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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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김성은(서울신문 기자), 김태형(프리랜서 방송작가),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박용석(출판업),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춘천별빛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이동화(아디 사무국장),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이동화/ 민변 국제연대위 간사 올해 6월 3일 프랭크 라 뤼 유엔표현의 자유 특별보고관은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제 17차 유엔인권이사회에서 한국 표현의 자유 보고서(8개 분야, 16개의 권고안)를 발표하였다. 한국 상황에 대해 보고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내용은 많지만 결론적으로 아주 간략하게 이야기 하자면 이명박 정권이후에 한국에서의 전반적 표현의 자유는 후퇴되었고 특히 인터넷 공간에서의 표현의 자유가 두드러지게 위축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권고안을 이행하기 위해 정부 측과 국회(천정배 의원실), 그리고 인권시민노동단체들이 공동으로 8월 17일에 국회에서 보고서 후속이행토론회를 개최하였다. 이로써 2008년 8월 유엔특별보고관에게 최초로 한국에 인권침해 조사를 요청하는 기자회견을 한 이후 3년여의 유엔인권활동(엄밀히 말하면 유엔 특별절차에 진정한 이후 진행되는 프로세스)이 마무리 되었다. 지난 5월 말 유엔인권이사회 17차 세션 한국 NGO 참가단 출국 기자회견 모습 사진 출처 - 필자 앞에서 잠깐 언급하였지만 이 활동은 2008년 촛불집회로부터 시작되었다. 2008년 광우병수입협상으로 촉발된 촛불집회는 그해 6월을 정점으로 정부의 심각한 탄압에 직면하게 되었고 그 상황에서 민변을 포함한 인권시민노동단체들은 유엔이라는 상대적으로 공신력이 높은 외부기구에 한국 인권침해상황에 대해서 정식으로 조사방문을 요청하는 유엔특별절차(UN Special Procedures)를 활용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국내단체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대표적인 인권단체인 포럼아시아와 함께 2009년 유엔 표현의 자유 특별보고관과 아시아 단체 활동가들이 참여하는 국제심포지엄을 개최하고 결국 한국의 상황을 인식한 표현의 자유 특별보고관이 2010년 직접 한국을 조사 방문하였고, 이를 2011년 6월에 보고서로 발표한 것이다. 이를 위해 꼬박 3년 동안 국내 수십여 인권, 시민, 노동단체들이 연대활동을 하였고 국제인권단체들도 많은 수고를 기울였다. 결론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 보고서에서 한국 단체들의 의견이 많이 반영되었고 나름 상세하게 한국 표현의 실상에 대한 언급과 함께 적절한 권고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어 단체들 간에는 성공적인 활동이라는 평이다. 하지만 다른 평가도 있다. 다른 유엔활동인 유엔 조약기구 활동(한국이 가입한 국제인권조약의 이행을 감시하는 기구에 NGO 보고서를 제출하는 활동)도 그렇지만 한국 정부에 대한 권고안이 강제력이 없기에 정부에서 이행하지 않겠다고 하면 별다른 도리가 없다. 이번 권고안에도 포함되었지만 유엔의 권고안들의 상당수가 1995년도부터 반복되고 있다.(특히 국가보안법 폐지, 기존 유엔권고안에 대한 이행 등) 그래서 유엔권고안에 대한 실효성은 지속적으로 문제제기 되고 있다. 또한 이행평가 토론회에서 정부담당자는 “특별보고관 보고서의 권고사항 이행계획을 수립할 예정이 없다”고 발언했다. 또한 이번에 같이 활동했던 활동가는 “유엔의 활동은 겉보기에는 화려해 보이고 얻어지는 결과(권고)도 나쁘지 않지만 들어가는 품은 많은데 비해 실효성이 부족하여 피로함이 높은 활동인 듯하다”라고 평을 하기로 하였다. 일리 있는 평가이다. 상반된 평가 속에서 유사하지만 또 다른 활동을 준비하고 있다. 바로 유엔 UPR(국가별인권상황정례검토)활동이다. 아직 제대로 된 평가가 마무리되지 않았다. 그래도 다시 시작한다. 누군가는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활동은 활동가의 상상력을 빼앗고 매너리즘에 빠지게 만든다고 한다. 나 역시 스스로 내적인 평가가 마무리 되지 않은 상황에서 유사한 활동을 이어간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어쩌랴. 한 번의 시도로 잘못된 구조와 현실이 변화된다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그것이 정말 비현실적인 기대일 뿐이고, 몇 번을 해도 여전히 국가보안법과 표현의 자유가 후퇴하고 있다면, 국가보안법이 폐지 될 때까지 표현의 자유가 보장될 때 까지 계속 맨땅에 헤딩도 하고 계란으로 바위도 치고 해야 하지 않을까? 남들이 뭐라고 해도 지금은 냉정한 평가와 이성적 판단보다는 우직하게 한 우물을 깊게 파내려가는 우공이산의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이것은 분명히 내 자신의 합리화임이 틀림없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322 | 추천: 0
강국진/ 서울신문 기자 “이스라엘은 적입니다. 그들은 내 고향인 레바논, 그리고 요르단 시리아 팔레스타인 땅을 불법으로 점령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우리 이웃이 아닙니다.” 와엘 사브 회장은 아랍에미리트 수도 아부다비 굴지의 대기업 회장이다. 레바논이 고향이지만 아랍에미리트에서 10년 넘게 살고 있는 그는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대단히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반응했다. 아랍에미리트에서 오랫동안 체득한 처세술인 듯 했다. 하지만 그런 그도 “이스라엘은 중동 평화 문제에서 대단히 중요한 변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이웃나라인 레바논 사람으로서 그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란 질문에 대해서는 단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지난 5월22일부터 28일까지 8일 동안 아랍에미리트와 이집트를 방문했다. 6주에 걸친 순회특파원 일정 중 첫 단추를 중동으로 꿴 셈이다. 아랍에미리트와 이집트를 선택한 것은 무엇보다도 정치적 격변과 침묵, 경제적 번영과 답보를 대조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취재를 하기 위해 만나는 중동 사람들에게 가능하면 이스라엘과 관련한 많은 질문을 던져보려 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내가 만나본 ‘중동’사람들은 이스라엘에 대해 공통된 견해를 갖고 있었다. 이스라엘이 막강한 무력을 앞세워 이웃나라를 힘으로 위압하고 영토를 불법점령하고 수백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감옥 아닌 감옥 생활을 강요하는 것이 첫 번째였다. 그리고 그런 깡패 짓을 대놓고 하는데도 말리는 건 고사하고 편만 들어주는 미국에 대한 불만이 두 번째였다. 그것은 마치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모든 학생들이 미워하지만 ‘완력’에 밀려, 그리고 학교가 채워준 ‘완장’에 눌려 불만을 삭일 수밖에 없는 학교 규율부장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아랍에미리트에서 사업가로 일하는 한 이라크인 알리 가잘은 이렇게 말했다. “이라크 대통령이 사담 후세인이건 누구건 우리처럼 사업하는 사람에겐 아무 상관없다. 그게 무슨 문제인가. 미국은 십년 넘게 사담과 친구로 잘 지냈고, 그 뒤로도 딴 짓 못하게 막아만 놓고는 건드리지 않고 그냥 뒀다. 그러다가 왜 갑자기 쳐들어와서 이라크를 난리판굿으로 만드는가. 사담이 대통령일 때 나는 이라크에서 기업하는데 아무 문제없었다. 