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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7호] ‘반동의 수사학’을 넘어서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1-03-03 12:11
조회
353

오인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사노라면 “인간이 어떻게 저럴 수 있지?”라고 놀랄 때가 있다. 나의 경우, 그런 자들은 대개 사사로이 대면하는 사람이 아니라 화면이나 지면을 통해 알게 된 공적 인물들이다. (개인적으로는 참 다행이지만 사회적으로 큰 불행이다!) 이를테면, 나라는 어찌되건 자신들의 사리사욕-당리당략만을 탐하는 자들, 자식을 잃고 애통해하는 부모들을 보듬기는커녕 불온시하는 자들, 강(江)을 죽여 놓고는 강 살리기를 했다고 우기는 자들,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떠들거나 법을 공부하여 판․검사가 되었다하나 법치(法癡)인 자들은 나를 놀라게, 우울하게 한다.


 그런데 정작 더 놀라운 것은 그런 경악(驚愕)에도 놀라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이라고 해서 사람의 탈을 쓴 ‘가면인간’은 아닐 진데, 자기 웃자고 남을 울리고, 자기 살자고 남을 죽이려는 하는 사람/현상에 대해 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철학 · 역사 · 사회학 · 정치학 등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경제학의 지평을 넓혔으며 생전에 ‘현세의 철학자 Worldly philosopher’라고 불렸던 앨버트 O.허시먼(Albert O. Hirschman, 1915~2012)은 이런 의문에 대해 최종적 답변은 아니어도 잠정적 해답을 제공한다.


 허시먼은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 The Rhetoric of Reaction⌋(이근영 옮김, 웅진지식하우스)에서 지난 200년간 진행되어 온 역사적 진보의 순간들에 맞서는 “시간을 거꾸로 돌리려 했던” 자들의 수사학을 분석했다. 그는 반동 세력들이 진보적 개혁시도와 의제를 효과적으로 공격하기 위해 개발해낸 반동 명제를 크게 세 유형으로 분류하고, 각각의 유형에 역효과 명제, 무용 명제, 위험 명제라는 이름을 붙였다. 특히 그는 토머스 마셜이 제시한 시민권 진보의 세 단계(시민적 시민권-정치적 시민권-사회적․경제적 시민권 단계)에서, 즉 18세기 프랑스 혁명과 개인적 자유의 등장 국면, 19세기 보통선거권 및 민주주의의 도입 국면, 20세기의 복지국가 출현 시기에 어떤 반동명제들이 주창되었는지를 파헤쳤다.


 우선 역효과 명제(perversity thesis). 이것은 사회를 개선하려는 모든 시도는 애초의 의도와 정반대의 엉뚱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주장을 말한다. 프랑스혁명 당시, 공공선을 추구하려는 혁명가들의 노력은 결국 재앙을 초래했을 뿐이라는 에드먼드 버크의 언술, 19세기의 보통선거권 투쟁 국면에서 보통선거권-민주주의를 도입하면 선동가에 휘둘리는 전제정치를 초래할 것이라는 주장, 또 시민에게 사회안전망을 제공하려는 시도는 게으름과 부패를 조장해 가난을 ‘생산’해낼 것이라는 주장 등이 대표적이다. 한 마디로 ‘세상 바꾸겠다고 용 써봐야 더 나빠질 뿐’이라는 거다.


 무용 명제(futility thesis)는 사회개혁을 추구하는 모든 노력은 효과가 없으며 사회를 향상시키려는 시도는 아무런 변화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논리다. 개혁은 물론이고 혁명적 변혁조차도 프랑스 사회에 진정한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는 토크빌(Alexis Tocqueville)의 주장이래로 무용명제는 사회개혁의 힘과 의지를 밑바닥에서부터 붕괴시키는 작용을 했다. 진실과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단식을 한들, 정당한 권리를 보장받겠다고 높은 굴뚝에서 수백 날 농성을 한들, ‘검찰공화국’의 철옹성을 깨겠다고 나선들, 아무 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저들의 오만함(그리고 그것의 역으로서의 무력감)은 바로 무용 명제를 바탕으로 한다.


 위험 명제(jeopardy thesis)는 진보를 향한 새로운 시도가 이전에 선취된 진보를 위태롭게 한다는 주장이다. 개혁에 들어가는 사회적 비용이 너무 크기 때문에, 그 변화나 개혁은 이전의 성취를 위험에 빠뜨린다는 위험 명제는 보통선거권-민주주의의 확대는 자유를 위태롭게 하고 다수에 의한 폭정으로 귀결될 것이라는 논리로, 복지정책은 개인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태롭게 할 것이라는 주장으로 표출되었다. 이처럼 애써 얻은 성과들이 새로운 개혁시도에 의해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위험 명제는 변화의 움직임을 ‘제로섬 게임’으로 본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앨버트 허시먼이 1982년 파리 소르본 대학에서 기념 강연을 하는 모습
사진 출처 - 부키


 허시먼은 얼핏 보면 세 가지 반동 명제 가운데 무용 명제가 역효과 명제에 비해 상당히 온건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상의 현실화를 추구하는 인간 행위의 실현 ‘가능성’이란 측면에서 훨씬 파괴적이라고 주장한다. 역효과 명제는 설령 의도와 정반대의 엉뚱한 결과가 나올지라도 인간의 실천적 노력이 작용할 여지가 있지만, 무용 명제는 그런 가능성 자체를 원천적으로 부정하기 때문이다. 이런 견지에서 허시먼은 실제로 현존 사회의 개선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훨씬 더 모욕적”이라고까지 주장한다. “사회가 인간의 변화를 지향하는 행동에 반응해서 비록 잘못된 방향으로라도 움직인다면 그것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 있다는 희망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런 행동이 결국 흔적조차 만들어낼 수 없다면, 변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기를 잃고, 자신의 노력의 가치나 진정한 동기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80쪽).


 허시먼에 의하면, 사회개혁의 덧없음이나 위험을 설파하는 주장들은 과학이나 법칙의 외피를 띠고 있어도 본질은 ‘반동의 수사학’에 지나지 않는다. 반동 레토릭은 개혁이 표방하는 목적을 노골적으로 반박하기는 곤란한 상황에서 그 주장에 흠집을 냄으로써 반대 효과를 높이기 위한 ‘미사여구’로, 명분에서 밀려 이기기 어려운 싸움에서 전세를 일거에 역전시키는 데 효과적 전략으로 작동했다. <세상을 ‘가능한 최선의 세계’로 만들려는 일체의 노력은 환상에 불과하나니, 헛된 노력을 하지 말라>는 반동 레토릭의 심대한 문제점은, 향후 인간 역사의 여정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오만하게 거부한다는 데 있다. 인류의 문명적 진화는 여전히 열려 있다. 이제 겨우 1월이다. 2021년이 11개월 이상 남아있다. 여유와 희망을 갖자!


오인영 위원은 현재 고려대 역사연구소에 재직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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