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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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김성은(서울신문 기자), 김태형(프리랜서 방송작가),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박용석(출판업),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춘천별빛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이동화(아디 사무국장),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송채경화/ 한겨레 기자   요즘 국정원 국정조사,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실종 사건 등으로 어느 때보다 바쁜 일상 중에서도 수요일과 목요일엔 칼퇴근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드라마 <너의 목소리가 들려>때문이다. 여기서 다루는 법정 사건 가운데 특히 지난주 목요일에 방송됐던 피의자 황달중과 관련된 재판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아내를 토막 살인한 죄로 26년을 복역한 뒤 감옥을 나온 황달중은 ‘살아있는 아내’를 만나자 홧김에 깨진 꽃병조각으로 아내의 목을 그었다. 26년 전 아내를 죽였다는 누명을 쓰고 억울한 감옥생활을 한 황달중에게 또다시 아내에 대한 살인미수죄를 적용할 수 있는가가 이 재판의 핵심이었다. 검사측은 이렇게 주장했다. “피고인은 억울한 수감생활을 했지만 그 판결이 유감스럽다는 이유로 선처를 바라면 안 된다. (황달중을 살인범으로 몰고 간 아내의 죄는 폭력이 아닌) 법으로 단죄함이 옳다”고. 이런 검사의 주장에 국민참여재판에 참석한 배심원들의 절반 이상이 수긍한다. 그러나 황달중의 변호인인 장혜성 변호사(이보영 분)가 최후변론을 하면서 배심원 전원이 ‘무죄’로 마음을 돌린다. 장혜성은 “피고인에게 법은 무엇이었을까. 무고하게 감옥을 살게 한 게 법이었다. 그런 피고인에게 또 다시 법을 강요한다. 만일 여러분이라면 그 법을 따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오늘 이 재판은 피고인의 유무죄를 가리는 재판과 동시에 사법부의 유무죄를 가리는 재판이다”라고 호소한다. 모든 걸 ‘정치적 상황’에 대입시키는 버릇이 있는 정치부 기자가 보기엔 이 드라마의 상황도 현재의 정치상황과 여러모로 비슷하게 느껴진다. 국정원 여직원 댓글 사건,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실종 사건으로 혼란이 가중되고 있는 정치권에 대해 국민들이 느끼는 신뢰감은, 황달중이 사법부에 느끼고 있는 신뢰감처럼 거의 ‘제로’에 가깝다. 60년이 넘는 세월을 정치인들에 속아온 국민들은 최근 국정원 사태로 인해 이런 사실을 더욱 뼈저리게 깨달으며 진저리를 치고 있다. 평소 정치에 별 관심 없었던 친구는 최근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올렸다. “오늘 신문을 보며 몸이 떨리고 닭살이 돋았다. 차마 무서워서 끝까지 못 읽겠다. (정치인들이) 정치라는 의미를 알고 있기나 하냔 말이다.” 상황이 이렇다는 걸 알기는 아는지 여야는 최근 “국민들이 짜증낸다”며 ‘NLL 논란 종식’을 외치고 있다. 그러나 국민의 신뢰를 떨어뜨린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반성은 전혀 없다. 그동안 새누리당은 국정원 여직원 댓글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보다 새누리당에 불리한 사태를 막기에 급급해왔다. 민주당이 이 사태에 대한 국정조사를 요구하자 새누리당은 “3권 분립이 엄연히 있는데 국정조사를 칼처럼 휘두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내뺐다. 그러나 김무성 새누리당 의원이 대선 당시 국정원이 갖고 있던 정상회담 대화록을 입수해 이를 선거에 이용했다는 내용이 보도되자, 새누리당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국군 통수권자로서 올바른 품격을 지켰는지 ‘NLL 국정조사’를 하자”고 공세를 가했다.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정상회담 대화록 실종 사태에 대해서도 애초에 “여야 합의로 검찰에 고발하자”던 새누리당이 불과 며칠 만에 여당 단독으로 검찰에 고발한 것도 ‘진실 규명’ 차원이라기보다는 ‘정치공세’에 가깝다. 이에 대해서는 민주당도 마찬가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에서 ‘NLL 포기’ 발언을 했다는 새누리당의 공세가 강해지자 문재인 의원은 “국가기록원에 있는 정상회담 대화록을 열람해 확인하자”고 제안했다. 국가기록원 대통령지정기록물은 국회 재적 의원 3분의2 이상의 찬성 의결이 이뤄져야 열람이 가능할 정도의 ‘일급비밀’에 해당한다. 공개될 경우 앞으로의 국가 외교에 상당한 차질을 불러올 수 있는 국가기밀을 단지 노 전 대통령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또는 약세로 밀리던 민주당이 주도권을 쥐기 위해 공개하자고 주장한 것은 국가이익보다는 당리당략을 앞세운 결정이었다. 공개될 것으로 믿었던 정상회담 대화록이 실종되자, 애초 “국정원이 공개한 대화록은 원본이 아니다”라고 했던 주장을 뒤집고, “국정원 대화록을 원본이라고 치고” 남북정상회담 관련 사전·사후 문서를 우선 열람하자고 주장한 것도 어이가 없는 행동이었다. 드라마 <너목들>의 한 장면. 26년 전 잘못된 판결로 황달중을 억울하게 감옥에 보낸 서대석 판사는 그 책임을 당시 검사와 변호사에 돌리며 끝까지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사진 출처 - SBS 정치권이 이런 모습을 보여주면서 국민들에게 “정치를 신뢰해 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는 사법부의 잘못된 판단으로 26년간 옥살이를 한 황달중에게 “법을 신뢰하라”고 말하는 것과 얼마나 다를지 의문이다. 정치권이 국민의 신뢰를 받으려면 잘못을 인정하고 바로잡으려는 노력이 필요하지만 그들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너목들>에서 26년 전 잘못된 판결로 황달중을 억울하게 감옥에 보낸 서대석 판사는 그 책임을 당시 검사와 변호사에 돌린다. 판결 직후 황달중의 아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으면서도 26년 동안 은폐한 것에 대해서는 끝까지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26년 뒤 진실이 드러나고 자신의 가족들에게까지 외면받는 서대석 판사는 끝까지 “내가 뭘 잘못했어?”라며 무표정을 유지한다. 나는 이 장면에서 권력을 움켜쥔 자들에 대한 서늘한 두려움을 느꼈다. 상대방만 물어뜯으며 자신에 대한 반성은 찾아볼 수 없는 여야 정치 지도자들의 얼굴과 서대석 판사의 얼굴이 겹쳐지는 대목이었다. 서대석 판사의 입양 딸이며 황달중의 친딸인 서도연 검사는 이 재판으로 인해 잘못을 인정하는 법을 배운다. 서도연은 재판 뒤 어릴 적 친구인 장혜성 변호사에게 말한다. “11년 전에 널 범인으로 몰았던 것 미안했다. 아마 나도 아버지처럼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걸 인정하기 싫었나보다. 틀린 걸 인정하지 않는 게 얼마나 끔찍한 건지 오늘 알았다. 사과한다. 진심으로.” 이 장면에서 시청자들은 그동안 악역을 맡아왔던 서도연 검사를 용서했다. 정치권이 국민들의 용서를 바란다면 통렬한 반성과 진심어린 사과가 먼저다. 상대방에 대한 반성과 사과를 외치다보니 문득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언론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장혜성 변호사의 최후변론 같은 역할이 아닐까. 장혜성 변호사는 극중에서 피의자를 변호하는 입장이었지만, 그가 배심원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진실과 정의를 앞세웠기 때문이다. 정치권이 혼란스러울수록 언론으로서 올바른 판단을 통해 독자들에게 진실을 알리는 역할이 더욱 중요함을 깨닫는다. 그런 의미에서 “무서워서 신문을 끝까지 읽지 못 했다”는 친구에게 사과의 말을 전한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373 | 추천: 0