오히려 사담이 무너지고 나니까 극단주의자들이 내 공장을 불질렀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곳으로 이민 올 수밖에 없었다.” 그와 동업관계인 다른 이집트인 이햅 옴란의 말은 더 냉정하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하나다. 우리는 이스라엘을 믿지 않는 것처럼 미국도 믿지 않는다. 왜 중동 평화가 안 되는가. 우리는 평화적 해결을 원하는데 이스라엘이 평화를 원치 않는다.” 두 사람은 종교간 갈등이라는 인식에 대해서도 단호히 손을 저었다. 가잘은 “이라크에 유대인이 많이 산다. 천년 넘게 아무 문제없이 다들 어울려서 평화롭게 살았다. 중동 국가 어디에나 유대인들이 산다. 하지만 이스라엘에 사는 아랍인은 지금 어떤 처지인가.”고 반문한다. 이집트인 에즈딘 엘하산은 미국의 이스라엘 편향이 미국에게도 손해라는 점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는 “아랍은 원래 상인문화가 발달해서 미국과 정서상 더 잘 맞는 곳”이라면서 “미국이 이스라엘만 옹호하면서 중동권에 반미 정서가 퍼졌고 결국 많은 중동국가가 소련과 가까워졌다”고 지적했다. 결국 그는 “미국은 이스라엘을 얻는 대신 전체 중동권을 잃었다.”는 것이다. 6주간 순회특파원의 핵심 주제는 ‘공공외교’였다. 공공외교는 한국에선 생소한 개념이지만 간단히 말해 ‘상대방 국민의 마음을 직접 얻는 외교’라고 할 수 있다. 전통적 외교가 외교관 대 외교관, 정부 대 정부라면 공공외교는 주체가 정부일 수도 있고 시민단체일 수도 있다. 대신 대상은 상대국 정부가 아니라 상대국 국민의 ‘이해와 공감’인 셈이다. 문화외교, 학술교류는 물론 개발원조단체들의 활동도 공공외교에 포함된다. 한국 같은 나라에게 공공외교가 필요한 건 무엇보다도 4대 강대국에 둘러싸이고 분단된 상황에선 힘으로 밀어붙이는 외교는 물론이고 한류 자랑만 하거나, ‘자랑스러운 1만년 역사’같은 허황된 국수주의 경쟁을 벌이거나, 다른 이웃은 나몰라라 하고 특정 이웃만 ‘편애’하는 행태 모두 우리가 버려야 할 것들이란 문제의식 때문이다. 가령 ‘한미동맹’을 되살린다며 남의 나라 대통령 골프차량 운전이나 해주고 쇠고기 받아오는 방식은 접어두고, 장기적이고 전략적인 관점에서 상대국 국민들의 ‘이해와 공감’을 얻어내는 걸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게 되려면 전제가 필요하다. 우리는 어떤 나라로 외국인들에게 한국을 각인시킬 것인가, 이는 우리는 어떤 나라를 알릴 것인가란 주제로 직결된다. 고민은 근본적으로 ‘우리는 어떤 나라를 원하는가’란 토론으로 이어진다. 이스라엘은 미국에 대해서만큼은 대단히 성공적으로 ‘이해와 공감’을 얻어냈다. 이스라엘계 로비단체인 AIPAC는 미국 내에서도 최대 최고 로비단체다. 아무도 이 단체에 정면으로 맞서지 못한다. 하지만 이스라엘에 대한 중동인들의 ‘불신’을 보면서, 그리고 이집트 다음으로 찾아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한 각국 문화축제에서 팔레스타인 부스 앞에서 땡볕에 길게 늘어서 있는 헝가리 시민들을 보면서 나는 이스라엘 ‘공공외교’의 빛과 그림자를 본다. 9월 런던에서 열리는 ‘템즈 페스티벌’에 초청받은 YG 가수들의 공연을 촉구하는 영국 팬들의 플래시몹 시위 사진 출처 - YG엔터테인먼트 하긴 멀리 볼 것도 없을 것 같다. ‘아시아를 넘어’ 유럽을 ‘점령’하고 있다는 한류를 통해 달러 좀 더 많이 벌어보겠다고 해외에서까지 ‘K팝 공연 촉구 플래시몹’이란 신종 관제데모까지 만들어내고 한류를 무슨 신성장동력이나 되는 듯이 난리치는 정부를 보면서 나는 세상에서 가장 한류에 취한 한국의 슬픈 조급증과 물욕을 본다. 우리는 한류가 세계 만방을 '점령'해서 그 덕에 이수만 같은 사람이 달러 많이 벌어들이는 나라를 원하는건가? 독도 문제를 이슈해 보려는 일본 의원 세 명에 온 나라가 난리법석을 떨며 군복입은 아저씨들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어주는 나라를 원하는가? 동계올림픽 한다고 개발업자들 배불려 주고 이건희 회장 사면에 면죄부를 주는 나라를 원하는가? 그것도 아니라면 182억원을 들여 단계적 무상급식을 할 것인지 아니면 또다른 단계적 무상급식을 할 건지 물어보는 걸 주민투표랍시고 하는 나라를 원하는가? 우리는 어떤 나라를 원하는 것일까. 그게 해결이 안되면 우리는 어떤 모습을 외국에 알릴지가 해결이 안된다. 그게 안되면 글로벌만이 살길이니 해외 인재 영입해야 한다며 인도 사람 채용해놓고 고작 한국의 문화를 알아야 한다며 삼겹살에 소주로 밤샘시키는 짓이나 벌이는 어떤 나라 대기업처럼 되기 십상이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337 | 추천: 0
이상재/ 대전시민아카데미 운영위원 단군 이래 최대 국운상승의 기회라고 떠들어 대던 1988년 서울올림픽이 마침내 열리던 그 해, 올림픽을 위해 몇 년간 아침 길거리 청소도 하고, 버스 탈 때 줄도 섰지만 올림픽 경기는 단 한 경기도 치러지지 않았고 아마 한 명의 외국인 관광객도 들리지 않았을 작은 도시의 고등학교에 나는 입학했다. 작은 도시라고는 하지만 지역에서 하나밖에 없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는 약간의 자부심과 입학식 날부터 밤 11시까지 진행되는 야간자율학습의 고통이 그 시절 내 기억조각들의 대부분이었다. 그때 내가 중학생과는 다른 고등학생이 되었다는 정체성을 가장 확실하게 느끼게 해 주었던 것은 실제 소총 무게와 비슷한 플라스틱 모형 총을 들고, 허리에는 수통까지 차며, 군복을 입은 선생님에게 제식훈련을 받았던 ‘교련’과목의 등장이었다. 학년 간 위계질서가 군인들의 계급 간 차이처럼 아주 엄격했던 당시의 고등학교 분위기와 학생들을 예비 군인처럼 취급했던 교련과목은 묘하게 어울렸던 것 같다. 1970년대 "목총 들고 분열" 1944~2008년재까지 교육활동 홍보사진과 추억의 교육관련 사진전 입선작 전시회 가운데 1974년 태백 기계공고학생들이 교련시간에 목총을 들고 분열을 하고 있는 모습의 사진 사진 출처 - 연합뉴스 교련시간도 입시위주의 학교정책 때문에 다른 예체능계 과목과 같이 자율학습으로 바뀌는 경우가 많긴 했지만 일 년 중에 단 하루 ‘교련’이란 단어가 우리에게 확실하게 각인되는 날이 있었는데 그것은 학교의 오랜 전통으로 내려온다는 ‘교련검열’이었다. 교련검열은 중간고사가 끝난 어느 토요일 오후 1학년 전체 학생들을 대상으로 2학년 학생회간부와 교련간부들이 실시하는 일종의 생활지도를 말하는 것이었는데 단순한 생활지도에서만 끝나지 않고 선배들의 무자비한 폭력이 동반되었기 때문에 1학년 학생들에게는 가장 고통스런 시간중의 하나였다. 바로 옆 반의 매 맞는 소리와 비명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허리를 똑바로 세우고 앉아서 조를 이뤄 끊임없이 들어오는 선배를 맞이하는 1학년들의 심정은 공포 그 자체였다. 선배들은 머리길이와 옷차림에서부터 교실 청소상태, 심지어 개인의 소지품까지 검사 했고 규정에 벗어난 학생이 있으면 어김없이 뒤로 불려나가 걸레자루로 매타작을 당했다. 그나마 교칙을 위반했다던가 해서 맞으면 좀 나은 경우였고, 이유 없이 불려나가 매를 맞는 경우도 허다했는데 나 같은 경우는 키가 크다고 다른 큰 친구들과 함께 불려나가 맞았다. 어떤 경우는 아예 반 전체가 대답소리가 작다고 단체로 맞기도 했다. ‘검열’을 빙자한 선배들의 공식적인 폭력행사는 교사들의 묵인아래 이루어졌다. 내가 2학년 때 어떤 교사는 수업시간에 웃으면서 “이번 교련검열은 좀 살살해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한 선배들의 비상식적인 행동은 오래된 전통이라는 명목아래 학교 구성원들 중 누구하나 문제제기가 없었다. 폭력행위의 직접적인 피해자인 1학년들조차도 ‘이만하길 다행이다’라는 분위기 속에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지나갈 정도였다. 그러한 교련검열은 내가 2학년이 되었을 때도 어김없이 재현되었다. 이번에도 중간고사를 치룬 어느 토요일, 학생회 간부를 포함한 수 십 명의 2학년들은 자율학습 중인 같은 반 친구들의 부러움 섞인 환호를 받으며 긴 걸레자루를 들고 1학년 교실로 향했다. 그리고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1학년들의 고함소리와 비명소리는 아련한 추억의 노랫소리와 같이 2학년들을 미소 짓게 만들 뿐이었다. 그러나 다음 월요일 학교에 갔을 때 담임은 싸늘한 시선과 함께 다짜고짜 지난 토요일 교련검열 갔었던 학생들을 불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지난 교련검열 때 걸레자루에 맞은 1학년 학생 중 몇 명이 다쳐서 병원에 입원하는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그동안 공식적인(?) 묵인으로 일관했던 교사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학생들을 다그쳤고 결국 몇몇 가해자 학생들은 징계를 받았다. 그리고 내가 3학년이 되었을 때 수 십 년을 내려왔다는 전통의 교련검열은 더 이상 실시되지 않았다.(그 때 교련검열을 하지 못했던 2학년들은 안도했을까? 아쉬워했을까? 아니면 분개했을까?) 고작 1년의 차이지만 너무나 엄격한 선후배간의 위계질서, 그래서 선배들의 명령이라면 잘못되고 비상식적이어도 전통이란 명분아래 어쩔 수 없이 고분고분 따라야 하는 분위기, 자기가 선배가 되어서는 불과 1년 전 자신들의 모습은 너무 쉽게 잊어버리고 완벽하게 악습의 체제에 순응하는 모습, 그리고 그러한 상황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도 묵인하며 방치하다가 정작 사고가 터지면 자신들의 잘못이 아니라고 발뺌하는 관리자........ 대한민국에서 가장 강하다는 그래서 귀신도 잡는다는 어느 부대의 총기사고 전후사정을 들으면서 문득 생각난 아주 오래전 나의 경험담이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350 | 추천: 0
