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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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김성은(서울신문 기자), 김태형(프리랜서 방송작가),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박용석(출판업),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춘천별빛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이동화(아디 사무국장),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이동화/ 민변 국제연대위 간사 지금부터 약 1달 반 정도 전, 지인 변호사 한분에게서 요청이 들어왔다. 내용은 그 변호사가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외국인이 G-20 서울회의 시에 한국에서 인권관련 캠페인을 하려하는데, 경찰들과 충돌을 피하고 좀 더 안전(?)하게 캠페인을 할 수 있는 법률 강좌를 열어줄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올해 초부터 정부 측에서 귀가 따가우리 만큼 G-20에 대한 홍보를 들었고, 지난 토론토 G-20 회의 때의 경찰과 시위대와의 충돌을 보았는지라 G-20이 도대체 뭐 길래 이 난리인지 싶어 한번 전반적으로 살펴보았다. G-20 토론토 정상회의 사진 출처 - 뉴시스 먼저 정부의 G-20 서울정상회의 공식 홈페이지 (http://www.seoulsummit.kr/) 에 가보았더니 정말 ‘헐’이다. 정부 측 홍보하는 사람들과 감수성이 달라서인지는 몰라도 개인적으로 웃기기까지 했다. G-20 회의를 성공적으로 개최하기 위해서 국민들은 건전(?)한 술자리 문화와 습관을 가져야 하고 지하철에서 통화를 소곤소곤, 음악도 적게 틀어야 한단다.(G-20 에티켓편) 수많은 국가의 정상들과 관련된 경제인들이 저녁에 회의 끝나고 우리들하고 같이 소주 한 잔하고 지하철로 퇴근할까 싶어 저러나 싶기도 하고, 아주 먼 기억이었던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 때 연희동 29만원 전 모대통령 정권이 주창한 국민의식 함양 프로젝트 ‘외국인보면 무서워하지 않고 Hello 하기 운동’이 생각이 나기도 한다. 그리고 웃고 넘기기엔 조금 심하다 싶은 것도 있다. 1박 2일 외국 우두머리 초청 행사가 어떻게 32개국 축구 잘하는 국가들이 모여서 하는 월드컵행사와 맞먹는 경제적 효과가 있다고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어쨌든 지적하려면 수도 없지만 (특히 한비야씨 인터뷰 중 한국의 기부문화가 눈부시게 발전했다고 하는 부분과 한국이 너무 자랑스러워 이민자를 붙잡고 싶다는 부분에서는 서글프기까지 했다.) 나름 웃겨주시는 센스에 깊게 태클 걸 생각은 없다. 아무래도 민변이 관심 가져하는 분야는 집회와 시위 관련 법률적 부분이고 애초의 외국인분의 요청 또한 법률 강좌이기에 G-20 관련 법안에 대한 검토를 해 보았는데, 이미 5월 19일 국회에서 “G-20 정상회의 경호안전을 위한 특별법”(이하 “특별법”)이 통과가 되었고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특별법 하에서 안전한 캠페인이나 집회 및 시위는 불가능해 보였다. 왜냐하면 특별법 통과 시 발표한 민변의 성명서(자세한 내용은 http://minbyun.org/?mid=voice_01&document_srl=31046&listStyle=&cpage=)에도 언급이 되어 있지만, 한마디로 특별법에 의하면 통제단장(대통령실 경호처장)의 요청으로 군대 동원이 필요시에 가능하여 졌고, 경호처장이 자의적으로 경호안전구역을 지정하여 이 구역 내에서 집회와 시위를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 있으며, 경호안전구역 지정 역시 공개하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는 것이다. 좀 더 쉽게 이야기 하자면 필요시 군대를 동원하여 서울 각 도처의 회의장이나 주요도로, 행사장을 삥 둘러쳐서 군인과 시민들이 대치하고 있을 수도 있고, 정부에 반대되는 목소리를 내는 캠페인이나 시위는 서울의 거의 모든 전역에서 모조리 불허되고 만약 불복하고 집회를 열며 바로 감옥으로 집어 넣어버리는 법이다. 가뜩이나 집시법 때문에 집회, 시위하기가 지랄 같은데 이 법은 집시법의 범위를 훨씬 뛰어넘는 봉쇄와 탄압을 법률적으로 보장해주는 법인 것이다. 군대까지 동원가능하다는 것에 5.18을 기억하는 한 사람으로써 섬뜩한 느낌마저 준다. 이건 뭐 막가자는 법률안이다. 그것도 이미 통과된... 젠장!! G-20 토론토 회의시 시위 모습 사진 출처 -: 네이버 블러그 “주르날리스트” 돌아와서 민변을 포함한 인권단체는 이 법률에 대응하기 위해서 이 법안이 시효 되는 순간부터 집회신고, 헌법소원 및 위헌제청 등 대응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하지만 앞서의 외국인의 요청사항은 난감하게 되었다. 좀 더 과격하게 말하면 계엄령과 유사한 특별법 하에서 준법 캠페인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에 캠페인은 알아서 눈치껏 통제단장이나 일선의 경찰 지휘관의 판단에 거스르지 않을 만큼으로 진행하여야 한다고 하며, 운이 없어 잡히거나 수감이 되면 수감자로써 보장받을 수 있는 권리들을 알려주는 강좌를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아마 “시위하거나 또는 잡히거나” 뭐 이런 식?? 그리고 정부 측에서는 이번 G-20 회의개최로 한국이 세계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고(참나... 오버도 이런 오버가... 자뻑도 이정도면 달인 급이다. 쯧쯧)하는데 다른 건 몰라도 한국경찰에 의한 세계 톱클래스의 집회 및 시위 진압 실력이 세계적으로 유명해 지는 건 아닐까 두렵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289 | 추천: 0
전종휘/ 한겨레신문 기자  <한겨레>에서 노동을 담당한 지 6달째다. 개인적으로는 이명박 정부 들어 환경부와 함께 가장 반역의 세월을 보내는 정부 부처가 노동부라고 생각하는지라, 공무원들이 무엇을 하는지 가자미눈을 뜨고 지켜본다. 내가 일상적으로 가자미로 변신하는 때는 보도자료를 토대로 한 기사를 쓸 때다. 특히, 내가 주의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근로자’라는 용어를 ‘노동자’로 바꾸는 일이다. 대한민국 고용노동부는 노동단체들이 ‘노동절’이라고 부르는 5월1일도 ‘근로자의 날’이라고 부른다. 노동 관련법에도 근로자는 등장하지만 노동자는 등장하지 않는다. 고용부가 내놓은 보도자료도 마찬가지다. 모두 근로자다.   근로부가 아닌 고용노동부는 왜 노동자를 근로자라고 쓸까? 한 번은 고용부의 한 관리에게 그 까닭을 물었다. “나도 궁금해 이것저것 따져봤는데, 별다른 이유는 없는 것 같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럼에도 나는 두 단어에는 중요한 이데올로기적 판단이 개입돼 있다고 믿는다. 노동자와 근로자의 사전적 정의를 보면 임금을 받아서 생활을 영위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말 뜻 그대로만 놓고 보면, ‘勞動者’는 말 그대로 힘을 써 움직이는 자이고, ‘勤勞者’는 부지런히 힘을 쓰는 자이다. 나는 ‘노동자는 항상 부지런히 일해야 한다’는, 이 자본 중심적 논리가 마뜩찮다. 아이들이 즐겨 보는 ‘토마스와 친구들’이라는 프로그램을 보면서도 ‘뚱보 사장’의 자본논리에 애궂은 꼬마 기관차들이 혹사당하는 것같아 마음이 편치 않을 때가 있다. 노동자도 사람인지라 때로 부지런히 일하지만, 때로는 그렇지 않을 때도 필요하다.   이런 내 머릿속 치환작업이 기능을 하지 않는 때가 있다. 바로 법정 용어를 써야 하는 순간이다. 대한민국에 ‘근로자’에 관한 법은 10개가 있지만, ‘노동자’에 관한 법은 하나도 없다. 