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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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김성은(서울신문 기자), 김태형(프리랜서 방송작가),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박용석(출판업),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춘천별빛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이동화(아디 사무국장),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송채경화/ 한겨레21 기자   최근 결혼 선물로 받은 카세트 플레이어 덕분에 10년도 더 된 카세트 테잎를 꺼내 들었다. 대학교 때 선배가 선물로 만들어준 것이었다. 주로 저항 시인들이 쓴 시를 가사로 붙여 만든 곡들이 이 안에 들어 있었다. “사람들은 맨날 겉으로는 소리높여 자유여 해방이여 통일이여 외치면서 속으론 제 잇속만 차리네” 가수 안치환의 목소리로 부른 김남주 시인의 <자유>가 나오자 같이 듣던 누군가가 지금의 상황과 너무 흡사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적극 공감했다. 새정치민주연합의 얘기다. 새정치연합은 공천 파행을 거듭하다 7·30 재보선에서 대패하더니 최근에는 껍데기뿐인 세월호 특별법에 덜컥 합의했다. 유가족들은 순식간에 뒤통수를 맞았고 이를 지켜보던 야당 지지자들도 등을 돌렸다. 새정치연합의 지지율은 호남에서조차 30%대로 역대 최저를 기록했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여러 가지 진단이 나온다. 당내 계파싸움이 원인이라거나, 야당으로서의 선명성을 드러내지 못했다거나, 거꾸로 너무 반대만 하는 모습을 보였다거나…. 그러나 내가 보기에 정답은 김남주 시인의 시 안에 들어 있다.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130명의 새정치연합 의원들, 그들이 문제다. 서울 광화문광장 이순신 동상 앞에 마련된 세월호 유가족 단식농성장 모습. 사진 출처 - 한겨레 정치권 안팎에서 심심치 않게 들리는 얘기가 있다. 새정치연합 의원들은 정권교체 의지가 없다는 것이다. 골치 아픈 여당보다는 여러모로 야당이 의정생활을 하기에 편하고, 정권을 획득하지 못 하더라도 어차피 지역을 기반으로 한 기득권은 그대로 유지될 것이기 때문이란다. 참 어이가 없다. 7·30 재보선에서 이정현 새누리당 의원이 전남 순천·곡성 지역에서 당선된 것은 지역민들이 새정치연합의 이런 인식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그들만 모르고 있다. 기득권 지키기에 급급한 그들은 더 이상 진보가 아니다. 어느샌가 권력에 안주하고 변화를 두려워하기 시작한 새정치연합은 스스로 보수가 됐다. 그들이 이제껏 내세웠던 ‘혁신’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껍데기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 국민들이 내린 평가다. 새정치연합은 큰 선거에서 패할 때마다 혁신보고서를 작성해왔는데 벌써 4개나 있다. 그때마다 반복해서 했던 말은 ‘뼈를 깎는 쇄신’이다. 이제 새정치연합에는 ‘그때마다 뼈를 깎았으면 지금쯤 이쑤시개가 됐을 것’이라는 비웃음만 남아 있다. 이제 어찌해야 할까. 기득권 지키기가 문제였다면 해결책은 단순하다. 기득권을 내려놓으면 된다. 그 첫 번째 발걸음이 바로 선거제도 개편이다. 이 시점에서 새정치연합이 추구하려는 목표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새정치연합의 정강정책에는 “보편적 복지를 통한 정의로운 복지국가를 지향한다”고 돼 있다. 이들의 최종 목표가 복지국가라면 다른 선진 복지국가들이 어떻게 이를 실현해왔는지를 봐야 한다. 특히 이들의 정치제도에 집중해서 본다면 하나의 공통점이 발견된다. 바로 이들 모두가 비례대표제와 다당제, 그리고 연립정부 형태의 권력구조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최태욱, <‘경쟁력을 위한 사회합의주의’ 발전의 정치제도 조건>) 이러한 공통점은 복지국가를 이루기 위한 중요한 핵심요소가 노·사·정 합의를 바탕으로 하는 ‘사회합의주의’라는데 기초한다. ‘사회적합의주의’는 우리나라와 같은 양당제보다는 다당제에서 실현 가능성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양당제의 경우 승자 독식이라는 구조 때문에 ‘합의’ 자체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일단 선거에서 승리한 쪽이 장관을 비롯해 모든 권력을 독점하고 이들은 이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지지 기반이 되는 특정 계층만 대변할 가능성이 크다. 지금의 새누리당이 바로 그렇다. 반면, 다당제의 경우 특정 정치세력이 권력을 독점할 수 없기 때문에 각각의 정치세력들간의 합의가 중요해진다. 자연히 ‘사회합의주의’를 이룰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된다. 새정치연합 스스로도 이를 아주 잘 알고 있다. 새정치연합 출범 직후 만들어진 ‘새정치비전위원회’는 <국민을 위한 새정치>라는 보고서에 “지금까지 우리의 정당체제는 지역기반 양대 정당의 독과점체제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 체제에서는 정당이 민주적 시장경제와 복지국가 건설 같은 전국적 개혁 이슈에 혼신의 힘을 다해 매진할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적었다. 양당제의 폐해를 인정한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해결책도 제시했다. “선거제도의 비례성을 크게 높여야 한다. 그래서 지역주의에 기반을 둔 지금의 독과점적 정당체제를 타파하고 민의 반영이 충분히 이뤄지는, 즉 다양한 사회 경제적 이해관계를 포괄적으로 대표할 수 있는 정당체제를 확립해야 한다.” 문제는 실행력이다. 새정치연합은 이러한 가치를 ‘지향’은 하지만 ‘실행’은 하고 있지 않다. 비례대표제를 확대하고 지역주의를 타파한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들의 기득권을 버려야 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크게 보면 새정치연합의 분열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 이들의 기득권 지키기에도 한계가 왔다. 이제는 놓을 때다. 이순신 장군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명량>이 최단기간 1000만 관객 돌파라는 기록을 세우고 있다. 이순신은 ‘필사즉생 필생즉사(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반드시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것이 지금 새정치연합에 가장 필요한 정신이 아닐까.
2017-07-12 | hrights | 조회: 328 | 추천: 0
전국완/ 중학교 교사   세월호 사건이 터진 지도 벌써 넉 달이 되어 가고 있다. 대통령은 '국가개조', '적폐 척결' 등의 어마어마한 용어를 써 가며 세월호 이전과 이후는 확실히 달라져야 하고 달라지겠다고 다짐했었다. 하지만 청와대와 정치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보면 무엇 하나 미더운 게 없다. 진상조사도, 특별법 제정도 그들의 정치적 계산 앞에서 한 치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7.30 보궐선거가 여당의 압승으로 끝나면서 청와대와 새누리당은 ‘이제는 경제를 살리자’며 노골적으로 손을 털고 있다.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농성하고 있는 유가족들을 ‘노숙자’ 운운하며 비난하는 여당의원들의 뻔뻔함에도 치가 떨리지만, 선거참패로 특별법 제정은커녕 자신들 코가 석자인 야당의 지리멸렬에 더 절망스럽다. 살아가는 이유였을 자식의 허망한 죽음 앞에서 가슴이 찢어지고 피가 끓었을 유족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재발방지를 위해 엄정한 진상규명과 이를 위한 특별법을 제정하는 일이 정치인들에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모든 방송에서 클로우즈업해 보여주었던 ‘대통령의 눈물’. 그는 화면 속에서 희생자들의 이름을 부르며 주르르 눈물을 흘렸고, 우리는 그 눈물에서 희망을 가져보려 했다. 그런데 그걸로 끝이다. 100일이 넘도록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절규하는 그들을 어쩌면 이리도 철저하게 외면할 수 있는지……. 세월호 사건 100일 째 있었던 추모제가 끝나고, 행진을 시도했던 유족들의 절절한 요구에 정부당국은 수백 대의 경찰차와 병력으로 응대했다. 어제 오늘 일이 아니겠지만, 끊이지 않고 터지는 군 내 폭행사건을 처리하는 군 당국의 태도도 똑같다. 사건이 터지면 진상조사보다는 은폐하기에 급급하고, 은폐에 실패하면 뒤늦게 찔끔찔끔 사과하고 재발방지 약속하고,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고 사건은 또 터지고……. 사건의 진상규명과 실질적인 재발방지보다는 숨길 때까지 숨겼다가 시간을 끌고 사람들의 건망증을 이용해 차고앉은 자리를 보전하는 게 먼저인 것이다. 실질적으로 개선된 것은 없는데, 자고 일어나면 뻥뻥 터지는 대형 사고들 덕에 많은 사람들이 이제 웬만한 인명사고에는 눈 하나 깜박 안 하는 담대함(?)을 가지게 된 건 아닌지 싶다. 이런 담대함과 건망증이 아니고서는 이 사회에서 살아내기가 어려울 테니 말이다. 어처구니없는 사건과 사고들이 줄을 잇고, 제대로 된 해결도 대책도 무망하다면 정치는 왜 필요한 건지, 피같은 세금은 왜 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몇 해 전 모 방송에서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의 대사가 떠오른다. 