이동화/ 민변 국제연대위 간사   2007년 9월 버마(미얀마)에서 들려온 군부독재에 의한 잔인한 시위진압소식은 한국의 많은 시민사회 운동단체들의 관심과 우려를 불러왔다. 기름값 인상으로 촉발된 시위는 그동안 군부독재에 대한 불만들과 융화되며 거침없이 커져갔고 버마에서 존경받는 승려 분들이 시위에 가담하면서 시위는 전국화 되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군사독재정권이 그러하듯이 버마 군부독재는 무자비한 공권력을 사용하여 시위를 진압하였고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는 안타까운 결과를 낳았다. 당시 내가 활동하는 단체들뿐만 아니라 시민사회단체들, 한국 내에서 오랫동안 활동을 이어왔던 버마인들의 단체(버마 NLD 한국지부, 버마행동 등)들까지 한 자리에 모여 서울 광화문과 버마대사관 앞에서 촛불시위 및 수차례의 기자회견과 공동행동을 하며 버마민중들의 항쟁에 연대하였다. 당시 기억으로 이렇게 버마단체들과 한국의 시민사회가 공동의 활동을 하기는 처음이 아니었나(개별단체들의 연대활동은 제외하고) 싶다. 시간이 흘러 공동의 연대활동은 이제 네트워크 방식으로 전환되어 근근이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수준이다. 이 부분은 어쩔 수 없는 현실적인 모습이지만 안타까운 모습이기도 하다. 지난 2007년 10월 2일에 진행한 38차 Free Burma Campaign(korea) 모습. 시민사회 각계 인사들과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버마 민주화 활동가들이 버마 민중학살 규탄과 민주화 지지 긴급행동(버마긴급행동)을 출범하여 한남동 버마대사관 앞에서 버마민중 학살중단과 군부퇴진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내가 활동하는 민변 국제연대위는 2007년 버마이슈를 시작으로 중국의 탄압을 받는 티벳, 활동가들과 종교인에 대한 정치적 살인이 만연한 필리핀, 내전으로 고생하는 스리랑카 등 이슈가 발생하는 순간에 연대활동을 하기 위해서 의미 있는 시도를 했었다. 아시아지역 국가들 중에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자리 잡은(형식적으로나마) 한국 단체입장에서는 여러 측면에서 아시아 국가의 인권상황에 목소리를 내려 했었고, 경험이 많지는 않지만 버마의 경우처럼 공동 연대활동도 진행했다. 그리고 단체 내에서 그 목소리와 활동력을 더 높여야 함에도 2008년 이명박 정권 출범이라는 정치지형이 변화하면서 민변 내에서 뿐만 아니라 시민사회 진영 내에서도 국제연대는 다시금 한국의 상황을 밖에 알리고 연대를 요청하는 상황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솔직히 내 코가 석자다 보니 국외의 이슈를 제대로 챙기기 어려웠다는 그럴듯한 변명을 할 수는 있지만 낯 뜨거운 변명이다. 이런저런 이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단체 내에서 시작된 의미 있는 시도에 지속적인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담당자의 잘못이 가장 크다. 그런 이유로 민변 국제연대위 내에서 2012년 후반부터 아시아인권 상황만을 다루는 아시아인권연대팀을 발족하였고, 그 첫 번째 국가로 버마를 선택하였다. 버마를 왜 선택하였는지는 딱히 선명하지는 않지만 이전의 경험 때문일 것이다. “그래? 그럼 너희들 뭐할래?” 라며 주변에서 많이 물어본다. 관심 있어 하는 민변 소속 변호사뿐만 아니라 주위 단체 활동가들이 물어본다. 심지어 지금 버마에 뭔가를 하러 왔는데 그런 질문을 많이 받는다. 사실 좀 곤혹스럽다. 팀 만들 때 활동계획과 목적을 담은 설립안, 버마현지활동을 위한 기획안 등을 대강 끼적거렸지만 솔직히 잘 모르겠다. 아니 사실 무엇을 할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다. 어쩌면 별로 할 수 있는 게 없을지도 모르겠다. 비싼 비행기 표를 지불하고 버마 현지까지 날아왔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돌아갈 수도 있다. 그래도 나름 위안해주는 말이 있어 참 좋다.^^ ‘시작이 반이다.’ㅋㅋㅋ 일전 중동지역에 잠깐 있을 때 말버릇처럼 되뇌었던 표현이 있는데, ‘직접 봐야 마음이 동하고 마음이 동해야 움직일 수 있다. 머리로 생각하지 말고 가슴으로 느껴 손과 발을 움직이자’ 라는 나름의 각오였다. 한국도 여전히 민주화되었네 인권이 어쩌네 하고 요란한데 여기 버마라고 아니 한국보다 훨씬 열악한 아시아지역 국가들의 상황이 어느 한 순간 바뀔 리가 없다. 중요한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있는지? 그들과 함께 하고 있는지? 라는 질문에 나와 내주변의 사람들이 답을 할 수 있느냐? 이다. 마음과 머릿속을 좀 더 경쾌하게 하여 가벼운 발걸음으로 이곳에서 오랫동안 활동하고 있는 이들의 의견을 먼저 들어봐야겠다. 그들의 의견을 듣고 경험을 경청하며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정도를 타진하는 것이 이번 버마방문의 최종과제가 될 것이다. 그래도 잘 되어야 할 텐데..^^
2017-07-12 | hrights | 조회: 293 | 추천: 0
홍성준/ 투기자본감시센터 사무처장   최근, 내가 속한 투기자본감시센터(이하, 우리센터)에서는 중국을 방문하는 박근혜 대통령을 향해 비판적인 논평을 낸 바 있다. 물론, 박 대통령이 중국을 국빈자격으로 방문하는 것은 여러모로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평가한다.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도, G2라는 경제대국과의 교류를 위해서도, 수천 년 문화대국과의 “인문”교류를 위해서도 그의 방중은 의미가 있다. 한국 대통령으로서는 최초로 시황제의 병마용갱(兵馬埇坑)을 방문하는 것도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었다. 우리센터의 비판 요지는 이렇다. 이번 중국 방문이 마음과 믿음을 쌓아가는 여정이라는, “심신지려(心信之旅)”라는 아름다운 슬로건도 좋지만, 쌍용차 해고 노동자 등, 중국 자본으로부터 고통을 받은 국민들의 마음도 고려해 달라는 것이다. 중국 자본의 먹튀에 대해 책임을 따져 묻고, 재발방지를 요구해야 한다. 그전에는 믿음도 마음도 없다!.. 등등의 내용이다. 주지하다시피, 2009년 상하이차(上海汽车)의 먹튀로 발생한 “쌍용차 사태”로 수십 명의 쌍용차 노동자들이 죽었고, 수천 명의 해고자를 양산했으며, 77일 파업과 대량구속으로 평택이라는 지역사회와 한국 사회 전체가 감내한 고통은 너무도 크다. 2006년, 우리센터는 당시 노무현 정권의 쌍용차 중국매각을 반대하였고, 완성차기술이 무단으로 중국 상하이차로 도용되고 있음을 폭로하였으며, 이를 검찰 고발한 이래로 쌍용차 사태에 개입을 해왔다. 지금까지, 이 사태를 주시하여 내린 결론은 쌍용차 사태의 주범은 대한민국, 국가이다. 정치권과 시민사회, 당사자인 노동자들의 반대를 억압하고 무분별한 매각을 강행한 당시 정권, 상하이차에게 대출을 해주어 채권단과 맺은 “특별협약”을 무력화시켜 쌍용차의 부실과 기술유출을 방치한 산업은행, 상하이차에 대한 고발을 묵살한 검찰, 상하이차의 회계조작을 통한 고의 부도를 묵인하고 대규모 정리해고를 승인한 파산법원, 상하이차와 결탁한 대형 회계법인과 쌍용차 경영진, 쌍용차의 완성차 기술을 훔쳐 중국에 넘기고 일신의 영달을 차지한 연구소 임원들, 이에 저항하는 노동자들을 무력진압하고 또다시 수상한 인도 마힌드라 자본에게 쌍용차를 재매각한 이명박 정권 등, 모두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국가기관들과 사회적 권력자, 전문가들, 쌍용차 내부의 권력자들이 총체적으로 모의해서 저지른 것이 쌍용차 사태이다. 하지만, 한국만 그런 수준의 국가범죄로써 쌍용차 사태를 저지른 것은 아니다. 쌍용차 사태는 중국의 국가범죄이기도 한다. 작년 9월 국회에서 공개된 외교문서를 보면, 쌍용차 사태에 대한 중국의 책임을 확인할 수 있다. 상하이차의 불법적인 기술유출로 검찰 수사망이 좁혀오자 상하이차가 조기철수를 한 것인데, 상하이차 뿐만이 아니라 상하이시, 상무부 등 중국정부가 그 철수를 결정한 것이 드러난 것이다. 그리고 한국은 그 상하이차의 철수를 협조한 것이다. 무수히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말이다. 이렇듯 쌍용차 사태의 책임이 1차적으로 중국에게 있는 것이다. 과거에도 같은 일이 있었다. 2006년 상하이차가 쌍용차를 인수한 직 후, 한국을 방문한 당시 상무부장 보시라이(薄熙來)가 정세균 당시 산업자원부 장관에게 인수에 반발하는 노동조합 단속을 요구한 바도 있었다. 보시라이는 부패독직, 부인의 암살 혐의, 유명 여배우와의 성추문으로 실각해서 온 천하를 떠들썩하게 만든 그 중국 정치인이다. 중국은 상하이차의 범죄에 대해서 지금도 비호하고 있다. 수원지방법원 평택지원에는 우리센터가 앞장서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장이 3년 넘게 그대로 묻혀 있다. 내용은 대주주인 상하이차로부터 다른 소액주주(쌍용차 노동자)와 회사(쌍용차)가 큰 손해를 입었으니, 회사인 쌍용차에 손해배상을 해달라는 것이다. 이 사건을 대리한 이는 우리센터 공동대표인 이대순 변호사이다. 그에 따르면, 2009년 소송을 하고 재판은 한번인가, 열리고 지금까지 휴정상태이다. 이유는 중국의 오만과 억지 때문이다. 처음에는 송장의 원고인 한국사람 이름이 중국의 한자가 아니라 한글인 것이 문제가 되었다. 원고 “홍길동”은 자기들이 못 알아보겠으니, 한자인 “洪吉童”으로 바꿔오라는 것이다! 김정우(현 쌍용차노조 지부장, 구속) 외 1,779명의 사람 이름을 한자로, 그것도 현재 중국에서 쓰는 “간자체”로 옮기느라 참 힘이 들었었다. 