죄다 ‘건설근로자’ ‘근로자복지’ ‘기간제 및 단시간 근로자’ 등에 관한 법뿐이다. 왜 노동조합은 근로조합으로 부르지 않는지 신기할 정도다.   요즘 언론 지상을 장식하는 ‘타임오프’ 제도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에 있는데, 이 제도의 법률 용어는 ‘근로시간면제제도’다. 이 법률용어를 기자 마음대로 ‘노동시간면제제도’라고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이 ‘근로시간면제제도’라는 용어는 단순히 노동이라는 단어를 근로로 대치했다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가장 큰 문제는, 근로시간면제제도라는 말만 놓고서는 일반인이 이게 도대체 무슨 제도인지를 알아먹을 수가 없다는 데 있다. 근로시간을 어떻게, 무엇으로부터 면제한다는 것인가?   사정을 이해하자면, 노동조합 전임 간부의 노조 활동이란 게 회사가 재화를 생산하는 일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으니 기본적으로 월급을 주지 말아야 한다, 그러니 법으로 노조 전임자가 노조 활동을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을 정해놓고 그 만큼의 시간은 근로시간에서 면제해주되 그렇지 않은 시간은 월급에서 까야한다는 뜻 같다. 뒤집어서 보면, 법으로 정한 만큼은 노조 전임자가 근로시간에서 면제된 상황에서 노조 활동을 할 수 있게끔 보장해주자는 뜻같기도 하다. 엎어 치나 메치나인데, 어쨋거나 고용부 관리와 기자들, 일부 관련자들 빼고 이 말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는 이가 있을까싶다. 고용부와 의회가 이처럼 어렵고 애매한 단어를 법률용어로 쓴 까닭이 조합원인 노동자와 노조 간부를 분리하기 위함이 아닐까하는 불온한 상상도 한다. 실제로 ‘타임오프’ 제도가 현장에서 힘을 받지 못하는 까닭은, 단기적으로는, 이 문제가 노조 간부의 문제이지 조합원의 이익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는 세간의 인식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금속노조 ‘타임오프 반대’ 집회 전국금속노동조합 소속 조합원들이 지난달 7월 29일 서울 양재동 현대기아차 본사 앞에서 타임오프제와 노조탄압 분쇄를 다짐하는 ‘노동기본권 사수 결의대회’를 열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전국금속노동조합 기아자동차지부 제공)  그래서 나는 기사를 쓸 때 근로시간면제제도라는 용어를 쓰지 않는다. ‘유급 노조활동시간(타임오프) 한도 제도’라고 쓴다. 월급을 받고 노조활동을 할 수 있는 한도를 정해놓은 제도라는 취지다.   여기서 활용형도 등장한다. 고용부는 이른바 타임오프에 정해진 시간을 쓸 수 있는 노조 간부를 놓고 ‘근로시간면제자’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이 말은 법에도 없는 말인데, 고용부는 기존 노조 전임자는 무급으로 한다는 법조항이 있는 만큼 이제는 월급 받으며 노조 활동을 하는 이는 노조 전임자가 아니라 근로시간면제자라고 주장한다. 산 넘어 산이다.   이런 식으로 ‘말과의 싸움’은 시간이 지날수록 깊이를 더한다. 얼마 전에는 고용부라는 고용노동부의 약칭을 두고 고민했다. 임태희 장관 시절 고용노동부는 ‘노동부’가 아니라 ‘고용부’로 불리길 원한다고 했다. 이 시대의 가장 큰 사회 문제가 바로 고용이고, 이를 업무에 반영하기 위해 부처 이름까지 바꾼 만큼 노동부보다는 고용부가 약칭으로 더 맞는다는 설명이다. 일부에서는 “그래도 노동 문제가 더 중요한데 고용부가 아니라 노동부라고 약칭을 써야하는 것 아니냐”는 문제제기도 있었으나 나는 그냥 ‘고용부’라고 쓴다.   원래 이름이란, 불리는 자가 불리고 싶은 대로 불러주는 게 예의이기 때문이다. 그게 원칙이다.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가 스스로의 약칭을 ‘총련’이라는데도, 굳이 ‘조총련’이라고 쓰는 일부 보수언론을 보면 ‘새디스트 집단’이라는 생각도 든다.   고용노동부의 요구를 받아들여 고용부라는 약칭을 쓰는데는 내 나름의 뒷계산도 깔려 있다.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존재해야 할 고용노동부가 노동자보다는 자본가, 기득권 세력의 이해를 더 대변한다는 게 내 가자미눈의 시각인데, 스스로의 이름에서 노동을 버리고 고용을 택하는 노동부가 얼마나 더 노동자에게서 멀어지는지 지켜보자는 것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기에 존재는 언어를 통해 스스로의 존재를 드러낸다. 고용은 자본가의 단어다. 노동자의 단어는 취업이다. 취업노동부가 아닌 고용노동부가 앞으로 고용주가 아닌 취업 희망자의 편에서 관련 정책을 쏟아낼지 지켜보겠다면, 고용부는 ‘공연한 트집’이라며 시비를 걸까?
2017-07-12 | hrights | 조회: 312 | 추천: 0
허창영/ 전남대 공익인권법센터 연구원, 전임 간사   최근에 알려진 ‘양천경찰서 고문사건’은 충격 아닌 충격이었다. 충격이라는 것은 아직도 고문이라는 전근대적 수법이 잔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고, 충격이 아니라는 것은 사실 고문이 완전히 근절되었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도 그럴 것이 일부에서는 고문이 과거 권위주의 정권에서나 있었던 일이라고 ‘추억’할지 모르겠지만, 가깝게는 2002년에도 검찰에서의 고문치사사건이 있었다. 그 이후에도 고문에 대한 증언은 이어져왔고,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된 사건들만 살펴보더라도 우리사회에서 고문은 여전히 ‘현실의 문제’라는 개연성이 충분하다. 여하튼 이번 일로 그동안 잊혀지려던 ‘고문경찰’이라는 말이 다시 부각되고 있다. ‘인권경찰’임을 표방하고, ‘새롭게 바뀌겠다’고 약속했지만 내부 깊숙한 곳에서는 구태의 악습을 벗지 못했음이 자명해졌다. 양천서 사건 이후 경찰이 보여준 태도 또한 이러한 심증을 굳게 한다. ‘자정결의대회’를 열고 인권교육을 실시하는 등 경찰 스스로 자숙하는 모습을 보이는 듯 했다. 그렇지만 이 또한 ‘눈 가리고 아웅’임이 금방 드러났다. 인권교육을 하러 간 강사에게 “고문을 봤냐”라고 항의하고, 동료직원들은 여기에 호응하는 박수를 보냈다고 한다. 백번을 자숙해도 모자랄 판에 “봤냐”라는 식의 항의는 희대의 살인마가 “내가 사람을 죽이는 것을 봤소”라고 묻는 섬뜩함이 느껴진다. 또 한 직원이 “고문이 아니라 가혹행위”라고 하거나, 서장이 “자연스러운 의견 개진”이라고 한 것에서는 천박함도 엿보인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조사가 사실이라면 양천서에서의 일은 국제사회가 규정하고 있는 고문임이 명백하다. 물론 우리 형법에는 고문에 대한 정의규정이 없어서 고문죄로 처벌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 그렇다고 있었던 고문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이런 이유로 국가인권위원회 또한 이례적으로 고문이라는 직접적인 표현을 쓴 것으로 생각된다. 서장의 변명도 궁색하다. 외부의 문제제기로 독이 오른 몇 백 명과 마주서있는 상황에서 터져 나온 불만을 자연스러운 의견개진이라고 하기엔 설득력이 없다. 지난 7월 7일 오전 서울 양천경찰서에서 열린 '양천경찰 신뢰회복을 위한 자정결의대회 및 인권보호교육' 참석자들이 강연을 듣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일련의 모습들은 인권교육만으로 적당히 넘어가려는 경찰에게 ‘면죄부’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물론 인권교육은 매우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다. 그렇지만 강요된 반성이거나 무마를 위한 일회성 인권교육은 답이 될 수 없다. 