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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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김성은(서울신문 기자), 김태형(프리랜서 방송작가),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박용석(출판업),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춘천별빛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이동화(아디 사무국장),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김현진/ 에세이스트 녹즙 배달을 처음 시작했을 때 가장 먼저 알아야 했던 상식은 이 녹즙은 어디에 좋고 저 녹즙은 저기에 좋고, 라든가 접객 요령이라든가 밀린 돈을 칼같이 받아내는 수금의 요령이라든가 신규 고객을 칼같이 낚아채는 세일즈의 기술 같은 게 아니라 ‘걸을 때 소리 나지 않는 신발을 신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게 제일 중요했다. 가정집에 배달하는 것은 일반 지사라고 하고, 사무실에 다니는 것을 특판 지사라고 하는데 내가 찾아간 곳은 특판 지사였다. 워낙 모든 사람이 하루에 열두 시간씩 일하는 과로의 시대다 보니 업무 시간은 아홉 시부터 시작이래도 사무직 노동자들은 몇 시든 나와서 일했다. 고무창이 잘못되었다거나 조금이라도 딱딱한 굽이 있는 신발을 신어서 소리가 나면 안 됐다. 살금살금, 쥐도 새도 모르게 없는 듯이 다닐 수 있도록 소리 안 나는 신발을 신는 게 제일 중요했다. 청소하시는 아주머니들도 하나같이 부드러운 밑창의 효도화를 신고 일하셨다. 편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아주머니들도 죄다 살금살금 다녀야 했다. 청소도 소리 안 나게 살금살금 하고, 삐걱삐걱 큰 소리 나는 금속 쓰레기통도 살금살금 비우고, 사무직 노동자들이 출근하지 않는 새벽 네 시부에 일단 진공청소기를 돌린다던가 하는 큰 청소들을 죄다 해 놓고 오후 네 시까지 건물 구석의 방에서 교대로 일하면서 구겨서 버린 종이컵, 뱉어 놓은 침, 바닥에 쏟은 커피 같은 걸 살금살금 치웠다. 사무실 사람들도 아주머니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고 아주머니들도 살금살금 재빠르게 사라지느라 사람들과 눈을 안 마주쳤다. 출처 - 경향신문 가끔 스키니 진 입었다고 청소 아주머니들한테 혼나곤 했다. 살금살금 다녀야 할 주제에 그딴 걸입었기 때문이었다. 청소 아주머니들은 그럴 때마다 번번이 사무실 분들, 사무실 분들이라고 불렀다. 사무실 분들이 보시는데, 사무실 분들이 불편해 하시는데. 우리는 사무실 분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면서, 소리 나지 않게 다니면서, 살금살금 일해야 했다. 죽은 듯이 일하는 게 우리 일이었다. 그럴 때 가끔 슬퍼졌다. 우리는 왜 이렇게 살금살금 다녀야 하나. 죽은 듯이 일해야 하나. 직업에는 귀천이 없을지 몰라도 그 직업을 가진 사람에게는 귀천이 있구나. 먹고 산다는 것은 고귀할지 몰라도 먹고 살고 있는 사람은 고귀하고 아니고가 있구나. 사무실 분들이 있고 아닌 분들도 있구나. 물론 나는 아닌 분이었다. 물론 살금살금 다녀야 하는 사람들끼리 죄다 연대한 건 아니었다. 녹즙 샘플 안 준다고 꼬집히고 옷 가지고 괜히 쥐어 박히고 나는 살금살금 다녀야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먹이사슬로 따지자면 플랑크톤 수준이었다. 뭐 입맛 다실 거 없나? 하고 멀리서부터 효도화 신고 살금살금 오셔서 누가 이야기할 때마다 가슴이 철렁철렁 내려앉았다. 괜히 트집 잡아 나를 꼬집고 밀치고 쥐어박던 아주머니를 보면 이가 갈렸지만, 일년 지나서 계약 연장이 안 되어 다른 아주머니들로 싹 갈린 걸 보니 마음이 좋지는 않았다. 갈린 아줌마나 다시 온 아줌마나 나나 죄다 우리는 죽은 듯이 일해야 하는 건 똑같았다. 그런데 문제는 죽은 듯이 일하면, 정말 죽은 걸로 아는 거였다. 홍대 청소용역 노동자 투쟁은 다행히 복직으로 해결되었지만, 지금까지 그분들의 하루 식대가 300원으로 책정된 걸 보면 이 사람들은 이거 먹고도 살 수 있겠거니 하는 것이다. 하도 없는 듯이 일하니까, 살금살금 일하니까, 죽은 듯 일해 주니까 너무 낯설어서 유령이라도 된 듯 정말 죽은 걸로 아는구나 싶었다. 소리 나는 신발을 또각또각 신고 일할 생각은 없지만, 죽은 듯이 일하지 말고 다들 산 것처럼 일해야 사무실 분들 아닌 분들 없어지지 싶다. 나 불편할 때는 반짝 살아 일하고 내 눈에 거슬릴 때는 죽은 듯이 일해 달라, 이런 요구 없이 일할 수 있어야지 싶다. 산 사람이 아니라 죽은 사람 취급하니까 유령도 하루에 300원 갖고 먹고 살 수는 없겠건만 산 사람보고 300원 갖고 자꾸 먹고 살라는 거지 싶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345 | 추천: 0
홍성준/ 투기자본감시센터 사무국장 대부분의 TV 뉴스가 마칠 때에는 어김없이 등장하는 것이 주식시장 동향이다. 어떤 때는 한국의 것만이 아니라 미국, 일본, 중국의 것도 나오고 때론 금 시세나 환율 동향도 등장한다. 한국만 그런지, 자본주의를 시행하는 다른 나라들도 예외 없이 같은지 늘 궁금하다. 아마도, 대부분의 나라가 같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주식도 단 한주가 없는 나 같은 이에게도 예외 없이 주식시장 동향을 왜, 보여줄까. 분명한 것은 이 세상은 주식시장, 환율시장, 채권시장 등 자본시장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모든 기업의 활동과 국민경제 전반이 그렇다. 더 이상 세상의 자본주의는 정상적인 생산과 소비, 저축이 아닌 주식시장의 표시된 숫자가 경제자체가 된 것이다. 그래서, 모두가 빨간 색에 웃고, 파란 색에 운다. 하지만, 그 숫자는 정당할까. 아니다 라고 하는 것은 점점 증명된다. 오히려, 그것은 거품 덩어리에 불과하고, 지금은 그 거품의 붕괴를 세상 모두가 두려워한다. 주식 포인트 2000이 붕괴되면 그 주식시장에 참여하지 않은 다수의 사람들도 떨어야 한다. 자신이 고용된 기업의 경영목표도 생산이나 고용이 아닌 주가 상승이고, 국민노후를 위한다는 국민연금을 동원해서 주가를 더 받치고 있으니 말이다. 기업의 생산성에 관계가 없이 기업파산과 일자리 증발을 가져와 자신의 삶이 당장 파괴될 수도 있고, 성실하게 납부한 국민연금이 바닥이 나서 거리에서 폐지를 줍다가 생을 마감할 수도 있기에 그렇다. 정말, 웃기고도 슬픈 일이다. 그렇다면, 주식시장이 합리적으로 운용되도록 우리 모두가 참여하면 해결되지 않을까. 그것은 더 웃기는 소리이다. 한번이라도 기업의 주주총회 같은 것을 본 사람이라면 그런 소리가 헛소리라는 것을 단번에 느낄 것이다. 우리 같은 시민들이 참석하는 회의는 대부분 “성원 보고”를 한다. 보통 “총원 00명 중, 00명 참석으로 성원이 되었습니다.” 하는 식의 의장 개회선언이 있다. 하지만, 그곳은 성원 보고가 아닌 “출석 주식 보고”를 한다. 보통 민주주의가 상식인 세상에서 1인 1표가 아닌 보유주식에 따른 의결을 하는 것이다. 즉, 사람이 아닌 돈이 지배하는 것이다. 이 대명천지 21세기에 재산에 따라 투표권 행사를 하는 유한선거제나 귀족정을 하는 곳이 있다니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다. 정말, 반인권적이고 반동적 작태이다. 사실, 주주총회 따위도 필요도 없다. 그냥 대주주 마음대로 하면 되니까 그렇다. 3대 세습을 하던, 노동자를 죽이던, 탈세를 하던. 그나마 소액주주는 주주총회장에나 들어가지만, 한주도 없는 다수의 사람들은 주주총회장의 결정에 지배를 받지만 철저히 배제된다. 이를 유식한 말로 “주주자본주의”라고 한다. 그럼에도 소수의 대주주가 거대 기업을 지배하고, 거대 자본의 욕망에 따라서 주식시장은 춤을 춘다. 그리고, 그들이 온 세상을 지배한다. 따라서, 일부 시민사회가 주장하는 ‘소액주주운동’이나 ‘소유지배 개선’은 넌센스, 몰상식이다. 차라리, 대주주와 대자본이 기업과 세상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직접적이고, 효과적이며, 합당한 것이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TV에서는 왜, 주식시장을 생중계할까? 여러모로 생각을 해보았지만, 적절한 답은 평범한 대중들에게 알량한 자본이라도 들고 주식시장에 참여하라고 꼬드기는 것에 불과하다. “한탕 크게 하면 대박”이 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대박은 누가 날까? 주식시장에서 통용되는 여러 법칙들과 경제지표라는 것이 실물경제를 반영하고 있지 않다는 점은 소위 전문가들에 의해 널리 알려져 있다. 즉, 실질성장이나 기업가치가 아닌 배팅을 잘해서 단기간에 고수익을 내는 것이 주직시장의 목표이다. 한마디로 그냥 “투기”이다. 결코, 주식시장은 기업 생산에 필요한 건전한 투자금이 모이는 곳이 아니다! 그건 고등학교 사회책에나 있는 말이다. 사진 출처 - 노컷뉴스 배팅에 거는 돈도 많다. 시중 부동자금이 800조원이라는 언론보도를 본 지도 1년이 넘었다. 그 돈은 다 누군가의 소유이고, 도박판 투기에서는 큰 배팅을 해야 고수익도 본다. 물론, 고위험도 있다. 더욱이 과도한 차입금으로 조성된 “투기자본”이라면 위험도는 커진다. 