그래도, 피해 노동자를 생각해 어려운 작업 끝에 송장을 다시 제출했더니, 이번에는 주소가 상하이차로 해서는 안 되고, 상하이차 총재 천홍(陳虹) 외 13명의 개별 주소로 각자에게 송장을 보내라는 것이다. 작은 시민단체인 우리센터가 무슨 수로 타국의 그들 개인 집주소를 파악한단 말인가! 한마디로 중국이 쌍용차 재판을 거부하고자 오만부당하게 억지를 부리는 것이다. 물론, 이런 말 같지 않은 이유를 우리에게 전달하고 재판을 열지 않는 판사도 한심한 자이다. 여기서 우리가 중국을 좀 더 이해할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상하이차는 중국의 국영기업(중국식으로는 국유기업)이다. 중국의 국영기업은 한국의 그것과는 다르다. 흔히 중국을 일체화된 중국공산당의 지배를 받는 “당정국가”, “일당독재”라고 한다. 중국의 총리와 장관은 모두 중국공산당 당원이며, 당에서 선출하고, 당에 책임을 진다. 중국의 공무원과 군대도 중국보다는 당에 충성을 한다. 국영기업들도 당의 것이다. 국영기업의 임원은 모두 당원이며, 당에서 선출을 하고, 당에 충성을 한다. 중국 4대 국영기업이라는 상하이차 총재는 장관급이라고 한다. 또, 현장의 노동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불법유출이 된 쌍용차의 완성차기술도 상하이차만 가지는 것이 아니다. 국가기관인 ‘중국과학원(Chinese Academy of Science , 中國科學院)’으로 쌍용차에서 훔친 기술이 보내지고, 거기서 검토한 후 중국 전체 자동차 산업계로 보내어진다고 한다. ‘메이드 인 차이나(made in china)’로 둔갑을 해서 말이다. 따라서 쌍용차 사태는 처음부터 고도의 음모로 진행된 상하이차와 중국의 먹튀이고, 국가 범죄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들의 목적은 중국은 쌍용차의 완성차 선진기술의 획득이고, 투자 미이행으로 동종의 경쟁업체인 쌍용차 부실, 나아가 쌍용차의 숙련 노동자의 대량해고로 국제 경쟁력 상실일 것이며, 이를 어느 정도 실현했다고 생각된다. 역사상 이와 유사한 일이 있었다. 18세기 인도 무굴제국이 내전 등으로 약화되자 영국 제국주의가 동인도회사를 앞세워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벵골지역을 장악했다. 당시 벵골지역에는 거대한 곡창지대였으며, 중국 양주(楊州)와 함께 세계시장에서 독점적인 경쟁력을 지닌 면방직(모슬린) 산업이 성업 중이었다. 영국의 제국주의자 입장에서는 산업혁명기 자국 면방직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인도의 모슬린 산업을 파괴해야 했었다. 그래서 모슬린 공장을 해체하고 직조기를 파괴했다. 더욱이 모슬린 산업을 영구히 파괴하기 위해 모슬린 제작 숙련노동자들의 모든 손을 자르는 야만적인 짓을 저질렀다. 이후, 인도의 모슬린 산업은 붕괴되었고, 영국산 면방직 제품만 인도와 세계에서 유통되었다. 이 제국주의 야만의 사건과 쌍용차 사태는 매우 유사하다. 중국의 행태는 다른 나라를 침략해서 그 나라의 전통산업을 붕괴시키고 식민지 수탈경제로 전환시키는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을 연상시킨다. 영국 = 중국, 동인도회사 = 상하이차(上海汽车), 무굴제국 = 한국, 벵골 모슬린 산업 = 쌍용차, 손목 잘린 노동자 = 정리해고된 쌍용자동차 노동자... 딱, 이런 사건이다. 이것이 바로 제국주의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쌍용차뿐만 아니라 LCD생산을 하는 경기도 이천의 하이디스에서도 중국 국영 자본, BOE에게 먹튀를 당한 바 있다. 또, 중국 자본의 아프리카 자원 약탈과 미국 등 선진국에서도 기술유출을 우려하는 국제사회 목소리도 높다. 따라서 박근혜 대통령이 한국의 대통령이라면, 한중FTA 협상 운운하며, 중국 자본의 더 많은 투자를 더는 입에 담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도, 마음과 믿음이 쌓인다는 헛소리는 말아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6월 28일 오후 베이징 조어대에서 열린 리커창 중국 총리와 면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박근혜 대통령은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의원시절 “산업기술 유출방지법”을 발의한 그 때의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물론, 그 법의 맹점은 많다. 무엇보다, 세계 13위의 경제 규모와 분야, 1800여 기업에 이르는 상장기업 숫자에 비해 턱없이 적은 규모를 보호한다는 것이다. 결국, 일부 대기업의 몇몇 기술보호에 그치고 있다는 것이 한계이다. 하지만, 삼성의 스마트폰 시장 선점을 위한 국제 소송 전에서 보듯이 초국적 대기업들은 스스로를 지킬 힘이 있다. 문제는 자신들의 기술을 해외 투기자본의 적대적 M&A로부터 지킬 어떤 수단도 강구하지 못할 수준의 기업에 대한 대책이다. 동종업계의 후발업체나 정체불명의 사모펀드, 투자은행 등 투기자본은 경영권에 접근할 수준의 주식취득 자체를 막아야 한다. 이들의 목표는 경쟁업체의 몰락이나 이미 국제시장에서는 경쟁력을 잃었지만 자국과 일부 시장에서는 경쟁력이 있는 선진기술을 노릴 것이다. 특히, 신흥 경제 강국인 중국, 인도, 러시아 등의 동종업체에 대한 주의가 필요하다. 또, 언제나 중요한 것은 그 투자를 심사하는 경제관료에 대한 주의와 감시도 필요하다. 끝으로, 몇몇 핵심기술 규정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기술인력에 대한 보호조치”이다. 숙련노동자에 대한 정리해고도 사회적 비극이고, 기술개발 인력의 해외유출도 막아야 한다. 특히, 정리해고의 문제는 노동‧인권의 문제이지만, “산업보호”라는 관점에서도 중시되어야 한다. 이 문제는 “소비자 후생”과도 관련이 있는데, 국내의 숙련노동자들에 의한 생산이 중단되고, 해외의 미숙련 노동자들에 의한 생산은 “도요다 리콜”사태를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은행과 주요 기업에 대한 무분별한 “해외 매각정책”의 폐기이다! IMF외환위기 사태이후, 김대중 정권과 그 이후 정권들은 주요 기업과 은행 등에 대한 해외 매각정책을 추진하였다. 2011년 9월 현재, 상장 기업의 외국인 소유 지분은 평균 30%이고, 국내 대표 기업인 삼성전자도 외국인 지분은 절반을 넘긴 51% 수준이다. 금융기관은 더 심하다. 2012년 10월 현재, 4대 금융지주사 가운데 정부가 1대 주주인 우리금융(24%)을 빼고, KB금융(65%), 신한금융(63%), 하나금융(65%)의 외국인 지분이 모두 60%를 넘는다. 대부분 정체불명의 사모펀드나 투자은행인 경우가 많다. 즉 “투기자본”이다. 문제의 심각성은 그 자들은 자본시장을 넘어 주요 기업과 은행에서 대주주로서 책임 있는 경영이나 사회 공공성을 훼손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반대로 단기적이고 투기적 수익, 먹튀에 몰두하고 있어 반사회적이고 반노동자적인 경영의 위험은 계속 증대되는 것에 있다. 다른 말로, “재무적 투자”라고도 한다. 기업의 가치나 성장을 목적으로는 하는 “전략적 투자”와는 상반된 개념으로 오로지 빠른 시간 내에 투자차익만을 목적으로 한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계속 기업을 운영하고 한국에서 영업을 할 이유는 투기자본에게는 없다! 오로지, 단기 고수익이 필요할 뿐이기 때문이다. 특히, 제조업은 쉽게 투기자본의 먹잇감으로 노출된다. 고용된 정규직 노동자가 많으니 정리해고 할 때마다 주가상승 등 수익이 발생하고, 공장부지 등 보유 부동산이 많으니 매각할 때마다 현금은 쌓이고, 생산량에 딱 맞는 소비시장이 안정적으로 있으니 그에 따른 수익과 주식가치는 보장된다. 더욱이 해외시장까지 확보하고 있다면, 정부(중앙 또는 지방)의 세제나 보조금 지원기간도 끝난다면, 그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먹튀를 한다. 국내 사업장을 청산하고, 인건비 싸고, 구조조정이나 투기자본의 경영행태에 반대하는 “민주노조”가 없는 해외로 생산 공장을 이전한다. 또, 이미 시장에서 기술적 우위를 보유한 경우가 많아 생산기술의 불법유출시 보너스로 엄청난 추가 수익을 볼 수도 있다. 최근의 불황도 이런 폐해의 반복에서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의 기업은 자본가의 것만이 아니라 노동자, 소비자, 지원해준 정부, 모두의 것이다. 이런 자본가의 배신은 반드시 규제되고 처벌되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산업보호 일 것이다. 그래도, 남는 것은 이미 피해를 입은 노동자와 시민들에 대한 구제이다. 중국에게도 강력하게 쌍용차 사태의 책임을 물어야 하며 재발 방지를 요구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한국의 범죄부터 단죄된 후 가능할 것이다. 쌍용차 사태의 책임자들에 대한 처벌과 피해 노동자들에 대한 배상을 요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정조사와 같은 진상규명이 선행되어야 한다. 