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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호] 느리게 함께 살기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18 17:15
조회
274

서정민갑/ 느림보



KTX 고속철도가 생기면서 그보다 조금 느린 무궁화호와 새마을호의 운행회수가 하루 한두번쯤으로 줄었다. 게다가 운행시간조차 아침 일찍이거나 밤 늦게로 바뀌어버려 울며 겨자먹는 심정으로 더 비싼 고속철도를 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가난한 사람은 열차 시간조차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으니 돈이 없으면 일찍 일어나거나 늦게 다니라는 것인가? 빠르고 안전한 고속철도를 만들었다고 자랑하는 정부가 정작 국민들에게 이런 서비스나 제공하려 했단 말인가? 가난한 다수에 대한 배려보다는 있는 사람에 대한 배려를 더 고민하는 대한민국 정부의 무감각앞에서 진정 고속철도가 무엇을 위해 달리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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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고속이 싫다. 서울에서 목포까지 3시간 반이면 가는 것이 바쁜 사람에게야 빨라서 좋을 수도 있지만 그다지 바쁘지 않은 나는 5시간 반이 걸리더라도 조금 천천히 가는 것이 더 좋다. 5시간 반의 기차여행이 아니라면 사실 언제 복잡한 서울에서 잠시 벗어나 이 땅의 왼편 그 산과 들을 오롯이 지켜보며 마음 젖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친절한 자본주의 정부는 나에게서 느림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빼앗아 가버렸다. 


 느림과 빠름 중에서 느림을 선택하기도 하고 빠름을 선택하기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빠름만을 선택해야 하는 이 빠름의 강요! 나 혼자쯤은 느리고 싶다는 개인의 권리는 국가의 저돌적인 발전논리 앞에서 설 자리를 잃고 오로지 등떠밀리듯 빠른 고속철도에 몸을 실어야 한다. 그리고, 귀가 웅웅거리는 시속 300Km의 속도에 실려진채 어디로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게 오로지 출발지와 목적지만이 존재하는 여행을 해야 한다. 이것이 진보이고 발전인가?


 게다가 고속철도에는 무려 450만 Kw의 전기가 흘러 지하 700m까지도 지렁이 한 마리도 살지 못한다고 한다. 여린 한 몸으로 철도를 멈춰 세웠던 지율 스님은 이것은 고속철이 아니라 살인철이라고 했다. 고속철이 지나가는 수백Km가 죽음의 길인 것이다. 20분 빨리 가자고 도롱뇽을 죽이고, 2시간 빨리 가자고 뭍 생명을 죽이는 길을 만들고 있는 세상은 과연 어떤 미래를 맞이할 것인가? 들에 무슨 꽃이 피었는지, 강의 안개가 어떤 빛깔로 피어나는지 눈 돌릴 사이도 없이 그저 도시와 도시 사이를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의 세상은 과연 어떤 미래를 맞이할 것인가? 뜸북뜸북 뜸북새, 나리 나리 개나리, 송알송알 싸리잎에 은구슬 노래를 부르던 날이 채 10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제는 뜸북새가 사라지고 맹꽁이가 멸종되고 솔개가 오지 않는 사람들의 도시에 찾아올 미래는 과연 무엇인가?


 멈춰야 한다. 오로지 빠름의 속도만으로 흘러가며 인간이 아닌 것들을 다 죽이는 이 미친 고속철도의 세상에 브레이크를 걸고 내려야 한다. 그리고 보드라운 땅위에 앉아 흙냄새를 맡고 잎지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바람이 흐르는 길에 눈길을 던지고 햇살의 단맛에 몸을 적셔야 한다. 떠나버린 맹꽁이와 솔개, 꿩과 가재 앞에 머리를 숙이고 용서를 빌어야 한다. 살아있는 어떤 것도 인간의 이름으로 죽일 권리가 없으며 오로지 함께 살 의무만을 가지고 있는 것. 인간이 아닌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죽이며 질주해온 길의 끝은 오직 천길 낭떠러지와 같은 파멸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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