투기자본이 무자비한 것은 시장의 다양한 위험 속에서 단기간에 고수익을 챙겨 먹고 튀어야(먹튀)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투자자와 “신용”을 지키게 되고, 더 많은 차입금이 생길 것이다. 이 때, 이 위험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가 국가를 장악 또는 매수해서 소위 ‘공적자금’을 마음대로 빼먹는 길이다. 이 때, 그들이 금융기관을 소유하면 모두가 찬양까지 하며 국민혈세를 바친다. 한국의 “론스타게이트”가 그런 것이고, 미국의 월스트리트가 금융위기에 벗어난 방식이다. 지금도 국민연금을 통해 늘 주가를 부양하는 것이 국가 정책목표이기도 하다. 이때, 필요한 것이 변호사, 교수 등 소위 전문가 집단을 중심으로 투기자본과 국가 관료집단 간의 삼각동맹일 것이다. 때로는 이들은 “회전문 인사”로 연결된다. 한국의 경우, 김앤장 법률사무소와 대형 로펌들, 삼일과 삼정 같은 회계법인들을 감시하면 잘 보인다. 다른 하나는 무지한 대중을 현혹해서 자신들의 투기장-주식시장에 끌어드리는 것이다. 대박의 환상은 TV를 통해 이미 많이 유포됐다. 또, 실제로 국가는 그 투기장과 투기자본을 적극 보호하고 육성하기 때문에 안전하다. 다른 나라는 약 30여년, 한국은 십 수 년 전부터 그랬다. 민주정부 10년, 잃어버린 10년 운운하는 소리는 마치 도박판에서 판돈 잃은 투기꾼이 개평 좀 달라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껏 국가는 투기자본 양성을 위해 입법을 했고, 사법으로 보호했고, 행정 서비스를 제공했다. 투기자본이라는 야수를 시장에 풀어서 마음대로 사냥하라고 부추겼고, 사냥감도 제공했다. 그것이 공기업 민영화이고, 빅딜이고, 사모펀드 활성화인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투기자본의 사냥에 미쳐 죽지 않고 피 흘리며 저항하는 다른 시장참여자 - 노동자, 소지자, 지역주민이 있으면 경찰까지 동원해 대신 죽여 먹잇감으로 던져 주었다. 제 3세계의 경우, 군대까지 보내 대신 사냥한다. 더불어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세금”이다. 한국은 자본가도 그렇지만, 노동자도 세금을 매우 적게 낸다. 언제나, 국가는, 역대 정부는 감세정책을 시행했고, 요즘은 여러 공공부문에서 적자라는 말도 들린다. 그러니, 사회복지도 없고 시민사회 연대의식 따위는 없다! 중요한 것은 세금부과가 적어 가처분 소득이 풍부한 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대박의 환상을 불어 넣어 투기장으로 밀어 넣기만 하면 모든 것이 만사 오케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노동소득으로 노후가 불안하다면, 은행의 예금 금리보다 더 벌고 싶다면, 아파트 평수 늘리자면 등등.. 남들 보다 더 잘 먹고 잘 살자면 투기는 확실히 인생목표가 될 것이다. 결국, 대중이, 개미들의 작은 자본들이 모여 투기자본에 투자되고, 모두가 두 손을 모아 그들의 투기성공을 빈다. 이것이 천만 펀드시대에 대박 열풍에 놀아나는 대중의 불안이고, 신앙이며, 몰염치이다. 하지만, 그들의 투기가, 되돌아 올 투자수익이 누군가의 피눈물이고 청년들의 고용불안이라는 것에 대해 부끄러워해야 한다. 그 많은 중국펀드, 베트남펀드를 생각하면 이것은 전 지구적인 문제이다. 론스타펀드의 주요 투자자가 미국의 교사 노동자들의 연금이란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미국과 한국의 어떤 노동자는 론스타 덕에 행복하고, 한국과 미국의 어떤 노동자와 서민들은 불행한 것이다. 그 투기수익은 제조업의 경우는 노동자 정리해고 등 구조조정, 고배당이나 부동산 매각과 유상감자, 기술유출 같은 약탈대상 기업의 자산 빼먹기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금융기관의 경우는 더 심각해서 소비자를 대상으로 약탈적 대출행위나 사기수법을 동반한 파생금융상품 불완전 판매, 각종 부외수익과 수수료에서 나온다. 그래서, 매년 수조원의 고수익을 번다. 이를 두고, 유식한 말로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라고 한다. 그 투기로 인한 고수익의 부스러기를 약간이나 주어먹고 행복해 하는 행위는 참으로 비윤리적인 일이다. 주식투기, 부동산투기에 투자(은행과 금융기관에는 부동산 기획 대출상품이 참 많다!) 하는 것 보다 밤에 술 많이 사먹고, 택시는 꼭 타고,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이들에게 ‘팁’도 많이 주고, 주말이면 가족과 함께 지방에 놀러가 서울만 쳐다보는 지방민들에게 돈 좀 쓰고, 대형마트 “정크 푸드”말고 재래시장에 가서 제발 깍지도 말고 식재료 사먹는 것이 한국 정규직 노동자 수준에 딱 맞는 “윤리적 소비”이고, 소득재분배 없는 나라에서 “사회연대”라는 것이 내 솔직한 생각이다. 불행이도 말이다. 하지만, 노동시간 줄이고 세금 더 내자는 말은 차마 못해도, 고액연봉이나 스톡옵션 더 달라는 뻔뻔한 노동조합은 이제는 제발 사라지길 바란다. 언제부터인가 요즘 한국을 표현하는 적절한 표현으로 ‘신자유주의에 포섭된 개인들’이란 말이 자주 보인다. 참으로 맞는 말이다. 예전에는 누군가 부당한 일을 당하거나, 죽임을 당하면 온 사회가 분노로 다 들고 일어나지만, 요즘은 그런 일이 별로 없다. 오히려, 대중적 관심은 누가 대박이 났을까 이다. 결국, 주식 투기 또는 부동산 투기에 환장하는 세상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런 현상은 천년만년 지속될 수 없다. 문제는, 진정으로 공포스러운 것은 그 투기에 실패할 때, 우리사회는 엄청난 사회적 비용과 개인의 희생을 치러야한다는 점이다. 이제라도 시민사회가 나서서 자본시장으로써 순기능 따위는커녕, 다수대중들의 영혼과 노동을 파괴하는 주식시장 폐지를 주장해야 한다. 더는 우리사회가 망가지고,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 이 글은 필자의 양심과 소신에 따라 거리낌 없이 썼지만, 필자가 속한 단체의 공식입장은 아닙니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333 | 추천: 0
강국진/ 서울신문 기자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에 대해 리비아 정부가 벌인 대응방식은 말 그대로 ‘막가파’다. 이 정도면 학살이라고 해야 할 지경이다. 사망자가 2000명이 넘는다는 발표가 전혀 어색하지 않다. 초강경 시위 진압으로 세계를 경악시킨 리비아의 국가원수 무아마르 알 카다피(69)는 현존하는 최장기 독재자다. 그런데 말이다. 그 역시 한때는 부패한 왕과 낡은 전제군주제를 몰아내고 국가의 면모를 일신했던 젊은 혁명 영웅이었다. 하지만 42년이라는 시간은 눈에 총기가 가득한 새 세대 지도자를 권력의 단맛에 취해 눈이 풀려버린 똠방각하로 만들어버리기에 충분하고도 남는 시간이었다. 카다피는 1942년 유목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1963년 대학을 졸업한 뒤 군사학교에 들어가 직업군인이 됐다. 당시 이집트 대통령이었던 나세르를 모방해 젊은 장교들로 구성된 ‘자유장교단’을 구성한 카다피는 1969년 쿠데타를 일으켰다. 일개 대위에서 일약 혁명평의회 의장으로 취임해 권력을 장악했다. 즉각 국부 유출의 원흉으로 규탄의 대상이던 외국 석유회사들을 추방하고 석유를 국유화했다. 민간인을 상대로 패악질을 일삼아 원성이 자자하던 미군들을 몰아내고 기지를 철수시키고 비동맹운동에 참가하는 등 독자외교노선을 견지했다. 과거 리비아를 식민 지배했던 이탈리아인들의 재산을 몰수하는 등 식민잔재도 철폐했다. 하지만 카다피는 단일 이슬람 국가 건설을 시도하고 엄격한 금욕주의 정책을 시행하는 등 점차 무리수를 두기 시작했다. 괴팍하고 종잡을 수 없는 행동으로 외교무대에서 숱한 물의를 일으키는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중동사 전문가 고 앨버트 후라니는 저서 ‘아랍인의 역사’에서 정권을 잡을 당시의 카다피에 대해서는 ‘장교 출신의 탁월한 인물’로 표현한 반면 권력을 장악한 뒤의 그는 ‘예측할 수 없는 인물’로 묘사했다. 이런 엽기 행각 때문에 점차 카다피는 괴팍하다거나 ‘4차원’이라는 평판을 받게 된다.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이 그를 일컬어 “중동의 미친 개”라고 했던 게 대표적이다. 카다피는 미군 기지를 철수시키는 등 반미노선을 견지했고 그 대가로 리비아는 오랫동안 미국과 군사적 긴장관계를 유지하며 대외적으로 고립을 감수해야 했다. 미국은 1979년 시위대가 리비아 주재 미국 대사관을 방화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1980년 외교관계를 끊었고 이후 리비아를 테러지원국 명단에 올렸다. 레이건은 미국을 겨냥한 테러사건의 배후라는 이유로 1981년과 1986년 두 차례 리비아를 폭격하기도 했다. 하지만 리비아와 미국은 2003년 12월 핵무기 프로그램 폐기에 전격 합의했고 이후 관계개선을 거쳐 2006년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하며 외교관계를 전면 정상화했다. 혹시 1980년대 한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출동 에어울프’라는 미국 드라마를 아시는지. 