경찰로 입직하는 과정에서부터 입직 이후 보수교육에 지속적으로 인권감수성을 향상할 수 있는 교육내용이 반영되어야 한다. 경찰관 직무규칙에 ‘경찰관서의 장’으로 명시되어 있는 인권교육의 의무를 경찰법에 ‘경찰청장’으로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양천서 사건 이후 각 서별로 이루어지는 일회성 인권교육은 절대 해답이 아니다. 또 내부의 자정 노력, 내부의 징계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경찰청장을 중심으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경찰의 특성상 내부에서의 무마도 얼마든지 가능한 조직이다. 외부에서의 감시와 견제가 가능하도록 구조화해야 한다. 경찰위원회를 활성화해 견제의 기능을 강화하고, 경찰옴부즈만, 경찰비리민원조사기구 등 감시와 통제기구를 둘 필요도 있다. 자치경찰제의 전면도입으로 힘을 분산시키는 것도 고려되어야 한다. 또한 ‘고문방지국가예방기구’의 도입도 검토되어야 한다. 대한민국이 1995년에 가입한 ‘고문방지협약’에는 어떠한 유보조항도 달지 않았지만, 국가예방기구의 설립과 고문방지소위원회의 현장방문권을 명시하고 있는 ‘고문방지협약 선택의정서’는 아직까지도 비준하지 않은 상태다. 고문이 현존하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고, ‘글로벌스탠다드’를 주장하는 현 정부의 지향을 고려한다면 선택의정서의 비준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그것이 경찰이건 검찰이건 교정시설이건 우리사회에서 고문을 완전히 근절하기 위한 적절한 조치가 병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고문경찰’의 악몽을 재현한 경찰을 두고 경찰 스스로의 반성과 성찰만 요구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이제는 시민들이 나서서 경찰의 문제를 바로잡아 주어야 한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306 | 추천: 0
이광열/ 구속노동자후원회 사무국장     전국 구금시설에서 ‘자살 방지용 철망’ 공사가 한창이다. 법무부(교정본부)가 지난 4월 19일 훈령을 통해 7월 말까지 완료하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감옥에 갇혀 있는 재소자들은 이런 상황에 대해 불만이 있어도 감히 말할 수 없다. 몇 몇 양심수들이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국가보안법 ‘일심회 사건’으로 구속돼 4년 째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 손정목, 장민호, 박경식 씨가 민주노동당 권영길 의원실로 보내온 편지에 따르면 “거실 내부가 어두워져서 대낮에도 인공조명에 의존하지 않으면 책을 읽을 수가 없”고 “통풍 조건이 나빠져.......열대야 현상이 없는 6월임에도 잠들기 힘든 밤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그나마 작은 위안이었던 쇠창살 너머 푸른 하늘이 이젠 촘촘한 철망에 가리어 회색 빛 하늘로 바뀌어버렸다”고 하니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도 무엇 때문에 교정본부는 인권침해에 따른 재소자들의 불만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렇게 무지막지한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일까? 7월 15일, 구속노동자후원회와 민가협, 양심수후원회, 전해투 등 사회단체 활동가들이 문제를 제기한 양심수 가족들과 함께 기자회견을 갖고 법무부를 찾아갔다. 교정본부에 있는 사무관 한 명과 계장 한 명이 면담을 하기 위해 나왔다. 그들은 우리를 보자마자, ‘아무런 문제가 없는 데 괜히 생트집을 잡고 있다’는 듯 못마땅해 했다. 그러면서 ‘교도소 자살사고가 심각하다’, ‘재소자들의 생명을 보호하는 건 우리의 의무다’, ‘생명권 보장은 다른 어떤 인권보다 우선해야 하지 않느냐’며 장광설을 늘어놓는다. 구금시설 재소자들의 자살률 증가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2006년 법무연수원 자료에 따르면 수형자 10만 명당 자살률이 30.5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1위를 차지한다. 법무부 통계를 보더라도 2008년 7월까지 4년여 동안 구금시설에서 187명이 사망했는데, 이 가운데 113명이 병으로 사망했고, 74명이 자살을 했다. 지난 해 11월 21일 ‘연쇄살인사건’으로 서울구치소에 수감 중이던 사형수 정남규 씨, 대전교도소 김 모 씨가 잇달아 자살하면서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법무부는 외부에 연구용역까지 줘가며 ‘자살방지대책’을 강구했는데, 그 결과물이 ‘자살방지용 철망’ 설치다. 구금시설 자살자의 “55%(40명)가 조사·징벌 거실 및 독거실에 수용돼 있었고, 주로 옷이나 수건 등을 변조하여 만든 끈을 철격자 등에 거는 방법으로 자살했다”는 분석결과에 따라 창문 뒤에 설치돼 있는 쇠창살(철격자)에 손이 닿지 않도록 막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사진 출처 - 노컷뉴스 얼마 전 교정본부에서 철망 공사의 주무를 맡고 있는 담당계장과 통화한 적이 있었다. 그는 여름이라 모기와 해충이 들어오는 걸 막기 위해 방충창을 설치하는 것일 뿐이라고 했고 재질이 스테인레스라 시야를 가리지도 않을 거라고 했다. 그런데 막상 교도소를 방문해서 안에 있는 재소자들에게 물어보니, 사회에서 쓰는 일반 방충망보다 더욱 촘촘해서 많이 갑갑하다고 했다. 특히 독거실 창문은 화장실 쪽으로 나 있는 것 하나밖에 없는데 이렇게 막아 버리면 흡사 닭장에 있는 느낌이 들 것이다. 교정본부 직원들은 우리에게 볼멘소리로 ‘반대만 하지 말고, 교도소에서 자살을 막을 수 있는 현실적인 방안을 제시하라’고 한다. 어떤 방법이 효과적인지는 저들 역시 잘 알고 있다. 재소자들이 인간답게 생활할 수 있는 교도소 환경을 만들어 주고, 세심한 관리를 통해 재소자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불어넣어 주는 일, 교정행정 본연의 역할을 잘하면 된다. 그런데도 하지 않을 뿐이다. ‘현실성’이 없고 ‘예산이 부족하다’는 핑계를 대면서....... ‘자살방지용 철망’ 설치를 비롯한 법무부의 자살방지대책은 대단히 위선적이다. 철망 하나 설치하는데 12~13만원의 예산이 소요된다고 한다. 전국으로 합산하면 수십억 원에 이른다. 법무부는 5월 1일부터 재소자들이 외부병원에서 진료를 받을 때 누구나 적용받아 왔던 건강보험료와 치료비 지원대상과 예산을 대폭 줄였다. 구금시설 재소자들은 법률상 국민건강보험 적용을 받지 못한다. 구금시설 내부의 의사 수도 턱없이 부족(재소자 565명당 1명-2009년 1월 현재)하고, 변변한 의료시설, 약품조차 구비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재소자들은 몸이 많이 아파도 외부병원에서 진료를 받기가 ‘하늘에 별 따기’처럼 어려웠다. 그러다 병으로 사망하는 재소자들이 급격히 늘어나자 법무부는 2006년부터 국민건강보험공단에 예탁금을 내는 조건으로 보험료와 진료비를 부담해 왔던 것이다. 그런데 올 들어 예산삭감을 이유로 지원 대상을 대폭 줄여버렸다. 이렇게 되면 돈 없는 재소자들 같은 경우, 정말 아픈데도 병원 문턱조차 못 가보고 사망할 수도 있다. 구금시설의 자살률 증가는 이런 환경 요인에서부터 비롯된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자살의 가장 큰 원인은 우울증이다. 구금시설 재소자들은 우울증에 걸릴 확률도 높고, 실제 우울증에 걸린 환자들도 상당수 있다. 이들은 감옥에 가둘 게 아니라 의료기관에 보내 치료를 받게 해야 하는데, 사실상 방치되고 있다. ‘UN 피구금자 최저기준규칙’에 따르면 구금시설마다 재소자들의 심리치료를 담당할 수 있는 정신과 의사들이 상주해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상황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자살방지용 철망’ 등 별 효과도 없는 대책에 수십억 원의 예산을 쏟아 부을 게 아니라 재소자들을 인간적으로 대우하면서 의료권 보장과 더불어 구금시설 환경을 대폭 개선하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시민들의 비판과 강력한 요구가 뒤따라야 한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443 | 추천: -1