결코, 정리해고 당한 노동자나 자살한 노동자가 불쌍하니 이들을 구제해 달라 식의 태도는 쌍용차 사태의 진정한 해결이 아니다. 또는, 다시 쌍용차가 예전의 생산력을 복구했으니 현재 경영진이 선처를 해서 해고자를 복직시켜야 한다는 식의 주장도 웃기는 소리이다. 쌍용차 사태는 산업변동기에 발생한 우발적인 실업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상한 소리가 정치권과 시민사회 일부에서 나올 때가 있는데, 불쾌하다. 무지가 아니다. 아마도 그들 속에는 쌍용차 사태의 공범들이 있을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쌍용차 사태는 한국과 중국의 국가범죄이다.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한다. 끝으로, 사족(蛇足)을 하나 붙인다. 나는 중국을 혐오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중국의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존경한다. 요즘 밤에 읽고 있는 것도 초(楚) 나라 시인 굴원(屈原)에 대한 평전이다. 다음 번 중국 여행을 기다리며 밤마다 그가 빠져 죽었다는 멱라수(汨羅水)를 상상한다. 다만, 쌍용차 사태에서 시비를 따지고, 책임을 묻는 것이다.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366 | 추천: 0
허창영/ 광주교육청 인권담당관, 전임 간사 1. 어린이를 재래의 윤리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그들에 대한 완전한 인격적 대우를 허하라. 2. 어린이를 재래의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만14세 이하의 그들에 대한 무상 또는 유상의 노동을 폐하라. 3. 어린이에게 그들이 고요히 배우고 즐거이 놀만한 각양의 가정 또는 사회적 시설을 행하라 어디에서 나온 얘기일까? 1923년 5월 1일 어린이날 기념식장에서 소파 방정환 선생이 발표한 「아동의 권리 공약 3장」의 내용이다. 1989년에야 채택된 ‘UN 아동 권리 협약’보다 앞서고, 지금으로부터 90년 전에 있었던 선언이지만 그 내용이 가히 혁신적이다. 어린이를 완전한 인격체로 존중하고, 노동을 금지하며, 배우고 놀 수 있는 가정과 사회를 만들자는 주장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완전한 인격적 대우’라는 것은 ‘촛불소녀’들에 대해 언론과 어른들이 ‘배후조종’을 들먹이며 ‘무뇌아’를 만드는 과정에서 여전히 먼 일임을 실감했다. 학생인권조례 제정 과정에서는 ‘미성숙’의 논리에 갇혀 어린이청소년에게는 완전한 권리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노골적으로 제기되었다. 신체의 자유, 표현의 자유, 사상•양심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 등 민주사회의 시민들에게 가장 기본적으로 보장되어야 할 권리들이 어린이청소년들에게는 제한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차별받지 않을 권리에 ‘성적지향’을 포함하려는 것에 대해 ‘동성애자 양산’이라는 허무맹랑한 주장이 사람들을 설득한다. 그 속에도 어린이청소년은 그저 스스로 인식하거나 판단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고가 깔려있다. ‘완전한’까지는 바라지도 않지만 ‘인격적 대우’조차 먼 것이 현실이다. 어린이노동에 대해서는 법적으로 금지하고 있지만, 법으로 허용하고 있는 청소년노동에 대해서는 ‘사각 중에서도 사각’이라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이다. 생계를 위해, 또는 용돈벌이(용돈도 사실 대부분 생계와 연결되어 있다)를 위해 PC방과 편의점 등에서 일하거나 ‘30분 안에 도착’해야 하는 위험천만한 오토바이를 타야 한다. 야간•휴일수당은 고사하고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거나 심지어 폭행과 성희롱을 일삼는 추잡한 어른들이 있지만 청소년들을 보호하기 위한 사회적 노력은 미흡하기만 하다. ‘고요히 배우’는 것은 “떠드는 놈은 죽는다.”라는 무시무시한 협박 속에서 일절 소음 없는 조용한 학교라는 왜곡된 방식으로만 나타나고 있다. 입시경쟁과 성적 위주의 줄 세우기 속에서 ‘고요’한 것이 아니라 그저 ‘죽어 있는’ 것이다. ‘즐거이 놀만한’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 ‘학교-학원-집’으로 이어지는 생활동선에 ‘놀 곳’은 들어가지 못한다. 집조차도 나머지 학습을 하는 공간일 뿐 놀고 쉬는 공간이 아니다. 이 거대한 도시 안에 어린이청소년이 ‘즐거이 놀만한’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조건이 이렇다보니 어린이청소년과 관련한 지표들은 ‘우울함’ 그 자체다. 국내 어린이청소년의 주관적 행복도는 OECD 국가 중에서 최하위 수준(그것도 한참 차이가 나는)이다. 자살을 생각해 본 어린이청소년은 부지기수이고, 열 명 중 한 명은 여러 번 생각하고 있다. 그 중 일부는 실제로 행동에 옮기기도 한다. 방임, 학대, 성범죄로부터 보호하지 못하고 있고, 학교를 떠나고 집을 떠나는 어린이청소년을 잡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일하는 청소년’은 여전히 노동권 보호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사실 이러한 문제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어린이청소년을 학교 안에만 가두어두려는 사고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학교 안에 있어야 하니 기본권을 제한해도 되고, 노동현장에서 학생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고인 것이다. 학교 안에만 있어야 하니 도시에 놀 곳 따위는 필요가 없다. 또 하나는 어린이청소년 교육의 책임을 한낱 행정관청에 불과한 교육청에만 내맡기고 있는 데에 원인이 있다. 성장하는 과정이 곧 배움의 과정이고 경험하는 모든 것이 교육일 수 있는데, 학교를 포함한 교육청에만 맡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교육청은 교육과정이라는 아주 협소한 영역을 담당하고 있을 뿐이다. 교육은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가능하지 않고, ‘학생’에만 머물러서도 안 된다. 학교를 넘어 어린이청소년의 생활공간 전체가 교육적 환경이라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결국 어린이청소년을 저 ‘우울함’으로부터 구출하기 위해서는 도시 전체가 움직여야 한다. 권리를 확인하면서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하고, 맘껏 떠들며 놀 곳과 쉴 곳이 마련되어야 한다. 지역사회가 교육을 나누어 맡아 학교 밖의 공간도 또 다른 배움의 공간이 될 수 있어야 한다. 학교와 학교 밖이 구분되지 않고, 삶의 공간이 곧 배움의 공간이 되도록 하는 시도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도시 전체에 물어야 한다. 어린이청소년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그것이 90년 전 소파의 일갈에 대한 현재적 고민일 수 있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328 | 추천: 0
손상훈/ 소셜리서치앤멘토르 기획국장 한국불교의 90%이상 영향력이 있다는 조계종. 25개 교구본사 가운데 어떤 교구가 골프장을 설립해 영업을 하고, 시내 최상급 상업건물을 소유하고 임대업을 한다면 시민들은 어떤 생각을 가질까. 불교계에서는 골프가 운동이라는 주장과 일반 사회적 시선에서 또는 출가수행자의 모습에 맞지 않다는 주장이 있다. 불교 교단에서 골프는 아직 확실하게 정리되지 못한 상태이다. 그리고 아직까지 골프장 영업을 하는 사찰은 없다. 사회적 여론조사들 가운데 종교인들의 생각을 묻는 조사는 많이 알려지지 않고, 정확하지 않다고 하지만 또 한편으론 정확하다. 조사할 엄두를 내지 못하거나 일부러 하지 않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 조계종 중앙종회 한 종책모임이 주축이 된 몽골여행단 일행들이 지난 2007년 6월 25일 6.25 발발 57주년에 삼삼오오 징기스칸C.C.에서 라운딩을 즐기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한결같 골프장에 간 사실이 없거나 골프를 친 사실이 없다고 부인, 참회하거나 골프를 즐긴 사태에 대해 문제될 게 없다는 입장임을 반증했다. 사진출처 - 불교닷컴 종교를 믿는 사람이면 자신이 믿는 종교가 최고라고 하고 영원하다는 확신이 굳세다. 그런데 최근 한 논단에서 인도에서 발생했던 불교가 사라진 이유에 대한 발표가 있었다. 간단하면서도 마음 가는 한 결론은 민중과 함께 하지 않아 망했다는 것이다. 