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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겸손한 어른 되겠습니다"… '전사' 홍세화의 마지막, 엉엉 운 시민들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4-04-20 16:27
조회
360
기사원문

[현장] '진보' 성찰한 시민사회추모제 "바닥과 멀어진 운동… 진영 아닌 '변화하는 힘' 기리자"


 20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 장례식장에서 한 시민이 18일 타계한 고 홍세화 장발장 은행장을 조문하고 있다.
ⓒ 김성욱

"홍세화 선생님은 여러가지로 까칠하기도 하고, 부드럽기도 하고 그랬는데. 홍세화 선생님에게 배웠던 건 늘 어디에 있어야 될지를 고민한다는 거였습니다. 지금도 '운동'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고요, 진보정당이 이번에 의석은 못 얻었지만 하여튼 '진보정당'의 20년 역사도 있고, '진보언론'도 있고 그런데요. 어느 틈엔가, 누구에게 말도 못하는, 그런 존재가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심지어 운동권과도, 진보와도 너무 먼 사이가 돼버렸습니다. '송파 세모녀'처럼 아주 극단적으로, 아주 이례적으로 죽지 않으면 들여다보지도 않는 진보와 운동권이 됐습니다. 장발장은행은 온통 그런 사람들을 봐왔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진보운동은, 우리 운동권은, 오늘 귀한 분을 잃었습니다. 흑… 원통… 합니다." -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20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 장례식장 영결식장. 추모영상 속 홍세화 장발장 은행장이 생전에 샹송을 흥얼거리고 몸을 흔드는 모습을 보고 웃던 좌중 곳곳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200석 규모의 좌석을 꽉 채우고 어느새 양 옆 가장자리와 바닥 구석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은 시민들, 노동자들, 장애인들, 성소수자들이 땅을 치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77세를 일기로 지난 18일 타계한 고 홍세화 장발장 은행장의 시민사회 추모제가 이날 저녁 열렸다. 고인은 책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1995)로 유명한 진보 지식인으로, 1979년 무역회사 주재원으로 유럽에 체류하던 차에 박정희 유신체제 말기 공안사건인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에 휘말려 프랑스에서 20년간 망명 생활을 했다. 2002년 영구 귀국해 한겨레신문사 기획위원(2001~2011), 진보신당 공동대표(2012), 장발장 은행장(2015~)으로 활동했다. 그는 지난해 암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고 있었다.
 
'진보' 내부 성찰에 통곡한 시민들 "우리가 겸손한 어른 되자"




 20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 장례식장 영결식장 '영원한 아웃사이더, 고 홍세화 시민사회 추모제'가 열렸다.
ⓒ 김성욱

"최근 몇 년을 돌아보면, 노회찬 의원이, 백기완 선생이 돌아가셨고, 이 당을 지지하든 지지하지 않든 정의당이 원외정당으로 빠지게 됐고, 진보정당 1세대인 심상정 의원이 정계은퇴를 선언했어요. 그리고 또 홍세화 선생이 돌아가셨습니다. 개벽의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는데, 아무런 기약도 할 수 없이 그냥 한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몹시 아픕니다. 그래도 살아있는 사람들은 뚜벅뚜벅 길을 가야겠지요. 저희도 그러겠습니다." - 꽃다지 정윤경 음악감독

"이분도 가시고, 저분도 가시고 우리가 따를 어른이 어디 있느냐. 홍세화 선생님이 오시면 그러실 것 같아요. 따를 어른을 찾지 말고 '너희들 스스로 어른이 돼라'. 직설적으로 말씀하시진 않겠지만 이렇게 알아듣도록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 선생님의 뜻을 좇아서… 성숙한 어른이 됩시다." - 김찬휘 녹색정의당 공동대표
 