현실 속에서 “정치란 정당끼리 치고 박고 싸우는 것, 정 떨어지고 치 떨리는 것, 정기적으로 치사한 짓 하는 것, 정 줄만 하면 뒤통수치는 것, 정상인은 없고 치기배만 가득한 것, …… 정리하면 정마담 치마폭보다 더 구린 것.”이란다. 지난 7월 24일 `세월호 참사 100일 추모 시낭송 그리고 음악회`가 열린 서울 시청광장에서 가수 김장훈씨가 이보미양이 생전에 남겨놓은 영상과 함께 <거위의 꿈>을 부르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21 세월호 사건으로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유족의 아픔을 같이 아파하기는커녕 한쪽에선 ‘보상금’ 들먹이며 ‘시체장사’로 폄훼하고 있고, 정부와 여당은 이런 분위기를 나서서 조장하고 있다. 특별법 타령은 그만하고 보상금이나 챙겨서 꺼지라는 투다. 이제 그만 경제를 살려야한다는 거다. 도대체 누구의 경제를 살리려는 건가? 정치가 이런 것이고, 정치인들이 이런 족속들이라면 우리는 그들에게 권력을 주어선 안 되 는 거였다. 그들이 ‘국민’을 내세워 사욕을 채우고 우리 위에 군림하도록 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눈곱만큼의 진정성도 없는 자들이 거짓시늉으로 권력을 휘두르게 놔둬서는 안 되는 거였다. 정치란 원래 그런 것이고, 정치가란 작자들도 원래 그런 거라고 손놓고 있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세월호 100일 째에 진행된 문화제에서 고인이 된 이보미양은 가수 김장훈씨와 함께 ‘거위의 꿈’을 듀엣으로 불렀다. 영상 속에서 노래하는 딸아이를 바라보며 실신할 듯이 절규했던 어머니의 모습에 아직도 가슴이 먹먹하다. 20일이 넘도록 단식을 끝내지 못하는 세월호 유족의 모습을 외면하지 못하고, 함께 단식에 참여한 가수 김장훈씨를 보며 우리 정치가 저버린 ‘인간에 대한 예의’를 생각한다.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이다. 서로 기대고 지탱해 주어야 살아갈 수 있기에 ‘人’일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드라마 속 주인공이 바라는 정치는 이런 것이었다. “근데 내가 바라는 정치는 정성껏 국민의 삶을 치유하는 것, 그거예요.” “정치요? 그까짓 게 뭔데요? 못사는 사람은 잘 살게, 잘 사는 사람 베풀게 하면 되는 거잖아요.” 옳고 그름이 바로 서지 않는 지금, 기득권자들이 ‘국민’의 이름을 훔쳐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짓밟는 지금, ‘정치’란 함께 살아야 하는 우리들의 매순간의 삶이며, 그래서 결국 우리 개개인 모두가 지고 가야 할 우리들의 몫이라는 걸 무겁게 깨달아야 한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339 | 추천: 0
허창영/ 광주교육청 조사구제팀장, 전임 간사 최근 들어 ‘안전’이라는 말 참 많이 보고 듣습니다. 지금도 그저 기가 막히기만 한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우리사회는 안전이라는 말이 화두가 되었습니다. 얼마 전 있었던 6․4 지방선거에서도 거의 모든 후보가 빠트리지 않고 얘기했던 말이 안전이었습니다. 시장은 안전한 도시를, 교육감은 안전한 교육환경을 약속했습니다. 정부부처에서도 안전과 관련한 다양한 정책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이제 곧 우리사회는 정말로 안전한 사회가 되어 ‘안전할 권리’가 충분하게 보장될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저는 지금 나오고 있는 안전과 관련한 정책들이 하나같이 못마땅하기만 합니다. 현 정부가 집권 초기에 국민의 안전을 강화하겠다며 ‘행정안전부’를 ‘안전행정부’로 만들었던 삽질과 다르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 삽질은 이제 ‘국가안전처’를 만들겠다는 것으로 가고 있는데, 이것조차도 그대로 닮아 있습니다. 다들 안전과 관련한 부서를 만들겠다, 위원회를 만들겠다, TFT를 구성하겠다는 발상들입니다. 이런 점에서 답답합니다. 그 답답함을 얘기하기 전에 우선 하나 묻겠습니다. 세월호 참사가 ‘재난’인가요? 아니면 원칙 없는 규제 완화와 자본의 탐욕, 관료들의 불감증, 석연찮은 의문들이 복합적으로 만든 ‘인위적 위험’에 의해 발생한 ‘인재’인가요? 사실 세월호 참사에 대해 우리사회가 ‘인재’라는 결론에는 어느 정도 합의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대응은 ‘재난방지’ 또는 ‘사고예방’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재난을 방지하고 사고를 예방하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이에 대해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체계를 만들고 최대한 피해를 줄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또 이런 상황이 벌어졌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교육하는 일도 빼 놓을 수 없는 일입니다. 생존력을 높이기 위해 수영 등 기술을 익히도록 하는 것도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겠지요. 필요하면 한 달에 한 번 하는 ‘민방위 훈련’을 전 시민이 참여하는 ‘재난대응 훈련’으로 한다고 해도 막지는 않겠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런다고 세월호 참사와 같은 일이 또다시 일어나지 않을까요? 정말로 안전들 하신 겁니까? ‘인위적 위험’이 만든 일에 ‘재난대응’만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것이냐 말입니다. 위험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 보다는 위험이 발생한 후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느낌입니다. 자본의 탐욕스런 작동이 가능하게 했던 원칙 없는 규제 완화와 관료들의 불감증은 쳐다보지도 않는 느낌입니다. 그러니 ‘세월호 특별법’에서 국민들은 ‘진실규명’을 외치는 반면, ‘교통사고’라고 생각하는 한심한 작자들은 ‘목숨값 문제’나 ‘특례’로 몰고 가려는 것이겠지요. 애초부터 그 이면의 진실은 캐고 싶지도 않았고, 인위적 위험을 제거하려는 의지는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유가족들의 빈소에서 사진이나 찍는 작자들 아닙니까?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단식 농성 중인 서울 광화문 광장 단식 농성장의 모습. 사진 출처 - 민중의 소리 우리사회는 이미 ‘총체적 위험사회’입니다. 세월호 참사도 거기에서 비롯됐고, 이를 풀기 위한 해법도 그 위험요인을 줄이는 것에서 찾아야 합니다. 무너지려는 둑을 손으로 막는 것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위험요인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해야 합니다. 원인을 알 수 없으면 결과 역시 막을 수 없는 것이니까요. 교육만 해도 그렇습니다. 세월호 참사에서 가장 큰 희생을 치른 것은 학생들이었습니다. 때문에 교육 당국의 충격은 매우 컸고, 반성과 대안들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대책이라고 하는 것들이 수학여행을 보내지 않는다거나, 안전교육을 강화하고 안전관리 체계를 수립하겠다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쉽게 얘기하자면 재난에 대한 대응 외에는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늘 어떤 사고가 벌어지면 나오는 얘기들 딱 그 수준입니다. 하지만 학교를, 또는 아이들을 정말로 위험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미 우리사회에서는 한 해 200여명의 아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습니다. 광주에서는 지난 21일에도 한 꽃다운 18살 청춘이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죽음을 선택하도록 만든 우리사회의 책임은 회피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계속되는 아이들의 죽음에 대해 ‘자살’이 아니라 ‘사회적 타살’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교육에 대한 총체적 고민 없이 재난대응을 잘 한다고 이런 죽음을 막을 수 있는 것일까요? 지금은 사회 전체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때입니다. 몇 몇 주변부적인 일들을 ‘땜빵’한 것으로 면죄부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세월호 참사가, 294명의 억울한 죽음이 주는 교훈은 제대로 된 ‘국가개조’를 하라는 것입니다. 자본의 탐욕을 제어하고, 이를 확고하게 하는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기업의 부품으로 전락한 교육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소수의 기득권에 의해 권력이 동종 교배되는 현상도 막아야 합니다. 그 출발이 바로 세월호 참사에 대한 ‘진실규명’과 ‘책임자 처벌’입니다. 어느 날 너무도 당혹스러운 시신으로 나타난 유병언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 씌워서도 안 됩니다. 우리 국민들은 ‘사실’ 뒤에 숨어 있는 ‘실체적 진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를 위한 수사권과 기소권 하나 내놓지 못하면서 국가를 개조하겠다는 것도 웃기는 말입니다. 그리고 사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그것도 못한다면……, 차라리 국가를 포기해야겠지요.