그 드라마 첫 회에 보면 에어울프 제작에 참여한 어떤 미치광이 박사가 에어울프를 탈취해 향하는 곳이 바로 리비아다. 그는 그곳에서 미녀들에 둘러싸여 미친 짓을 서슴지 않고 미군 함정을 공격해 침몰시키기도 한다. 카다피를 바라보는 미국인의 시선이 그대로 녹아있다. 독재와 인권탄압에 대한 비판은 또 얼마나 많이 받았던가. 하지만 관계정상화 이후 미국에서 카다피 비판은 사라져 버렸다. 미국 정부는 입을 무아마르 알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 사진 출처 - 서울신문 싹 씻고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이 리비아를 방문하기도 했다. 그 뒤를 이어 숱한 미국계 석유기업들이 리비아로 몰려들었다. 부족들 간의 알력을 이용하고 석유와 천연가스 수출 이익을 독차지하는 통치행태는 결국 민중들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쳤다. 이제 카다피는 사실상 트리폴리와 그 지역 일부만 지배하는 일개 군벌로 전락했다. 지난달 26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카다피와 일가, 측근들 16명을 여행금지 대상자로 지목했다. 향후 안보리 결의가 있으면 국제형사재판소(ICC) 전범재판에 회부될 수도 있다. 흥미로운 점은 카다피 본인을 뺀 15명 가운데 카다피 친인척이 아닌 인사는 5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카다피가 얼마나 카다피 일족을 중심으로 한 전근대적인 독재정권이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장남 무하마드(41) 리비아 올림픽위원장, 3남 사아디(38) 리비아 축구협회장 겸 특수부대 사령관, 7남 사이프 알아랍(29)을 빼고는 역시 자산동결 대상에 올랐다. 차남 사이프 알이슬람(39) 국제 카다피 자선·개발 재단 이사장은 여러 차례 공개연설을 통해 시위대를 겨냥한 폭력행위를 부추겼다. 5남 무아타심(35) 국가안보보좌관과 6남 카미스(33) 32여단 사령관은 유혈 시위진압을 주동했다. 사이드 모하메드 카다피 알담(63)은 카다피의 사촌이다. 유엔 안보리에 따르면 그는 1980년대 암살단에 관여했으며 여러 암살사건의 용의자이기도 하다. 압둘라 알세누시(62) 군 정보부장(대령)도 카다피와 동서지간이다. 카다피는 최근 외신 인터뷰를 통해 리비아는 평온하다거나 리비아 국민들이 모두 자기를 사랑한다거나 하는 망발을 일삼아 또 한 번 비웃음을 샀다. 그는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 극단적 자기애에 빠지면 그리 될 수도 있다고 한다. 서울신문 보도에 따르면 홍진표 서울아산병원 정신과 교수는 “성공한 사람들 중 일부에서 나타나는 자기애성 성격장애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자신에 대한 과장된 평가를 바탕으로 특권의식 아래 타인에게 착취적인 행동을 하는 병이다. 물론 망상이 아니라 치밀한 계산에서 나온 것이란 분석도 있다. 경찰대 범죄심리학과 표창원 교수는 미국 방송과 인터뷰를 하거나 ‘오바마는 좋은 사람’이라고 치켜세우는 것에서 볼 때 막다른 골목에서 미국에 타협을 타진하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누구라도 카다피처럼 될 수 있다.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오만과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는 자만, ‘이 나라를 신(神)께 봉헌하겠다’는 망상만 있으면 권력이라는 사카린 한 숟가락으로도 충분하다. 그런 면에서 카다피는 팀플레이가 아니라 개인기로만 골을 넣으려다 공 뺏기고 나면 도와주는 선수가 없어서 힘들다고 푸념하는 어떤 축구선수를 떠올리게 한다. 우리에겐 안해본게 없는 경험 많은 지도자보다는 개인의 한계를 절감하며 제도와 시스템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지도자가 필요하니까 말이다. 그것이 바로 하루에도 몇번씩 속으로 ‘뒈져라 카다피’를 외치는 와중에 그에게서 얻어낼 수 있는 반면교사가 아닐까 싶다. 뱀다리(蛇足): 이슬람에서 유일신으로 숭배한다는 ‘알라’란 말 그대로 ‘신’을 뜻한다. 그러므로 알라신이란 말은 ‘역전앞’처럼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또한 코란은 아브라함부터 다윗, 솔로몬, 성모 마리아, 독생자 예수(그의 부활까지) 모두 선지자로 인정하고 그들을 보내주신 신(=알라)를 경배한다. 그러니 카다피가 이슬람국가를 세운다고 했던 것이나 온 세상을 ‘교회 천국’ 만드느라 불철주야 노력하는 한국의 ‘일부’ 목사들이나 내 눈엔 똑같이 보일 뿐이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304 | 추천: 0
임아연/ 한밭대 학생   '필리핀 마닐라에서 생활한지 어느덧 6개월이 지났다.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필리핀의 상황은 생각보다 더 열악했다. 아니 어떤 면에선 끔찍했다. 필리핀 번화가(특히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 지역에) 어디에나 퍼져있는 성매매부터 시작해, 한국 사회에선 거의 보기 드문 가족노숙까지. 그로 인해 방치되고 학대받는 아이들은 <긴급출동 SOS>에나 나올 법한 모습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이런 상황들이 사람들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여질 만큼 흔한 모습이기도 했다. 그러나 함부로 말을 꺼내놓기 어려웠던 건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듯, 짧은 시간동안 겪은, 혹은 보고 들은 모습으로 한 사회를 함부로 속단하는 우를 범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러한 내 생각이 한 나라를 규정하는 또 하나의 이미지가 되어 사람들에게 '필리핀? 그럼 그렇지' 하는 식으로 회자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들을 만나려고 했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려 했다. 또 내가 살고 있는 마닐라의 모습이 곧 필리핀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위해 많은 곳을 여행하고자 했다. 그런 노력덕분인지 내가 생각해오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필리핀의 모습들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야 그동안 내가 겪은 이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조심스레 꺼내 놓는다. '한국은 이런데 여긴 왜이래?'라는 생각을 가져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필리핀과 대한민국, 그 두 사회가 엇비슷하게 공유하고 있는 모습들이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너무 쉽게 얕잡아 보던, 흔히 '후진국' 이라고 말하는 한 사회의 문제를 우리도 고스란히 안고 있었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래도 우리가 좀 낫지' 하는 식으로 자위하기엔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며칠 후면 한국의 대학들은 새 학년도 새 학기 개강이겠다. 듣자하니 올해도 서울대를 비롯한 여러 대학들에서 등록금을 동결했다고 한다. 이 소식에 가슴을 쓸어내리기엔 속이 좀 쓰리다. 동결됐다 하더라도 이미 대학의 문턱이 높다. 아니 대학 '등록'의 문턱이 너무 높다. 사실 진부한 이야기다. 그러나 다시금 또 이야기를 꺼내는 건 '아무나' 교육 받을 수 없는 이곳의 현실을 보면서 대한민국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전국등록금네트워크와 한국대학생연합 회원들이 지난 2월 24일 서울 청운동주민센터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명박 정부의 ‘반값 등록금’ 공약 이행을 촉구하고 있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혹자는 한국이 빠른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요인으로 높은 교육열과 교육 수준을 꼽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개천에서 용' 나는 방법은 교육 뿐 이라는 게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이 곳 사정을 보면 더 와 닿는다. 그나마 개발도상국 중에서도 교육수준이 나은 편이라는 필리핀 역시 교육비가 여간 비싼 게 아니라서 웬만큼 '사는 집', 혹은 웬만한 열의가 아니고서야 대학 교육을 받기가 쉽지 않다. 특히 거의 모든 대학과 교육기관이 밀집해 있는 마닐라에서 조금만 떨어져 살아도 태어난 곳이 한 사람의 미래를 결정짓는 일이 흔하다. 