임아연/ 한밭대 학생   사람들은 높은 담장 안에 스스로 갇힌다. 더 크고 굵고 튼튼한 자물통을 찾는다. 이렇게 자유를 떠나 불행을 택한다. 장담할 수 없는 성공, 부에 대한 욕심, 그 알 수 없는 맹신에 기대어 사람들은 도시로 밀려든다. 그 도시가 폭발할 지경에 이르면 그들은 새로운 도시들을 만들어 낸다. 필리핀에서 지내온 1년 가까운 시간동안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의 삶이 어떠냐고 내게 물었다. 그럴 때마다 우스갯소리처럼 답했다. "아주 좋아요, 마닐라만 빼고." 필리핀 북부에 있는 평균 2천 미터가 넘는 까마득한 산맥을 여행하다 프랑스에서 왔다는 두 형제를 만났다. 프랑스에서 가장 좋은 곳은 어디냐고 물었다. 형제가 대답했다. "다 좋은데… 파리 빼고는." 파리는 안 가봐서 모르겠지만 확실히 마닐라보단 서울이 좀 더 번듯하긴 하다. 그런데 이런 비교가 무의미 할 만큼 서울도, 마닐라도 너무 복잡하다. 매일 아침, 저녁 출퇴근 시간대의 교통은 끔찍하다. 도심 한복판에서 크게 숨 한 번 들이마시기엔 폐 건강이 염려되고, 잊을만하면 살인사건 뉴스로 세상 흉흉하다. 서울에선 CCTV가, 마닐라에선 정복차림의 경비원들이 수시로 감시하고, 모든 집들의 문들은 둔탁하게 잠겨있다. 시골로 떠났다. 온 가족이 외출을 하는데 허름한 나무문을 대강 닫아 놓는다. 담은 말 그대로 담의 역할을 하기보다 외관을 꾸미기위한 장식에 더 가깝다. 허리 높이 쯤 되게끔 대나무로 얼기설기 엮어놓거나 나지막한 꽃나무가 담을 대신하기도 한다. 콘크리트로 두껍게 쌓아올린 벽이 아니라 더운 기후에 맞게 사방이 트인 니파 오두막을 짓는다. 밥 때가 되면 근처 바다 양식장에서 잡아온 물고기와 새우를 바나나 잎에 올려 낸다. 천혜의 자연조건을 지니고 있는 필리핀의 민다나오섬 사진 출처 - 한겨레 적어도 내겐 집으로 들어가기 위해 두 세 개의 문을 지나야만 하는 마닐라보다 바람도 참새도 개구리도 마음대로 집 안에서 쉬었다 가는 시골 마을이 좋았다. 에어컨 빵빵 나오는 기숙사 방 보다 야자나무 그늘 아래 해먹에 누워 낮잠 한 숨 늘어지게 자던 그 시간이 더 행복했다. 사람들은 지켜야 할 게 많을수록 더 높이 담을 쌓고 여러 겹의 문을 만들어 냈다. 주변에 사람이 많아질수록 그들은 더욱 서로를 믿지 못해 감시하고 경계해야만 했다. 흙과 나무보다 콘크리트와 철근이 더 많아진, 도시화된 곳으로 밀려든 사람들이 그랬다. 누군가가 말했다. "'sugar-free.' 있는 게 아니라 없는 게 자유로운 것"이라고. 가진 게 많은 사람들은 그래서 자유로워 보이지 않았다. 2018년 동계 올림픽이 우리나라 평창에서 유치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람들이 김연아가 프리젠테이션 할 때 입고 나온 옷 브랜드가 어디냐고 관심을 가질 때, 문득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던 나의 20대 초반 그 어느 무렵에 무작정 혼자 찾아간 강원도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 큰 품으로 가만히 나를 위로하던, 평화롭던 자연이 생각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제 곧 몇 년 사이에 그 깊고 울창한 산을 관통하는 터널이 만들어 질 것이다. 결국엔 자연에게도, 사람에게도 그 터널 굵기 만한 상처가 가슴에 뻥 뚫리겠지. 더구나 개발엔 항상 투기가 쫒아 오기 마련일 테니, 머지않아 '지켜할 게 많은 사람들'이 콘크리트 도로를 따라, 고속철도가 지나는 길목을 따라 담을 쌓고 두꺼운 자물통으로 스스로 가두려 할 것이다. 개발로 인한 편리함이 꼭 행복을 가져다주진 않는다. 내가 그러했듯 누군가는 손 때 묻지 않은 자연의 품에서 위로받을 텐데, 사람의 욕심으로 인해 그 풍요로웠던 자연이 도시의 모습으로 냉랭하게 돌아서 버릴까 두렵다. 4대강 사업 지역에서 폭우에 쓸려 내려가던 시뻘건 강물이 피눈물 같았는데 이제 강원도의 눈물까지 보게 될까 마음이 무겁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314 | 추천: 0
김현진/ 에세이스트   <제 5도살장>의 작가 커트 보네거트는 에세이집 <나라 없는 사람>에서 불과 백여 년 동안 인류가 교통이라는 이름으로 지구에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보라고 말했다. 정말 그렇다. 석유고 석탄이고 다 꺼내 썼고 심지어 일본 쓰나미에 원자로까지 걱정할 일 천지다. 소위 결혼 적령기를 좀 넘어섰는데 하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 바람에 장례식에 오신 손님들이 하나같이 이럴 때 사위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아, 이럴 때 결혼을 했었어야지, 그 자리에서 누굴 덮칠 수도 없고 어차피 없는 거, 당장 어디서 사올 수도 없는 바람에 잔소리만 잔뜩 들었다. 아버지 돌아가신 것만 해도 충분히 속상한데 애초에 있지도 않았던 신랑이 없다고 슬퍼할 정신까지는 없었으므로 아유 그럼요 사위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하고 넘겼지만 별로 마음이 급하지 않은 걸 보니 있으면 좋겠지만 없어도 충분히 살겠나보다. 물론 어른들이야 걱정이 늘어진다. 서른이 넘었는데 시집도 안 가고, 외로워서 어떡하냐, 애도 낳아야지, 그런 말씀들 들을 때마다 그냥 귀나 후비게 되는 게 내가 철이 없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아무래도 나도 요즘 유행하는 <삼포세대>인 모양이다. 삼포세대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어서 안 하는 안타까움이 있지만 나는 귀나 후비적거리고 있으니 이를테면 살짝 변종 삼포세대인 셈이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게 삼포세대라는데 연애는 포기가 안 되는 건지 내가 별 인기 있는 것은 아니지만 눈이 좀 낮은 덕에 아무거나 걸리면 그냥 닥치는 연애하는 덕을 보는 건지 아예 간택이 안 되는 날까지는 안 할 생각은 별로 없고, 연애 대신 취업을 포기했다. 이것도 투철하게 포기한 건 아니고 회사 생활도 나름 해보고 이력서 냈다 떨어져도 보고 그러면서 증명사진을 보니 관상부터 아, 회사에 충성할 얼굴이 아니구나 싶어 일찌감치 현실에 적응하고 말았다. 결혼 까짓 거, 남자친구가 있어도 외롭고 제일 친한 친구가 있어도 외로운데 결혼한다고 뭐 그리 안 외로울까, 싶기도 하고 결혼하면 결혼한 대로의 좋은 점이 있고 안 하면 또 안 한 대로의 좋은 점이 있겠지, 하고 나쁘게 말하면 심드렁하게 좋게 말하면 태평해지는 것이 나이 먹는 것의 장점인 모양이다. 출산에는 전혀 관심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다. 이미 인류는 온 지구에 차고 넘치는데, 지구의 인구 대폭발을 걱정하면서 조국의 저출산을 동시에 근심할 수 있는 이들의 심리를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 못하겠다. 이미 60억이 있는데 나까지 보탤 필요가 뭐가 있나 싶다. 앞에서 커트 보네거트가 말했던 대로, 지금까지 있었던 인류가 이미 지구를 충분히 망쳤다. 그런데 뭐 그리 아득바득 낳을 일이 있겠는가 싶은 것도 있고 생명은 어떻게든 이어진다는 큰마음을 먹으면 내 새끼 낳겠다는 생각이 별로 안 생긴다. 