강국진/ 서울신문 기자 1970년대 후반 캘리포니아에선 부동산 가격이 과열 조짐을 보였다.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면서 재산세 부담도 늘게 되자 고정수입이 많지 않은 노령층 주택소유자들의 불만이 높아져 갔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하워드 자비스, 폴 갠 등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들고 나온게 바로 ‘주민발의 13호’였다. 한국에선 일부에서 납세자운동의 전형처럼 얘기하는 이 ‘납세자의 반란’은 이후 캘리포니아 재정을 망가뜨리는 일등공신이 됐다. 주민발의 13호는 재산세율을 연간 부동산 평가액의 1% 미만으로 제한하고 세율을 올리더라도 연간 2%를 넘지 않도록 했다. 주민투표 끝에 65%가 찬성했다. 1978년 주 의회를 통과한 이 안건은 이후 캘리포니아 주 법과 동일한 효력을 지닌다. 당장 재산세 납부액이 절반으로 줄었고, 이때부터 캘리포니아 재정은 급속도로 악화됐다. 문제는 주택 가격이 아무리 올라도 재산세는 거의 변동이 없게 됐다는 점이다. 가령 1만달러 주택이 10년 뒤 5만 달러가 되더라도 세금은 아무리 높게 잡아도 집값 상승을 따라갈 수 없다. 실제로는 세금이 계속 줄어드는 셈이다. 이 경우 두 가지 현상이 필연적으로 나타난다. 소득불평등이 심해지고 재정압박은 심해진다. 더욱 큰 문제는 주민발의 13호가 향후 주정부가 세금을 인상하려면 주 의회 의원의 3분의2 이상의 찬성을 얻도록 규정했다는 점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캘리포니아 주 법은 예산안을 통과시킬 때 재적의원 3분의2가 찬성하도록 하고 있다. 세금이건 예산이건 캘리포니아에선 원만한 합의가 힘들다. 세금을 더 거둬야 할 아무리 절박한 이유가 있더라도 3분의1이 반대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특히나 양당제인 미국에서 세금인상에 거부감이 강한 공화당 소속 의원이 주 의회의 3분의1 이상을 차지하는 경우가 일반적이기 때문에 증세는 꿈도 꾸기 힘들게 돼 버렸다. 이것이 초래한 끔찍한 상황이 바로 작년에 벌어졌다. 2007년 이후 부동산 거품이 붕괴되면서 캘리포니아 재정은 위기에 처하기 시작했다. 결국 지난해 7월1일 아널드 슈워제네거 미국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재정 비상사태’를 선언했다. 253억달러에 이르는 누적 재정적자를 둘러싼 갈등으로 인해 그해 7월부터 시작하는 2009회계연도 예산안을 주의회가 통과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갈등 끝에 결국 주정부와 주 의회는 교육·복지·의료부문 예산 155억달러를 삭감하는 선에서 타협했다. 당초 예상했던 재정적자 가운데 예산삭감을 제외한 나머지는 산하 지방정부한테서 수십억 달러 빌리고 부동산을 매각하고, 태평양 인근해역에서 석유시추를 허용해 생기는 수입으로 메우기로 했다. 이 막대한 삭감안이 캘리포니아 주민들의 삶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지 확인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당장 우수한 수준을 자랑하던 교육이 직격탄을 맞았다. 교사 3만 명 이상이 해고됐고, 이는 수업 부실화로 이어졌다. 주정부 지원이 줄어든 주립대들은 등록금을 올리면서 가뜩이나 어려운 중산층 이하 서민들의 허리를 휘게 만들었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평의회(UCBR)는 학생들의 반발에도 지난해 11월 등록금을 한꺼번에 32%나 올리기로 했다. UC버클리는 전기를 아끼기 위해 시험기간 중 도서관 24시간 개방제도를 없애고 토요일마다 도서관 문을 닫는다. UCLA는 개설강좌 수가 10% 감소했고, 강의를 듣는 학생 수가 30% 늘어난 강좌도 있다. 빈곤층 의료지원 프로그램도 13억 달러가 줄어들면서 저소득층이 직접적인 타격을 받게 됐다. 주정부 상황만 나쁜 게 아니다. ‘나성에 가면 편지를 띄우세요.’로 우리에게 유명한 로스앤젤레스 시에서는 지난 2월 경찰관, 소방관 등 공무원 1000명을 정리해고했다. 4월에는 공원과 도서관 같은 공공기관에 대해 1주일에 이틀씩 의무적으로 무급휴가를 가도록 했다. 급기야 잔여 형기가 60일 이하인 수감자들을 조기 석방하는 조치도 등장했다. 캘리포니아의 재정적자는 지금도 190억 달러에 이른다. 지난 3월 4일 캘리포니아의 대학 재정지원 삭감 반대 시위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최근 성남시 모라토리엄(지불유예)을 계기로 지방재정 위기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한국 지방자치단체들이 방만한 재정운용을 해온 것이야 원체 유명한 일이지만 자치단체 공기업까지 위험하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위기의식이 높아지고 있다. 더구나 지난해 재정조기집행 과정에서 지방채 발행을 독려하는 등 중앙정부가 지방재정악화에 책임이 적지 않다는 점에서 상황이 썩 녹록치 않아 보인다. 일반적으로 재정위기 상황에서 선택하는 정책수단으로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올리는 것은 ‘마른 수건 쥐어짜기’라고 할 수 있다. 재정지출을 줄이고 각종 인건비는 동결하거나 삭감하고 신규투자를 줄이는 것이다. 하지만 긴축재정을 할 경우 가장 먼저 줄어드는 것이 복지예산이라는 것은 외국 경험에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캘리포니아에서 보듯 공공부문 일자리를 줄이고 복지예산과 교육예산을 줄이면 한쪽에선 저소득층이 늘어나면서 공적부조예산이 늘어나 복지예산이 더 늘어나는 모순이 발생한다. 다른 한 쪽에선 다들 돈이 없어서 소비도 살아나지 않고 경제는 더 살아나지 않으면서 자연스레 세입감소가 계속된다. 말 그대로 악순환이다. 정창수 좋은예산센터 부소장에 따르면 복지국가의 대명사인 스웨덴이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한 공적 부조(기초생활보장)에 쓰는 예산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1% 가량이라고 한다. 그런데 복지국가와는 거리가 먼 미국 연방정부가 쓰는 예산이 GDP 대비 약 4%다. 정 부소장은 “재해 관련 예산을 예방 중심으로 편성할 것인가 사후복구 중심으로 편성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동일한 문제가 지방재정위기에서도 발생한다.”고 꼬집는다. 사후복구가 당장 중요하다고 해서 사후복구 중심으로 재해예산을 쓰다보면 해마다 사후복구만 하게 된다. 하지만 예방 중심으로 바꾸면 당장엔 돈이 더 들지 몰라도 어느 순간이 지나면 비용도 적게 들고 피해도 적게 입는다. 캘리포니아가 지금이라도 세금을 올린다면 당장엔 힘들지 모른다. 하지만 저소득층 복지와 공교육을 희생하고, 경찰을 해고하고 재소자를 석방하는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방식이 언제까지 통한다는 보장도 없다. 당장 우리나라에서도 2008년에 종합부동산세가 대폭 완화되면서 지방자치단체 세입에 큰 타격을 입었다. 이제 우리도 ‘세금 깎아준다’는 감언이설에서 벗어나 ‘세금 더 내고 더 많이 나눠 갖자’는 생각을 하는 것이 재정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지혜가 아닐까.