예컨대 바다에서 방카 보트를 운전하는 아버지 밑에 태어난 8살짜리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배를 타면서 그 일을 계속한다든지, 관광객에게 말을 태우는 일이 전부인 곳에서 어렸을 때부터 마부로 길러져 왔다든지. 그들은 자신들의 직업에 대해 내게 이렇게 말했다. "There is no choice.(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이렇게 단편적인 사실들만 보아도 교육이 한 사람의 삶을 결정짓는데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두 말 할 나위가 없다. 이제 한국 사회를 들여다보자. '서울대'와 '서울에 있는 대학', 그리고 '서울 밖에 있는 대학'과 같은 출신성분에 따른 직업선택의 차이, 아니 차별은 차치하고서라도, 대학의 이름과 상관없이 마냥 높기만 한 대학 등록금은 대학생들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간다. 누군가는 노래방 도우미를 한다고 하고, 누군가는 호스트바에 나간다고 하는 이야기들은 더 이상 신문지면 안의 뉴스가 아니라 내 주변의 이야기가 돼버렸다. 지금 한국사회의 대학 교육에 대해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지만, 적어도 지식과 진리를 구할 기회가 박탈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일 수 있겠으나, 비싼 등록금은 대학생들이 아르바이트와 취업, 스펙에 목매달게 하는 하나의 요인이 되어 있다. 대학이 학생들의 정신을 풍요롭게 하기는커녕 외려 피폐하게 만들어, 대학은 '무식한 대학생'을 키워 내고 학생들은 또 등록금을 걱정하면서 돈을 버는 악순환을 반복한다. 그 지독한 고리를 끊어낼 칼자루를 쥔 정부는 임기 3년이 지나도록 대학 등록금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어 보인다. 학생들은 매년 반복되는 협상 아닌 협상에 지쳐가고, 변함없는 상황에 그들의 관심도 점점 사그라졌다. 체념하듯 현실에 수긍하며 살아간다. '큰 배움' 없는 대학에서 그저 비싼 등록금 영수증 같은 졸업장만 손에 넣는다. 공부, 혹은 배움이 한 사람의 인생을 넘어 우리사회의 변화를 이끌어 내고 있는 것일까? 아예 대학 문턱 조차 넘기 힘든 필리핀의 상황과 무엇이 더 낫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필리핀에서 부끄러운 한국 사회의 자화상을 들여다 볼 일이 많아졌다. 한국에 있을 때보다 조금은 객관적으로 한국 사회를 관찰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자꾸 이러면 안되는데…'하는 조바심이 생긴다. 그저 외면해 버리기엔 먼 이야기가 아니라서, 특히 교육 없인 정말로 희망이 없을 것만 같아서 부질없이 조급증만 커져간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304 | 추천: 0
손상훈/ 종교자유정책연구원 상담위원 존경받아야 할 분들이 많아야 행복한 세상이 된다. 새해에는 ‘자유와 평화’가 넘쳐나고 자신의 위치에서 양심과 인권이 편안하게 펼쳐지는 사회가 되기를 희망한다. 사법부를 대표하는 대법원장도 특정 종교모임에서만 존경받지 않고, 국민에게 감동을 주는 ‘소신과 원칙’이 강물처럼 흘러나가길 ‘애교’있게 권고해 본다. 세금을 꼬박 꼬박 내고 있는 시민의 한 사람이지만 자격이 있는지 스스로 살펴보면서 함께 고민해 보았으면 좋겠다. 평소 다른 사람의 인권을 이해하고 공감이 부족한 내게 ‘인권감수성’이란 단어는 때론 도전적이고 불편하기도 하다. 그러나 인권 현실을 공부하다 보면 ‘한마디’로 압축해 주는 말이기도 하다. 대법원장의 인권감수성을 도마 위에 올려 놓은 불손함을 저지른다고 해도 ‘애교’로 봐주실 것 같아 덕담을 드리고자 한다. 이미 아시는 분들도 많다. 보도에 따르면 한나라당 황우여 의원은 “대통령을 모신 국가조찬기도회에서 대법관에게 기도를 부탁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며 “대법관 제청권을 가진 이용훈 대법원장에게 투정도 부려봤다”고 말했다. 이어 “가능하면 모든 대법관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이들이길 바란다”고 말했다. 황 의원은 자신의 발언에 대해 "내가 (조찬기도회장) 해보니까 그런 것(기독 대법관)이 없어서, 법원 측에 그런 투정을 했다는 것도 내가 선배니까…. 법원이 내 고향, 친정 아니예요? 그러니까 그런 취지로 내가 애교 있게, 즉흥 연설이니까 그렇게 표현한 것이지"라며 문제될 게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이 자리에 계셨던 대법원장은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져 야당이나 시민, 종교단체까지 나서서 사회적 논란이 되었으나 현 대법원장은 아무런 의견이 없으시다. 침묵은 금이라서 아니면, 개인적이고 사적인 종교모임이었기 때문일까. 여기에서 대법원장의 인권감수성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판사 출신인 황우여 한나라당 의원(4선·인천시 연수)이 “가능하면 모든 대법관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이들이길 바란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져 종교 편향 논란을 낳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이용훈 대법원장은 1월1일자 신년사에서 “새해에도 더 낮은 자세로 국민과 소통하면서 국민의 시각에 맞추어 변화와 혁신을 지속적으로 이루어 나가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하며, 국민의 고통과 아픔을 치료하고 어루만져 줄 수 있는 재판다운 재판을 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국민이 감동하는 사법부를 만들어 가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따뜻한 격려와 엄중한 질책을 아끼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년사와 특정종교모임의 내용은 사뭇 다르다. 사적인 자리이고 대법원장 개인의 종교자유도 보장되어야 하지만, 속담에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했다. 신년을 맞이하는 평범한 시민이나 국민의 48%를 차지하는 무종교인 국민에게 신뢰받을 만한 ‘침묵’인지 의문이다. 당당한 대법원장의 ‘소신’을 펼쳐 보이길 기대하는 하는 이유가 있다. 이 대법원장은 지난 2010년 7월2일 가인 김병로 선생을 기념하는 가인연수원 개관 치사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출처 : 대법원 홈페이지) “가인 선생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초대 대법원장으로 9년여 동안 재직하시면서 법치주의의 근간이 되는 사법부 독립의 기틀을 마련하셨고, 대내외적으로 줄곧 사법부의 엄정한 독립을 천명하셨고, 법관들에게도 항상 다른 사람의 어떠한 간섭도 배격하고 법관 자신의 양심에 따라 재판할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선생께서는 만사에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홀로 있을 때도 몸을 삼간다는 뜻의 '계구신독(戒懼愼獨)'을 좌우명으로 삼고 평생 절제되고 검소한 삶을 사셨습니다. 공직에 계실 때에도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하여 일을 처리하셨다”고 밝혔다. 또한, 이 대법원장은 “선생께서는 사법부 구성원에게도 인격 수양과 청렴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는데, ‘법관으로서의 청렴한 본분을 지킬 수 없다고 생각될 때는 사법부를 용감히 떠나라’고까지 말씀하실 정도였습니다. 우리 사법부는 아직도 많은 국민들로부터 더 높은 수준의 청렴성 및 공정성에 관한 요구를 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 선생의 가르침은 사법부 구성원 모두에게 귀중한 경구이자 채찍질이 될 것입니다.”고 치사에게 언급하고 있다. 이 대법원장은 치사와 신년사에서 언급한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하고, 국민의 아픔을 치유하는 사법부가 되도록 국민의 엄중한 질책’을 받겠다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 황 의원의 ‘애교’에는 납득할만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사법부를 대표하는 이 대법원장이 국민으로부터 존경받고 무종교인들의 기본 인권을 생각한다면 초대 대법원장의 원칙을 지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같은 종교를 믿는 사람들만의 자리에서 ‘애교로 한 덕담’을 한 어느 국회의원의 ‘말’에 대법원장은 침묵하고 있다. 국민들이 납득할 만한 이야기를 했지만 미처 못 듣고 있는지도 모르고, 새로 추천해야 할 대법관 자리가 여럿이라 고민할 상황이기도 하겠지만 ‘소신과 원칙’으로 대답해 주길 바라면서 ‘신년 덕담’을 해본다. 법관들의 모범이 되어야 할 대법원장의 ‘인권감수성의 잣대’를 어디서 찾아야 할까.