게다가 인류가 꼭 존속되어야 할 건 뭐람, 인간이 없다면 지구는 평화로울 텐데. 지난해 4월 한 청년단체 회원이 20대의 팍팍한 삶을 풍자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주간경향 그렇다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내 맘대로 내 재미만 보면서 살겠다는 건 아니다. “나에게 인간은 두 종류로 나뉜다, 그것은 회원과 회원이 아닌 사람이다!!!!!!” 라는 인권연대 오창익 국장님의 사자후에 깊은 감명이랄까 위협이랄까 뭐 그런 것을 받아 인권연대에 당장 가입한다거나 사회적 문제에 계속 관심을 가지고 살아야겠다, 역시 연대투쟁의 최고는 입금이지, 뭐 이런저런 다짐을 할 때의 마음은 항상 같다. 어차피 모두가 모두의 가족이다. 라 생각하면 마음 편하다. 물론 그들이 나를 가족으로 쳐주지 않을 때는 약간 서글프지만 어쨌거나, 굳이 억지로 내 아이 낳을 필요도 없고 굳이 법적으로 누군가와 가족이 되어야 할 필요도 없고 어슬렁어슬렁 살다가 가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지 싶다. 물론 이것은 이종 삼포세대의 변이다. 그래서 결국 하고 싶은 이야기는, 애들이 골비고 나약하고 의지가 부족해서 굳이 삼포세대가 된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88만원 세대니 44만원 세대니 삼포세대니 하고 너무 가엾이 여길 것도 없다. 모든 세대는 그 나름대로의 고통을 지닌 법이니까, 모든 세대는 그 나름대로 포기하는 것이 있기 마련이니까. 그냥, 너무 착취하거나 너무 잔소리만 하지들 말아 주십사고 하는 소리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326 | 추천: 0
강국진/ 서울신문 기자     독일 베를린 시내 외곽을 달리던 전철이 한적한 시골역같은 곳에 멈춰 섰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문이 열리길 기다린다. 문은 안 열리고 전철이 다시 움직인다. 그때서야 뭐가 문제였는지 깨닫는다. 독일 지하철에선 문에 달린 단추를 눌러야 문이 열린다. 다음 역에서 전철을 반대방향으로 갈아탔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이번엔 제대로 단추를 눌렀다. 단추가 빨간 색에서 파란색으로 바뀌며 문이 열렸다. 전철역 바로 옆 주택가로 들어섰다. 초인종을 누른다. 현관문이 열렸다. 3층에 다다르자 7년 만에 만나는 반가운 분들이 따뜻하게 안아주며 어서 들어오라고 잡아끈다. 송두율 교수와 정정희 여사를 그렇게 7년만에 다시 만났다. 두 분을 처음 만난 건 2003년 9월이었다. 만났다기 보다는 직접 얼굴을 본게 처음이라고 하는 게 정확하겠다. 그 해 9월 22일 두분은 두 아들을 데리고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했다. 1967년 유학 이후 35년 만에 어렵게 성사된 귀향이었다. 1967년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했던 송 교수는 그 해 독일로 유학을 갔다. 처음엔 5년 있다 돌아올 생각이었다고 한다. 1972년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거두 위르겐 하버마스 지도로 박사학위를 받았을 때 곧바로 돌아왔다면 그의 인생이 얼마나 달라졌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 즈음 두 분은 해외에서 유신독재 반대운동에 참여하면서 귀향의 꿈을 가득 한켠에 묻어둬야 했다. 그렇게 35년이 흘렀다. 두 분은 독일 국적을 취득하고 두 아들은 독일인으로서 자라며 부모의 고향에 왜 가지 못하는지 묻기도 했다. 35년 만에 돌아온 고국은 이들을 가만 내버려두지 않았다. 국가정보원과 검찰은 집요하게 송 교수를 심문하고 그와 관련한 정보를 언론에 흘렸다. 일부 언론은 여기에 적극 개입했다. 국정원·검찰·언론은 핑퐁 게임하듯이 그를 ‘해방 이후 최대 간첩’으로 몰아가는 노골적인 프로파간다 작업을 벌였다. 결국 송 교수는 구속됐다. 법원은 2004년 3월 징역 7년을 선고해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다행히 그 해 7월 2심에서 일부 무죄 및 집행유예로 석방이 됐고 송 교수 부부는 곧 독일로 돌아갔다. 지난 2일 만났을 때 정 여사는 “당시엔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쓰러지기 일보 직전 몸으로 겨우 독일로 돌아왔다.”고 회상했다. 결국 대법원은 2008년 독일 국적취득 이전의 방북을 뺀 국가보안법 위반에 대해 모두 무죄를 선고해 고등법원으로 파기 환송했고 이는 그해 8월 확정됐다. 1972년 이후 교편을 잡았고 1982년엔 교수자격까지 취득한 학자를 “알고보니 교수가 아니었다.”는 식으로 몰아가며 기자회견장에선 대놓고 “송 교수님이 아니라 송 선배님께 질문하겠다.”는 뻔뻔한 말을 하던 언론들은 구속 직전까진 나라가 백척간두에 선 양 난리법석을 떨었지만 구속되는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모른 체했다. 송두율 교수와 정정희 여사 사진 출처 - 필자 교수 은퇴 이후 더 바빠 독일로 돌아가고 나서 송 교수는 2009년 가을 정년퇴임했다. 하지만 교수 당시보다 지금이 더 바쁘다고 했다. “한국에선 교수란 자리가 빨리 늙어버리는 것 같아요. 제 지인들을 봐도 그렇죠. 이 곳 독일에선 나이를 먹을수록 학자로서 더 정열적으로 글을 씁니다. 저 역시 힘이 없어 글을 못 쓰는 날이 오기 전에는 계속 글을 쓰려고요.” 아침에 일어나면 운동을 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하루 종일 책을 쓰는게 요즘 일과라고 했다. 대략 6시간 정도 집필에 몰두한다. 작업은 주로 조용할 때인 저녁 늦게 하는 편이란다. “지금 준비하고 있는게 대여섯 권입니다. 그 가운데 독일어로 쓰는 책이 세 권이죠. 하나는 비엔나에 있는 출판사에서 곧 출간할 예정인데 내가 맡은 부분은 탈고를 거의 했습니다. 1910년부터 2010년까지 한국이 지난 100년 동안 겪어온 정치와 사회 역사를 다뤘습니다. 전문서는 아니고 유럽에서 여전히 한국에 대해 잘 모르니까 핵심 문제를 짚어서 정리한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독일어로 쓰는 마지막 한국 관련 책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더 이상 한국 문제에 대해 쓰고 싶은 마음이 없지만 그래도 내 고향이 한국이니까 쓰게 됐습니다. 두 번째는 일종의 자서전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1967년 유학온 뒤 45년 동안 독일에서 겪었던 내 지적편력을 정리하고 고찰하려고 합니다. 현대성(모더니티)을 철학적으로 고찰한 책도 준비중이죠.” 몇몇 한국 출판사에서 책을 출간하자며 제안이 들어온 적이 있다고 했다. 현재 두 가지 작업을 진행 중이라고 한다. 하나는 한국에서 여전히 ‘경계인’의 의미에 대해서 오해도 많고 궁금증도 많다며 그에 대한 대중서를 써 달라는 요청을 받고 동의한 뒤 대략 ‘경계인과 세계인’이란 주제로 대학생을 위한 교재 형식으로 구상중이다. “독일에서 반백년 가까이 지내다보니 한국어로 글을 다듬는 게 말처럼 쉽진 않다.”면서 “정리는 얼추 해놨는데 출간을 언제 할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고 했다. 또 하나는 살아온 과정을 되짚어보는 자서전을 쓰기로 한 출판사와 약속을 했다. 독일에선 오래되고 천장 높은 게 비싼집 두 분은 지금 집에서 살기 시작한지 수십 년이 됐다. 뮌스터대 등에서 교수로 일할 때는 송 교수가 기차로 대학에 가서 며칠 지내다가 집으로 오곤 했다고 한다. 집 근처에 김나지움도 있는 등 교육여건이 좋은데다 집 자체도 마음에 들어서 이사 갈 생각을 안했다고 한다. 한국과는 정 반대로 독일에선 오래되고 천장이 높은 집이 비싼 집으로 통한다는 얘길 들었다며 아는체를 하자 송 교수는 무심한 듯 자세하게 집자랑을 했다. “천장 높이는 3.5m”이고 거실 바닥의 목재는 “길이가 8m”이고 “19세기 프로이센 장교들이 살던 집”이었다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집은 가운데 거실을 중심으로 양쪽 끝을 다 개방할 수 있다. 손님들을 저녁에 초대할때는 작은 파티장이 될 수 있다. 주변에 나무가 많아서 공기도 맑고 새소리를 들으며 아침에 잠을 깬다. 건축양식도 현대 양식으로 넘어오기 직전이라며 ‘희소성’을 강조했다. 자제들을 낳으며 수십 년을 산 집에 대한 애정을 감추지 않았다. 