소위 지식이 많고, 권위가 있는 특별한 출가수행자그룹만으로 강력한 탄압에 맞서 이겨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고통 받는 사람들과 함께 하고, 평신도를 포함하여 가르침을 생활에서 익히고 발전시키는 다양한 층이 존재하지 않으면 인도 불교 모양새가 된다는 곱씹어 볼 주제이다. 교과서 또는 학술적으로 힌두교 부흥과 이슬람 침입 이후 무자비한 사찰 파괴, 수천 명의 승려 학살이 원인이라고 하지만 양면을 다 살펴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제목으로 발표를 한 조준호 박사(외국어대 인도연구소 연구교수)는 “성채와 승원에 갇힌 불교는 실천력이 크게 약화했고, 일반인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상실한 불교는 인도사회에서 종교적 신앙적 활력을 끌어내지 못했다. 또 상류층 후원에 안주한 불교는 왕조의 지원이 끊기고 이슬람 침략으로 후원자가 몰락하면서 거대 사원경제가 마비됐다.”고 지적했다. 힌두교도의 불교 탄압에 이은 이슬람교도의 무자비한 승려 살상과 사원 파괴가 결정적이었다. 그러나 힌두교도 이슬람의 살상과 파괴를 겪었지만 살아남았다. 불교가 사라진 내적인 원인은 무엇일까. 조 박사는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진 내적 원인을 ▶교리적으로 조직충성도를 강화시키지 못했으며 ▶계급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함 ▶일반인의 생활의례 정착에 소홀 ▶세속의 욕망에 반하는 ‘무아’ 교리 ▶정체성 상실 ▶힌두교의 불교 박탈 전략에 무대응 ▶승원에 갇힌 출가중심으로 민중과 단절 ▶산스크리트화로 대중과 유리되었다”고 진단했다. 국고보조금과 문화재 관람료, 큰 후원 신도를 찾는 모습과 비슷하다는 강렬한 느낌이 든다. 정확한 사회적 통계는 부족하지만, 무늬만 전통사찰이 아닌 대부분의 오래된 문화재 사찰은 대부분 왕조와 관 주도로 건축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진 원인과 한국의 불교교단도 닮지는 않았는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한국 불교의 역사에서 고려 말 12세기 불교계는 지독하게 부패하고, 온갖 못된 일은 다 했다고 전해진다. 국가차원의 불교행사를 자주 열어 민중의 생활은 궁핍하고, 병역의 의무를 피해 출가를 하기도 하고, 새로 들어온 라마불교를 이용해 여인을 유혹하는 몹쓸 승려들이 판을 치고, 심지어 사람장사까지 했다고 한다. 이런 고려불교 교단의 문란은 유생들의 불교 배척의 근거가 되고, 조계종이 새로 등장하게 된다. 현재 조계종은 민중들에게 어떠한 모습으로 비칠까. 오는 10월 조계종의 대통령 선거인 총무원장 선거에 갖가지 이야기가 나온다. 원장 후보의 기준에 최소한 은처 논란은 없는 후보, 상습도박이나 부정부패에 연루되지 않고, 후보 스스로 철학이 있는 사회적으로 지탄받지 않는 후보가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위키 백과에 따르면, 르네상스 시대의 세속화 된 교황으로 알려진 알렉산데르 6세 시대의 ‘호색과 탐욕 부정부패’로 사상최악의 교황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고, 뛰어난 지도력을 갖춘 군주라는 의견도 있다는 교황도 닮은 후보가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 한국사회에서 종교는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 가는 가장 먼저 찾는 주체이자 특혜를 받는 브이브이아이피(VVIP)고객 대접을 받는 이중적인 위치에 있다. 조계종 환경위원장 장명스님을 비롯한 환경위원들은 밀양 송전탑 공사 현장을 찾아 주민들의 호소를 들었다. 사진출처 - 불교포커스 한국의 불교가 인도의 선례를 닮지 않기 위한 소중한 사례도 많다. 그 중에 조계종 환경위원회(위원장 장명스님)는 밀양 송전탑 문제에 기자회견과 현장을 방문했다. (사진_출처 : 불교포커스) 지역사찰과 평신도들도 함께 할지 지켜볼 일이다. 답답한 철학놀음이나 하고 당시 인도 민중의 생활을 외면했던 불교 교단의 문란과 고려 말 12세기 불교와 닮은 점이 어떤 것인지 교훈을 찾아야 한다. 또한, 12세기 고려 말의 불교와 닮은 부패하고 너무나 세속적인 종교 교단의 모습은 인권을 아끼는 모든 이들이 ‘자성하고 쇄신’해야 한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438 | 추천: 0
이상재/ 대전충남인권연대 사무국장 지역의 한 대학 로스쿨의 교수가 제자를 성추행하는 사건이 일어나서 피해학생과 학생회가 강력하게 반발한 일이 얼마 전에 있었다. 성추행을 일으킨 가해 당사자는 부장판사 출신으로 작년에 이 대학의 로스쿨로 왔다고 한다. 그런데 교수로 임용된 지 얼마 되지 않은 9월에도 성추행을 일으키고 그 당시에는 각서까지 작성하며 재발방지를 약속했지만 불과 넉 달 만에 제자와 함께 간 노래방에서 표현하기 힘들 정도의 성추행을 다시 저질렀다고 한다. 당연히 학생들은 저런 교수에게 더 이상 수업을 들을 수 없다며 해임을 요구했고 서명 작업, 시위 등 일련의 과정 속에 해당대학 징계위원회는 최종적으로 해임을 결정했다고 한다. 두 번이나 학생들에게 성추행을 저지른 교수의 수업을 들을 수 없다는 학생들의 당연한 요구가 다행스럽게도 받아들여진 것이다. 지난 5월 3일 충남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학생들이 '징계위원회'가 열리는 본관 앞에서 제자들을 성추행한 J교수의 해임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이 대학뿐만 아니라 지역의 다른 대학에서도 교수 두 명이 수년간 여학생들에게 상습적인 성추행, 성희롱을 가했는데 피해확인이 된 학생만 23명에 이른다고 한다. 비단 이 두 대학뿐만 아니라 여러 곳의 대학가에서 계속 터져 나오는 것이 학내 성추행, 성희롱 사건의 연속이다. 시야를 넓혀보면 대학뿐만 아니라 회사, 관가, 시민단체를 가리지 않고 성추행, 성희롱의 성범죄는 최근 들어 연이어 일어나고 있다. 다소 엽기적인 면을 보여준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성추행 행각은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겠다. 대한민국 최초의 성희롱 민사소송인 이른바 ‘서울대 우조교 사건’이후 성희롱 개념이 1999년부터 남녀차별금지법과 남녀고용평등법 등에 도입되었다. 하지만 이후로도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매일 인터넷 포탈에 떠 있는 각종 성희롱, 성추행 사건 기사를 보며 확인하고 있다. 실제 2012년 한국여성민우회가 접수한 고용평등 상담 중 44.8%가 성폭력 관련 상담이었다고 한다. 최근 갑을관계가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데 성폭력 문제야말로 명확한 권력관계에 기반을 두는 갑을 관계의 대표적 사안이다. 남성교수와 여성제자, 남성 직장상사와 여성 부하직원간의 관계에서 남성은 대부분 슈퍼갑의 지위를 갖는다. 이런 슈퍼갑이 가진 권력을 이용한 성희롱, 성추행과 같은 성범죄에 대해서 ‘을’이었던 여성이 문제를 제기하고 사건화 시키기에는 너무나 많은 장벽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2011년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이 실시한 '여성 노동자 직장 내 성희롱 실태 조사'에서 약 40퍼센트의 직장여성들이 지난 2년 동안 성희롱을 경험했다고 대답했다. 그 중 80퍼센트는 아무런 사후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유는 적극적으로 대응해도 변화가 없을 것 같아서 그랬다는 응답이 25퍼센트였는데 실제로 사후 조치를 취했을 때 상대방에게는 아무 변화가 없었다는 응답이 50퍼센트가 넘었다. 심지어 사후 조치를 취했을 때 불이익을 받았다는 응답이 50퍼센트 가까이나 되었다는 조사결과는 성희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직장 내 여성들이 넘어야 할 장벽이 얼마나 공고한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삼성전기에서 일하다 직장상사의 성희롱을 문제제기한 이은의 씨는 5년간 회사와 민사소송을 진행한 끝에 결국 승리했지만 12년 9개월의 재직기간동안 7년이 넘게 만년 대리로 살아야 했다. 이러한 현실적 어려움과 결코 부서질 것 같지 않는 권력관계의 공고한 틀 속에서도 꾸준하게 문제제기를 하는 ‘을’의 목소리가 점차 많아지는 것은 희망적이라고 생각한다. 과거에 비해 최근에 부쩍 성희롱, 성추행 사건이 많아진 것이 아니라 성희롱, 성추행을 용기 있게 고발하는 ‘을’이 많아졌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의 우리사회는 여러 가지 이유로 봉인을 강요당하는 성추행, 성희롱 범죄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드러나야 할 시기이다. 진정한 변화가 더디 올 것이 뻔 하다면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아니 알면서도 부인하는 가해자 남성들이 적어도 조심은 할 게 아닌가?