2017-07-12 | hrights | 조회: 317 | 추천: 0
이동화/ 민변 국제연대위 간사 개인적으로 소셜 네트워크라는 것에 시큰둥하다. 싸이월드도 안하고 트위터도 개설만 해 놓고, 그나마 페이스북만 지금 단체에서 활동하기 전에 사귄 외국의 친구들의 성화로 4년 전 즈음에 개설 해놓고, 가끔 외국친구들의 근황을 알기 위해 들어 가 보는 정도였다. 근데 요즘 이 소셜 네트워크가 난리다. 특히 트위터하고 페이스북은 완전 붐이다. 그리고 그 위력 또한 대단하다. 최근에 나도 페이스북의 위력을 실감했던 사건이 하나있었다. 평소 때처럼 잘 들어가지 않는 페이스북에 별 생각 없이 들어갔는데, 낯익은 이름 하나가 친구를 신청하여 왔다. 쉐이마 하심, 내가 2003년 중순경에 이라크에서 반전평화팀 일원으로 있을 때 바그다드 빈민지역 알 마시텔 놀이방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던, 개인적으로도 친하게 지냈던 여성 선생님의 이름과 같은 이름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친구수락을 하였더니 그리 오래지 않아 그쪽에게서 대화를 신청하여왔다. 당시 일과 중이라 여유가 있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기대반 의혹반이어서 대화를 시작하였는데, 맙소사! 2003년 이후에 연락이 끊어졌던 이라크 바그다드 알 마시텔 놀이방의 그 선생님이었다. 정말 깜짝 놀랐고 너무나 반가웠다. 운이 좋게도 페이스북 상의 내 이름은 이전 외국 친구들을 위해서 영어 이름으로 적혀있어서 그 선생님은 어렵지 않게 나를 찾았다고 했다. 난 바그다드에서 어떻게 페이스북을 통해서 나를 찾을 수 있을까 생각도 했다. 참고로 지금은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내 기억속 2003년도 당시의 이라크 바그다드의 상황은 이메일 한통 보내기 위해서 시내 한복판으로 나와서 비싼 돈을 지불해야만 하고, 컴퓨터도 굉장히 열악하였다. 반가움과 흥분을 감추며 대화를 진행하였다. 그 선생님은 당시에도 바그다드의 주요한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인재였으며, 영어도 능숙하였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변화된 개인상황에 대해서도 주고받으면서 나는 아주 당연한 듯이 요즘의 바그다드 상황을 물었다. 그랬더니 그 선생님은 현재 자신이 미국 마이애미에 있다고 했다. 갑자기 바그다드에서 마이애미로 이동한 그 이유가 궁금하여 물었더니, 상황은 이러했다. 이라크자살폭탄공격사진 사진 출처 - 신화통신 아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후, 이라크 내부는 극심한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 혼란은 전쟁을 주도했던 미군조차도 컨트롤 할 수없는 극한의 불안정 상태로 진행되었고, 2005년 2006년이 되면서 이라크 내 종파간 지역 간 가족간 극한 갈등상황으로 치달았다. 당시 매일 종파간 분쟁으로 수십, 수백명씩 죽어가고, 서로가 복수를 다짐하며 상대편에 무력을 행사하며 누구도 믿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2005년 초반에 결혼을 한 그 선생님 집안도 위험이 닥치기 시작했다. 특히 남편의 집안이 종파간 분쟁에 휩싸이면서 그 선생님과 그 가족은 신변에 큰 위험이 닥쳤고, 그들은 무작정 바그다드를 떠났다고 한다. 그리고 몇 년간 정처 없이 인근 국가를 떠돌다가 미국에 난민신청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 선생님은 현재 난민이 되어 2년 전 2008년부터 미국에 체류하고 있다고 했다. 놀라움에 미국에서의 생활을 물었다. 그 선생님은 거의 2년간 집에서 아이들만 키우고 있었고, 그 남편은 얼마 전부터 어디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어려움을 내비치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인 나에게 자신의 지난 몇 년간의 과거를 담담히 이야기하는 그 선생님의 모습에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을지 짐작이 가서 마음이 먹먹했다. 그 선생님은 조만간 자신도 외부생활을 하고 싶고, 공부도 더 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고향 이라크의 모든 것이, 이라크에 두고 온 가족들이 그립다고 했다. 그러면서 또 계속 이야기 하자고 했다. 요즘 그 선생님과는 페이스북의 열렬한 친구가 되었다. 이전에도 몇 차례 이 공간을 통해서 언급한 바가 있었는데, 2006년 말까지 이라크 전쟁과 점령으로 인하여 이라크 인근 국가인 요르단과 시리아, 이란, 사우디아라비아에는 수백만의 이라크 난민들이 거주하고 있고, 이라크 내부에도 수백만 명의 내부난민들이 존재했었다. 그리고 2005년 2006년 내가 요르단에 있을 때 나와 함께 지냈던 분들도 이라크 난민 가족이었다. 2003년 초반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은 미국의 이라크 전쟁을 반대했으며, 2004년 한국 사회는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으로 격렬히 갈등하였으며, 2008년말 한국군은 이라크에서 철수한다. 그리고 2010년 미국도 이라크에서 전투 병력을 철군시키고 있다. 그리고 2011년 오늘 페이스북을 통해서 나의 2003년 친구는 난민이 되어 이라크가 아닌 미국에서 2011년 자신의 이야기를 전해왔다. 그리고 아마도 이 전쟁과 점령으로 인하여 수백만의 이라크 난민은 지금 자신의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2003년도 이전을 그리워하며...
2017-07-12 | hrights | 조회: 299 | 추천: 0
전국완/ 중학교 교사   한 해를 마치면서 겨울방학 즈음이면 연례행사처럼 온몸이 아프곤 했었다. 에너지가 소진되었음을 알리는 방학증후군이랄까. 그런데 올해는 그 놈의 행사가 유난히 요란한 것이 근 한 달이나 약을 달고 살았다. 약에 취해 해롱거리면서 제야의 종소리를 듣게 되다 보니 요란하게 소리치며 새해를 향한 카운트다운을 해대는 TV 속 군중들의 모습이 너무도 생뚱맞아 보였다. 저들은 밝아오는 새해에 대해 어떤 희망을 가지고 있는가. ‘몸살’ 앓으랴, 학년말 업무하랴 정신없이 지내고 있는데, 전에 없이 여기저기서 인권연수 듣자는 연락이 오고 부랴부랴 마감직전에 연수신청을 하고는 참가하게 되었다. 와서 보니 왜 이리 아는 얼굴들이 많은지, 지금까지 들은 인권연수 중 제일 많은 ‘우리’들이 모인 것 같다. 이들을 보며 반갑기도 했지만, 한편 우리 모두 심각한 위기감에 몰려 발길이 모아진 것이 아닌가 싶다. 시험 때마다 스트레스로 유리창을 깨는 아이들의 유혈이 낭자한 주먹을 보는 일, 지역교육지원청의 채근 탓인지 재학생들로도 성이 차지 않아 인근 초등학생들마저 방과후 수업으로 끌어들여 방과후수업의 새 역사(?)를 여는 중학교, 그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불경기인 지금도 연일 매출액을 경신하고 있는 사교육비에 삶이 파탄 날 지경인 서민들, 막대한 국민혈세를 지원받으면서도 가르치는 일보다는 우수학생 선점에만 혈안이 되어 고등학교 중학교 교육을 황폐화시키고 있는 대학들, 사교육비에다 천만 원이 넘는 대학등록금 탓에 더 이상 개천에서는 용이 날 수 없는 세상,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그 속에서 절대 다수의 시민을 ‘루저’로 전락시키는 괴물인 경쟁과 물신주의……. 이런 비교육적인 시스템의 개선을 요구하는 교사들의 시국선언을 불법적인 정치행동으로 매도하여 범법자로 만드는 정권, 여당의원에게 수백만 원을 후원한 교장은 놔두고 야당후보에게 몇 만원의 후원금을 건넨 전교조교사들은 무더기로 해고하려는 정권과 검찰의 후안무치,……. 기득권층의 이익만을 대변해 온 골수보수언론들이 무더기로 종편채널권자로 선정되는 현실, 도심 한복판에서 무자비한 철거에 저항한 서민들이 폭도로 몰려 불타 죽고, 비정규직 노동자의 목숨을 건 절규가 메아리 없이 스러지는 곳,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75만원에서 1만원 올려달라는 청소부아주머니들의 요구에 해고로 답하는 대학이 있는 나라, 노조 가입했다고 매값 운운하며 야구방망이로 근로자를 패는 CEO가 있는 나라, 어린애들과 장애인 밥그릇 빼앗아서 삽질에 쏟아 붓는 나라, 정권비판하면 언론이든 국민이든 고소고발로 응수하는 무시무시한 나라, 대를 이어 군대 면제받은 사람들이 전쟁부추기는 나라, 그리고 이렇게 속은 곪아 터져서 문드러지고 있는데, ‘G20회의’ 개최를 떠벌이며 ‘국격 향상’ 운운하는 대통령이 있는 나라……. 어느 쪽을 둘러봐도 절망적이다. 이제는 누구를 탓하고 비난할 기력도 없다. 지지율 50%에 한껏 고무되어 있는 대통령과 정부여당, 보수언론, 이 사회의 기득권층. 그들은 모두 벽창호들이다. 아니, 우리의 외침에 설득당할 가슴을 지니고 있지도 않다. 너무나도 야만적이고 폭력적인데다가 점점 가속이 붙어버린 이 ‘몰상식’과 ‘파렴치’의 급류에 자칫하면 나도 쓸려갈 수도 있겠다는, 아니 이미 쓸려가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무언가 붙들고 싶어졌던 것 같다. 