2017-07-12 | hrights | 조회: 311 | 추천: 0
사실이라면, 대통령으로 모셔야 할까 - 안상수의원의 한나라당 대표 출마를 지켜보며 손상훈/ 종교자유정책연구원 상담위원 어려서 학교 다닐 때, 교장선생님의 훈시가 너무도 부담스럽고 벅찬 때가 있었다. 햇빛이 강렬한 무더위, 운동장에 서 괴로운 친구 얼굴들만큼이나 귀담기 힘들었던 선생님들의 훈시. 그럼에도 신기하게 기억에 남는 단어가 있다. “거짓말, 거짓말은 안 된다”고 말씀하셨던 그 말 이다.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던 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을 밝힌 후 스스로 검찰을 떠난 분이니, 이 분은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다만 기억이 나지 않을 뿐이고, 기억나지 않는 것도 사과하는 모습. 정치인의 새로운 탄생이라 뒤집어 상상해본다. 보통의 사람들은 사회 공공의 지도자들이 종교계에 당당하고 거침없이 소신을 굽히지 않고 중심을 잡아 주길 바란다. 어려운 사람 돕고 좋은 일 하는 종교 지도자들에게 존경심을 표하는 것이야 당연하지만, 정 반대의 경우도 종종 눈에 밟히기 때문이다. 국민의 세금을 도둑질해 국고보조금을 횡령하는 종교지도자들은 용서하지 않아야 참 정치인이다. 이번 봉은사 정치외압 논란도 새로 당선된 조계종 총무원장과 원내 대표의 면담에서 시작되었다. 만남의 목적이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템플스테이 예산을 협의하기 위한 것이 중요한 사안이었다고 한다. 안 의원은 자신이 원내대표 시절이던 지난해 11월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 스님을 만난 자리에서 “현 정권에 비판적인 강남 부자 절의 주지를 그냥 놔두어서 되겠느냐”고 말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런 자리에서 강남의 부자 절에 ‘운동권 퍼주기’ 하는 주지스님이 말이 안 된다고 당연히 했을 법도 하고, 같이 있던 한 분은 사실이라고 한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결론은 성경구절 한 대목 그대로이다. ‘의로운 이’를 말하는 ‘욥’의 욥기13장에 “... 너희는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요. 다 쓸데없는 의원이니라. 너희가 잠잠하고 잠잠하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너희의 지혜일 것이니라...”는 말씀이다. 성경은 정치인이 사람에게 한 말은 기억해야 하며, 적당히 회피하고 넘어가지 않아야 함을 배우게 한다. 총무원장 자승스님과 안상수의원 사진 출처 - 불교닷컴 역발상으로 비틀어 상상해보자. 기억나지도 않는 사실을 인정하며, 불교계에 유감과 사과의 뜻을 전하는 너그럽기도 하고, 수용적인 의원이기 때문에 여당의 대표로 출마할 자격이 있지 않나싶다. 안 의원은 모 사찰을 매년 방문하기도 하는, 종교 교류의 모범을 알고 관용을 실천하는 정치인이다. 가끔 스님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한 단점을 극복한다면 더 높은 역할을 맡아야 할지도 모른다. 또한, 한국 속담에 ‘거짓말도 새끼를 친다.’는 말이 있는 줄 모르는 시민들에게 평생학습을 하도록 교훈을 준 국민의 은사이기도 하다. 누가 알았겠는가! 한국 속담에 ‘거짓말도 잘하면 오례 논(올 벼를 심는 논) 닷 마지기보다 낫다’는 이야기가 있을 줄이야. 거짓말도 잘하면 도움이 된다는 뜻의 이런 속담이 있는 줄 모르는 시민들도 거짓말에 대해 공부하게 된다. 사법고시에 합격한 그 머리 좋은 분이. 잠잠하기를 기다리던 끝에 당대표 출마 기자회견에서 “사실이라면 유감이다”고 한 것은 체면을 앞세운 것이 아니라, 국민들에게 새로운 정치인은 기억나지 않아도 반성하는 신 버전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이지 않을까. 이런 상상이 사실이라면 안 의원은 대통령을 하셔야 한다. 더구나 템플스테이 예산을 더 많이 받기 위해 나온 신임 조계종 총무원장에게 한 말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유감’을 밝힐 필요가 없는데도, 종교계에 먼저 선물 보따리를 내 놓는 것이 정치인이다. 참 보기 좋은 모양새이다. 마구 비틀어 보면. 조금만 생각해 봐도 알 수 있는 상황을 계속 꼬이게 만드는 분이라도, 상식의 차원을 넘어, 계속 반복하면 깊은 속내가 무엇인가 있는 건 아닌지 헷갈리고 기대를 하게 된다. 거짓말과 관련해 ‘로터’는 ‘거짓말은 눈사람 같아서 오래 굴리면 그 만큼 커진다.’고 했다. 눈사람의 크기가 한 국가를 덮을 정도가 되고 있는지 우려스럽다. ‘조지 버나드 쇼’의 말처럼 ‘거짓말쟁이가 받는 가장 큰 형벌은 그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신임을 받지 못 한다는 것보다, 그 자신이 아무도 믿지 못한다는 슬픔에 빠지는데 있다’고 했다. 차기 한나라당 대표가 되어야 할 분이나, 대통령이 되셔야 할 분은 이런 논쟁에서 자유롭고, 정치와 종교가 결탁해 서로 주고받기를 하지 않는다는 교훈을 주는 깔끔한 분이었으면 좋겠다. 정치와 종교가 오염되지 않는 사회. 이런 생각이 꿈일까, 한나라당을 아끼는 분들의 선택이 궁금하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298 | 추천: 0
전국완/ 중학교 교사   16강을 끝으로 우리에게 남아공 월드컵은 아쉽게 끝이 났다. 하지만 지구 반대쪽의 낯선 그라운드에서 혼신을 다해 코리아의 열정을 보여 준 선수들이 너무 자랑스럽다. 그들이 선물한 환희와 감격을 벅차게 맛보며 함께 울고 웃을 수 있어서 정말이지 행복한 시간이었다. 마지막 경기가 되어버린 우루과이 전에서 종료휘슬이 울리자 장대비 속에서 펑펑 울던 선수들의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짠하다. 그리고 월드컵이 진행되는 동안 우리 동네 닭집도, 피자집도, 호프집도 모처럼 특수를 누린 것 같아 다행이다. 소규모 자본으로 가게를 꾸려가는 우리들의 평범한 이웃들이 월드컵 덕분에 수입을 올렸다니 이 역시 좋은 일이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엔 ‘이제 좀 그만! 잘 끝났다.’는 생각도 못지않게 많다. 우리 팀의 경기가 있을 때마다 어김없이 TV 앞에서 마음을 다해 응원하긴 했지만, 우리가 마음으로 부르는 응원가가 특정기업의 소유가 되었다는 소식이 들리고, 그래서 시청광장에선 특정한 노래만 불러야 된다는 더 황당한 소식이 들리고, 우리 팀이 경기를 할 때마다 중계권을 독점구입한 모방송국이 100억 원씩 수익을 올리고, 덩달아 유명 연예인들이 응원가를 부르며 마트를 광고하고, 아이스크림을 광고하고, 에어컨을 광고하며 돈을 펑펑 벌어들이는 걸 보면 씁쓸하다 못해 슬그머니 역겨워진다. 결국 모든 것이 돈으로 귀결되는 듯해서 말이다. 피겨스케이팅도 돈이 되고 축구도 돈이 되고, 응원도 돈이 되고……. 이제는 그 돈벌이에 지나간 아픈 역사인 전쟁도 주요메뉴로 등장한 것 같아 황당함을 넘어서 걱정이 든다. 요즈음 전에 없이 한국전쟁을 다룬 영화, 드라마들이 쏟아지고 있다. 정권이 바뀌면서 지난 10년 동안의 대북정책은 폐기되고 점점 남북관계가 험악해지는가 싶더니, 급기야 천안함 사태로 남북이 그야말로 극도의 긴장상태에 와 있는 지금, 여기에 화답하듯이 전쟁영화, 드라마들이 줄줄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피웅피웅’ 총알이 날아다니고, 무차별 총격에 사람들이 퍽퍽 쓰러지며 피가 낭자하게 흐르고, 귀청을 찢는 듯 한 폭음에 집과 사람이 날아가는 장면들이 안방에서, 극장에서 매일같이 우리들의 눈과 귀를 붙잡는다. 