집 얘기를 듣다가 그가 한국에서 10개월 가까이 겪었던 서울구치소 독방을 떠올렸다. 35년 동안 입식 생활을 해서 한국식 독방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게 너무 힘들어하는 그를 위해 변호인단과 주한독일대사관은 책상을 넣어달라고 요구했더. 1990년대 윤금이 사건으로 실형을 선고받아 한국 교도소에 수감됐던 케네스 마클 이병은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에 따라 미국의 기준에 준한 감옥에서 인터넷까지 즐기며 감옥생활을 했지만 당국은 송 교수에 대해서는 선례가 없다며 거절했다. 송 교수가 수감돼 있을 당시 두 번 그를 면회할 수 있었다. 한번은 정 여사와 둘째아들을 따라서 갔고, 두 번째는 혼자서 갔다왔다. 면회시간은 짧고 가족끼리 할 말이 많은데 끼어드는게 예의가 아니라서 뒤에서 세분이 독일어로 대화하는걸 멀뚱히 지켜보기만 했다. 정 여사는 “당시 그게 마음에 걸려서 대책위원회에 얘기해서 면회날짜를 하루 잡아달라고 했다.”고 했다. 사실 송 교수와 만났다고 할 수 있는 건 두 번째 면회에서였다. 그러고보니 송 교수와 대화를 나누는 건 그 때 이후 베를린에서 처음이었다. 구속 이후 언론 관심이 멀어질 때 나는 꾸준히 취재를 계속했다. 법정심리가 있는 날은 어김없이 기자회견이 열렸고 나는 거의 모든 자리를 함께했다. 사실 정 여사가 나를 기억하고 단독인터뷰에도 응해줬던 게 다 그 덕분이었다. 정 여사는 당시를 떠올리며 “기자 같지 않았다”고 표현했다. 두 분은 나를 위해 장을 보고 손수 음식을 준비했다. 오랜 해외취재일정 동안 한국 음식을 못먹었을까봐 고기쌈을 준비했다. 집에서 직접 기른 채소도 꺼냈다. 참 맛난 저녁이었다. 독일에 처음 왔을 때는 김치를 담그고 싶어도 재료가 없었다고 한다. 궁여지책으로 중국인 가게나 인도인 가게에서 비슷한 걸 사다가 김치 대용으로 하기도 했단다. 그렇게 몇 십년을 지내다보니 이제는 한국요리를 하면 전통적인 맛이 난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라고 한다. 한편으론 옛 맛을 간직하고 있단 뜻이고 다른 한편으론 평균적인 한국인의 입맛도 많이 바뀐 탓이리라. “가위의 양쪽 끝이 벌어지며 서로 멀어지듯이” 두 분은 가슴속에 간직한 한국과 실제 한국의 거리는 멀어져 있었다. 그 덕에 한국에 와서 상당한 문화충격을 받았다. “초대장을 못 받았다”며 지인의 회갑잔치에 갈 엄두를 못내기도 했다. 정작 두 분이 기대했던 변화는 너무 더뎠다. 두 분은 민주화된 한국에 용기를 얻어 귀국했지만 고국은 그들이 한국을 떠날 때도 말많고 탈많았던 바로 그 국가보안법으로 송 교수를 잡아넣었다. 정작 송 교수는 수십년 동안 통일이란 화두를 철학적으로 고찰했지만 고국은 그에게 ‘친북인사’란 딱지를 붙였다. 하버마스나 노엄 촘스키, 하워드 진 등 전 세계 석학들까지 송 교수 구명운동에 나섰지만 정작 한국에선 송 교수를 아는 사람 중에서도 짐짓 고개를 돌려 모른척했다. 그나마 송 교수 비난에 동참한 사람들에 비하면 양반이라고 해야 할까. 거실에서 송두율 교수와 함께. 벽에 걸린 액자는 "깨끗함은 결국 화해와 기쁨으로 통한다"는 뜻이다. 사진 출처 - 필자 밤늦게까지 이어진 이야기꽃 저녁 7시에 초대를 받았는데 저녁을 먹으며, 또 와인을 곁들여 수다를 떨다 보니 시간이 11시나 돼 버렸다. 두 분에겐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셋이서 당시 얘기를 떠올리며 추억에 젖었다가 가슴 아팠던 얘기에 먹먹해 했다. 고국에 대한 섭섭함은 아무리 감추려 해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들은 한국에 대해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송 교수는 “한국에 대한 책은 더 이상 쓰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도 인터넷을 통해 한국 소식을 왠만큼 파악하고 있었다. 정말 안타깝게도 그 자리에서 들었던 많은 얘기 가운데 상당수는 이 글에 담을 수 없다. 예민한 문제들이라서 두 분은 자신들이 한 얘기가 널리 퍼지기를 원치 않았다. 그저 가슴에 묻어둘 밖에. 오랫동안 두 분을 다시 만나고 싶었다. 처음 송 교수 책을 읽었던 1995년 이후, 그리고 두 분이 망명하듯 한국을 떠날 당시부터 언제나 나는 이 날을 기다려왔다. 그리고 7년 만에 다시 만났다. 하지만 얘기를 하다보니 벌써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나는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몇 시에 오겠느냐며 약속시간을 정할 때 낮에 가겠다고 할 걸. 이제 베를린을 떠나고 나면 또 언제 다시 그 분들을 뵐 수 있을까. 그래도 ‘공식’ 인터뷰를 빌어 소개할 수 있는 얘기는 건졌다. 40년 가까이 교편을 잡은 교육자로서 송 교수는 최근의 한국의 교육을 둘러싼 갈등에 대해 자신의 소견을 밝혔다. “독일의 경우 대학 교육은 모두 국가가 책임지는 구조다. 최근 일부 주에서 등록금을 부과하고는 있지만 그마저도 한 학기 500유로에 불과하다. 대학생들에게 버스와 지하철을 무료로 해준다거나 하는 등 각종 혜택도 많다. 한국 사립대학들이 한 학기에 800~1000만원 수준의 등록금을 받는다는 건 상대적인 국민소득을 감안할 때 엄청난 부담이다. 이는 ‘교육받을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반값 등록금’ 논쟁에 대해서는 “문제는 단순히 등록금이 많고 적고 문제에서 그치지 않는다.”면서 “대학 졸업자 대부분이 실업자가 되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등록금을 반의 반으로 줄이더라도 문제는 고스란히 남는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고학력 실업문제, 즉 교육과 고용 정책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장기적인 고민을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세계화니 국제화니 하는 이름으로 영어수업을 의무화하는 곳이 늘고 있다. 심지어 영어수업 가능자를 교수 임용 조건으로 내거는 곳도 있다. 이에 대해 송 교수는 “미쳤다”며 상당한 우려를 나타냈다. “미국에서 유학했다고 하기만 하면 미국에서 빌빌대던 사람도 한국에선 교수로 대접받는다. 이래가지고 학문이 어떻게 발전하고 사회가 어떻게 발전한단 말인가.” 그는 ‘학문의 주체성’이란 측면에서 이 문제를 꼬집었다. “영어를 잘 구사해야 한국 학문이 세계적인 수준으로 도약한다거나 교육 수준이 높아진다는 생각에 전혀 동의할 수 없다. 어떤 내용을 채우느냐가 중요하다. 아무리 영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하는 교수라 해도 문제는 어떤 내용을 강의하느냐라고 할 수 있다. 언어는 수단이다. 수단을 목적으로 삼는 건 말 그대로 ‘주객전도’라고 할 수 있다. 영어를 모국어 수준으로 구사하는 전문인력을 적극 육성해야 하는건 맞지만 5000만 국민 모두가 영어 도사가 될 필요가 있겠나. 자국어의 생명력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려 끊임없이 노력하는 독일이나 프랑스를 귀감으로 삼아야 한다. 지역의 특성을 감안하지 않는 세계화는 없다.” 송 교수의 비리(?)를 폭로합니다 얘기를 하다가 정 여사는 내게 송 교수의 엄청난 비리(?)를 폭로했다. 유학 뒤 정 여사는 사서로서 독일 대학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송 교수가 논문 준비와 유신반대운동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데다 아이들까지 생기자 도저히 직장을 계속 다니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결국 사표를 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워낙 대우가 좋은 자리인 데다가 일을 하고 싶은 욕심에 고민이 정말 많았단다. “어렵게 사표를 쓰셨겠네요.” “아녜요. 나는 사표를 도저히 못 쓰겠더라고요. 결국 나는 아쉬워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저 양반이 대신 사표를 썼어요.” 정 여사는 이어 “그렇게 뒷바라지해서 교수 시켰는데. 한국 가서는 또 옥바라지에 1년 가까운 세월 보내며 내가 폭삭 다 늙어 버렸죠.” 내가 “페미니스트들이 들으면 엄청난 반응이 나오겠는데요. 이제 집안일은 왠만한건 다 떠넘겨도 되겠네요.”하며 맞장구를 치자 정 여사는 그 말이 맞다고 하면서 송 교수를 흘겨보며 이렇게 말했다. “후식은 당신이 좀 가져오시죠.” 송 교수, 멋쩍게 웃더니 말없이 부엌으로 가서는 예쁜 유리컵에 아이스크림을 담아왔다. 우리는 후식을 먹으며 또 수다를 떨었다. 그러고 보니 거실 한가운데 운치 있게 자리잡은 원목책상을 보고 송 교수에게 “멋진 서재네요. 저기서 글을 쓰시면 글이 더 잘 써지겠습니다.”라고 하자 송 교수가 “아니 이건 저 사람꺼고, 나는 저 옆방에.”했던 게 떠올랐다. 송 교수가 구치소에 있을 당시 바짝 바짝 말라가던 때를 생각하면 송 교수는 앞으로도 안방마님을 잘 봉양해야 할 듯하다. 추 신: 정 여사는 얼마 전 발코니에 오이를 심었다. 원래는 꽃만 길렀는데 최근 새로 생긴 취미생활이다. 까맣게 윤기 있는 독일 흙은 토질이 워낙 좋아 따로 거름을 안해도 잘 자란다. 올 여름에는 두 분이 하루 종일 먹고도 남을만큼 오이가 열릴 것이다. 하늘 높이 줄기를 뻗으며 풍성하게 열릴 오이처럼 두 분에게 행복과 기쁨이 넘쳐나길 빈다. 그리고 언젠가, 두 분을 서울에 있는 우리 집에 초대해 점심을 대접할 날이 꼭 왔으면 좋겠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458 | 추천: 0