나름 씩씩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했던 친구들도 이런 나와 비슷한 마음으로 연수에 참가했지 싶다. 강의를 들으면서 우리가 기대했던 ‘희망’의 전조는 찾을 수 없었다. 이 정권을 택한 건 천박한 물신주의와 이기주의의 포로가 된 우리 스스로였다는 통렬한 자책밖에는. 1월 3일자 한겨레신문에 실린 박노자 교수의 칼럼 <‘착한 우리’에 대한 환상 깨기>에서 소중한 힌트를 얻기로 한다. ‘…… 권력자들도 오로지 당장의 사리사욕을 좇고, 대중들도 ‘성공’만 한다면 파렴치한 모리배를 ‘존경하는 기업인’으로 볼 준비가 돼 있는 사회에서는, 권력자들에게의 직간(直諫)이나 그들에 대한 도덕적 비판은 의미가 없다. 우리에게 도덕이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훨씬 더 의미 있는 일은, 모리배들이 매체를 통해 유포하는 환상에 넘어가고 마는 대중들에게 혹은 대중들에 대해서 바른말을 하는 것이다.…… 이윤만 알고 정의를 모르는 국가인 대한민국을 뒷받침해주고 있는, 경쟁과 착취에 길들여진 유순한 노예인 우리들의 실제적 상황에 대한 바른말이 대중화돼야 노예상태로부터의 탈출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경쟁만능의 기조 속에서 각자가 힘없는 개체로서의 삶을 꾸려가느라 일상이 버겁겠지만, 결국 ‘희망’은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는 ‘우리라는 존재 자체’일 수밖에 없다는 어느 강사님의 말씀이 현재로선 최선의 답일 듯싶다. 이번 연수를 통해서 우리 각자가 ‘혼자’가 아닌 ‘함께’라는 것을 밑천 삼아 작은 일부터 실천하는 것이 희망을 만드는 일이리라. 보수언론들에 힘겹게 맞서고 있는 진보언론매체 하나 더 구독하고, 나아가 부모님이나 형제에게 구독시키자. 자신들이 기득권층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이들이 계급정체성을 찾을 수 있도록. 그리고 여러 강사분이 말씀하신 책읽기 모임을 꼭 시작하자. 우리들이 외면하거나 보지 못했던 불편한 진실들을 ‘아는 것’만으로도 힘이 될 수 있으리라. 그래서 저들이 감히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짓을 하지 못하도록. 그리고 지난할 수밖에 없는 노정 중에 계속 깨어있기 위해서라도. 해가 갈수록 심해지는 현상이지만, 지난해 끄트머리에서 겪어낸 ‘몸살’에 대한 의사의 진단은 ‘과도한 스트레스’에서 온 것이다. 매일 매일의 스트레스가 해결되지 못한 채 누적된 결과, 몸의 저항력이 떨어져 체내 모든 기관들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 몸의 건강한 순환을 위해서 지금이라도 무력감으로 인한 우울과 스트레스 알갱이들이 암덩이로 또아리를 틀고 들어앉아 세포증식을 통해 몸 전체를 잠식하지 못하도록 서둘러 해체작업을 시작해야겠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312 | 추천: 0
이광열/ 구속노동자후원회 사무국장 지난 12월 16일, 대법원은 박정희 정권이 1975년에 발동한 ‘긴급조치 1호’의 ‘허위 사실 유포’ 부분에 대해 위헌판결을 내렸다. 한편 헌법재판소도 12월 28일 인터넷 경제논객 ‘미네르바’와 촛불집회 참가자들을 구속시킨 ‘인터넷 시대 긴급조치법’인 전기통신기본법 제47조에 대해 위헌판결을 내렸다. 표현의 자유를 옹호한 두 판례를 통해 우리는 이명박 정권과 박정희 정권의 비슷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뒤늦게나마 국가권력의 한 축인 사법부가 과거의 잘못을 일부 인정하고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준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국가보안법을 비롯해 사상·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악법들은 곳곳에 널려 있다. 2010년 12월 28일 헌법재판소(소장 이강국)는 ‘공익을 해할 목적으로 전기통신설비에 의해 공연히 허위의 통신을 한 사람에게 5년 이하의 징역이나 5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한 전기통신기본법 제47조 1항에 대한 헌법소원 사건 심판에서 재판관 7(위헌) 대 2(합헌) 의견으로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전기통신기본법 제47조 1항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헌법소원을 냈던 ‘미네르바’ 박대성씨(오른쪽) 사진 출처 - 한겨레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에서 “의견의 발표를 억누르게 할 때 나타나는 특유한 해악은 그것이 전 인류의 행복을 빼앗는 점에 있다.”고 했다. 사상과 토론의 자유에 대한 완전한 보장은 밀이 제시한 자유민주주의의 핵심 원칙이다. 그런데도, 국가 권력자들이 집요하게 이를 탄압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행위다. 그럼으로써 기득권 세력은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노동자·서민들의 생존권을 빼앗아, 엄청난 경제적 이익과 함께 법 위에 군림하는 특권까지도 누리게 된다. 지난 11월 28일, MBC ‘시사매거진 2580’에서 SK 재벌가 2세 최철원이 고용 승계를 요구하며 회사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던 화물연대 조합원을 야구방망이로 폭행하고 매 값으로 2천만 원을 던져 준, 충격적인 만행이 폭로되었다. 다른 사람을 함부로 때리면 엄중하게 처벌받을 수 있는 ‘법치국가’에서 어떻게 간 크게도 그런 범죄행위를 거리낌 없이 저지를 수 있었을까? 노동자나 서민들이 사소하게 법을 어기면 엄히 처벌하는 검찰과 사법부가 ‘가진 자’들이 저지르는 심각한 범죄 행위에는 ‘국가 경제 공헌’ 운운하며 불기소, 솜방망이 처벌, 특별사면을 남발한데 큰 원인이 있다. 구속노동자후원회가 조사·집계한 바에 따르면 이명박 정권 아래서 정당한 노조 활동, 파업·집회 같은 집단행동으로 구속된 노동자는 385명에 이른다(외국인 보호소에 장기 수감된 이주노동자들은 정확히 수치를 파악할 수 없어 포함시키지 않았다. 이들을 포함하면 수치는 훨씬 더 커질 것이다). ‘촛불항쟁’이 전국으로 퍼지던 2008년도에 140명의 노동자가 구속되었고, 용산참사, 쌍용차 점거 파업이 일어난 2009년도엔 214명, 노동자 투쟁이 다소 잠잠했던 2010년에는 31명이 구속되었다. 얼핏 수치만 견주어 보면 김대중, 노무현 때보다 노동 탄압이 줄어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촛불항쟁’, ‘용산참사’, ‘쌍용차 점거 파업’에서 볼 수 있듯이 이명박 정권은 대중에게 공포감을 심어주기 위해, 어떤 정권보다도 잔인하고 집요하게 노동자·민중 투쟁을 탄압했다. 불법 민간 사찰과 도·감청이 기승을 부리면서 2003년 이후 줄어들던 ‘공안’(국가보안법. 형법상 내란·외환죄 등) 및 ‘공안 관련’ 사건(집시법, 노동관계법 들) 기소율이 이 정부 들어 50퍼센트를 넘어섰고, 전체 양심수도 계속 늘고 있다(<경향신문> 2010년 10월 13일자) 하지만 정권과 자본의 집요한 탄압 속에서도 한진중공업, 기륭전자, 동희오토,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전주 버스 노동자 파업 등 2010년 한 해 동안 곳곳에서 불완전 고용과 정리 해고로 벼랑 끝에 내몰린 노동자들의 절박한 투쟁이 터져 나오면서 대중적 지지를 받았고 값진 승리를 일구어 냈다. 이명박 정권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투쟁을 억누르기 위해 검찰과 경찰을 동원해 노동자들을 싹쓸이 연행하고 구속하려 했지만, 노동자 투쟁에 대한 지지와 더불어 갈수록 번져가고 있는 대중들의 ‘반MB 정서’ 때문에 법원이 나서서 이를 말리는 형국까지 됐다. 혁명가 트로츠키도 말했듯이 민주주의는 추상적인 법조문보다는 ‘살아 움직이는 세력들의 투쟁’에 의해 좌우된다. 노동력을 팔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노동자들이 인간다운 노동조건을 보장받기 위해, 노동조합을 만들어 활동하는 것이 ‘보편적 인권’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건 100년이 넘었다. 하지만 세계 곳곳에서 노동자들의 권리는 여전히 짓밟히고 있고, 민주주의는 노동과 자본의 세력 관계에 따라 부침을 거듭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이 자신의 양심에 따라 권리를 행사했다는 이유로 극심한 탄압을 받는 건 따지고 보면 지배자들과 사상과 견해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 추운 날 노동자들은 무엇 때문에 희생을 감수하면서 파업이나 시위, 심지어 아찔한 철탑위에서 동상에 걸려가며 처절하게 농성을 벌이고 있는 걸까? 단순히 먹고사는 문제를 떠나,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가진 자’들과 동등한 인간으로서 대접받기 위해서다. 