2017-07-12 | hrights | 조회: 383 | 추천: 0
강국진/ 서울신문 기자 경상남도 도지사 홍준표가 4월 3일부터 진주의료원을 휴업한다고 강행한 것을 계기로 지방의료원의 역할과 필요성을 둘러싼 격렬한 사회적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경상남도는 과도한 인건비 등으로 인한 누적된 적자를 이유로 들지만 보건의료노조나 시민단체 등에선 신축이전에 따른 차입과 미흡한 지원을 원인으로 지목한다. 박근혜 대통령 대선공약과 정면배치된다는 비판으로 확산되면서 공공의료 전반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지방의료원은 지역주민에 대한 의료사업을 수행할 목적으로 지방정부에서 설립한 공공의료기관이다. ‘국립(대학)병원-지방의료원-보건소’로 이어지는 공공의료체계에서 2차 기관으로서 기능을 수행한다. 지방의료원은 여타 복지시설과 마찬가지로 보편적인 건강권과 계층에 상관없는 의료서비스에 대한 접근권을 보장해주는 기본권 보장의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지방의료원 유래는 1910년 조선총독부에서 설립한 자혜병원 10곳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1925년 병원경영권을 시도로 이양했고 1980년에 지방정부가 지방의료원을 설립할 수 있도록 지방공기업법을 개정했다. 2005년에는 지방의료원 소관업무를 행정자치부에서 보건복지부로 이관했고, 참여정부의 ‘공공의료시책 확충 대책’에 따라 지방의료원을 지역거점병원으로 만드는 변화가 이뤄졌다. <표>지방의료원 현황 지방의료원이 적잖은 적자를 안고 있다는 건 사실이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11년 기준 지방의료원 누적적자는 5140억 원에 이른다. 문제는 그 원인이 공공의료 기능을 수행하면서 불가피하게 발생한 비용이라는 점이다. 보건복지부와 국립중앙의료원이 2011년 발표한 ‘지방의료원 운영진단 및 개선방안 연구’를 보면 공익기능에 따른 비용이 ▲저수익 필수 진료과 운영 9억 원 ▲저수익 필수 의료시설 운영 15억원 ▲의료급여 진료비 차액 4억원 ▲지역보건 프로그램 운영 3억원 등 의료원당 평균 30억원이 넘는다. 게다가 지방의료원에 대한 경상비 보조가 갈수록 낮아져 의료원에 고용된 인력의 근로조건이 낮아지고 시설 노후화가 심각해지는 것도 중요한 문제다. 지난해 보건복지부 자료를 보면 전국 34개 지방의료원 중 12곳에서 임금체불이 발생했다. 통합진보당 김미희 의원은 지난해 10월 발표한 ‘전국 지방의료원 실태조사보고서’에서 2012년 7월말 기준 임금체불액이 152억 원이나 된다고 밝혔다. 한마디로 악순환이다. 지방의료원 경영상태가 어렵다. 앞으로 좋아질 가능성이 별로 없다. 그러니 문 닫아버리자. 거칠게 말해서 이게 홍준표식 대처법이다. 이에 반해 서울시는 정반대 재정정책을 편다. 지난해 서울시는 중랑구 신내동에 위치한 서울의료원에 173억 원을 운영보조로 지원했다. 올해는 187억원을 책정했다. 여기에 더해 서울시에선 새로운 실험에 착수했다. 서울의료원은 지난 1월부터 총 623병상 가운데 격리병상 등을 제외하고 39%인 180병상을 대상으로 운영중인 환자안심병원이다. ‘보호자 없는 병원’ 실험의 최신판이라고 할 수 있다. 환자안심병원은 공공의료라는 취지를 살리기 위해 간호사인력을 대폭 늘려 보호자가 필요 없도록 하는 지방의료원을 만들겠다는 실험이다. 간호사들이 간병인 구실까지 하면서 의료 질이 높아지고 좋은 일자리도 늘어나는 선순환구조를 만들 수 있다. 서울시에선 예산 36억 원을 지원하는 덕분에 간호사 1인당 환자 수가 7명에 불과하다. 한국 전체 통계를 보면 간호사 1인당 환자 수는 평균 17명이다. 현재 간호사 144명, 병원보조원 24명, 사회복지사 5명이 환자안심병원에서 일한다. ● 간호사 중심, 보편적 의료복지 실험 ‘보호자 없는 병원’ 자체는 새로운 실험이 아니다. 하지만 환자안심병원이 특별한 건 간병인이 아니라 간호사 중심이라는 특징 때문이다. 지난해 초 박원순 시장과 김창보 서울시 보건정책관은 서울의료원에 보호자 없는 병원 시행을 위한 아이디어를 내달라는 요청을 했다. 서울의료원에선 고민끝에 시에 간호사 중심 시스템을 제안했다. 서울의료원에선 “어차피 의료서비스가 핵심이라면 간호사를 직접고용하는게 더 좋다”는 논리를 폈다. 가령 미국 캘리포니아는 환자 몸에 닿는 행위는 무조건 간호사만 할 수 있도록 했고, 이를 위해 간호사 1인당 환자 수가 5명을 넘지 않도록 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간병인 중심 실험은 역사가 적잖게 오래됐다. 1994년 의료보장개혁위원회에서 보호자 없는 병원 운영을 검토한 이래로 2006년에는 간병서비스 건강보험 급여 제도화 검토를 위해 정부차원에서 연구 사업을 진행했고 2007년과 2010년에는 시범사업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 민간업체를 통한 위탁이다보니 ‘질 나쁜 일자리’만 양산하고 관리 소홀과 의료사고 문제가 발생했다. 행정비용은 늘어나는데 정작 환자들의 비용을 절감하는 효과는 전혀 없다보니 필요성 자체가 의심을 받았다. 간병서비스와 간호서비스가 분리돼 있다 보니 의료사고와 의료서비스 질 저하 우려가 높았다. 간호사 규모를 대폭 늘리면서 일반 병원에서 가족이나 별도로 고용한 간병인이 해야 했던 모든 서비스를 간호사가 도맡아 한다. 간호사들로서는 노동강도는 높아졌지만 보람도 함께 커졌다. 환자안심병원에서 만난 한 수간호사는 이렇게 말했다. “일반 병실에선 환자들을 세심하게 돌보고 싶어도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환자는 불만스럽고 간호사는 몸과 마음이 지쳐가죠. 환자안심병원은 간호사 1인당 환자 수를 7명으로 맞췄기 때문에 환자 상태를 더 잘 살피고 필요한 조치를 할 수 있습니다. 환자들에겐 친절하게 설명해주는게 무척 중요한데 지금은 그게 가능합니다.” 일부 취약계층만 대상으로 하지 않고 모든 시민들에게 혜택을 주는 보편복지를 구현한다는 점도 새로운 실험이다. 서울의료원에선 최대한 많은 시민들에게 기회를 줄 수 있도록 의사 판단에 따라 이용여부를 결정하고, 기간은 15일에 필요시 1주일 연장하도록 했으며 만성이 아니라 급성 위주로 했다. 서울시와 서울의료원이 보편복지 시스템으로 설계한 이유는 무엇일까. 기초생활수급자는 의료급여를 전액 지원받기 때문에 의료비 부담이 오히려 적고, 정작 차상위계층이 더 취약하다는 점 때문이다. 시에서 지원하는 취약계층 대상 간병비 지원 사업을 2007년부터 별도로 진행하고 있다는 점도 감안했다. ● 환자에겐 '안심', 간호사에겐 '보람' 몇 주 동안 입원해 있는 환자를 문병해보면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 있다. 환자 침대 옆에 쌓여있는 옷가지와 생활용품. 환자 옆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갖 수발을 들어야 하는 가족들. 환자안심병원에는 이런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 환자 침대 주변은 단촐하다. 가족들은 간병이 아니라 문병을 위해 병원을 찾는다. 환자들은 무엇보다 엄청난 간병 부담을 덜 수 있다는 점에 높은 점수를 줬다. 가족들이 간병을 할 때 나타나는 경제적 어려움 뿐 아니라 오랜 간병으로 인한 가족해체도 막을 수 있다. 시행 4개월째가 되면서 개선해야 할 문제점도 드러나는 것 또한 사실이다. 특히 정부 차원에서 제도보완을 해야 한다. 바로 신포괄수가제 도입 이후 간호관리료 항목이 없어지면서 건강보험에서 인건비 보조를 받을 수 없다는 점이다. 이 문제를 풀지 못하면 시민들을 위해 환자안심병원을 확대할수록 적자가 늘어나는 덫에 빠질 수도 있다. 이 경우 결국 간호사 인력유지에 어려움을 겪게 되고 이는 다시 간병서비스 부실로 이어지게 된다. 환자에게 제공하는 서비스 범위와 한계를 명확하게 정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일부 환자들이 간호사들에게 밥달라 커피 달라며 부하 부리듯이 하는 것에 대한 불만 때문이다. 거기다 일부 환자가족들이 사사건건 불만을 제기하면서 환자보다 더한 상전 행세를 하는 것도 개선이 필요한 대목이다. ● 혹으로 볼 것인가 투자로 볼 것인가 서울시에선 앞으로 서울의료원 뿐 아니라 여타 시립병원에도 환자안심병원을 확대할 계획이다. 서울의료원이라고 적자가 없는 게 아니다. 2011년에만 149억원 당기손순실을 기록했고 누적적자가 315억원이나 된다. 그럼에도 이를 단순한 적자가 아니라 ‘공공성 확보를 위한 불가피한 투자’로 생각한다는 것이 박원순과 홍준표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예산을 어디에 어떻게 쓴다는 것이 철학의 문제이고 정치의 문제라는 것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참고로, 서울의료원에선 과감한 신규이전 투자와 환자안심병원으로 인한 이미지효과 등으로 최근 환자수가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325 | 추천: 0