2017-07-12 | hrights | 조회: 335 | 추천: 0
이현정/ 흥사단 민족통일운동본부 부장 고등학생 수 십 명이 지금 국회를 향해 도보행진 중이다. 바로 4.16 세월호 참사 생존 학생들이다. 어제 출발하여 오늘 새벽 2시까지 걷고, 다시 아침부터 걷고 있다. 이 글이 나가는 시점에서는 국회에 도착했을 것이다. 그리고 국회에서 단식, 노숙 농성 중인 부모님들과 희생당한 친구 부모님들을 만난다. 끝내 책상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국회 국정조사 특별위원회가 무늬만 특별법으로 누더기로 만드려는 것에 나섰다. 더 이상 정부와 국회를 믿을 수 없다는, 희생당한 친구들과 선생님을 향한 간절한 몸부림이다.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는 여름의 아스팔트를 걷는 학생들은 힘들어했다. 그러나 수 백 명의 시민이 함께 걸어주고, 또 거리에 나와 박수와 간식으로 응원해주니 힘들어도 지치지는 않는단다. 그러면서 본인들이 할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다며 1박2일 도보행진을 펼쳤다. 도보행진 모습 사진 출처 - 한겨레 난 이 학생들이야말로 민주주의 사회의 ‘좋은 시민’이라고 본다. 한나 아렌트의 책 <공화국의 위기>에 언급된 것처럼 좋은 국가를 만들기 위한 시민불복종은 위법행위이거나 과격한 행동이 아니다. 좋은 시민으로서의 존재방식이다. 프랑스에서는 고등학생들이 이주자 추방을 반대코자, 또 자신들의 수업시간 연장에 반대코자 거리에 나와 집회시위를 펼친다. 이들 또한 좋은 시민의 존재방식을 이렇게 표출해왔다. 어느덧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는 무관심 또는 혐오 속에서 ‘도망자 민주주의’가 되어버렸다. 셀든 윌린의 얘기처럼, 우리 사회의 대의민주주의제는 시민들의 정치참여를 극도로 제한해버렸다. 이러한 제한된 틀에서 시민 스스로가 사유하지 않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이뿐인가. 민주주의가 도망쳐버린 자리에 시민들은 정치엘리트들의 비민주적 행태에도 그냥 구경꾼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결국 한국 사회도 슬프게도 구경꾼 민주주의로 확장되어버렸다. 그러면서 최근 위법적인 절차와 공권력이 남용되는 밀양 송전탑 설치, 강정 해군기지 건설, 쌍용자동차 불법 해고 등에서 시민들은 구경꾼으로 몰락하고 말았다. 지난달 밀양에서 경찰 수 천 명이 765,000v 송전탑 설치 반대 농성 중이던 70, 80대 동네 노인들과 기도중인 수녀들을 강제로 끌어냈다. 움막은 강제 철거되었고,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할머니들은 옷 하나 걸치지 않고, 온 몸에 쇠사슬을 묶어 더 이상 억압하지 말라고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당시 할머니 편지에는 이는 국가사업이 아닌 개인사업이고, 발전소 핵폭발하면 누가 책임질 것이며, 국가가 법도에 어긋날 일을 하지 말고, 물질만 탐하지 말고 좋은 나라를 만들며, 이것은 정치가 아니다는 이유 있는 항변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경찰 공권력에 의해 강제로 진압되었고, 노인들의 부상 후송이 있었다. 이후 나는 여기에서 소름끼치는 사진을 보았다. 강제 집행 이후, 여경들은 그 현장에서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며 환하게 웃는 얼굴로 기념촬영을 한 것이다. 무서웠다. 저 ‘사유 없는 복종’이. 좌측: 할머니 진압 / 우측: 경찰 기념촬영 모습 사진 출처 - 프레시안 한나 아렌트는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유태인 학살 범죄자 아이히만의 재판을 오랫동안 지켜보면서 ‘악의 평범성’을 강조하였다. 군인으로서 상사의 명령을 따랐던 아이히만의 근면성 자체가 범죄는 아니었으나, 자신의 행동의 의미를 사유하지 않은 것이 큰 범죄라는 것이었다. 결국 아렌트가 강조한 것은 사유 없는 복종에서 나오는 인간의 ‘악의 평범성’이었다. 저 밀양 여경들의 모습은 다르지 않은 건지. 또 하나. 난 2011년 나경원 서울시장 후보의 인권유린 장면이 기억난다. 불빛이 강한 영화조명을 켜놓고 카메라와 기자들 앞에서 장애가 있는 아이 알몸 목욕을 시키던 그 끔찍한 장면을 잊지 못한다. 너무 큰 충격이었다. 이것이 진정 장애아 복지정책 홍보활동이었던가. 그걸 지켜보는 유권자들이 그들의 진정성을 어떻게 보았을까. 그녀가 이번에 7.30 재보궐 선거에 출마하면서 국가를 위해 나왔다던데, 진정으로 권력을 위한 국가가 아닌 시민국가 모습을 생각해달라는건 무리일까 반문해본다. 앞서 말한 단원고 학생들의 국회행 1박 2일 도보행진, 그리고 유가족들의 국회 앞 단식과 노숙농성은 좋은 정치를 펼치지 못하는 대의제 불신에서 나온 시민들의 불복종 운동이다. 좋은 시민으로서의 당연한 존재방식을 직접행동으로 표출한 것이다. 현재 무늬만 특별법이 되어가고 있다. 청와대에서는 야당이 요구한 269건 자료 중 단 13건만 제출하였다. 대통령은 4.16 사고 당일 행방이 묘연하다. 여당 의원은 유가족들에게 막말을 해댄다. MBC 방송국은 증인 출석도 하지 않았다. 이러한 가운데 사유하는 시민으로서 희생자 가족들과 생존자 가족, 학생들이 앞장서 나서고 있는 것이다. 도망자, 구경꾼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들은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하는 것일까. 지금은 ‘시민적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사회적 아픔을 공유하고, 스스로 끊임없이 사유하고, 정의를 얘기하고, 시민불복종 행동을 펼쳐야 할 때이다. 더 이상 도망자로, 구경꾼으로 살아가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숭고한 시민적 지위’를 스스로 내팽개치는 꼴이 되겠다. 지금 우리를 둘러싼 많은 사회적 문제점들에 나서자. 그럼 우리 사회는 분명코 시민적 지혜가 더 많이 발현되는 좋은 곳으로 바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의 역사가 바로 그 분기점이 될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말을 인용해본다. “역사는 이렇게 기록할 것이다. 사회적 전환기의 최대 비극은 악한 사람들의 거친 아우성이 아니라, 선한 사람들의 소름끼치는 침묵이었다고.” 우리 도망자, 구경꾼 민주주의를 벗어던지자. 그리고 끊임없이 사유하자.
2017-07-12 | hrights | 조회: 393 | 추천: 0
이상재/ 대전충남인권연대 사무국장 6·4 지방선거가 끝났다. 길게는 1년여 전부터 후보자의 하마평과 선거구도, 여야의 이해득실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술 안주거리를 제공해 주던 선거가 끝나니 어느덧 올해의 상반기도 훌쩍 지나가 버렸다. 충청지역은 대체로 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이 선전한 것으로 평가받는 분위기이다. 대전시장과 세종시장선거에서 처음으로 새정치민주연합(구 민주당계열 포함)의 후보가 당선되었고 충남과 충북도지사도 새정치민주연합 후보가 재선에 성공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번 충청지역 지방선거의 가장 놀라운 결과는 이른바 진보교육감 후보의 대거 당선일 것이다. 대전시를 제외한 세종시와 충남, 충북에서 진보성향의 후보들이 사상 처음으로 지방 교육행정의 수장이 되었다. 대전도 이런 분위기속에서 진보교육감이 당선될 가능성이 높았지만 4년 전 선거에서는 후보를 구하지도 못했던 진보후보가, 이번 선거에서는 두 명이나 나와서 시민들을 헷갈리게 하더니 결국 2,3위로 나란히 낙선하고 말았다. 대전의 결과야 이제는 어쩔 수 없는 것이고 다른 충청지역 세 곳에서는 당당히 진보교육감들이 첫발을 내딛었는데 지역 교육정책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던 학부모와 시민들은 기대와 호기심어린 심정으로 진보교육감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당선된 진보교육감들의 공약을 살펴보고 나니 왠지 모를 허전함이 밀려온다. 한국사회에 진보교육감에 대한 존재감을 확실히 보여주었던 대표적인 정책은 ‘혁신학교’와 ‘학생인권조례’일 것이다. 충남, 충북, 세종에서 당선된 교육감의 공통적이며 대표적인 공약은 ‘혁신학교’의 도입이지만 ‘학생인권조례’는 충남을 제외한 두 곳의 공약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그나마 충남의 김지철 교육감은 ‘학교가기 좋은날! 