똑같이 한 표를 행사하는 유권자지만 안정적인 일자리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열악한 처지에서는 법 앞의 평등, 권리의 평등은 고사하고 평생 노예 같은 삶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삼성, 현대차 같은 기업체 사장들과 그들의 수족 노릇을 하는 정부 기관들은 그 때마다 얼굴을 부라리며 노동자들의 집단적인 의사표현을 ‘불법’으로 몰아간다. 대중에게 ‘경제 살리기’, ‘국가 경쟁력 강화’라는 해묵은 이데올로기를 우려먹이며 ‘귀족 노동자’와 ‘서민 노동자’로 편 가르고, 마지막에는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는 노동자들에게 ‘범법자’, ‘폭력 전과자’라는 낙인을 찍어 감옥에 보낸다. 구속노동자는 첨단 과학기술 문명을 자랑하는 자본주의 사회에 짙게 드리워진 야만의 그늘을 상징하는 이름이다. 신묘년 새해, 노동자와 억압받는 사람들이 지배자들의 인권 탄압에 맞서 함께 분노하고 투쟁하면서, 야만의 그늘을 걷어내고 진정한 민주주의 세상을 꽃 피울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원한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325 | 추천: 0
허창영/ 전남대 공익인권법센터 연구원, 전임 간사 좀 지난일이기는 하지만 시사주간지인 <시사인> 제162호(10월 23일)에 우울한 기사가 하나 실렸었다. ‘집이 가난하면 꿈도 가난하다’는 기사였다. 민주노동당 권영길 의원실의 보고서를 기초로 한 이 기사에서는 서울 강남, 서초, 송파구와 관악, 구로, 금천구 초·중·고 아이들의 꿈을 비교했더니 가난하면 꿈도 가난하다는 분석결과를 내놓았다. 강남 3구의 아이들은 의료인, 법조인, 학자 등 사회지배계층에 대한 선호도가 높았는데, 관악, 구로, 금천구 아이들은 직업안정성이 높은 교사, 회사원, 공무원 등에 대한 선호가 높게 나타났다. 이러한 현상은 고등학교로 갈수록 확연했다. 사회양극화가 심화되고, 부의 편중이 극심해진 사회구조에서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옛말이 되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아이들의 꿈마저 양극화라는 사실은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물론 직업에 귀천이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어떤 직업이 더 좋은 직업이라고 얘기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기업의 세습, 엘리트 집안의 대물림 등 ‘왕후장상의 씨앗’이 굳어져가는 현실이 아이들의 상상력까지 지배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 우울한 일이다. 얼마 전 북한의 권력세습이 한참 도마에 올랐었다. 남한의 시민사회단체들은 ‘사회주의에 대한 중대한 배신’이라며 이례적으로 강력한 비난성명을 내놓았고, 정당들도 너나없이 비판하고 나섰다. 보수정치권은 간만에 좋은 안주를 만나 말잔치를 벌였다. 현실적으로 어떻든 간에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국가에서 권력을 세습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민중에 대한 배신임은 부정하기 어렵다. 세살 때부터 총으로 과녁을 명중할 정도로 위대한 능력을 가진 것이 사실이라고 해서 권좌에 오를 정당성을 확인해주지는 않는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북한만 비판한 일은 아니다. 사실 북한의 3대 세습은 이제야 구체적인 사실로 확인된 것일 뿐 우리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일이다. 당연히 비판해야 할 일이지만 호들갑을 떨 일은 아니라는 얘기다. 그보다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세습부터 차단해야 하지 않겠는가. 재벌의 2세 경영 등 부의 대물림, 의사 집안에서 의사가 나오는 우리 안에서의 세습을 막아야 한다. 물론 간단치 않다. 세상을 확 뒤집지 않고 이를 가능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이 쉽게 생각나지 않는다. 그런데 운동 또한 조금씩 가능한 변화를 꿈꾸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면 우리 안에서 가능한 방법으로 접근하면 된다. 이와 관련해 사회권 또한 사법심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사회권은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를 이르는 말로 흔히 사회적 생존권으로 표현되는 권리이다. 좀 더 쉽게 얘기하자면 노동, 교육, 주거, 건강 등 사회복지로 표현되는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런데 우리사회에서는 이 사회권이 사법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이해하고 있다. 사회권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돈과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법원이 구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입법이나 정책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용산참사와 관련해 철거민들이 주거권 침해를 놓고 국가와 개발업자들을 상대로 소송을 벌일 수 있어야 하지만 우리사회에서는 불가능한 상황이다. 그런데 반대로 법원은 경제적 자유권(재산권 등)을 보호하는 일에는 적극적이다. 파업으로 인한 거액의 손해배상을 인정하고, 기업규제에 대해서 소극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법원도 부자들의 권리에는 민감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에는 무관심한 셈이다. 인권운동의 화살은 바로 이런 지점을 향해야 하지 않을까? 사회권에 대해 소극적인 법원의 태도를 바꾸려는 시도가 시작되어야 한다. 마침 2008년에 UN의 사회권규약 선택의정서도 채택되지 않았던가. 그만큼 사회권 또한 중요한 권리구제의 대상이 된다는 인식이 인류의 보편적 인식으로 확산되고 있는 상황이다. 조효제 교수가 번역한 <인권의 대전환>도 같은 맥락의 주장을 담고 있다. 우리사회에서도 사회권에 대한 침해를 놓고 법정에서 다툼을 벌이는 일이 가능하도록 하는 싸움이 시작되어야 한다. 이를 통해 사회권 또한 당연히 보장되어야 할 권리임이 우리사회에서 확인되고, 사회권의 확장을 통해 양극화의 격차를 조금씩 해소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근본적인 해결방법은 아니다. 그렇지만 아이들에게 가난해서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하는, 아이들의 꿈까지 가난하게 만들지 않도록 하는 작지만 중요한 시작일 수 있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316 | 추천: 0
강국진/ 서울신문 기자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3년간 내세울만한 ‘업적’이 뭐가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한 가지밖에 떠오르질 않는다. 바로 국민들에게 ‘국가재정’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국민들에게 뼈저리게 가르쳐준 은혜다. 개인적으로는 남북한 소득수준을 (하향) 평준화해 통일의 기반을 닦았다는 김영삼 전 대통령에 필적한다. 추위를 이기려 두 주먹 꽉 쥔 우리의 손발을 오그라들게 만든 그들의 예산안 날치기 통과는 국민들에게 또 한 번 엄청난 학습효과를 안겨다주었다. 먼저 간략한 경과를 살펴보자. 이명박 대통령이 2011년도 예산안을 정기국회 회기 종료일인 12월 9일까지 통과시켜달라고 했다. 한나라당은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계수조정소위원회에서 내년도 예산안 계수조정을 마치기도 전에 회의를 중단시켰다. 이주영 예결특위 위원장과 이종구 기획재정위원회 한나라당 간사, 기획재정부 예산실 관계자 등이 함께 밤을 새가며 벼락치기를 했다. 그리고 12월 8일 야당 저항을 뚫고 통과시켰다. 날치기 이후 여러 가지 후폭풍이 불고 있다. 템플스테이 예산 삭감에 책임공방이 벌어지고 영유아 예방접종 지원 사업을 두고 진실공방이 일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보기에 2011년도 예산안을 둘러싼 여러 가지 논쟁 가운데 본질을 가리는 것들이 적지 않다. 또한 본질적인 내용을 외면하기 위해 덜 본질적인 내용만 부각시키는 것들도 있다. 먼저 상황을 이렇게 만든 책임을 거론해야겠다. 책임은 이명박 대통령과 정부에게 있다. 당초에 왜 9일까지 예산안을 통과시켜야 했는지부터 의문이다. 