전국완/ 중학교 교사 근무하고 있는 학교에서 작년에만 4명의 교사가 명퇴하였다. 올해도 이미 40대 교사 한 명이 명퇴에 들어갔고, 두 명의 교사가 8월 말 명퇴를 신청한 상태다. 이 글을 끄적거리고 있는 필자도 명퇴 시기를 고민하고 있다. 학교 밖에서는 교직만큼 편하고 든든한 직업이 어디 있냐며 시기어린 부러움의 시선으로 교사들을 바라본다. ‘잘릴 염려 없지, 일찍 퇴근하지, 방학 있지, 퇴직하면 연금 나오지……’ 생각해 보면 이 세상에 힘들지 않은 일이 있을까마는, 최근 몇 년 사이 ‘그 좋은 일터’를 중도에 관두는 교사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유를 한마디로 말하면 학교생활이 행복하지 않아서이다. 누가 들으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며 비아냥거릴 수도 있겠지만, 지금 현장에선 교사들의 신음소리가 가득하다. 교직도 엄연히 생계의 수단이지만, 그래도 우리 교사들을 버티게 했던 것 중에 많은 부분은 학생들과의 생활에서 얻는 기쁨과 보람이었다. 한창 몸과 마음에 변화를 겪는 아이들의 성장을 지켜보며 얻는 뭐라 말할 수 없는 뭉클함과 감동이 이제는 거의 없다. 나이 어린 학생들이지만 한 때 나누었던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이웃으로서의 교감도 점점 사라지고 있다. 학원공부가 끝나고 매일 밤 11시가 넘어 귀가해 모자란 잠을 자고, 얼굴에 피곤을 덕지덕지 바른 채 학교수업을 듣는 아이들과의 수업시간, 수업시작 후 20여 분을 넘기지 못하고 여기 저기 조는 아이들을 깨우는 일도 이제는 지친다. 하루 열 시간이 넘는 공부에 치인 아이들의 날카로워진 신경을 잘못 건드렸다가는 봉변당하는 것도 보통이다. 섣부른 선행학습으로 이미 신선함을 잃은 학교수업을 듣는 일이 아이들에겐 또 얼마나 고역이겠는가. 생활비의 1/2에 육박하는 사교육비를 대느라 부모들이 밤낮없이 허둥대는 사이, 아이들은 각종 인터넷 게임에 중독이 되어 가고, 우범지대화 되어버린 공원 등지에서 술과 담배와 놀고, 친구들을 때리고 금품을 갈취하는 무서운 아이들로 변신을 한다. 집단따돌림부터 폭력, 금품갈취까지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는 학생사안으로 학생생활지도에 학부모면담까지 정신없이 가버리는 교사의 하루가 너무 고단하다. 이런 현실엔 아랑곳없이 학업성적부진학생 수를 가지고 학교평가를 하고, 그 결과에 따라 학교간 차등 지급되는 성과급, 이웃나라에서 수 천명이 죽어나가고, 예측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방사능 피해로 전 세계가 떨고 있는 지금, 그래서 국내 과학자들이 당장 올여름 몰려 올 태풍과 함께 닥칠 방사능 오염을 지적하며 정부대책을 촉구하는 뉴스가 나오던 날 ‘원자력...’ 문구가 새겨진 볼펜 한 자루씩 주면서 ‘원자력이 얼마나 안전하고 뛰어난 에너지인지 학생들에게 홍보하라’고 강조하는 교직원회의…. 정신없이 팽팽 돌아가는 학교일상 속에서 아이들에게 치이고, 교육정책에서 소외된 채 영혼 없는 허깨비가 되어 가고 있는 교사들…. 교육정책에 경쟁이라는 시장주의를 도입하면서 가장 힘들어지는 건 학생들이다. 교육의 시장화는 교육의 자율성과 다양성을 해칠 우려가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사진 출처 - 부산일보 요즘 경기도에 이어, 서울에서도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위한 서명이 진행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학생인권!’ 환영할 만한 일이다. 다만, 이 말엔 왠지 학생인권을 위협하는 집단이 다름 아닌 교사라는 인식이 깔려 있는 것 같아 불편하다. 연전에 현 교육감께서 당선되기 전 교사들과의 대화중에 ‘교사인권’ 관련 질문에 대해 ‘수업공간에서 교사는 절대적인 권력자이며, 당연히 절대적 약자인 학생의 인권이 더 중요하다’는 답변을 하신 적이 있다. 완전히 잘못된 말은 아니나, 교사와 학생을 대결적인 측면에서만 바라보고 있다는 아쉬움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학생의 상대는 교사가 아니다. 수업이든 생활지도든 간에 학교의 교실공간에서 교사와 학생의 인권은 하나의 덩어리로 봐야 하지 않을까? 학생의 인권을 침해하는 것은 종이호랑이격인 교사가 아니라, 학생들 밤잠을 재우지 않는 이 사회의 무한경쟁시스템이며, 현장교사의 소리는 묵살한 채 신자유주의 경제논리로 교육정책을 쏟아내는 오만한 교과부관료들이며, 등록금으로 배불리는 사립대학들이다. 지금 학교 현장에서 교사들이 토해내는 한숨과 신음은 교원평가가 부담스러워서가 아니다. 아이들을 체벌할 수 없어서가 아니다. ‘무한경쟁’, ‘평가를 통한 교사통제’, ‘교육의 시장화’ 라는 세 개의 톱니바퀴 속에 갇혀 질식 직전에 있기 때문이다. 영혼 없는 부품으로의 삶을 강요당하다보니 우울하고 불행하다. 교사가 행복하지 않다는 걸 우리 사회가 배부른 투정으로 일축하지 않기를 바란다. 요즈음 힘들지 않은 사람이 없다. 가장 힘든 건 물론 학생들이다. 밤잠을 못자고 해롱거리며 도처에 널려 있는 자극에 빠지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배출하는 아이들. 밑빠진 독에 물 붇는 사교육비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는 학부모. 이미 지쳐있는 학생들과 제대로 교감하지 못하고 교육정책에서 소외된 채, 스스로를 지탱해왔던 교육적 신념을 버려가며 현장에서 이율배반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모습에 고통스러워하는 교사들. 이는 우리 교육이 이제 임계점에 도달했다는 심각한 신호다. 교사와 학생, 학부모가 소생하는 길은 각각 다르지 않다. 하나다. 이제 범사회적으로 우리 경쟁교육에 대해 심각한 논의와 반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340 | 추천: 0
허창영/ 전남대 공익인권법센터 연구원, 전임 간사   현재 광주는 전남대학교에 있는 ‘헌혈의 집’ 문제로 시끄럽다. 중앙일간지에는 잘 소개가 안 되고 있지만 지역 언론에는 연일 관련 기사가 실릴 정도로 ‘뜨거운 감자’다. 급기야 정치권까지 가세해 북구의회가 유감을 표시하고, 시의원이 1인 시위에 나설 만큼 이슈가 되고 있다. ‘전남대학교 헌혈의 집’을 놓고 이전을 요구하고 있는 학교 측과 이전 불가를 주장하고 있는 대한적십자사가 맞서고 있는 것이다. 사정은 이렇다. 전남대학교 후문 쪽에는 1997년에 생긴 ‘헌혈의 집’이 있다. 대한적십자사가 기부채납 방식으로 건물을 지었으며, 전남대는 3년간 무상사용을 허가했다. 이후 2009년까지 3년마다 계약을 갱신해 12년간 무상으로 사용을 해왔다고 한다. 그러던 중 전남대는 2009년 3월 광주전남혈액원에 ‘헌혈의 집’ 반환을 요청했다. 교육, 연구 공간의 부족이 이유였다. 그렇지만 광주전남혈액원이 재사용을 요구했고 전남대는 2011년 4월 30일까지 2년간만 연장을 허용했다. 당시 허가서에는 “학교가 필요하다고 요청할 경우 반환할 뿐 아니라 허가기간이 종료된 경우 원상회복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전남대는 반환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겉으로만 보면 전남대의 요구가 정당한 것으로 보인다. 아니 정당하다. 총장이 직접 나서 ‘정당한 재산권 행사’라고 강변하지 않아도 모두들 동의할 수 있는 사안이다. 