송채경화/ 한겨레 기자   요즘 국회에서는 대체휴일제 도입을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 이 법안은 공휴일과 일요일이 겹칠 경우 평일에 하루 더 쉴 수 있도록 하는 법이다. 야당과 일부 여당 의원들은 입법에 찬성하고 있지만, 재계와 정부, 여당 지도부의 반대로 국회 안전행정위원회에 상정된 채 논의가 중단됐다. 재계에서 내세우고 있는 주요 반대 이유는 ‘생산성 하락’이다. 일을 해야 하는 평일에 쉬게 되면 그만큼 생산성이 떨어진다는 논리다. 그러나 대체휴일제를 찬성하는 입장에서는 노동자들의 ‘일하지 않을 권리’를 지키면서도 그만큼 관광이나 레저 소비가 늘어나 내수진작에 도움이 된다고 맞서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논의 말고도 입법 반대자들은 ‘오히려 노동자도 쉬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새누리당의 한 의원은 “어떤 면에서는 근로시간 단축을 근로자들도 싫어한다. 일을 더 많이 해서 돈을 더 많이 벌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하루 수당이 삶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논리로 보면 대체휴일제 도입 반대는 마치 노동자의 ‘일할 권리’를 지켜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일할 권리? 그렇다면 근무 수당이 절실한, 혹은 휴일에도 열심히 일하겠다고 주장하는 누군가는 ‘진심으로’ 일하고 싶어 하는 걸까? 지난 4월 29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안전행정위 전체회의에서 여야가 ‘대체휴무제’ 법안에 대한 이견을 좁히지 못한 채 정회되자, 김민기 민주통합당 의원과 김현 민주통합당 대변인이 회의실을 나가는 새누리당 의원들에게 항의하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한병철 베를린 예술대학 교수의 저서 <피로사회>를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이 사회의 주민은 더 이상 ‘복종적인 주체’가 아니라 ‘성과주체’라고 불린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이다. … 성과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강제하는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 과다한 노동과 성과는 자기 착취로까지 치닫는다.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착취자는 동시에 피착취자이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다.” 즉, 현대의 성과사회 인간은 과거의 규율사회 인간과는 달리 성과를 위해 스스로를 착취하며 노동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노동자들이 기업과 정부에 ‘휴일에도 일을 하게 해 달라’고 주장하는 것은 오롯이 개인의 선택에서 나온 걸까? 아니다. 신진욱 중앙대 교수는 이러한 ‘성과주체’들이 양산되는 현상에 대해 “성취와 성공, 능력 있는 인간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키는 우리 사회의 담론들, 소수의 승자에게 거대한 보상을 내리고 저항하는 주체들을 ‘실패한’ 주체로 낙인찍은 선택과 배제의 제도들, 또 이런 제도들에 대한 통제권을 쥐고 있는 집단들” 때문이라고 말한다. 결국, 우리가 휴일에도 일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은 평일에 8시간씩만 일해도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없도록 만들어진 우리 사회의 담론과 제도들인 것이다. 이런 점에 비춰 봤을 때 진정한 의미의 ‘일할 권리’는 휴일이나 밤에 일할 권리가 아닌, 평일 8시간을 일할 수 있는 권리, 그러고도 정상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권리일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복종적 주체’가 아닌 ‘성과주체’로서 노동을 하며 살아가는 현대의 많은 인간들은 스스로 이러한 권리를 누릴 자격이 있음을 깨닫지 못 하고 있다. 또한 많은 이들은 이런 권리 상실에 대한 책임을 사회가 아닌 자기 스스로에게 돌리고 있다. 취직이 안 돼 일을 못 하는 이들이나, 평일 8시간씩 일을 해도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지 못 하는 이들은 이에 대한 책임을 사회나 국가보다는 개인의 능력 부족 탓으로 돌리고 만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은 진정한 의미의 ‘일할 권리’를 지키는 방향으로 국가모델을 전환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최근 정치권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다는 점이다. 새누리당은 지난 4월11일 독일의 ‘사회적 시장경제’를 이해하고 이를 통해 한국형 국가모델을 모색하겠다며 ‘대한민국 국가모델 연구모임’을 발족시켰다. 사회적 시장경제란, 시장경제에 있어서 자유경쟁을 보장하지만, 시장형태 등을 포함한 사회적 질서의 형성·유지에 대해서는 국가가 경제 ·사회 정책을 통하여 책임을 지는 독일식 제도를 말한다. 이들이 ‘독일 모델’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그동안 미국식 신자유주의를 기치로 성장에만 매달려온 현재의 국가 모델로는 노동자들의 ‘일하지 않을 권리’나 ‘일할 권리’를 지킬 수 없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이 모임 대표인 남경필 의원은 “경제성장의 수치도 중요하지만 국민 개개인의 행복을 유지하고 보장시켜준다는 의미에서 독일 사회가 주는 메시지가 크다”고 말했다. 민주통합당도 신계륜 의원을 중심으로 4월30일 사회적경제를 연구하는 국회 연구모임을 결성했다. ‘대한민국 국가모델 연구모임’의 첫 강연에서 김택환 경기대 교수의 얘기를 들으면서 독일이 가장 부러웠던 것은 대다수의 노동자가 1년에 최소한 6주간 휴가를 간다는 얘기였다. 우리나라 현실에서는 아직 상상하기 힘든 풍경이다. 이러한 환경을 만들고자 하는 시도들이 단지 정치권의 ‘보여주기식 쇼’에 그치지 않길 진심으로 바란다. 언젠가 우리나라 국민들도 ‘휴일에도 일하게 해 달라’가 아니라 ‘더 많이 놀게 해달라’고 마음껏 외치는 날이 오기를.