헌법상 어차피 12월 2일 이후엔 위헌사태였다. 지난 8일 예산안을 통과시키고 나서 기획재정부가 내년도 예산안 특징 등을 설명하는 보도 자료를 12일에야 냈다. 덕분에 예산안통과 다음날이면 신문마다 등장하던 ‘새해 이렇게 달라진다’ 기사를 스크랩할 기회를 놓쳐버렸다. 기재부 공무원들이 나흘 동안 얼마나 철야작업을 했을지 상상하는건 어렵지 않다. 9일까지도 국회 홈페이지에선 내년도 예산안 관련 자료를 게시하지 않았고 같은 날 예산전문가 소리를 듣는 민주당 모 보좌관은 아무런 자료도 확보하지 못해 답답해하고 있었다. 상황은 한나라당도 다르지 않았다. 곳곳에서 터지는 지뢰 막기에 급급했다. 졸속행정보단 차라리 뒷북행정이 낫다고 생각하는데 정부와 여당은 속도만 추구하다 사고를 친 셈이다. 조선일보가 11일자 기사 제목으로 뽑은 “몸싸움만 잘했던 ‘무능한 巨與’”는 정확한 지적이다. 지난 8일 오후 국회 본회의장에서 야당 의원들이 한나라당 측의 본회의 진행을 저지하려고 국회의장석을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 민주당 홍영표 의원이 동료의원들의 도움을 받아 의장석을 점거하기 위해 기어오르다 경위들에게 제지당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서울신문 지역구예산 논란은 핵심을 ‘살짝’ 비켜났다 한나라당 안상수 대표는 10일 템플스테이, 재일민단, 춘천~속초 동서고속화철도 세 가지 예산이 누락된 것에 대해 문책 의사까지 밝혔다. 이런 게 바로 전형적인 핵심을 가리는 연막전술이다. 그건 한나라당 대표의 정세분석능력 부족을 반증할 뿐이다. 절차상 문제를 제외하고 예산 자체만 놓고 보면 세 가지 사업 예산을 깎은 것은 문제가 없다고 본다. 일단 템플스테이 지원사업은 예전부터 문제가 많았다. 민단 지원도 감사원 지적을 받았던 사안이다. 전세계 재외동포가 700만명인데 왜 재외동포지원예산의 절반 이상을 민단에 쏟아 부어야 하는지도 의문이다. 춘천~속초 동서고속화철도사업은 국토해양부 타당성 조사에서 부적격 사업 판정을 받았다는데 이런 사업이 예산반영된다면 오히려 그게 더 문제다. 지역구 챙기기 문제도 본질에 ‘살짝’ 비켜 서 있다. 한나라당에서 야당 실세도 예산 많이 챙겼다는 식으로 물타기하려 하는건 언급할 가치가 없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그렇다. 물론 이상득 의원의 형님예산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예산을 쌈짓돈으로 생각한다는 건 국가를 운영할만한 자질을 의심하게 만든다. 지난 3년 동안 이상득 의원 지역구인 포항에 가져간 예산이 1조 1000억 원인데 이건 전형적인 ‘도덕적해이’다. 하지만 역으로 생각해보자. 모든 지역구 의원들은 자기 지역구에 한 푼이라도 예산을 더 많이 배정받도록 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많은 유권자들도 그걸 바라고 투표를 한다. 특히 도로건설 등 각종 토건예산이나 특별교부세, 특별교부금 등이 대상이 된다. 이번 예산안처리가 특히 문제가 되는 건 ‘게임의 규칙’ 자체가 깨져버렸다는 측면도 있다. ‘형님예산’을 규탄하는 한편에선 ‘우리 지역은 홀대받았다.’는 전제가 숨어있다. 지금 같은 소선거구 선거제도에선 국회의원이 사실상 서울에 파견된 지방의원이나 다름없다. 결국 비례대표 대폭확대만이 해법이다. 그럼 예산안 날치기에서 잊지 말아야 할 본질적인 부분은 무엇일까. 가장 먼저 언급하고 싶은 건 정부와 한나라당의 복지의지를 확인할 수 있는 현장이었다는 점이다. 한나라당과 진보신당 사이에 ‘삭감’이 맞냐 틀리냐 논쟁이 있었지만 ‘삭감’이 아니라 깎였다는 표현을 써도 본질은 어차피 마찬가지다. 친서민은 목도리 풀어주는걸로 되는 게 아니다. ‘70% 복지’라는 구호로 되는 것도 아니다. 영유아예방접종사업이나 양육수당 청소년 공부방 예산삭감에서 ‘예산없는 정책은 말대포에 불과하다’는 평범한 진리가 다시 드러난다. 영유아 필수예방접종 사업을 보자. 애초에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정부안이 320억 5600만원이었다. 2010년도 예산 379억 3800만원보다 60억 원 가까이 줄어들었다. 방학중 결식아동 급식 국비지원도 2009년 542억, 올해 203억에서 내년도 예산에선 0원이 됐다. 정부가 복지예산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보다 더 잘 드러나는 사례는 없을 것이다. 한나라당도 다르지 않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에서 여야 합의로 증액시키기로 해놓고도 정작 최종적으로는 정부안을 따라가 버렸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거기에 쓸 돈’이 없는 거다. 보건소 시설 확대에 힘쓰지도 않으면서 보건소 핑계 대는 건 ‘비겁한 변명’일 뿐이다. 정부와 여당은 의지도 부족할 뿐 아니라 철학도 부재하다. 정부와 한나라당은 단기처방에만 급급할 뿐 본질적 대책인 국공립보육시설 확충을 외면한다. 이런 ‘복지철학 부재’를 보여주는 지표가 바로 내년에 확충하려는 국공립보육시설이 10곳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나도 그렇지만 대다수 학부모들이 국공립어린이집이나 국공립유치원을 선호한다. 그런데 국공립어린이집 신축수는 이명박 정부 들어 2008년 50개, 2009년 38개, 2010년 10개소, 2011년 10개소로 해마다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한국의 국공립보육시설 비중이 전체 보육시설 가운데 5.5%에 불과하고 공립대기자수는 16만 명이나 되는데도 이렇다. 이명박 대통령이 정부청사 어린이집이나 국회 어린이집에 한번이라도 가봤다면 왜 학부모들이 국공립어린이집을 원하는지 알 것이다. 그곳은 영유아보육법이 규정한 대로 시설이나 인력과 예산을 쓰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곳들은 한국에서 가장 우수한 보육시설이기도 하다. 바꿔 말하면, 우리나라 대다수 어린이들은 법이 규정한 것보다도 열악한 환경에서 크고 있다. 정부는 ‘공공형 보육시설’을 강조하지만 이건 인증제도다. 서울형 어린이집과 다를 게 없다. 세 번째로 꼬집을 부분은 ‘지역에 떠넘기기’다. 외환위기 이후 정부가 신자유주의 정책을 펴면서 지방분권이나 지방자치란 이름으로 귀찮고 번거로운 건 지방에 떠넘기는 행태를 보여 왔다. 대표적인 것이 노무현정부 당시 지방분권이라며 복지사업을 대폭 지방사무로 바꾼 것이다. 덕분에 제일 먼저 나타난 현상은 지자체에서 노인 장애인 지원예산을 깎는 것이었다. 논란이 되는 ‘방학 중 결식아동 급식지원’이 딱 이 경우다. 기획재정부는 보도 자료를 통해 “동 사업은 '05년 분권교부세 도입시 지방이양된 사업이나'09년 및 ‘10년의 경우에는 경제위기에 따라 각각 542억 원, 203억 원을 한시적으로 국비 지원한 바 있음”이라며 정부예산안 원안을 유지한 이유에 대해 “작년 예산심의시 예결위 부대의견으로 ’10년 국비 한시 지원키로 명시된 사업임. ‘11년에는 경제위기 이전대로 각 지자체에서 전체 결식아동 급식 소요를 편성하여 차질 없이 지원할 계획(내년 지자체 예산에 3,105억원 기편성)”이라고 주장했다. 그럼 실제 지방에서 나타나는 양상은 어떨까. 국민일보 14일자 기사에 따르면, “전라남도의 경우 중앙정부의 국비지원이 전액 삭감하면서 전남도가 현재 확보한 올 겨울 방학기간 결식아동에 대한 급식예산은 30억3천만 원으로 소요 예산의 절반에 불과하다. 이 돈으로는 도내 결식아동 2만2천700명의 49.3%인 1만1천200명만이 급식 지원을 받을 수 있을 뿐이다.”라고 지적했다. 부산이나 경기도 등 다른 곳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복지예산 삭감 논쟁은 국회와 정부 가운데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인지 보여준 점에서도 흥미롭다. 양육수당 문제를 보자. 정부는 올해보다 241억 증액한 898억 원을 정부예산안으로 국회에 제출했다. 이에 대해 국회 복지위원회는 지원대상을 차상위 이하에서 소득하위 70%로 확대하기 위해 2,744억원을 추가 증액했다. 여기까지는 안상수 한나라당 대표가 천명한 ‘70% 복지’에 부합한다. 하지만 결국은 정부원안대로 돼 버렸다. 기재부는 이에 대해 “내년도 보육 예산은 무상보육 확대(전체가정의 50%→70%) 등 정부안에서 이미 금년보다 대폭 확대”됐다면서 “보육료지원 확대로 지방재정 부담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양육수당까지 추가 확대할 경우 지방재정의 어려움 가중 우려… 향후 양육수당 지급대상 확대는 정책효과 등을 고려하여 단계적 추진 필요”라고 주장했다. 기재부가 지방재정 걱정하는 것에 대해서는 앞에서 언급했지만 예산을 최종적으로 심사하고 편성하는 곳이 국회라는 헌법조항조차 무시하는 발상이 놀라울 뿐이다. 더구나 한나라당은 대통령이 시키는 대로 서두르다가 이런 상황을 초래했으니 기재부한테 무시받아도 할 말이 없게 됐다. 대통령은 반대의견 듣기를 싫어하고 한나라당은 대통령이 시키는대로 한다. 대한민국 국회의 슬픈 초상화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310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