이날 추모제의 제목은 '영원한 아웃사이더, 고 홍세화 시민사회 추모제'였다. 시민들은 그를 "영원한 아웃사이더", "소박한 자유인", 그리고 "전사"라고 부르며 기억했다. 김찬휘 녹색정의당 공동대표는 "홍 선생님은 끊임없이 회의하는 자가 자유인이라고 하셨다"라며 "회의해야만 자신을 새로 지을 수 있다. 고칠 게 없거나 자기 집이 다 지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묶여있는, 자유인이 아니라고 했다"고 했다. 그는 "끊임없이 회의하는 자는 내가 잘났다고 할 수 없고 소박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실제 고인은 진영논리에 매몰되지 않고 "아웃사이더"를 자처했다. 진보신당에서 함께 했던 간판 노회찬·심상정 의원이 2011년 위기에 빠진 당을 떠날 때 그들을 정면으로 비판하며 당에 남아 당대표를 맡았다. 2019년 '조국 사태'가 터지자 진보의 모순과 사회경제적 타락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했다. 자신이 몸담았던 진보언론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안효상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대표는 "자신과 동료를 향한 말은 겸손하게 하고, 적을 향한 우리의 화살은 예리해야 한다고 했던 것이, 선생이 가슴 깊이 묻어뒀지만,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했을 '전사의 삶'일 것"이라고 했다. 고인과 55년 지기인 유홍준 명지대학교 석좌교수는 "올곧은 진보적 지성의 표상으로 살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진정한 벗이었다"라며 "잘 살다 갔다"고 했다.




 20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 장례식장 영결식장 '영원한 아웃사이더, 고 홍세화 시민사회 추모제'가 열렸다. 송경동 시인이 추모시를 읽고 있다.
ⓒ 김성욱

모여든 시민들은 그가 후배들에게 남긴 마지막 당부인 "겸손"의 의미를 되새기며 "이제 우리가 어른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송경동 시인은 추모시에서 "우리가 원하는 세상이 빨리 오지 않더라도 절망하거나 훼절하지 않고 겸손하겠습니다"라고 읊었다.  
"왜냐면 이 나쁜 세상에서도 꿈을 잃지 않고 견디며 살아가야 하는 모든 소박한 이들의 삶이 우리에겐 더 소중하니까요/ 당신이 그토록 미워했던 부패하고 썩어가는 인간들 앞에서도 겸손하겠습니다/ 왜냐면 그들의 이른 주검이 새로운 시대의 싹들이 자라날 좋은 토양과 거름이 될 거니까요/ 겸손이 특권이 되지 않도록/ 겸손이 무슨 권위나 식견이나 자랑이 되지 않도록/ 겸손이 온갖 공모와 협작의 안온한 밀실이 되지 않도록/ 겸손이 행동하지 않음의 핑계가 되지 않도록/ 겸손 앞에서도 겸손하겠습니다/ 끝까지 소년 척탄병으로 남아/ 어떤 야만의 땅에도 끝내 뿌리내릴 수 없었던 외로운 난민으로 남아/ 약자와 소수자들과 빼앗긴 자들의 스피커로 남아…(후략)"
 
시인의 말대로 20년간 난민으로 살았던 그는 생의 마지막까지 이주노동자, 성소수자 등과 연대했다. 그래서 비가 추적추적 오는 토요일 저녁에도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과 헤진 조끼를 입은 노동자들이 영결식장을 찾아 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다음은 SNS에 올라온 그의 생전 활동에 대한 추모글들을 추린 것이다.