폭력 없는 학교’라는 큰 공약카테고리 안에 있는 여러 실천공약중의 하나로 ‘학생인권조례 제정 및 교권보호정책 추진’이라고 되어 있을 뿐이다. 아예 문구조차 찾아볼 수 없는 다른 두 지역 보다야 낫지만 학생인권조례의 참의미를 살릴 수 있을지, 또 다른 공약과의 비중을 비교해볼 때 과연 제정이 제대로 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의구심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한국사회의 학생들이 겪고 있는 여러 가지 어렵고 불편한 현실들을 감안할 때 ‘학생인권조례’는 여전히 유의미하며 강력하게 요구되는 정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왜 ‘진보’를 표방하는 교육감후보들이 이번 선거에서 ‘학생인권조례’를 애써 무시하거나 비중을 약하게 두었을까? 각 선거캠프가 내 놓은 공약 하나 하나의 전후 사정을 완벽하게 파악 할 수 없는 내 처지에서는 그 이유를 뭐라 단정 짓기는 쉽지 않다. 그래도 그 이유를 어렴풋하게라도 추측하자면 ‘부담감’이 아니었을까 싶다. 대전과 충남은 전국적으로도 교육집행부나 시민사회단체에서 ‘학생인권조례’나 그 비슷한 것도 제대로 추진한 적이 없는 학생인권만 놓고 보면 아주 보수적인 지역에 속한다. 충북은 시민사회단체에서 ‘주민발의 충북학생인권조례제정운동본부’를 결성하고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추진했지만 2013년 당시 이기용 교육감이 충북교육청법제심의위원회의 결정을 구실삼아 충북학생인권조례안을 최종 각하 처분해버리고 말았다. 작년까지 ‘충북학생인권조례제정운동본부 상임대표’를 맡았던 김병우 신임 충북교육감 당선자는 이 과정에서 지역의 학생인권조례를 반대했던 강력한 보수여론을 의식한 때문인지 교육감직 인수위원회 공식 의견으로 학생인권조례를 재추진하는 것은 아니고 ‘교육주체권리헌장'을 만드는 것이 정확한 공약이라는 발표까지 했다. 경기도와 서울에서도 반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한 때 진보교육정책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학생인권조례가 불과 몇 년 사이에 진보교육감 후보에게 부담스런 정책이 돼 버린 것이다.   충북학생인권조례제정운동본부가 지난 2013년 3월28일 충북도교육청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전국 최초로 주민의 권리 행사로 성사된 학생인권조례안을 각하 처리한 이기용 교육감은 사퇴하라"고 촉구했다. 사진 출처 - 충청일보 한국사회에서 학생과 청소년이 보호받고 존중받아야 할 ‘인권’이 가야할 길은 아직까지 너무나 멀게 느껴지는데 진보교육감의 공약에서도 제대로 된 ‘학생인권조례’를 찾지 못하는 심정은 안타깝기만 하다. 학생은 학교안의 독립적인 구성원인 주체로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감시하고 보호받아야만 하는 미성숙한 존재로 여겨지는 것이 학교현장의 현실이다. 내가 살고 있는 대전의 경우만 해도 0교시와 야간자율학습은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으며 학생에 대한 체벌, 언어폭력 또한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 많은 학부모와 교사들의 의견이다. 이미 학생인권조례를 제정한 지역에서 간간히 들려오는 ‘학생인권조례’의 부작용과 피로감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근대적인 교육정책이 시행된 이후 일제 강점기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거의 변하지 않았던 것이 우리 사회의 ‘학교’라는 시스템이다. 그 시스템 속에 학생인권조례를 정착시키려고 한다면 일정 정도의 진통은 감수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미국의 인지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는 그의 책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에서 정치 공간에서의 ‘프레임(frame)’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위력을 발휘한 ‘세금폭탄’ 논쟁과 같이 옳고 그름을 떠나 상대가 설치해 놓은 프레임에 갇혀 버리면 ‘사실’은 더 이상 힘을 갖지 못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프레임은 사실을 이긴다. 프레임은 유지되고 사실은 튕겨나간다.” 는 것이다. ‘학생인권을 강화하면 할수록 교권은 더 추락 한다’, ‘청소년은 권리주체가 아니다’, ‘학생인권조례의 내용은 너무 진보적이고 불안하다’는 명제들은 사실이 아님을 교육 선진국의 사례나 많은 교육 전문가의 견해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 프레임에 갇혀서 치른 선거가 지난 6·4 교육감선거는 아니었는지 우려스럽다. 지역의 진보교육감들이 허구의 프레임을 과감히 깨고 ‘학생인권조례’ 제정과 시행을 통해 제대로 된 진보 교육정책을 펼쳐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앞으로 4년 내내 가져볼 것이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393 | 추천: 0
강국진/ 서울신문 기자   정부 고위공무원인 A 씨는 틈날 때마다 자리를 옮길만한 곳을 알아본다. 요즘 들어 부쩍 ‘언제 옷을 벗어야 할까’ 불안하다. ‘차라리 7급에서 시작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고 후회하기도 한다. 그는 이제 50대 초반이다. 한창 일할 수 있는 나이다. 20년 넘게 일해 전문성도 있다고 자부한다. 등산이나 하며 늙기엔 눈이 너무 높아져 버렸다. 더구나 둘째는 이제 대학생이 된다. 십중팔구 그는 산하기관이나 유관업체로 재취업할 것이다. 세상은 그를 ‘관피아’라고 부른다. A 씨는 주변에서 만나거나 들은 고위공무원 사례를 조합해 가상으로 구성한 인물이다. 최근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고위공직자가 퇴직 뒤 산하기관에 취업하는 관행을 뿌리 뽑아야 한다는 주장이 높아지고 있다. 관료와 마피아를 합성한 ‘관피아’란 신조어도 유행한다. 하지만 틀어막으려는 논의만 활발할 뿐 근본원인을 진단하는 노력은 미흡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산하기관 재취업 문제는 사실 정부에서만 나타나는 문제는 아니다. 임원승진에 실패한 대기업 간부가 명예퇴직 뒤 협력업체로 자리를 옮기는 건 상식이 된 지 오래다. 유독 한국과 일본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점도 특징이다. 하나같이 계급제 문화가 강력하다. 후배를 위해 선배가 물러나야 한다는 ‘용퇴’ 관행도 있다. 정년을 채우지 못하고 물러나는 선배에게 생계수단을 보장해주는 것은 결국 조직 전체를 위한 과제가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공직사회에 대해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먼저 우리는 신분보장도 없고 노동 유연성도 극대화하는 대신 공인으로서 의무를 요구하지 않는 방식이다. 이런 방식에선 '관피아'라고 비판할 필요도 없고 그런 비판을 하는 것 자체가 명예훼손이 될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모델은 공공부문에 존중과 신분보장을 주고 그 반대급부로 사익추구를 강력히 규제하는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 이 방식에선 공무원들에게 적절한 (십중팔구 높은 수준으로) 급여를 줘야 하고 정규직 위주로 정년을 보장해줘야 한다. 우리는 신분보장은 약화시키면서 동시에 사익추구 금지만 강화하자고 요구하고 있다. 이는 여성인권을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남편을 따라죽을 선택권'을 옹호하는 것만큼이나 자기모순이다. 일전에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이계수 교수가 지적했듯이 “고위공무원단과 개방형 임용제도에서 보듯 ‘경영마인드’라는 이름으로 유연화 경향이 뚜렷해지면서 공무원 신분 자체는 갈수록 ‘회사원’과 비슷해지는 반면 각종 의무는 ‘공직자’ 기준을 요구하는 모순”을 되돌아봐야 한다. 