그렇지만 이 문제는 그렇게만 판단할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선 학교가 겉으로 내세우고 있는 ‘교육, 연구 공간의 부족’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헌혈의 집은 고작 건평 40평 정도에 지나지 않는 좁은 공간이다. 공간이 부족하다는 말의 진실성을 의심하지는 않지만 이렇게 좁은 곳을 어떤 교육, 연구 공간으로 활용하겠다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대학에서도 구체적인 사용계획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전남대 헌혈의 집 모습 사진 출처 - 뉴시스 또 하나는 그간 전남대가 헌혈의 집을 홍보의 수단으로 잘 활용해왔다는 점이다. ‘전남대 헌혈의 집’은 전국 대학에 설치된 21개 헌혈의 집 중 헌혈 실적이 1위라고 한다. 이에 대해 모 교수는 “5·18정신의 현대적 승화”로 이해하기도 했다. 80년 광주에서 피를 나누었던 것이나 8-90년대에 불의에 저항하고 민주주의와 인권운동에 앞장선 것, 2000년대에 피가 부족한 이웃과 동료들을 위해 헌혈운동에 나선 것 모두 같은 봉사정신의 발로라는 해석도 덧붙였다. 대학이 이런 해석에 동의하는지는 모르지만 대학을 홍보하는데 있어 적극적으로 활용해왔던 것은 사실이다. 총장이 송년사에서 “4년 연속 헌혈 1위라는 영예”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전남대의 교시가 ‘진리, 창조, 봉사’라는 점에서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 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지역에서의 우려의 목소리가 있고, 전남대 구성원 5명 중 4명이 이를 반대하고 있지만 대학의 입장은 강경하다. 총장이 모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반환을 거부하는 혈액원에 대해 “사람이 할 짓거리입니까?”라고 격앙된 어조로 얘기한 것에서 거듭 확인할 수 있다. 물론 그간 전남대의 배려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해왔고, 대학 차원에서 헌혈을 독려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경영대 뒤쪽에 대학 소유의 25평 공간을 대안으로 제시하기도 했다.(그렇지만 유동인구를 고려하면 이는 현실성이 떨어지는 대안이다.) 때문에 이토록 대학이 강경한 이유는 일종의 ‘괘씸죄’일 가능성이 높다. 혈액원은 2011년 4월 30일에 계약이 만료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2년 동안 이렇다 할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러다 지난 3월에 와서야 대학에 재사용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동안 별다른 요청이 없다가 갑자기 재사용을 요구했으니 대학으로써는 뜬금없을 수 있다. 또 혈액원의 태도가 여론의 유리함을 등에 업은 ‘막무가내’로 해석 수도 있다. 그렇지만 좀 더 넓은 시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 지역사회에서의 대학의 공적 역할이니 국립대가 가진 사명이니를 굳이 들먹이지 않아도 된다. 누군가가 지적한 ‘소탐대실’이라는 말이면 충분하다. 헌혈의 집이라는 좁은 공간을 돌려받고 지역사회로부터 외면을 받는다면 전남대가 얻을 것은 무엇인가? ‘헌혈 전국 1위’가 가진 대학의 영예를 어떤 경제적인 가치와 바꿀 수 있는가? ‘봉사’를 교시로 삼고 있는 전남대에 남겨지는 오점을 무엇으로 치유할 것인가? 결국 작은 것을 얻고 큰 것을 잃을 가능성이 높다. 얻을 게 없는 다툼을 끌고 가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전남대의 경고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 ‘참 대학 못났다’라는 말까지 들을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2017-07-12 | hrights | 조회: 336 | 추천: 0
홍성준/ 투기자본감시센터 사무국장   먹튀 VS 변양호 신드롬 한국에서 금융·투기자본의 폐해가 본격화 된지 이미 10년이 넘는다. 그 중 대표적으로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사건이 “론스타게이트”이다. 론스타게이트란 2003년 투기자본 론스타와 인허가권을 지닌 경제관료, 김앤장 법률사무소 등의 전문가 집단이 공모해서 외환은행을 불법적으로 인수한 사건이다. 이미, 드라마나 영화의 소재로도 이 사건은 널리 쓰인다. 이 투기자본 론스타의 외환은행 재매각을 두고 우리사회는 극단적인 두 가지 시각이 존재하는데, 이 두 시각을 대표하는 두 가지 단어도 있다. 하나는 “먹튀”이고, 다른 하나는 “변양호 신드롬(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승인의 책임이 있는 관료-노무현 정권에서 재경부 금융정책국장)”이다. 이 단어들의 생성기원을 보면, 전자는 필자가 활동하는 투기자본감시센터에서, 후자는 삼성재벌 신문인 중앙일보가 만든 조어이다. 먹튀는 금융투기자본이 단기간에 무자비한 방법으로 고수익을 챙겨 시장에서 떠난다는 의미, 분노의 목소리이다. 반면, 변양호 신드롬은 인허가권을 가진 고위 관료가 세상의 비난이 두려워 지닌 권한을 사용하지 않아 시장에서 수익을 남기지 못했다는 의미, 안타까움의 목소리 또는, 다른 한편의 분노의 목소리이다. 상식적으로 볼 때, 전자는 금융투기자본의 무자비한 고수익 축적으로 피해를 입은 대중들이 주로 사용할 것이고, 후자는 고수익의 기회를 놓친 소수의 자본, 금융투기자본들이 주로 사용할 것이다. 대법원 판결보다 투자자 보호! 이제, 론스타가 5조원이라는 천문학적인 먹튀 수익을 챙겨 떠나려는 순간,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동안, 론스타게이트의 불법성에 언제나 면죄부를 내리던 대법원이 이전과는 다른 판결을 낸 것이다. 지난 3월, 대법원(주심 안대희)은 2003년 론스타가 외환카드 주가조작 범죄를 저질렀음을 명확히 밝히고 유죄판결을 내렸다. 그 순간, 모든 것은 명확해 졌다. 은행법 등 관련법에 불법을 저지른 자가 대주주 자격이 없다고 명시되어 있어서, 론스타의 대주주 자격 박탈은 명백한 진실이 된 것이다. 대주주 자격박탈과 강제매각을 내릴 주체인 금융위원회도, 비록 위원장인 김석동과 금융위원인 심인숙이 론스타게이트 주요 책임자 또는 법률 대리인 출신임에도 론스타 먹튀를 승인할 수는 없었다. 그러자, 재미있는 일이 생겼다. 한국 사회 대부분의 언론과 방송은 일제히 “변양호 신드롬”을 말하며, 금융위원회를 질타하고 나섰다. MBC, 조선일보, 한국일보, 매일경제, 머니투데이, 서울경제, 이데일리, 연합뉴스, 국민일보, 이투데이, 아시아경제, 서울신문, 아주경제... 모두 헤아리기도 힘들다. 모두들 금융위원회의 관료들이 대법원 판결을 무시하고 능동적으로 외환은행의 재매각-론스타 먹튀를 승인하지 않아 안타깝다고 한다. 그럼 주가조작을 위해 “사제폭탄”을 투척해도 투자자만 보호되면 된다는 소리인가! 즉, 소수의 자본, 금융·투기자본이 먹튀로 큰 돈 버는 것이 대한민국 대법원 판결보다 우선하는지 밝혀야 한다. 아울러, 이완용은 자신이 지닌 “애국의 소신”이 한일합방이었다는데, 그의 정책결정을 가속화한 일진회 100만 회원의 여론 조작과 이들 언론과 방송의 행태가 무엇이 다른가? 다른 무엇보다, 다수 대중이 아닌 고수익을 챙길 소수 자본-론스타, 론스타 투자 한국인, 하나금융 등을 대변하는 그들은 대중 언론인지, 아니면 금융·투기자본의 대변인인지를 답을 해야 한다! 나찌에 부역한 세력을 청산하는 과정에서 드골이 가중 처벌한 대상이 언론과 지식인이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 이유는 세상 그 어떤 압제보다 민중에게 가장 큰 해악은 정신을 오염시키는 것 때문이다. 변양호 신드롬 운운하는 언론과 방송은 이 세상 그 어떤 오염물질 보다 강력한 독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서울 명동 외환은행 본점 모습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사이비 진보와 무식한 진보 그리고, 또 하나의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 전에도 투기자본 론스타 먹튀를 옹호해왔던 김상조 교수(경제개혁연대 소장)가 보수지인 조선비즈(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또 한 번의 그 “소신”을 밝혔다. 