 20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 장례식장 영결식장 '영원한 아웃사이더, 고 홍세화 시민사회 추모제'가 열렸다.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가 추도사를 하고 있다.
ⓒ 김성욱
마지막까지 이주노동자·성소수자와 함께 한 홍세화… "진영 아닌 변화하는 힘"
 
"20여 년 전 그가 망명 생활을 마치고 돌아왔을 무렵 그와 나는 얼마간 견해 차이가 있었다. 그는 극우 집단주의(조선일보로 대변되던)와 싸움이 우선이라고 봤고, 나는 그 싸움과 함께 자유주의 세력(민주당 리버럴) 문제가 중요하다고 봤다. 자유주의 세력의 성장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강화와 좌파의 쇠락으로 이어질 거라는 생각이었다. 언쟁을 벌인 기억은 없다. 그는 대화 끝엔 언제나 '극좌인 아들도 아빠는 개량주의자라고 비난한다'며 웃곤 했다. 그러던 그가 어느 시점부터 바뀌었다. 좌파의 우경화가 가속도가 붙을수록 그는 오히려 더 왼쪽으로 갔다. 드문 일이었고, 그의 연배를 고려한다면 더욱 드물고 희한한 일이었다.

민노당 당원이었고 진보신당 당원이던 그는 통진당이나 정의당에 참여하길 거부하고 마지막까지 노동당원으로 남았다. 애정을 가졌던 한겨레가 자유주의 세력에 경도되어간다며 괴로워했다. 조국 사태가 일어나자 기득권화한 자유주의 세력에 비판적 견해를 더욱 분명히 했다. 그의 그런 행로가 널리 이해되거나 지지 받지는 못했던 것 같다. 홍세화를 좋아한다는 말이, 현재의 홍세화가 아니라 옛 홍세화 - 파리의 택시운전사를 쓰고 톨레랑스를 말하던 - 를 의미하는 경우가 늘어갔다. 나는 후반기의 홍세화가 진짜 홍세화라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나는 홍세화가 '변화하는 힘을 잃지 않은 인간'이었음을 말하려 한다. 그는 사회 현실과 인민과 함께, 쉼 없이 학습하고 성찰하며 생각과 행동을 끊임없이 변화해갔다. 사회주의자임을 자랑스러워 한 그가 고수한 건 이념이 아니라 변화하는 힘이었다." - 김규항 '고래가그랬어' 발행인

"화성외국인보호소 면회활동을 결심하고 일산의 '마중' 사무실을 찾아갔던 2021년 가을. 막막한 마음에 무작정 홍세화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마중 사무실이 선생님 댁과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있으니 지금이라도 나와 주실 수 있을까요? 함께 면회활동 해봐요 선생님! 난민 경험도 있으시고 프랑스어도 잘하시잖아요!!! 밑도 끝도 대책도 없는 갑작스런 제안에도, 홍세화 선생님은 흔쾌히 한겨레신문 칼럼 마감이 한 시간 남았으니, 마감하고 바로 나오시겠다며 화답해 주셨더랬습니다. 그리고는 그 다음주부터 바로 함께 면회를 갔어요.

외국인보호소 면회활동을 함께 했던 시간들, 성소수자 난민 재판응원단을 꾸려 함께 법정을 오갔던 날들, 준비서면을 쓰기 위해 서너 시간을 쉬지 않고 통역해 주셨던 선생님. 보호 일시 해제된 난민신청자를 청주까지 운전해서 데려다 주셨을 때 피곤하실까봐 걱정을 하니 "제가 택시 운전을 몇 년 했겠습니까. 걱정 마세요~~~" 하시던 선생님. 비싼 특허약을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난민신청자를 마주하고 어쩔 줄 몰라 했던 제게 약을 구하는 방법을 알려주신 선생님. 하제마을 팽나무 축제에도, DMZ 생태 탐방에도, 베트남전쟁 관련 법정과 토론회에도, 소박하고 작은 모임들에 조용히,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겨주셨던 선생님. 어느 해 새해 첫날, 무밍 마마처럼 앞치마를 두르고 떡국을 끓여주셨던, 손빨래의 감촉을 좋아하셨던 선생님.