그는 “현 제도에서는 줄 세우기와 사익추구를 막을 방법이 없고, 심지어 정치적 중립도 위협받는다”고 지적한다. 공무원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대표하는 게 이른바 철밥통 담론이다. 여기에는 “하는 일 없이”, “정년보장도 되면서”, “임금삭감도 안 하는” 기득권층이라는 비난 혹은 질시를 담고 있다. 민간영역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노동조건 악화와 비정규직화 등으로 인한 상대적 박탈감이 정규직이고 정년보장까지 받는 공무원을 향해 돌을 던지게 하는 건 아닐까. 사진 출처 - 서울신문 철밥통 담론을 구성하는 세 가지 논거는 달리 생각할 여지가 너무 많다. 하는 일 없다는 비판에는 민원처리 비효율이나 시간외수당에서 나타나는 도덕적 해이 등이 자리 잡고 있다. 물론 모든 공무원이 노동 강도가 강하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취재 과정에서 만나본 공무원들 상당수는 꽤 많이 일한다. 특히 중앙부처 간부들 중에는 주말에 제대로 쉬지도 못하는 ‘저녁 없는 삶’을 사는 사람이 상당수다. 공무원들이 받는 시간외수당 역시 민간기업과 비교하면 매우 낮게 책정돼 있다. 공무원연금도 비판 대상이다. 장기적으로 공무원연금을 개혁하거나 국민연금과 통합시켜야 한다는 데 찬성하는 편이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대목도 있다. 공무원들은 퇴직금을 받지 않는다. 지금이야 공무원 평균임금이 대기업에 근접하는 수준까지 올라갔지만, 외환위기 이전만 해도 공무원들은 박봉에 시달렸다. 높은 공무원연금보장은 낮은 임금에 대한 반대급부였다. 공무원에게 정년을 보장하고 적절한 신분보장을 하는 건 역사적인 맥락을 따져봐야 한다. 막스 베버가 지적했듯이 신분을 보장하는 직업공무원을 근간으로 하는 근대 관료제가 형성된 이유는 전문성과 소명의식, 그리고 무엇보다도 부패방지와 정치적 중립을 보장하기 위해서였다. 우리 헌법 역시 정치적 중립을 위해 공무원 신분보장을 규정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정년보장은 오히려 민간에서 확대해야 할 문제다. 민간기업에서 신분보장이 악화하니까 공무원 너희도 신분보장 받지 말라고 하는 건 ‘자해공갈’이자 ‘바닥을 향한 폭주’일 뿐이다. 우리는 왜 이토록 공무원을 비난하고 정부를 불신하는가. 가장 큰 이유는 당연히 정부가 제구실을 못 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 공무원을 대표하는 대통령이 마치 자기는 공무원 아닌 척 공무원들을 비난하고 욕보이는데 우리가 부화뇌동해야 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세월호 참사 과정에서 나타난 정부의 부실과 난맥상은 백번 비판하고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 목적이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제대로 된 정부’를 만드는 것인지, ‘나는 사오정 오륙도 걱정하는데 자기들만 정규직에 정년 보장되는 공무원’을 때려잡아서 하향 평준화하자는 것인지 분명히 구별할 필요가 있다. 공직 개혁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공공성과 ‘국가의 역할’ 회복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 서둘러 정책 발표하면 ‘졸속행정’이라 비난하다가 신중하게 정책 검토하면 ‘늑장행정’이라 욕하는 방식으로는 우리가 원하는 ‘좋은 정부’를 만들 수 없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346 | 추천: 0
홍성준/ 투기자본감시센터 사무처장   1. 이완용 이래로 정책 실패를 저지른 관료는 법적, 정치적, 역사적 처벌을 받지 않았다. 투기자본감시센터는 지난달 말, 전 현직 경제관료(일명, 모피아) 5인을 검찰에 고발했다. 주요한 혐의는 두 가지인데, 그중 하나가 2003년 투기자본 론스타에게 외환은행을 매각하는 과정과 그 이후 론스타에게 특혜를 주고 국가에 큰 손해를 입혔다는 것이다. 그동안, 외환은행 매각과정에서 불법성 즉, 사모펀드에게 예외승인을 한 것이 불법이 아닌가, 외환은행의 부실은 조작된 것이 아닌가, 론스타는 자본시장법 상의 금융주력자인가, 등등을 제기해 왔다. 반면에, 이번 고발을 통해 규명하고자 한 것은 당시 경제 관료들이 론스타에게 외환은행을 매각하면서 국가를 상대로 사기를 치고, 천문학적인 손해를 입힌 행위를 규명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묻고자 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2003년부터 2006년 사이, 정부가 수출입은행과 한국은행을 통하여 소유한 국유재산인 외환은행 주식 1.6억 주인 43.17%를 보유한 최대주주로서 경영권을 단 돈 1,667억 원에 팔아치운 사기 사건으로, 국가에게 총 1조 7,426억 원의 손해를 입힌 행위에 대해 책임을 묻는 것이다. 2003년 국가보유 주식가를 저가로 결정, 콜옵션, 드래그 얼롱 등을 담아 국가를 상대로 사기를 친 내용으로 론스타와 계약을 맺었고, 이것을 당시 재경부 금융정책국장인 변양호가 주도했다. 더 하여, 주요 공범은 금융감독위원회 감독정책 제1국장 김석동과 재경부 경제협력국장인 임영록이다. 변양호가 금융정책국장을 그만 둔 뒤인 2004년에는 김석동이, 2005년에서 2006년 사이에는 임영록이 금융정책국장을 이어 받아 계약대로 론스타에게 국유재산을 퍼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도 묵인한 자들도 있다. 2003년도 당시의 재경부 장관 김진표와 수출입은행의 행장인 이영회 등이다. 그렇다면, 국가를 상대로 사기를 치고, 천문학적인 손해를 입힌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그들은 제대로 처벌받지 않았고, 승승장구하고 있다. 변양호는 2005년 “보고펀드”라는 사모펀드를 조성해서 금융시장의 큰 손이 되었다. 펀드의 이름은 “해상왕 장보고”에서 따 왔다는데, 외국자본에 맞서는 “토종” 펀드라는 것이다. 불쌍한 노예를 구출하고자 해적들과 싸운 장보고를 생각하면 참으로 가소로운 이름이다. 동료 파트너로 리먼 브라더스 한국 대표이던 이재우와 모건 스탠리 한국지사 기업금융부문 대표이던 신재하, 2010년에는 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 박병무가 합류했다. 보고펀드가 대주주로서 경영에 참여하거나 경영권을 인수한 기업은 동양생명보험, 노비타, 아이리버, LG실트론, 비씨카드, 한국 버거킹 사업을 운영하는 BKR, 미국 셰일오일 및 가스를 생산하는 아나다코, DSLR용 카메라의 교환렌즈를 생산하는 삼양옵틱스, 대표적인 온라인 모바일 쇼핑 가격비교서비스인 에누리닷컴 등이며, 총 운용자산 규모는 2014년 1분기 말 기준으로 약 2조 원에 이른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보고펀드에 최초로 투자된 자금의 성격이다. 그가 과거 재경부 관료로서 관리하던 시중은행으로부터 고가의 수수료를 챙기며 거액을 투자받은 것이다. 이것은 국회 국정감사에서도 밝혀진 사실이다. 김석동도 그 후, 관료로서 승승장구하여 2007년 재정경제부 1차관을 지냈고, 고액 연봉 시비가 일었던 농협의 경제연구소 대표를 역임했다. 정권이 바뀐 후에도 다시 고관대작이 되었는데, 2011년에서 2013년까지 금융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금융위원장 시절 기억에 남는 것은 두 가지 일이다. 하나는 저축은행 부도파산이 현실화 되는 시점에도 그런 현실을 오도하며 저축은행사태 피해자들을 우롱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론스타의 먹튀를 승인하여 그들이 4조 원을 챙겨 한국을 탈출하도록 조력했다는 사실이다. 임영록 역시 그 후, 관료로서 승승장구하여 2007년 재정경제부 2차관을 지냈다. 그리고 그 기간에 저축은행 사태가 잉태되고 있었다. 2002년 상호신용금고는 저축은행으로 이름을 바꿨다. 2005년 12월 금융당국은 감독 규정을 바꿔, 사모투자펀드 투자 등을 확대할 수 있도록 했다. 여신비율 8%이하, BIS비율 8%이상인 저축은행을 우량은행으로 규정한 '88클럽'에 해당하는 곳에 대규모 대출이 가능하도록 허가했고, 저축은행 간 인수 합병을 가능케 해 덩치를 불릴 수 있도록 했다. 이후 부동산 경기가 좋아지면서 저축은행은 부동산 PF대출에 대거 뛰어들게 된다. 이 과정에서 퇴직한 금융당국 고위 관료들이 저축은행의 고문, 감사, 주주가 되었다. 그 결과 감독 기능은 무력화되고, 2011년 저축은행 사태가 발생했다. 