그런데 그 화면 속에서 아주 오래 전 초등학교시절 불렀던 ‘아ㅡ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조국의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ㅡ 주먹 붉은 피로 원ㅡ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해 떤 날을....’ 이라는 노래가 떠오르는 건 나만의 느낌일까? 천안함 사태로 남북이 그야말로 극도의 긴장상태에 와 있는 지금, 여기에 화답하듯이 전쟁영화, 드라마들이 쏟아지고 있다. 사진 출처 - 뉴스엔 이런 드라마를 보면서 어르신들은 ‘니네가 빨갱이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기나 해?’라며 60년 전 기억이 떠오른 듯 부르르 떠신다. ‘전쟁이라면 지긋지긋하다’ 하시면서도 매번 빠뜨리지 않고 챙겨보시는 그 표정에는 은근히 지난날에 대한 향수도 어린 듯하다. 또 아이들은 화면 속에서 ‘전쟁의 참담함’을 읽어내기보다는 재미있고 적당히 스릴도 있는 전쟁놀이를 감상하고 있는 듯하다. 이런 드라마와 영화의 기획 의도는 도대체 무엇일까? 보수적인 권력층의 입맛에 맞추려는 의도도 분명 깔려 있겠지만, 수백억을 들여서 만든다는 건 그 이상의 수익을 충분히 낼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한창 남북관계가 험악한 지금, 나라의 불안한 안보상황을 기회삼아 ‘전쟁’을 상품으로 만들어 내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 지난 2000년인가 개봉되었던 ‘공동경비구역 JSA'라는 영화가 생각난다. 개성공단도 없었고, 남북 간의 교류도 많지 않던 그 시절, 남북의 군인들이 우정을 나눈다는 매우 비현실적인 내용이었지만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다 올라갈 때까지도 나와 친구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영화가 그려낸 민족분단의 모습에 너무 가슴이 아파 울고, 분단문제를 바라보는 영화의 진정어린 시선과 극복에 대한 절절한 열망에 감격해서 울었다. 한참을 눈물범벅이 된 채 앉아 있다가 벅찬 가슴을 안고, 희망을 안고 극장을 나왔던 기억이 난다. 그 때 품었던 희망은 10년이 지난 지금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영화나 드라마는 우리 인간의 삶의 진실을 보여주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가 돈을 내고 감상하는 상품이지만, 그것들이 전달하는 메시지는 상품이 아닌 진실이어야 한다. 더욱이 우리 민족의 현대사를 피로 물들인 엄청난 비극이었던 ‘6·25’, 다시는 일어나선 안 될 ‘전쟁’과 그 역사를 다룸에 있어서는 더욱 신중하고 진정어린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한국축구를 응원하는 뜨거운 가슴, ‘전쟁’ 속의 진실 등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가치이다. 이런 것들까지 ‘돈’으로 환산하려는 천박한 계산 앞에서 휘둘리지 말고 정신을 차려야 한다. 우리가 지금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두 눈을 크게 뜨고 잘 살피며 나아가야 할 것이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296 | 추천: 0
이동화/ 민변 국제연대위 간사 월드컵으로 온 나라가 웃고 울며 떠들 때, 한국의 대표적인 시민단체인 참여연대 사무실 앞에는 태극기와 참여연대 OUT이라는 손피켓을 든 다수의 어르신들이 기자회견 및 집회를 개최하며 참여연대는 빨갱이 단체라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심지어는 가스통과 기름이 담긴 인화물질을 소지하고 참여연대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서 “다 불태워버리겠다”고 위협해서 이를 경찰이 막는 참으로 기이한 풍경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그리고 지금도 보수단체들의 집회는 계속되고 있다. 개인적으로 진보건 보수건 자신들의 주장과 의견을 표현할 권리가 있기에 그 분들의 기자회견과 집회 그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물론 테러에 가까운 물리적 폭력과 언어폭력, 이에 대한 경찰의 뜨뜻미지근한 대응은 심각한 문제이지만 여기서는 다루지 않기로 한다.)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보수단체의 어르신들을 참여연대 앞으로 보내게 한 이 정부의 비겁하고 치졸한 행위에 있다. 참여연대의 서한이 유엔안보리로 발송이 된 것은 지난 11일(금) 오후이다. 그리고 다음 주인 14일에 국내 주요일간지에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정부 외교부 대변인의 공식 성명을 시작으로, 외교부장관, 대통령 비서실장, 여당의 원내대표도 한 목소리로 참여연대의 서한발송이 “국익에 저해되고”, “안타깝고” “부적절한 행위” 라고 하였다. 특히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인 국무총리는 국회에서 참여연대의 서한 발송은 “어느 나라 국민인지 의심스럽다”라고 하며 참여연대의 애국심을 의심했다. 정부의 주요 인사들과 여당의 실세들이 이렇게 발언하며 매도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니 보수단체가 참여연대 앞에서 그렇게 극성스럽게 시위를 하는 것이 이해가 되고, 일반 시민들도 참여연대가 대단히 큰 잘못을 한, 옛날 말로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로 비춰질 수 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참여연대 서한의 내용은 논외로 하고, 과연 참여연대가 유엔안보리에 서한을 발송한 것이 문제가 되는지의 여부는 유엔의 시스템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고 접해본 사람이라면 참여연대가 지극히 특별할 것 없는 소위 NGO(비정부기구) 활동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부는 정반대로 정부의 외교에 커다란 어려움을 주었다니, 이즈음 되면 정말이지 “막가자는” 이야기들이라 답답하다 못해 통탄할 노릇이다. 국회에서 참여연대 관련 발언을 하고 있는 정운찬 국무총리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참여연대라는 단체는 유엔경제사회이사회(ECOSOC)가 부여하는 특별협의지위자격(Special Consultative Status with UNECOSOC)이 있는 단체이다. 이러한 협의지위자격이 있는 단체는 유엔의 각 기구에(주로 유엔인권이사회와 경제사회이사회) 단체의 주장과 의견을 제기, 발표하고, 로비를 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는다. 그리고 그 권리는 유엔의 결의안으로써 더욱 보장받고 강화를 받고 있는 것이 현재의 추세이다. 국가들 간의 연대체인 유엔에서 NGO의 의견을 중시하고 제도적으로 보장한 역사는 유엔의 탄생 때부터라고 할 만큼 상당히 오래되었다. 