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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정동칼럼] ‘영장 자판기’라는 오명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3-06-23 09:09
조회
418

함부로 항공기 문을 열려고 했던 소년이 구속되었다. 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기 위해 가던 길에서 만난 기자들에게는 굳이 얼굴까지 내보이며 횡설수설했다. 항공기 문을 열면 위험한지 몰랐냐고 물으니 “대한민국 권력층에게 공격받는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피해망상이 심각하고 불안해보였지만, 판사는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18세로 나이는 어리지만, 구속해야 할 ‘부득이한 사유’ 때문이라고 했다.


 

형사소송 절차를 진행하면서 구속해야 할 부득이한 사유는 널리 알려진 것처럼 증거를 인멸하거나 도망칠 염려다. 구속은 재판을 통해 실제로 죄가 있는지 없는지 따져보기도 전에 피의자, 피고인이 도망치거나 증거를 없앨 경우에 대비하는 일종의 대비책이다.


 

구속되면 구치소에 갇혀 신체의 자유가 제한되는 고통을 받는다. 유죄 선고로 형이 확정되기 전부터 고통이 시작된다. 사회적 평판에 금이 가고 가족관계에 위기가 오고 직장에서 쫓겨나는 등의 부가적 피해를 받는다. 피의자, 피고인 입장에서는 한꺼번에 많은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재판을 앞두고 헌법과 법률이 보장하는 방어권을 행사하기도 힘들어진다. 그러니 구속은 꼭 필요한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해야 한다. 바로 형사소송의 원칙이다. 구속 자체가 인권침해적 속성이 있으니 검사의 영장 청구와 법관의 영장 심사와 발부라는 이중의 안전장치를 거치도록 하고 있다.


 

소년은 한국으로 들어오는 항공기 안에서 소란을 피웠으니, 도망의 염려는 별로 없다고 보는 게 맞다.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아도 출국금지만 해놓으면 도망의 염려는 얼마든지 차단할 수 있다. 항공기 문을 열려고 했던 범죄야 자백을 한 데다 증인까지 많으니 증거인멸의 가능성은 전혀 없다. 게다가 소년법의 적용을 받는 18세 미성년자라는 점을 감안하면 구속의 필요성은 찾기 어렵다. 도망과 증거인멸의 우려 말고 내세울 만한 ‘부득이한 사유’는 형사소송법에 없다. 소년에 대한 구속은 신중했어야 했다.


 

형사소송법은 범죄의 중대성, 재범의 위험성, 피해자 및 중요 참고인 등에 대한 위해 우려 등도 중요한 표지로 꼽고 있지만, 이건 구속 사유가 아니라, 고려 대상일 뿐이다. 범죄가 중대하거나 재범의 위험이 있다고 반드시 구속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검사 출신 대통령에다 검사 출신 법무부 장관까지 등장하면서 기세등등해진 검사들이 압수수색과 구속영장 청구를 남발한다는 지적이 많다. 대통령이 불편해할 수사는 전혀 진행하지 않지만, 대통령이 불편해하는 사람에 대한 수사에는 엄청난 인력을 투입해 공을 들이고 있다.


 

이럴 땐 수백 번의 압수수색마저 거침없다. 검사의 무분별한 영장 청구에 대한 안전장치는 법관의 통제가 유일하지만, 실제 상황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 압수수색이든 구속이든 형사소송을 위한 하나의 절차에 불과하지만 피의자, 피고인이 당할 고통은 유죄 선고와 다름없는 결과로 이어질 정도로 구체적이니 신중을 거듭해야 하지만, 현실은 딴판인 경우가 많다.


 

수사는 경찰, 기소는 검찰, 재판은 법원이 각각 나눠 맡는 형사사법 구조가 정착하면 그나마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부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국민의 인권을 두고 서로 다른 국가기관이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있기 때문이다. 수사기관의 과욕을 기소 기관이 걸려내고, 수사와 기소기관이 놓친 문제를 법원에서 다퉈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검찰이 수사와 기소를 동시에 틀어쥐고 사실상 형사사법 절차를 주도한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법률에서는 진작 없어졌지만, ‘검사동일체’ 원칙이 엄연한 상황에서 수사 검사의 결과물을 기소 검사가 걸러내는 일은 없다. 그러니 법관은 검사가 청구한 영장이 꼭 필요한 것인지 꼼꼼하게 따지며 제동을 걸어야 한다. 검사는 영장을 내주지 않으면 수사를 할 수 없다는 볼멘소리를 반복하겠지만, 그렇다고 검사의 압력에 굴복하면 안 된다. 수사를 못하는 일이 있어도 적법절차 원리는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 바로 형사소송의 대전제다.



 

검사는 영장을 마구잡이식으로 청구하고, 법관은 별다른 통제 없이 영장을 기계적으로 발부하는 것은 이미 형사소송의 대전제가 상당한 정도로 무너져버렸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단지 어떤 사건에서 누군가 이익을 보거나 불이익을 당하는 문제가 아니라, 검사와 법관 등 법집행 공무원들이 법의 원칙을 훼손하는 일이 잦아지면, 법의 근간 자체가 허물어질 수 있다. 위험한 일이다. 적어도 ‘영장 자판기’라는 비난은 듣지 않도록 법관들이 더 많이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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