저축은행의 대주주들과 퇴직해 ‘낙하산’으로 저축은행에 들어온 금융관료들이 공모해서 저축은행의 자본금 2조 1,680억 원 이상을 불법 대출 등으로 빼돌렸고, 그 결과 저축은행은 부실해졌고 무수히 많은 피해자들을 양산했다. 저축은행사태 피해자들은 평균 나이가 63세이고 평균소득 115만 원의 가난한 시민들로, 그들은 노년의 삶을 통째로 강탈당한 것이다. 예금자보호한도인 5,000만 원을 넘는 피해금액은 1인당 평균 540만 원 정도이다. 지금까지도 어떤 정부기관도 나서서 피해구제를 하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최근에는 저축은행 사태를 당하여 저항했던 피해자들을 검찰이 기소하여 처벌을 노리고 있다. 반면에, 저축은행 대주주들과 결탁해서 뇌물수수 비리를 저지른 정치 권력자들, 금융관료들에게 사법당국은 무죄 방면과 면죄부를 주고 있다. 아무튼, 그런 임영록이 현직 경제 관료로서 자신의 후배인 금융위원회 위원장 신제윤에 의해 낙하산으로 KB금융지주의 회장이 되었다(이 건으로 신제윤도 고발). 임영록이 2013년 6월 KB금융지주의 회장이 된 이래로 국민은행에서는 끊이지 않고 대형 금융사건이 일어나고 있다. 그 중 압권은 대량의 “개인정보 유출” 사건일 것이다. 지금도 전산시스템 교체 문제로 내부 갈등 중이다. 2003년 론스타와의 외환은행 주식매각 계약에 관련 된 조연급들의 다른 인물들을 보면, 그들도 위에서 거론한 자들처럼 별 일 없이 잘 산다. 먼저 박승 한국은행 총재는 중앙대학교 명예교수로서 지금도 존경을 받는 경제계의 원로로 대접을 받으며 편안한 노년을 보내고 있고, 이영희 수출입은행장은 아시아자산신탁 대표이사회장을 지내는 등 금융계의 큰 손이며, 김진표 재경부 장관은 야당의 유력 정치인으로 성장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후, 대한민국에서 뜨거운 ‘이슈’는 소위, “관피아(관료+마피아)”일 것이다. 지금 언론과 대통령, 정치권, 입 달린 모든 사람은 “관피아”를 말하고 있다. 물론, 사람 사는 세상에서 ‘끼리끼리’ 패거리를 지어 이익을 챙기는 짓은 흔한 일이다. 그런데, 국가를 대신해서 권력을 행사하는 관료가 민간의 특정 자본가(또는 집단)와 결탁해서 사익을 챙기는 짓을 하는 것은 범죄이다. 범죄인데도 두루뭉술하게 “정책 실패”라고 고상하게도 말 한다. 아무튼, 그 결과 국가와 사회, 노동자와 시민들에게는 큰 손해를 입힌다. 더욱이 심각한 것은 그런 범죄가 반복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지난 100년 동안 한국의 역사에서 “정책 실패”를 저지른 관료들은 제대로 처벌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관료들은 뇌물을 직접 수수하지 않는 한 법적인 처벌을 받지 않는다. 정치적으로도 대통령이나 선출된 정치인은 권력을 잃으면 비판을 받거나 처벌을 받지만, 익명의 관료들은 정치권력이 교체되면 그냥 망각되고 그 지위를 유지하며 별 일 없이 잘 산다. 당연히 역사적인 처벌도 없다. 막연히,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군부 독재 시대, 신자유주의 시대가 나쁘다고 한다. 그냥, 사회구조 탓, 세월 탓을 한다. 구체적으로 누구누구가 그러한 정책실패 - 범죄를 기획하고 집행을 하여, 무수히 많은 피해자들을 양산했는지, 실명을 거론하며 단죄하는 역사책도 거의 본 적이 없다. 만약에, 그들의 이름을 거론하며 처벌을 요구하면, 저급한 행동인 것으로 말해지거나, 싸구려 “음모론”으로 취급당하기도 한다. 그나마 실명이 거론되는 것이 일제 강점기 식민지 관료였던 “친일파”다. 하지만, 구체적인 범죄사실을 적시하기도 어렵고, 그 범죄의 결과로 그 후손이 지금 사회적으로 여전히 지배계급의 지위에 있다고 말하는 순간, 정치권의 흔한 정쟁거리 이거나 술자리 안주로 전락하기 쉽다. 그러한 한국에서 관료들은 선출되지 않는 대한민국의 영원한 주인으로 남은 것이다. 앞에서 거론한 자들은 그들 중 일부이며, 그 나마도 드라마나 영화의 소재가 될 만큼 유명한 사건을 저질렀기에 이 정도의 추적과 고발이 가능한 것이다. 어떤 과오에도 제대로 처벌받지 않는 한국의 관료 신화는 이제 깨져야 한다. 동양그룹 사태와 관련한 5개 회사의 제2차 관계인집회가 열린 지난 3월 21일 오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제3별관에서 ‘동양사태’ 피해자들이 집회에 참관하기 위해 접수를 하고 있다. 이날 회생계획안은 담보 채권액 95%, 무담보 채권액 69%의 채권자 찬성으로 가결됐다. 사진 출처 - 한겨레 2. “관피아” 개혁은 누가 할 수 있을까?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난 4월, 국회 정무위원회에서는 금융정책, 금융감독체계 개혁을 둘러싸고 한편의 “막장 드라마”가 있었다. 이 이야기는 2012년 11월 9일, 투기자본감센터가 여의도 점령운동을 함께 했던 여러 단체들과 준비한 “금융소비자위원회 독립설치”와 “금융정책감독기구의 민주적 개혁”을 위한 두 가지 법률안을 당시 민주당 김기준 의원 등이 발의한 것에서 시작된다. 중요한 것은 이 두 가지 법률을 준비한 주체인데, 금융피해자 단체들과 금융권 노조, 금융관련 시민단체들이 그들이다. 서로의 다른 입장을 넘어 금융시스템의 소외자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6개월 여간 치열한 내부 토론을 통해 정리한 것을 법안에 담았다. 한마디로, ‘금융수탈을 당하는 99%가 1%를 위한 금융시스템에 침투해서 싸우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왜 민주당인가 하면, 당시 문재인 대통령 후보의 공약으로 그 법안의 내용이 채택되어 대통령선거에서 쟁점이 되길 희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대통령선거에서 금융관련 쟁점 자체가 부재한 이유로 부각되지 못했다. 2013년 1월에서 2월 경, 현 박근혜 정권수립 당시 정부조직 개편과 맞물려 다시 부각되길 희망했지만, 금융관료들의 “금융부 신설”과 현 금융감독원을 분리해 금융위원회 산하에 “금융소비자원”을 설치하자는 안을 제기하여 그것을 저지하고자 노력했다. 그 이유는 그 안이 금융관료들의 이해와 욕망을 노골적으로 담은 것이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금융소비자 보호 기구를 두는 목적이 무엇인가! 탐욕스러운 금융자본과 부패무능한 금융관료로부터 금융소비자를 보호하자는 것이다. 그런데도, 뻔뻔하게 금융소비자 보호 기구를 금융관료 자신들이 장악하겠다는 것이다. 개혁의 대상이 개혁의 주체로 나서는 역겨운 법안이다. 그렇기 때문에 투기자본감시센터 등 여론의 반대로 무산되면서 다시 사라졌다. 아무튼, 그런 논쟁 속에서 금융수탈을 당하는 99%가 주도적으로 제기한 최초의 금융감독기구 개혁법안은 주목받지도 못했고, 결국 잊혀졌다. 그러던 중, 2013년 10월 이후 “동양그룹 사태” 발생으로 다시 금융소비자 보호기구 설치에 대한 필요성이 부각되었다. 그러자, 금융관료들이 새누리당을 통해 새롭게 관련 법안을 내놓았다. 기존의 것에서 “금융부 신설”은 제외하고, 금융위원회 산하에 “금융소비자원”을 설치하자는 원래의 법안을 다시 제안했다. 한편,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민주당의원(이후, 새정치연합)들도 관련 법안을 경쟁적으로 발의했지만 별로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결국, 어떤 법안도 통과하지 못한 상태에서 해를 넘겼다. 그런데, 2014년 2월, 김기식 의원이 새누리당의 안, 즉 금융관료들의 안을 받자고 주장하고 나섰다. 전해서 들은 이유는 납득이 잘 가질 않는데, 대강 “동양사태”로 여론이 비등하니 일단 금융소비자기구를 어설프게나마 만드는 것이 국회의 도리(?)라는 것이다. 금융관료의 법안 내용을 보면, 형식적으로는 “쌍봉형” 체계를 하고 있지만, 현 금융위원회 산하의 금융감독원을 둘로 쪼개 금융소비자원을 신설하자는 것에 불과하다. 금융소비자위원회의 구성에서도 인사권을 모피아들이 행사하게 한 것, 금융소비자위원회가 법안조차 발의를 하지 못하고, 법이나 시행령의 하위개념인 “규정의 개정 권한”만 가지는 것 등의 문제가 드러난다. 한마디로, 개악이었다. 철저하게 금융관료들의 이해와 욕망의 법률안이 김기식 의원의 찬성으로 상정되어 표결을 통해 정무위원회 통과를 목전에 두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해 김기준 의원 등이 격렬히 반대하였고, 김기식 의원은 자신의 주장을 일단 철회하였다. 그 결과, 국회 정무위 법안심사소위원회에서 해당 금융관료들의 법률안은 다룰 수 없게 되었다. 3월에 들어서자 기존의 민주당 의원들의 법률안들을 이종걸, 민병두 의원의 법안 중심으로 통합해야 한다는 새정치연합 내의 입장이 정리되었다. 