특히나 유엔이 갈수록 각 국가들간의 외교적 공간으로 전락하고 강대국의 이익만이 관철된다는 국제적 비판으로 인하여 국가들과 일정정도 다르고 비판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는 NGO들에게 의견을 청취하고 반영하려 하는 움직임은 갈수록 제도적으로 뒷받침되고 있다.(유엔인권이사회의 UPR 제도 신설 등) 그러하기에 유엔에서 국가와 다른 의견을 가진 엔지오의 존재는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만약 회원국가의 의견과 그 회원국가의 NGO가 의견을 같이 한다고 하면 그것이 유엔차원에서는 이상하게 받아들여지고, 이는 제 3세계 독재국가내의 관변단체들로 인식이 될 뿐이다. 또한 이 서한은 유엔안보리에 Open letter(공개서한) 형식으로 보낸 것이다. Open letter는 특정 수신인에게 비밀리에 보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에게 공개적으로 보내지는 일종의 낮은 수위의 청원 글인 것이다. 실상 이러한 형식의 서한은 공식적인 논의의 대상이 되기 힘들다.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공식적으로 NGO들이 제기한 사항에 대해서 의제화 하거나 NGO들의 공식적 참여를 제한하는 폐쇄적인 운영을 하고 있다. 하지만 안보리에서 다루는 주제가 대단히 위중한 것들이기에 각각의 주제에 따라 전 세계 수없이 많은 시민단체, 노동단체, NGO, 인권단체들은 안보리 비/상임 이사국들에게 Open letter를 보내고 또한 적극적인 로비도 진행한다. 대표적인 인권단체인 국제앰네스티는 1999년 6월 이후 현재까지 안보리에 50여통 이상의 Open letter를 보냈으며, 인터넷 검색엔진인 구글(Google)을 검색해보면 유엔안보리에 보내진 Open letter는 전 세계적으로 수십 만 건 이상이 검색되어 진다. 아마도 이러한 사실은 외교부에서도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외교부를 비롯한 정부 고위 관계자들은 정부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을 거라면 입 닥치고 가만히 있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그러면서 참여연대는 어느 나라 국민이냐고 언성 높여 꾸짖는다. 참나 아무리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며 입 다물고 살아야 하는 요즘이라지만, 이건 정말 해도 너무한다. 옛 말에 올바른 위정자는 국민을 섬긴다고 하였다. 하지만 요즘의 정부 관료는 국민을 섬기며 국민의 의사를 귀 기울이기는커녕 국민을 자신들의 부속품으로 생각하는가 보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정부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았다고 하여 애국/매국으로 나눠서 색칠해버리는 놀랄 정도의 무모함을 발휘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유엔에 사무총장을 배출하고 유엔의 인권이사국인 한국 정부는 도대체 어느 나라의 정부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다 떠나서 나는 이 정부가 진심으로 창피하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300 | 추천: 0
장윤미/ 국민대 학생 요 며칠 전라남도 강진에 있는 도룡마을이란 곳을 다녀왔다. 그곳에서 작업하고 있는 친구들을 도와주기 위해서였다. 친구들은 그곳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책을 만들고 영상을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번엔 한 할머니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단편영화로 만든다고 했다. 겨우 며칠 있었을 뿐인데, 밤마다 잠들기 전 친구가 조근조근 해주던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각자 이야기 때문인 건지, 난 금세 그들에게 정이 들었다. 마을에선 60대 노인은 젊은 축에 속한다. 아직 농사를 짓는 분들도 많고 아니면 텃밭을 일구어 먹거리를 장만하신다. 특히 남편을 여의고 혼자서 살아가는 7,80대 할머니들이 참 많더라. 할머니들은 버스 정거장이 있는 마을 입구 나무 그늘 아래 모여 이런저런 얘기들을 하신다. 매일 그렇게 보는데도 무슨 할 얘기가 그리 많으신지 가만히 보고만 있는 것도 재밌었다. 작업하다 짬이 좀 나서 막연하게 그들을 바라본 적이 있었다. 쓸쓸하기도 하지만 평화로운, 그들의 주름살이 지독해보이면서도 너무나 위대한. 그렇게 바라보다 불현 듯 어떤 이미지가 스쳐갔다. 도시에서 본 노인들의 모습이다. 내 어깨를 세게 부딪치고 악취를 풍기며 지나가는 사람을 신경질적으로 돌아보자, 모자를 눌러 쓴 할아버지가 지하철의 폐휴지를 수거하며 저 멀리 사라지고 있었다. 지하철 계단에 쭈그려 앉아 구걸하던 할머니. 사실 도시에선 흔한 풍경들이다. 이곳에 와서야 그동안 내가 노인들에 대해 갖고 있던 부정적인 이미지들이 떠올랐다. 왜 난 늘 그들을 그렇게 바라보았던가. 아니 그렇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그리고 구체적인 공간으로서 특히 도시에선 말이다. 도시에서 내게 노인들은 어떤 존재였는가 하고 물어 본다. 그래, 너무 불편한 존재였다. 보고 싶지 않았다. 연민과 불편함이 뒤섞여 찝찝함과 우울함만을 자아냈다. 호화롭게 사는 노인들이야 내 눈에 잘 비칠 리가 없다. 그들은 저마다 풍요로운 삶을, 내가 접근하기 어려운 그런 공간에서 잘 누리고 있을 것이다. 결국 거리에서 내 눈에 띄는 노인들은 안타까워 보이고 불편하다. 그 불편함은 이내 서글픔으로 변한다. 나 역시 그곳을 향해 스멀스멀 기어가고 있다는 사실, 그것은 진리. 노인이 된다는 게 두려운 게 아니라 노인으로서의 삶이 두려워지는 거다. 대비할 수 없으니까, 그러니까, ‘노후대비’ 말이다. 이렇게 저렇게 구르고 구르면서 되는대로 늙어가고 싶은데, 늙었을 때 정말 돈도 없고 집도 없고 배가 고픈데 돈 벌 데도 없으면 어떡하나 또 그런 내가 싫어지면 어떡하나 싶은 두려움이 뒤따른다. 안정적으로 살라는 말의 근거 중에서 가장 나를 약하게 만드는 말은 나이 들어서 고생한다는 것이다. ‘노후대비’라는 말로 내 삶을 저당 잡히고 싶진 않은데, 살라는 대로 살지 않으면 노후를 대비하기란 어렵다. 아니, 생각해보면 아주 열심히 산다 해도 노후를 대비하긴 어렵지 않은가. 이미 사회는 열심히 산다고 해서 그만큼의 대가를 주는 곳이 아니란 걸 알아버렸으니까. 사진 출처 - 노컷뉴스 나이가 든다는 건 육체가 소멸하면서도 그 안에 경험을 더 많이 축적하는 일이라는 데, 그래서 영원하지 않은 것에 영원한 것을 채워가는 것이라는데, 그동안 내 눈에 보였던 노인의 몸뚱이는 부정하고 싶은 것이었다. 그래서 내게 ‘노인’과 ‘할아버지, 할머니’는 전혀 다른 말이리라. 내가 강진의 도룡마을에서 기분이 좋아졌던 건, 열심히 살아온 한 분, 한 분의 삶을 내 나름대로 상상하고 존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처럼 가진 내 여유 덕분이기도 할 것이고 마을에서는 가능한 자생능력과 이웃 관계 덕분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도시가 훨씬 비인간적이고 비인권적인 풍경이 많이 드러나는 건 당연하다. 도시 지하철 계단 한켠에 쪼그리고 앉아 마른 손을 내밀고 있는 노인을 보고 싶지 않다. 마주할 때 느끼는 찰나의 찝찝함을 재빨리 비껴가고 싶을 뿐이다. 