홍세화 선생님, 그동안 정말 감사했어요. 선생님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함께 했던 시간들을 잊지 않고, 소박한 물음들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겠습니다." - 심아정 화성외국인보호소 방문시민모임 '마중' 활동가

"나 : '저는 성소수자입니다.' / 홍세화 : '저는 난민 출신입니다.' 2년 전 홍세화 선생님과의 첫 대화가 그렇게 시작됐다. 어쩌다 함께 대담집을 냈다. 한 달의 시간 동안 '시대의 어른'과 이야기를 나눈 건 감사한 일이었다. 사진 속 장소는 게이인권단체 친구사이의 사무실이다. 선생님께 대담 장소 중 한 곳으로 여기를 추천했는데, 무척 좋아하셨다.

'저는 평생 성소수자의 친구로 살아왔어요. 왜냐하면 제가 난민 출신이다 보니, 배척 당하는 사람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거든요.' 그러면서 프랑스에서 겪었던 여러 일화를 들려주셨다. 확실히 선생님은 늘 약자 옆에 계셨다. 노동자며, 난민이며, 병역거부자며, 성소수자며.... 대담을 하고, 북토크를 함께 다니고, 여러 집회에서 만난 2년 동안 선생님께 배운 건 예의였다. 세상과 삶에 대한 예의. 20년이 훌쩍 넘는 나이 터울에도 내게 반말을 사용한 적이 없다. 늘 존대어였다.

어느 날인가는 선생님 일산댁에 놀러갔다가 막차를 타러 나오는데 버스정류장까지 따라오시더니, 내 주머니에 5만원을 찔러 주시고는 냅다 도망치셨다. 저 놈이 아마 택시비도 없는 가난쟁이겠지 싶으셨나 보다. 난 아직도 그 5만원을 그대로 갖고 있다. 언젠가 나도 나보다 더 가난한 놈에게 줄 날이 오려나. 내가 선생께 배운 건 그런 감성, 그런 예의였다. 시대의 어른을 잃어버렸다." - 이송희일 영화감독

"참 이해가 안됐던 게 대학 나와서 공장에 위장취업하고 빵에 가는 사람들이었다. 우리야 먹고 살려고 지긋지긋한 일을 하는데 그들은 왜 굳이 '투신'까지 하는걸까. 홍세화 선생님 책을 읽으면서야 의문이 풀렸다. 인간의 품위. 내가 아는 가장 품위있게 사셨던 분. 홍세화 선생님 이제 아프지 마세요.." -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

"그는 내가 쓴 <대리사회>라는 책에 추천사를 써 주었다. 파리에 망명한 그가 찾은 직업이 택시기사였고, 대학에서 나와 내가 찾은 일이 대리기사였으니까, 서로의 삶이 시간과 공간을 넘어 제법 어울렸던 것 같다. (중략) 그에게 꼭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왠지 그가 지금 잠들기 전 꼭 물어야 할 것 같아서, 그에게 물었다. "선생님, 제가 살면서 누구에게도 이런 것을 물은 일이 없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 꼭 묻고 싶습니다. 저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사람은 어떤 삶의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까. 그냥 한 단어라도 좋습니다 선생님. 말씀해 주세요."

그는 길게 답하기 힘든 상태였지만, 숨을 한 번 들이쉬고는, 정갈하고 힘 있는 목소리로 답해 주었다. "나는, 겸손이라고 생각해요." 나는 그의 말을 듣고 곁에서 눈을 오래 감았다. (중략) 선생님이 말씀하신 그 겸손이라는 단어가 자꾸 남아, 선생님께서 펜을 들 수 있을 때 겸손이라는 단어 하나만 직접 적어서 주실 수 있을까. 몇 시간 후 그에게 사진이 왔다. "겸손, 홍세화. 2024년 4월 15일." 그는 이 단어를 어떤 마음으로 썼을 것인가. 겸손하게 살아가겠습니다. 다정이라는 단어 곁에 겸손이라는 단어를 함께 두겠습니다. 어디서 누구를 대하든, 선생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하겠습니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 김민섭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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