그런 강한 압력이 김기준 의원에게 들어오자, “금융소비자위원회 독립설치”와 “금융정책감독기구의 민주적 개혁”을 위한 두 가지 법률안은 확실하게 폐기하게 된다. 나는 화가 나서 물었다. “왜, 하필, 금융에 대해 문외한이 만드는 안을 중심으로 통합되어야 하는가?”, “또, 아직 완성된 법안도 아닌 이종걸 안을 중심으로 당론을 정하는 것은 웃기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이에 대해 의원실 관계자는 “당에서 공천 줄 때는 금융전문가이지만, 국회에서는 초선 의원은 다선 의원의 말을 들어야 하는 것”이란다. 국회도 결국 ‘짬밥 순’인가! 웃기는 것은, 4월 14일, 새정치연합 의원들이 그 때까지도 성안이 되지 않았던 이종걸 의원 안을 지지한다고, 일부 노조와 피해자 단체 대표를 국회로 불러서 기자회견까지 열었다. 그중에 일부는 투기자본감시센터와 함께 앞에서 말한 “금융소비자위원회 독립설치”와 “금융정책감독기구의 민주적 개혁”을 위한 두 가지 법률안을 준비한 주체도 있었다. 그런 기자회견에 내용도 살피지 않고 얼굴 내미는 정신없는 노조 위원장과 궁박한 상황의 금융피해자 단체 대표도 한심하지만, 이러한 처지의 사람들을 자신들의 정치수단으로 이용하는 새정치연합 의원들이 더욱 나쁜 놈들이다. 시민사회와 정치권이 이런 관계라면, 민주주의는 “개똥”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더욱 화가 나는 것은, 끝내 이종걸 안은 성안되지 않았다. 그러자, 금융관료들의 안을 받기로 새정치연합의 당론이 정해졌다는 것이다. 그 날이 세월호 참사 와중인 4월 28일이다. 금융관료 안의 통과를 목적으로 정무위원회 범안심사소위원회를 열겠다는 것이다. 결국, 같은 당 소속 김기준 의원의 공개적인 반발로 당일에 상정되지는 않았다. 일단, 다행이다. 하지만, 나는 국회 정무위원회 새정치연합 의원들을 여전히 ‘감시’ 중이다. 나는 평소, 부패 무능한 관료들이 패거리를 지어서 사익을 추구하는 행위를 막을 자는 ‘선출된 정치인’이라고 생각했다. 상식적으로 볼 때, 시민들에게 선출된 정치인이 관료를 통제할 권위를 가지는 것은 ‘민주주의에 부합’된다고 본다. 또한, 무수히 많은 관료들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선출직 정치인이 더욱 많아져야 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확장’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내 소신이다. 그런데, 지난 4월,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일어난 소동을 볼 때, 이 말이 맞을까? 자신들의 이해와 욕망을 추구하는데 능수능란한 자들이 관료들이다. 그들에게 처음 포섭된 것은 박근혜 대통령과 여당인 새누리당이다. 그리고 이에 대항해야할 야당인 새정치연합도 포섭되었다. 아마도 그 포섭의 기술은 오랜 세월 금융정책을 주물러 온 “경험”, “금융자유화” 같은 교활한 논리일 것이다. 이 기술이 경험이 부족한 국회의원들, 자유주의 정치를 지향하는 여야의 정치인들을 포섭한 것이다. 관료들이 여야 가릴 것이 없이 이런 식으로 대한민국 건국 이래 60여 년 동안 선출된 정치인들을 포섭하고, 민의를 우롱했다는 생각을 하니 기가 막힐 뿐이다! 우리사회는 “정치개혁”이란 미명으로 선거 때마다 정당들에게 대규모 의원 “물갈이”를 요구해 왔었다. 또, 미사여구를 늘어놓는 “자유주의” 정치인을 지지해왔다. 그런 것을 목적으로 시민운동을 하는 단체들도 있다. 그 결과, 경험이 미숙한 초선 국회의원을 양산했다. 숨어 있는 관료의 위험성은 보지도 못하고, 모든 책임은 여당 또는 야당, 대통령이라는 식의 정쟁에 익숙한 정치인들만이 국회를 장악했다. 그런데, 세월호 참사 이후, 그런 정치권이 “관피아”를 개혁한다고? 난 정말 모르겠다. 그런 수준의 정치인만 선출하는 시민사회가 미숙한 것인지, 선출된 정치인들을 가지고 노는 관료들이 시민사회보다 더 영악한 것인지... 분명한 것은 우리사회 곳곳이 ‘세월호’라는 것이다. 위험한 자본과 부패한 관료들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더는 미숙하고 질 낮은 정치인을 선출하면 안 된다. 우선은 시민사회부터 관료를 통제하는 방법, 자본을 통제하는 방법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막강한 관료와 자본에 맞서서 자신을 선출해준 노동자, 시민들을 지킬 수 있는 진정한 ‘호민관’이 선출될 것이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390 | 추천: -1
이동화/ 민변 국제연대위 간사   2003년 3월, 이라크 전쟁이 발발하였다. 도저히 그냥 있을 수 없어 무작정 이라크행 비행기를 탔고, 그 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7개월간 함께 지내며 ‘셀림’(건강한 청년, 한국의 돌쇠(?) 정도)이라 불리는 반전활동가가 되었다. 그리고 2004년 6월, 열병에 걸린 것처럼 다시 이라크로 향했지만, 김선일 씨의 죽음, 내전으로 치닫는 내부 상황, 점령으로 인한 이라크는 외부인의 활동을 용납하지 않았고 4개월 만에 한국으로 들어올 수 밖에 없었다. 이후 2005년 겨울, 현지인들과의 소통을 위해 필요한 아랍어를 배우기 위해 찾은 요르단 생활 중 이스라엘에 의해 수십 년 동안 점령과 봉쇄를 당하고 있는 팔레스타인에 한국의 활동가들과 함께 정말 우연치 않게 약 한 달간 지내게 되었다. 이라크만큼이나 강렬했던 팔레스타인의 경험은 국제연대활동의 중요성을 실감케 했고, 그곳 사람들과의 만남은 지울 수 없는, 강렬한 기억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2006년 11월, 한국에 되돌아 왔다. 2014년 5월, 민변이라는 단체에서 국제연대업무를 담당하며 8년여의 시간이 흘렀다. 2007년부터 한미 fta 비준, 광우병 촛불집회, 용산 참사, 4대강 사업, 나꼼수 표현의 자유, 국정원 대선개입 이후 박근혜 정부 들어 서울시 간첩조작사건까지 한시도 바람잘 날 없는 단체에서 국제연대활동뿐만 아니라 여러 활동을 함께 하였다. 다행스럽게도 현재 민변은 많은 시민들의 지지와 성원을 받고 있고, 한국 사회내 여러 부조리하고 부정의한 곳 어디에서든 민변의 활동을 요청받고 있다. 단체 소속 활동가로서 뿌듯하고 자랑스럽다. 반면에 시간이 흐를수록 내안의 열정은 관성이 되고, 에너지는 오래된 배터리처럼 쉽사리 충전되지 않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소속된 단체의 국제연대활동이 국내이슈에 대한 국제연대활동 중심으로 집중되다 보니 단체에서 해야하는 일과 내가 하고 싶어하는 일의 간극이 갈수록 벌어지고 있었다. 스스로 조율하는 의지도 희미해져 갔다. 위기였다. 2014년 6월, 오랜만에 느끼는 중동지역의 강렬한 더위와 건조하기 짝이 없는 바람은 내 몸의 세포들을 깨우고 있다. 모스크에서 들려오는 아잔소리(기도시간을 알리는 소리)와 주변에서 들리는 격정적인 신디사이저 음악소리는 강렬한 아랍커피처럼 이곳이 내가 그리워했던 곳임을 일깨워준다. 나는 지금 다시 팔레스타인으로 가기위해 옆 나라인 요르단에 왔다. 거의 10년만이다. 요르단 압달리 정류장 사진 출처 - 필자 다행히도 활동하는 단체에는 만 7년 이상 상근하면 3개월의 안식월이 주어진다. 나는 안식월 기간 중 5주 동안 요르단내 이라크 난민 가족을 만나고, 그 이후 대부분의 시간을 팔레스타인에서 지내는 여행을 할 예정이고 오늘이 첫 번째 날이다. 5주라는 시간동안 무엇을 할지, 무엇을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부딪치려 한다. 오기 전 친한 선배가 이번 여행기간에 무엇을 한다는 생각보다는 푹쉬면서 여유 있고 내적으로 성숙할 수 있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전적으로 동감한다. 이번 여행의 중요한 목적도 휴식과 여유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이 여행을 채우기에는 미안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 집에서 육아를 전담하고 있는 와이프와 아빠와 한참 친해진 아이, 소속 단체의 여러 상근자 및 현장에서 치열하게 활동하는 모든 이들. 일단 마음 가고 몸가는 대로 움직이되, 더불어 나를 국제연대활동으로 이끌었던 그 곳의 사람들을 다시 만나 그들의 삶을 눈으로, 귀로, 피부로 느끼며 잊혀지고 있는 초심을 되돌아보고자 한다. 이 여행을 통해 당장은 모르지만 마음 속 깊은 곳의 솔직한 내 목소리도 들어보려 한다. 비장하지는 않지만 의미있는 여행, 이것이 오랫동안 내가 준비한 이번 여행의 그림이자 내 스스로에 대한 다짐이다. 길 위에서 다시 길을 되돌아본다. 오랜만에 살람 알라이쿰, 알라이쿰 살람(평화가 그대에게, 그대에게 평화가)!