2017-07-12 | hrights | 조회: 327 | 추천: 0
이동화/ 민변 국제연대위 간사 민변에는 다른 인권시민사회단체들처럼 자원활동가 제도(이전에는 인턴이라 했는데, 최근 변경함)를 활용하고 있다. 초창기 지원자들은 광우병에 빡친 시민들, 로스쿨을 지망하는 이들, 기자와 PD가 되고 싶은 이들, 아님 학교에서 학생운동을 하였거나 하고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2008년 하반기부터 시작하였으니 햇수로는 5년, 기수로는 9기가 배출되었고(현재는 10기) 매 기수마다 15~20명 정도 배출되었으니 얼추 150명 정도가 민변의 인턴을 거쳐 간 듯하다. 민변내 각 팀과 위원회별로 자원활동가를 선발하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내가 담당하고 있는 국제연대위는 자원활동가들의 참여와 활동을 적극적으로 보장한다. 개인적으로도 그동안의 자원활동가들이 없었다면 국제연대위 활동이 어떻게 진행이 되었을지 상상도 어렵다. 그리고 매 기수마다 위원회 인턴선발과정에 참가하는데 지원한 자원활동가들의 정말 화려~~한 스펙?, 내로라하는 대학(학교기재를 하지 않지만 다른 사항으로 충분히 알수 있는)과 학점, 그리고 뛰어난 언어능력에 많이 놀란다. 솔직히 입장 바꿔서 내가 지원하면 서류도 통과하지 못할 것 같다. 칭송을 좀 더 하자면 선발된 자원활동가들의 성격도 대체적으로 좋고 긍정적인 편이다. 정말 민변이 무슨 복이 터졌는지 정말 대단하신 분들이 자발적으로 보수도 지급하지 못하는 민변에 선발하는 인원보다 항상 더 많이 지원해 주시고 계신다. 칭송은 잠시만 접고, 앞서도 말했지만 2008년 민변에서 인턴을 처음 선발할 때 인턴을 지원했던 동기나 계기를 보면 나름 다양했다. 어떤 이는 홍콩에서 유명한 언론매체에서 근무하다 광우병사태를 접하고 분노하여 한국에 와서 열심히 집회하다가 민변의 모습을 보고 인턴을 지원하신 분도 있고, 어떤 이는 집회에서 연행이 되었다가 민변에서 접견 온 변호사에 반해서 지원하신 분도 계신다. 그런데 인턴기수가 늘어갈수록 지원자들 중 로스쿨을 지망하는 이들도 늘고 있다. 로스쿨 지망하는 이들이 민변과 같은 법률가 단체에서 인턴활동을 경험하고 싶은 게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본다. 재밌는 건 민변에 지원하는 이들 중 몇 분은 민변이 무슨 활동을 하는지, 어떠한 의견과 주장을 사회적으로 던지고 있는지는 모른 채 변호사 집단이기에 법률가 집단이기에 지원한 경우도 생기고, 어찌어찌 선발되었지만 민변의 좌빨? 주장이 본인의 정체성과 맞지 않아 인턴활동 초기에 정신적 멘붕을 겪고 중도에 그만두신 분들도 생기고 있다. 사실 아는 사람은 다 알지만 민변의 활동이나 사회적 메시지가 절대 왼쪽에 있지도 급진적이지도 않다. 차라리 내부자의 시선에서는 실망스럽거나 법률가 단체답게?^^ 적당히 중간에서 타협하며 뭉개는 경우도 적지 않다. (언제 민변 활동이나 민변 변호사에 대해 이야기하는 기회가 있다면 그때 더..ㅋㅋ) 표본 집단이 적고 개인적 편견이라는 전제를 하고 이야기 하면, 좀 더 재미있는 건 최근 자원활동가들은 좀 더 차분하고 조용한 전형적인 모범생 같다는 점이다. 학창시절에 꽤나 공부 잘하며 선생님과 부모님 말씀에 충실하며 대학 가서 집회나 시위의 경험은 없고 학점관리하며 로스쿨을 준비한 그런 모범생?^^ !! 사실 요즘 대부분의 대학생들이 취업과 학점관리에 사활을 거는 현실에서 그들이라고 뭐가 다를까 싶지만, 적어도 그들에게 술자리에서 왜 변호사나 법률가를 희망하는지 물었을 때 인권변호사를 꿈꾸는 정도의 지망생이라면 좀 더 다양한 경험과 의견을 가지지 못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 길(주어졌다고 믿는)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벗어나려 하지 않는 순응적 모습에서 오는 살짝 아쉬움!! 차라리 잘 몰라도 씩씩하게 주장하며 서투르지만 당당한 느낌을 주었던 초기의 자원활동가들이 요즘 그립기도 하다. 솔직히 나는 변호사도 법률가도 아닌 단체상근 활동가이지만 세상을 바꾸거나 변화시키기 위해 법률전문가의 역할이 아주 중요하고 현재도 참 많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현재 법률가와 변호사들이 가지고 있는 고리타분하고 권위의식에 쩔어 있는 모습을(가끔^^;;) 볼 때가 있고, 어느 정도는 그 개인의 그릇이 그 정도 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직역이 갖는 특권의식과 문화 때문에 그렇지 않나 생각한다. 미래의 인권변호사를 지망하며 법률가가 되고 싶은 이가 있다면 본인이 왜 법률가가 되고 싶은지 솔직하게 물어보고 답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과거에는 더 했고 현재도 여전한 그들의 특권의식과 권위적인 문화는 인권변호사라는 아름답고 예쁜 꿈을 아주 빠르게 기억에서 지워버릴테니깐. 현재의 검사 집단이 그렇게 욕을 먹고, 사법부가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받지 못하는 이유가 그들 개인이 모자라거나 나빠서라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367 | 추천: -1
임아연/ 당진시대 기자 “여자 혼자 사니까 너도 몸조심해….” 부산에서 혼자 살고 있는 친구에게 이 말을 뱉어 놓고는 곧장 “야, 네가 조심할 게 뭐 있어. 그냥 살아! 네가 조심할 이유는 없어”라고 고쳐 말했다. ‘몸조심 하라’는 말 속엔 ‘밤늦게 돌아다니지 말고, 치마 짧게 입지 말고’ 따위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아서 그랬다. 몇 주 전 한 취재원이 나를 성추행했다. ‘뭐 좋은 일’이냐며 떠들어 대고 싶지 않았다. 좁디좁은 지역사회에 최대한 알려지지 않았음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조용히 이 일을 털어놓게 된 한 사람은 검지를 추켜세우고 입술 앞에 가져다 대며 “누구한테도 이 일에 대해 섣불리 말하지 말아라. 지역은 보수적이라 일을 당한 여성들이 손해를 본다”고 했다. 나를 염려하는 나이 지긋한 어른으로부터 들을 수 있는 흔한 반응이라고 생각하고 넘겨버렸다. 해당 취재원에게 개인적인 사과를 받고 사건은 일단락 됐지만 법적 조치를 취할 수도, 파렴치한으로 낙인찍고 지역사회에 더는 발을 못 붙이게 할 수도 있는 사안이었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는 내게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고, 이 일로 누군가의 인생이 완전히 파괴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건이 붉어지는 과정에서 나의 가족이 입을 상처는 물론이고, 생각지 못한 사람들이 고통을 겪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에 대한 분노만큼이나 컸다. 그는 처자식이 버젓이 있는 가장이었다. 그렇게 조용히 지나가길 바랐던 일에 대해 글로 쓴다는 것은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다. 아물지 않은 생채기에 소금물이 닿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래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일을 크게 만들어 그를 응징(?)하지 못한 것에 대한 소심한 분노의 표현일 수 있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그 일련의 시간을 보내며 피해자로서 느낀 감정들을 직접 설명해야 한다고 여겼다. 대부분의 성추행 혹은 성폭행 사건에 대해 피해자의 상황은 “심각한 정신적 피해를 호소하고 있으며” 따위의 경찰이나 의사, 언론 등 제3자의 입을 통해 전해질 뿐이다. 우선 내가 그 일을 겪은 후 사회에 알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할 때 가장 크게 두려웠던 건 나를 향한 질타였다. “그러게 왜 밤에 남자랑 단 둘이 만나 술을 마셔? 옷을 야하게 입은 것 아니야? 아직 어려서 그런지 사람을 너무 믿었네.” 혼자서 ‘내 잘못이 아니야’라고 주문처럼 되뇌여도 타인의 입에서 이런 얘기가 한 마디라도 흘러나오면 가까스로 부여잡고 있던 ‘멘탈’이 와르르 무너질 것 같았다. 지난 3월 21일 국제엠네스티 한국지부 이사장을 지낸 고은태 중부대 교수의 성희롱 파문과 관련하여 언론인 출신 고종석 작가가 피해 여성의 과거 발언을 들춰내며 논란을 가중시켜 네티즌의 비난을 받았다. 사진 출처 - 노컷뉴스 얼마 전 ‘박시후의 그녀’라는 동영상이 떠돌며 성폭행을 당한 여성이 ‘원래 색기 있는 애더라’라는 얘기, 고은태 교수가 성희롱 했던 여성의 트위터 멘션을 모아 ‘원래 야한 것 좋아했던 여자’ 등으로 잘못의 화살을 여성에게 돌리는 일은 한국 사회에서 성추행(폭행)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꼭 한 번씩은 나오던 얘기가 아니던가. 이 같은 반응들은 몸조심하라는 흔한 걱정의 말조차 ‘내가 몸조심을 못했기에 이런 일을 당했느냐’고 따져 묻고 싶을 만큼 나를 날카롭게 만들었다. 일을 하면서 알게 된 사람이 “기사 잘 봤다. 고마우니 밥 한 끼 사겠다”는 말을 애초부터 경계할 일도 없거니와, 저녁을 먹으며 술 한 잔 마시는 건 직장인들에겐 일상적인 일이다. 그런데다 나는 청바지에 후드티를 입고 운동화를 신고 나가서도 험한 꼴을 당해, 여성의 옷차림이 성추행(폭행)에 그리 중요한 요소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일을 겪고 얻은 결론은 하나, ‘그 누구도 믿지 말자’였다. 성추행(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은 피해여성에 심리적, 정신적 때로는 신체적 상처는 물론이고 쓸쓸함을 안겨주는 일이다. 이 일에 대해 입을 연다는 것도 어려운 일일뿐더러 용기를 내더라도 고립될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해야만 한다. 흔히 하는 위로조차 상처가 될 수 있어 스스로 가시나무가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왜 더 강하게 뿌리치지 못했지? 내가 잘못한 건가? 아, 내 잘못이 아닌데….’ 마음이 요동을 치며 롤러코스터를 타다 다다른 종착역은 ‘더러운 몸뚱아리’와 같은 낮아진 자존감이다. 이들에게 필요한 건, 고소나 고발 같은 가해자에 대한 응징이라기보다, 내 자신을 무너지지 않게 부여잡는 것이다. ‘앞으로는 좀 더 조심하라’는 조언이 아니라 ‘괜찮아. 네 잘못이 아니야’라며 서있을 수 있게 지탱해 주는 말이다. 한국 사회에서 숱하게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지만 제대로 된 대처 매뉴얼을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기껏해야 “당당히 ‘NO’라고 말하세요”라는 죽은 활자뿐. 예방도 중요하지만, 피해자 심리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를 바탕으로 ‘그들을 어떻게 다독이며 사회에서 고립감을 느끼지 않도록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절실하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303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