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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의미(정한별)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3-01-03 09:59
조회
347

정한별 / 사회복지사


 

소설 「밤의 유서(요슈타인 가이더, 2021)」의 주인공 알버트는 남편이자, 아버지이며, 할아버지인 자이다. 그는 자신의 친구이자 주치의인 마리안네로부터 ALS 진단을 받고, 사랑하는 아내 에이린과의 추억이 깃든 호숫가의 오두막집에 찾아간다. 알버트는 자신이 불치병에 고통 받으며 가족들의 짐이 되는 것보다, 스스로 운명을 결정할 수 있을 때 사랑하는 아내와 가족을 떠나고자 한다.


 

오두막집은 사랑의 추억이 깃든 장소임과 동시에, 가족과의 추억이 서린 별장이기도 하다. 알버트는 오두막집에서 자신의 생을 정리한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자신의 사랑과 잘못들을 마치 유서를 쓰듯, 오두막집에 두고 쓰던 방명록에 눌러 담는다. 이틀 동안의 방명록에 존재, 사랑, 이별, 죽음에 대한 마음을 담으며 결국 방명록을 태워버린다.


 

소설은 상당히 짧았다. 예상되는 전개, 뻔한 문구들이 많았던 책이었음에도 죽음이란 단어가 며칠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2021년 3월 23일 내가 사랑한 남자가 죽었다.


한 아내의 남편이자, 두 아들의 아버지, 지금은 4명의 손자, 손녀들의 할아버지인 그가 죽었다. 그는 죽음을 온전히 몸으로 받아들였다. 고통을 유일한 친구로 삼은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의연하게 하루하루를 살았다.


 

먼저 걷는 일이 힘겨워졌다.


뼈밖에 없던 다리가 어떤 날은 코끼리처럼 퉁퉁 붓기도 했다. 홀쭉했던 배엔 물이 차기도 했다. 걷기 힘든 다리를 끌고서도 그는 성당을 찾았다. 기도도 건강해야 하지 않겠냐고, 집에서도 기도는 할 수 있지 않냐고 잔소리를 하면 그는 성당에 가서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했다. 천천히 걸어서 돌아오면 된다며, 지팡이를 짚고 나설 채비를 하곤 했다.


 

먹는 일이 힘겨워졌다.


먹을 수 있는 음식의 수는 점점 줄었고, 먹는 양도 점점 줄어갔다. 밥을 제대로 먹을 수 없는 그였지만, 내가 집을 찾을 때면 항상 밥솥에는 밥이 가득했다. 혹여나 밥을 먹지 않고 집으로 돌아올 가족을 위해 밥솥 가득 밥을 하곤 했다.


 

걷는 일도, 먹는 일도 힘겨웠던 그가 끝까지 힘을 냈던 일은 성경을 쓰는 일이었다. 그에게 어떤 마음으로 성경을 쓰는 건지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그의 마음을 알 것만 같아 묻는 일이 무서웠다.


 

걷는 일도, 먹는 일도 힘겨웠던 그가 누워서 잘 수 없게 되었다.


 

통증이 심해 눕지 못하고 앉아서 졸기만 하는 그를 보는 일이 점점 힘겨워졌다. 그러다 요구르트 한 병을 마시는 일도 힘겨워졌다. 요구르트 한 병을 마시는 일이 힘겨워도 그는 아들과 손녀의 모습을 카메라로 담는 일은 멈추지 않았다. 자신이 사랑하는 아내에게 보여주고자 동영상을 촬영하는 그를 보며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고통을 친구 삼아 하루를 살아가는 줄 알았던 그가 병원에 가자고 했다.


숨을 쉬는 일이 힘들다고 했다. 병원에 간 지 3일 만에 그는 비로소 그가 자랐던 마을에 돌아갔다. 내내 가고 싶었지만 갈 수 없었던 동네로 돌아갔다.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내를 묻었던 손으로 아들도 묻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장례식에 오지 않았다. 대신 아들이 자라난 마을 뒷산에 묫자리를 준비했다.


 

그는 감은 눈을 다시 뜨지 못할 거란 생각을 하지 못했다. 막걸리 한잔이 마시고 싶다고 했다. 아직 할 일이 많다고도 했다. 집에 가야 한다고 했다.


 

그는 서로 사랑하라는 말을 남기고, 2021년 3월 23일 세상을 떠났다.



출처 - 저자


아버진 병으로 고통을 받으면서도 가족과 함께 하고자 했다. 하루라도 더 가족들을 보고 싶어했다. 보고싶다는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도 내내 보고 싶다는 마음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육체는 고통에 침식당하면서도 정신만은 지키고자 노력했고 가족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노력이, 되려 부담이 되기도 했다.


 

아버지에게 배운 가장 큰 교훈은 바로, ‘좋은 날이나 나쁜 날이나 항상 함께 하는 사랑의 의미’였다. 그는 마지막까지 죽음을 통해 사랑의 의미를 몸소 가르쳐줬다.


 

한때 우리는 좋은 날이나 나쁜 날이나 항상 함께하겠다고 서약한 적이 있다. ··· 어쩌면 그 나쁜 날 중에서도 무언가 좋은 점을 발견해 낼 수 있지 않을까?” (소설 밤의 유서 중에서)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너무나 간단한 명제이며, 너무도 당연한 이치이기에 그 어떤 감흥도 없는 죽음. 나도 죽고, 너도 죽고, 우리도 모두 죽는다는 사실 자체엔 감정이 깃들지 않는다. 죽음이라는 본질이 실존이 되는 순간, 죽어있던 죽음이 비로소 생명을 얻는다. 죽음이 갖고 있는 역설은 여기에 있다.


 

희망보다 절망이, 생명보다 죽음이 가득 찼던 2022년이 모두 지나갔다. 2022년의 마지막 금요일 밤. 사랑하는 아들과 딸을 가슴에 묻은 부모, 형제, 가족들이 전쟁기념관 앞에 모였다. 2023년의 마지막 금요일 밤에는 길거리가 아닌, 각자의 집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 할 수 있게 되길 바라본다.



출처 - 저자 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