2017-07-12 | hrights | 조회: 314 | 추천: 0
임아연/ 당진시대 기자   이번 6.4지방선거에서 주목할 만 한 점은 당진시장 후보들을 대상으로 한 토론회가 무려 5개나 진행됐다는 점이다. (방송토론까지 따지면 5개 이상이다.) 지역신문사가 주최한 토론회와 지역사회연구소에서 진행한 토론회는 큰 틀에서 보면 당진시에 대한 전반적인 정책 등 시장 후보들을 검증하는 것이었고, 면 단위에서 해당 지역의 현안에 대해 토론을 벌인 것과 농업정책, 그리고 여성정책에 대한 토론이 각각 이어졌다. 이번 선거는 세월호 참사로 인해 당내 경선 등 선거일정이 많이 미뤄졌고, 이전 같지 않게 다소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후보자들이 유세를 벌이고 있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후보들이 한 사람의 유권자라도 더 만나기 위한 시간이 부족한데, 토론회가 너무 많은 것 아니냐는 볼멘소리도 있었다. 하지만 선거가 인물이 아닌, 사탕발림 같은 구호가 아닌 정책 중심이어야 한다는 당연한 상식에 따른다면 후보자들이 공부하고, 고민하고 또 그들의 생각을 알릴 수 있는 토론회는 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권자로서 여러 토론회가 계속 이어지면서 후보들이 해당 분야 또는 지역현안에 대해 얼마나 준비를 했는지 가늠할 수 있었고, 각 후보들이 사회를 보는 시각에 대해서도 나름의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에 무척 고무적이었다. 사진 출처 - 당진시대 특히 지난 5월 22일 한국유권자연맹 당진지부에서 개최한 여성정책 토론회의 경우에는 당진시가 ‘여성친화도시’를 표방하고 있지만 아직도 넘어야할 산이 크다는 것을 방증하는 기회였다. 아직도 사회에 만연한 성적 불평등과 부족한 성 의식, 그리고 그에 따른 성 인지 정책 등 모든 부분에서 미흡함을 느낄 수 있었다. 후보들이 ‘복지’라는 큰 틀에 포함시킨 여성정책은 대부분 시혜적 차원에 그쳤다. 여성을 단지 사회적 약자로 규정하고, 돌봐야 하는 존재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여성을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존재로 인식함으로써 끊임없이 타자화하고 객체화시킬 뿐이다. 성적 불평등은 여성회관을 따로 지어 주거나, 여성전용 택시를 두거나 하는 등 남녀를 구분 짓는 정책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여성이 사회적 존재로 설 수 있도록 사회참여를 돕고 정치적 발언의 기회를 확대함으로써 해소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성들이 가장 큰 문제로 느끼고 있는 출산과 육아에 대한 부담을 반드시 짚고 넘어 가야 한다. 그래서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북유럽의 사회복지 모델은 자연스럽게 여성정책과 맥을 같이 한다.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일이 여성으로 살아가는 한 존재에게 걸림돌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사회는 이를 책임지지 않으면서 출산만을 강요하고 있지는 않은가. 여성들 스스로 갖는 인식의 문제도 크다. 토론회를 앞두고 지역에서 벌인 설문조사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정치적 능력이 떨어진다고 보는 결과가 나왔다. 또한 토론회 말미에 사회자가 후보자들의 아내에게 “가정에서 남편의 성평등 지수를 점수로 매겨달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도 마찬가지 였다. 이들은 남편(후보자)이 손톱을 깎아 준다거나 집안 살림을 ‘돕는다’거나, 딸 아이의 초경을 축하해줬다는 점을 내세우며 저 마다 자신의 남편이 최고라고 치켜세웠다. 성 평등적 가치관과 남편의 가정적인 성향은 엄연히 다른 것이지만 여성들조차도 이를 잘못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희망은 있다. 고령 인구가 많고, 보수적이라고 하는 지역에서 여성 문제가 이렇게 공공의 영역에서 토론된 것은 이전엔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이다. 첫 술에 배부를 수 없다. 이번 선거를 계기로 앞으로 더 많은 토론과 논의, 문제제기가 이뤄진다면 지역의 여성정책과 성 인지 관점에 대한 지역민의 공감대가 점차 확산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336 | 추천: 0
송채경화/ 한겨레21 기자   5월20일자 모든 일간지의 1면에는 눈물을 흘리는 박근혜 대통령의 모습이 실렸다. 박 대통령의 눈물이 진심이든 아니든 본인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눈물을 흘리면 그 자체로 엄청난 뉴스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누리꾼들 사이에서는 이 눈물이 애초 청와대 참모진의 ‘기획’이었다는 의혹도 나오고 있다. 대통령이 대국민담화를 하기 직전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한 김진오 선임기자가 “청와대 관계자들이 세월호 참사에 대한 반성과 사과를 감성적으로 접근해야 대국민 호소력이 커진다는 의견을 개진했다. 대통령이 참모진의 의견을 수용해 단 한 번도 없었던 눈물을 보일지 지켜볼 일”이라고 말한 것을 근거로 들었다. 그러나 사전 연출이냐 아니냐를 따져 대통령의 눈물이 진심인지의 여부를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청와대 참모들이 눈물을 흘리라는 의견을 내놓은 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대통령이 이를 거절했을 수 있다. 그리고 거절은 했지만 대국민담화를 진행하다보니 감정이 복받쳐 눈물이 나왔을 가능성도 있다. 사람의 속마음을 누가 어떻게 들여다볼 수 있을까.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9일 오전 청와대 춘추관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관련 대국민담화 발표 연설 말미 ‘의로운’ 희생자 이름을 거명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사진 출처 - 청와대사진기자단 그럼에도 나는 박 대통령의 눈물이 ‘악어의 눈물’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리기 어렵다. 대통령은 일반인이 아니기에 눈물에도 ‘책임’이 따른다고 보기 때문이다. 눈물에는 여러 의미가 있다. 슬픔, 안타까움, 자기성찰, 다짐 등등. 대통령이 눈물을 흘리려면 적어도 이러한 상징적인 부분을 그 눈물 속에 담아낼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대통령은 이 점에서 실패했다. 슬픔과 안타까움은 있었을지 몰라도 자기성찰이나 앞으로의 다짐은 그 눈물에 없었다. 세월호 참사의 최종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고 말했지만, 무엇을 잘못했는지, 앞으로 어떻게 책임질 것인지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 ‘해경 해체’라는 초강수 구조조정안 외에 무너진 신뢰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더구나 대통령은 앞에서는 울면서 뒤에서는 세월호 참사에 슬퍼하는 이들에게 무차별적인 공권력을 휘둘렀다. 박근혜 정부는 지난 주말 서울 청계광장과 광화문 주변에서 거리행진을 하던 시민 200여 명을 연행했고, 이들을 형사 처벌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연행한 방식도 기존과는 달랐다. 전혀 폭력적이지 않던 분위기에서 경찰은 시민들을 에워쌌고 몇 분 만에 3번의 해산명령을 마친 뒤 궁지에 몰린 시민들을 붙잡아갔다. 해산하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시민들까지도 순식간에 데려갔다는 게 현장 참석자의 증언이다. 현장에 있던 한 시민은 <한겨레> 인터뷰에서 “200여 명 정도가 모여 있었고 일부만 도로에 앉아 있었다. 자유롭게 해산하려는 분위기였는데 순식간에 세 차례 해산명령이 이뤄지더니 경찰이 에워쌌다”고 말했다. 경찰의 목적이 애초부터 ‘질서 유지’가 아니라 ‘연행’이 아니었는지 의심이 드는 대목이다. 박근혜 정부의 공권력은 세월호 유가족을 미행하는 어처구니없는 짓도 저질렀다. 세월호 가족 대책위는 19일 “오늘 세월호 사고 실종자 가족들이 있는 전남 진도로 가던 도중 불법 미행을 하고 있는 경찰들을 발견하고, 이들로부터 미행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미행한 경찰들은 희생자 가족들이 눈치를 채고 “경찰이냐”고 묻자 아니라고 부인하다가 결국은 “유가족들에게 혹시 무슨 일이 있을까봐 도와주려고 그런 것”이라고 변명했다. 그 말이 진심이라면 출발 때부터 공개적으로 가족들을 호위했어야 맞다. 어디 이뿐일까. 교육부는 대통령에 세월호 참사의 책임을 지고 퇴진하라는 글을 쓴 교사들을 중징계하겠다고 밝혔고, 청와대는 대통령 조문 연출 의혹을 제기한 <CBS>에 소송을 걸었다. 세월호 침몰에 대한 온라인상의 수많은 의혹에 대해서는 대통령이 직접 나서 “사회적 혼란을 야기시키는 불순한 의도”라며 “이런 거짓말과 유언비어의 진원지를 끝까지 추적해서 그들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공포정치’다. 공포정치는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대중에게 공포감을 주는 정치를 뜻한다. 자기 목소리를 내는 시민들과 언론, 심지어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마저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이 무자비한 공권력의 이면에는 “가만히 있으라”는 강력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이러한 ‘공포정치’를 해놓고 이제 와서 눈물의 진심을 믿어달라고 하니 누가 수긍할 수 있을까. 대통령은 정말 눈물 하나로 이 모든 불신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것일까. 박 대통령이 이번 대국민담화에서 던진 메시지는 이것이었다. “모든 것은 나의 책임입니다. 그러니 국민 여러분은 입 다물고 내가 앞으로 어떻게 해결해나갈지 지켜보기나 하세요.” 그러나 박 대통령이 진심으로 반성하고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면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 “국민 여러분, 가만히 있지 마십시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됐는지 우리 함께 되짚어봅시다. 새 체제가 필요하다면 다 같이 만들어봅시다. 제발 움직여 주십시오.”
2017-07-12 | hrights | 조회: 355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