언제나처럼, “론스타가 팔고 나가게 하는 게 국익에 도움”이라고 했고, 먹튀를 중단시킨 금융위원회를 비겁하다고 맹비난했다. 김상조 교수의 그런 소신은 솔직히 놀랍지도 않다. 이것이 그와 그의 단체의 일관된 주장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참여연대에 있을 때인 2006년도부터, 론스타가 천문학적인 먹튀 수익을 챙기고자 벌린 재매각 협상이 있을 때마다 그러했다. 그 뿐이 아니다. 론스타게이트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대표적인 투기자본 문제인 쌍용차 사태에도 같은 입장을 밝혔다. 기술유출 방지방안 마련이 외국인 투자를 막는다고 반대 했다. 이것은 우리센터의 노력이나 시민사회 분노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의 문제일 뿐 아니라, 지금까지 모두 15명의 무고한 생명을 죽음에 이르게 한 쌍용차 사태를 외면하는 행태이다. 같은 사례는 찾으면 많다. SK-소버린 사태에서도 투기자본인 소버린을 대변 아니, 법률적으로도 대리하였다. 이처럼, 그와 그의 단체의 오류는 찾을수록 발견된다. 아무튼, 이제 다시 한번 더 나서서 론스타 먹튀를 옹호하고 있는데, 시민단체, 시민운동가의 금도를 이미 넘어 섰다고 판단되어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그와 그의 단체가 전문가로 유명세를 타고 진보로 자처한 것은 금융•투기자본의 문제가 미국 월가의 일로 치부하는 우리사회의 무지 때문이다. 특히, 진보진영이라고 불리는 단체와 개인 명망가들의 책임이 크다. 그와 그의 단체의 본질은 그냥 신자유주의 금융화로 무장하고, 주주자본주의를 옹호하는데 있다. 삼성재벌을 비판하고 있지만, 그들이 삼성 노동자들의 권리나 원하청 관계를 통한 수탈의 문제로 고민하고 싸운 적을 본 적이 있는가! 이건희-이재용의 불법상속으로 손해를 입은 다른 주주-외국인 주주(삼성전자는 50%에 육박)를 위해 싸운다는 판단은 왜 못하는가! 그들과 관련된 “소액주주운동”을 통해, 실제로 재벌의 지배구조 개선 성과는 물론, 노동탄압의 문제, 반사회적 영업의 문제를 제기했다는 말을 아직 듣지 못했다. 하지만, 모두 진실을 외면하였다. 오히려, 그들과 함께 사진 찍는 것을 즐겼고, 진보언론매체는 지면을 아낌없이 할애하였고, 진보정당은 주요 간부로 임명하며 자랑하였다. 부끄러운 일이다. 또한, 잘못이다. 정말 몰라서 그랬다면 묻고 배워라! 하지만, 몰라서 묻고 배우는데, 상대를 불쌍한 피해대중과 소위 유명한 전문가를 구분하는 태도는 오만한 엘리트주의일 뿐이다. 필자의 기억으로는 쌍용차 사태를 다룬 진보적인 방송-PD수첩 등에서도 사태 원인-투기자본 상하이차 자체를 다룬 것을 본적이 없다. 그냥, 쌍용차 노동자가 불쌍하다는 인식을 드러낸 방송만을 주로 접했다. 오히려, 경제 전문가들은 누구인가? 아마도, 지금의 경제체제 하에서 존재하는 이데올로그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대안이라는 것도 현 경제체제 하에서 이미 (타국에서) 허용되는 법제도이거나, 현재의 대주주에서 다른 대주주로 주인을 바꾸자는 수준의 주장일 것이다. 이는 현재의 경제체제-금융·투기자본의 폐해는 피해대중이 더 잘 알지 경제학 교과서에 있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론스타와 김앤장, 그리고 경제관료들의 투기동맹을 조사하고 책까지 낸 사람은 외환카드의 해고 노동자였다. 상하이차가 먹튀 방식으로 회계를 조작하고 정리해고를 한 것을 최초로 밝힌 사람은 77일 파업으로 감옥에 있던 50대의 고졸 학력의 쌍용차 생산직 노동자였다. 결코, 많이 배운 교수나 TV출연이 잦은 전문가가 아니다! 자칭 진보라면, 이들을 과격하고 조야하다 말고 이들 피해대중의 경험과 소망에서 배워라! 그것이 아니라면, 그런 진보 또한 혹세무민(惑世誣民)일 뿐이다! ※ 이글은 금융위원회의 론스타 대주주 적경성 심사유보 결정 후, 필자가 속한 단체의 두차례 촌평(필자 집필)을 기초로 쓰였음을 밝힙니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339 | 추천: 0
임아연/ 한밭대 학생     한 여자가 찾아왔다. 친구 집에서 홈스테이를 시작한지 며칠 지나지 않아 이웃이 나를 찾아 온 것이다. 이제 겨우 스물 두 살이라던 그는 다짜고짜 내게 한 남자의 사진을 보여줬다. 남자는 얼핏 봐도 나이가 꽤나 있어 보이는 한국인이었는데, 얼마 전 그와 결혼했다며 곧 남편이 데리러 오면 한국에 가서 함께 살 작정이라고 했다. 궁금한 것이 많은 듯 내게 한국어 몇 마디, 한국 문화 몇 가지를 물어 보는 얼굴엔 온통 한국으로 간다는 설렘과 들뜸으로 가득했다. 갑작스레 찾아온 그에게 나는 축하한다든지, 앞날을 축복한다든지 하는 행복을 빌어주는 말을 하는 것보다 걱정스러운 마음이 앞섰던 게 사실이었다. 남편이 몇 살이냐, 어떻게 만났냐, 남편이 영어나 타갈로그어를 좀 할 수 있느냐 등을 꼬치꼬치 물었던 건 한국에서 살고 있는 이주 여성들이 겪는 문제를 도무지 떨쳐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필리핀 처녀와 결혼하세요' 따위의 현수막을 보게 될까봐, 아니 그걸 읽고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게 될까봐 노심초사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가 꽃다운 청춘을 40대 남자에게 판 건지 어쩐 건지는 내게 솔직하게 털어 놓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는 일이나 기분이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사람을 사고파는 것은 이미 역사책 속에서 노예제도 철폐 이후에 끝난 일처럼 그려진다. 하지만 이 말도 안 되는 비인간적 행위들이 모양새를 바꿔 한국 사회 곳곳에서 아직도 일어나고 있는 것은 정말로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계급에 따른 봉건 질서가 막을 내린 이후 하늘 아래 모든 사람이 평등해졌다고 말하면서, 미국이나 유럽의 소위 선진국 여성이 아닌 필리핀과 같은 동남아시아 제3세계 국가 여성들만 상대로 거래(?)하는 것만 봐도 자본에 따른 권력이 작용 했다는 걸 알 수 있지 않은가? 다문화가정 합동 결혼식 모습 사진 출처 - 연합뉴스 백번 양보해서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일은 서로 인연이 닿으면 어떻게든 만나게 되는 것이라고 치자. 그래서 그들의 만남이 알선을 통해 이뤄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해도 이렇게 돈 주고 사들인 '사람'을 말이 안 통한다며 무시하고, 화풀이 대상으로 삼아 때릴 수도 있다는 데에 문제가 또 다시 발생한다. 마치 비싼 돈 주고 사들인 물건이 생각보다 맘에 들지 않을 때 보이는 반응처럼 돈을 지불한 만큼 제 값을 하길 사람에게 바라는 형국이 되고 만다. 더 이상 인간은 존재만으로 가치가 있지 않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 자본과 권력에 따른 불평등, 비인간적 행위, 인간 존재가치의 추락을 보여주는 일들이 비단 이것뿐이겠냐 마는 몇몇 필리피노들이 내게 들려주는 생생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더 마음이 쓰라렸던 건 이들이 생각해온 한국에 비해, 이들이 경험한 한국이 더없이 초라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한류 문화의 영향으로 포장되어 만들어진 한국의 이미지보다, 그래서 그들이 코리안 드림을 꿈꾸는 한국보다 실제로 부딪혀 경험했던 한국은 아직도 사회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너무나 낙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종종 집 근처에서 마주치던 그가 더 이상 보이지 않았을 때 이미 한국으로 떠났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아직 앳된 얼굴엔 한껏 기대감에 부풀어 생글 거리던 미소로 가득했었다. 철모르고 마냥 좋아하던 그에게 만큼은 뉴스에서 마주치던 이주 여성들의 문제가 피해가기를, 내가 걱정했던 부분들이 한낱 기우였기를 바라본다. 부디 여느 새댁들처럼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부디.
2017-07-12 | hrights | 조회: 342 | 추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