내 마음이라도 편하고 싶다면 돈이라도 바구니에 넣어드리면 될 텐데, 매 순간 줄까 말까 고민하는 나도 싫다. 굽어진 허리로 병이나 폐휴지를 주우러 다니는 노인들을 보면 정말이지 나이 드는 게 두렵다. 정말 노후를 대비해야 한다는 어른들의 말이 맞다 싶어 어서 돈을 모으고 결혼도 해서 자식도 낳아야 하나 싶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왜 꼭 그래야 하나 하는 무력한 분노가 치민다. 그냥 이 모든 걸 그저 긍정하고 싶다가도 내가 국가와 사회라는 테두리 안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속상해진다. 내가 이 안에서 당연하게 보장받고 싶은 것들에 대한 욕심이 생기니까. 또 그게 당연하다고 믿으니까. 가장 나를 절망하게 하는 건, 죽을 때도 돈이 없으면 장례를 치르지 못 한다는 ‘현실’이다. 이 말이 얼마나 절망스러운 것인지 깨닫지 못하고 사람들은 그저 절망스럽게 말만 할 뿐이다. 이미 당연하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죽음의 권리는 나 혼자서 보장해야만 하는 것일까. 물론 할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다. 하지만 결코 혼자서 가능하지 않다. 취업이 나 혼자만의 문제는 아니지 않은가. 서로 간의 관계성이 기본이 되고, 생활의 토대인 정책이 뒷받침해주어야 할 것이다. 두려워하고 싶지 않다, 나이 드는 것을. 아름다운 할머니가 되어야지 하다가도 진짜 현실의 맨얼굴을 떠올리면,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늙음이 아름다운 사회에서 살고 싶다, 만들고 싶다. 소멸해가는 몸을 긍정하고 싶고, 몸 안에 축적되어갈 삶의 경험을 존중하고 싶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317 | 추천: 0
임아연/한밭대 학생   ‘모르는 게 약’이었을까, ‘아는 게 힘’이었을까. 결과적으로 나는 ‘앎’으로 인해서 병이 났고 더는 견디지 못했다. 필자는 얼마 전 고심 끝에 난생 처음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결심했다. 그동안 쥐꼬리만 한 돈이었지만 대학 신문사에서 일하는 대가로 원고료와 취재비 명목의 월급을 조금씩 받아왔다. 3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퇴임을 하자 그야말로 ‘학생백수’가 됐다. 두어 달 동안 부모님으로부터 용돈을 받았는데, 경제적으로 힘들어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더는 부모님께 손 벌리기가 송구스러웠다. 며칠을 알아 본 끝에 학교와 집의 중간 즈음에 있는 수제 삼각김밥집에서 일하기로 마음을 먹고 이력서를 만들었다. 처음 써보는 이력서에는 인상 좋게 나온 사진을 붙여야 하는 공간과, 주민등록번호를 써넣어야 할 칸도 있었다. 게다가 내가 다운 받은 이력서가 옛날 것이었는지 지금은 폐지되어 있지도 않은 호주와 호주와의 관계 기입란도 있었다. 시작부터가 꺼림칙했다. 마음에 걸리는 부분들을 슬며시 지워버린 이력서를 들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가게를 찾았다. 무뚝뚝해 보이는 사장이 이력서를 대충 훑어보더니 앞치마부터 입힌다. 손에 비닐장갑을 씌우고는 다짜고짜 삼각김밥 만드는 법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수저는 테이블 당 몇 개씩 놔라” 등등 온갖 사소한 것까지 잔소리를 하는 탓에 짜증이 날 지경이다. ‘나도 그렇게 일 못하는 사람은 아닌데…’라고 생각하면서 일을 배움과 동시에 삼각김밥을 정신없이 만들어 팔며 한창 바쁜 저녁시간대가 다 지났다. 8시 반쯤 돼서 좀 한가해지자 사장은 대뜸 “네가 할 만하면 하고, 아니면 말고”란다. 당장 일이, 아니 돈벌이가 급했던 나는 엉겁결에 “알겠다”고 하고 다음 날부터 하루 6시간씩 일을 하게 됐다. 고소한 참기름 냄새도 반나절을 맡으면 밥맛이 뚝 떨어진다. 더구나 6시간을 사장 눈치 보며 의자에 앉지도 못하고 뜨거운 밥과 씨름하다보면 가게 문을 닫을 때 즈음엔 빗자루질도 못할 만큼 허리가 끊어질 것 같다. 살면서 내 허리에 고스란히 느껴지는 중력의 무게를 그렇게 절감해 본 적이 있었던가. 허리 통증을 참고 비닐장갑 안에서 퉁퉁 불은 손을 겨우 꺼내 놓을 수 있는 시간은 9시가 다 될 무렵이었다. 하지만 정말 참을 수 없었던 건 틈만 나면 의자에 걸터앉아 인터넷을 하던 사장이 손님이 많아질 시간이면 “기계적으로 일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것이었다. 사람을 보고 ‘기계’처럼 일하라는 그 말이 왜 그렇게 마음에 가시처럼 박히던지…. 그런 말을 당당하게 하는 그 앞에서 ‘근로계약서’ 따위의 단어를 꺼내는 일이란 쉽지 않다. 취재하고 기사 쓰던 일을 대학생활의 주된 업으로 삼고 지내던 시절, 노동자들이 왜 바보같이 자기 권리도 못 찾냐며 답답해하던 때가 있었다. 그게 얼마나 어리석고도 가벼운 입놀림이었는지 그땐 몰랐다. ‘사장’ 혹은 ‘고용주’라는 이름 앞에서 일하는 내내 그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난 한낱 ‘알바생’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아르바이트생은 여전히 최저임금제 등에서 소외되어 있다(위 사진은 특정 업체와 관련 없음)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시급 4200원. 사장은 그 돈을 주고 얼마나 나의 일손을 뽑아 먹을까 궁리하고, 나는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덜 힘들게 돈 벌 수 있을까를 궁리했다. 그 두 가지 생각이 만나는 교차점에서 내 노동의 양이 결정된다면 좋으련만 역시나 나는 한시도 일거리에서 눈을 떼면 안 될 피고용자였다. 가게엔 하루 종일 라디오가 계속 흘러 나왔는데 DJ가 무슨 사연을 읽었는지, 내가 좋아하는 노랠 틀었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다만 아주 가끔, ‘다음엔 무슨 일을 해야 하지’라고 생각할 때만 부분적으로 들렸을 뿐. 결국 허리통증으로 '임아연의 노동OTL'은 사흘 만에 막을 내렸다. 적어도 악으로 깡으로 한 달은 버텨보려 했건만 내 연약한 의지력 탓인지, 몰랐으면 ‘약’이었을 노동인권에 대한 불편한 고민 때문이었는지 몸이 쉽게 축나버린 것이다. 그동안 일한 사흘 치 일당은 고사하고 “일찍 고만두게 되어 죄송하다”며 사장에게 머리를 조아려야 했고, 집에서는 “돈을 벌기는커녕 병원비로 외려 돈이 나갔다”는 꾸중 아닌 꾸중만 들었다. 하지만 나야 아직 등이라도 비벼댈 부모가 있어 이렇게 쉽게 그만 둘 수 있었으나 매일매일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우리의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또 나의 친구들이 생각나 많이 서글펐다. 이제는 너무도 쉽게 그들을 향해 ‘아무 권리도 주장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피고용자’라고 비난하지 못할 것 같다. ‘권리’라는 것이 나 혼자 들기엔 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가. 백 번의 취재와 인터뷰보다 내게 더 많은 이야기를 건넸던 사흘이 그렇게 지나갔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293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