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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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김성은(서울신문 기자), 김태형(프리랜서 방송작가),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박용석(출판업),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춘천별빛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이동화(아디 사무국장),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홍성준/ 투기자본감시센터 사무처장   지난 10월 17일, 동양그룹 기업어음‧회사채 사기사건의 1심 재판부는 금융사기 범죄를 저지른 동양그룹 회장 현재현에게 징역 12년, 동양증권 사장 정진석에게 징역 5년, 동양 그룹 계열사 임원들에게도 각각의 형량을 선고하였다. 2조 원에 육박하는 피해금액, 5만여 피해자를 양산한 “단군 이래 최대의 금융 사기사건”을 저지른 자들에 대한 엄중한 처벌이 내려진 것이며, 이는 투기자본감시센터(이하, 우리센터)와 피해자들이 공동 투쟁을 통해 쟁취한 소중한 성과이다. 특히, 중요한 것은 이로써 사기범죄자들은 피해자들에게 법적으로 ‘피해배상’ 의무가 생긴 것이다. 5만여 피해자들에게 드디어 희망이 생긴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 금융당국, 검찰이 함께 신속하고 실질적인 피해배상을 위한 방안을 마련해야 하며, 동시에 사기사건의 주범, 가해자들이 책임감을 가지고 능동적으로 피해자들에게 배상에 나서도록 강제하여야 한다. 또한, 현재현은 물론 다른 금융자본가의 유사한 금융사기 “재범의 위험성”을 사전에 막는 방향으로 법제도를 개혁해야 한다. 사실, 삼성전자나 현대차를 제외한 대부분의 재벌그룹은 이 불황 속에서 수익을 내지 못하고 있고, 동양그룹이 그랬던 것 처럼 “금융사기”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않다. 지난 10월 1일자로 동양증권은 “유안타증권”이라는 새로운 간판을 달고 서울 본점과 전국 지점에서 영업을 하고 있다. 이것이 상식에 맞는 일인가! 주범인 현재현과 정진석만 처벌받으면 모든 것이 끝인가! 아니다! 지금 유안타증권의 모든 임직원은 동양그룹의 사기범죄 공범이며, 실행자들이다! “단군 이래 최대의 금융 사기사건”을 저지른 금융회사-증권사가 계속 영업을 해야 할 어떤 이유도 없다! 지난 국정감사에서, 동양증권은 하부의 조직 폭력배들이 마약 등 불법 자금을 모아서 그 조직의 보스(Boss)에게 바치는 "상납금" 방식으로 운영된 것이 드러났다. 우선, 동양증권은 처음부터 “동양증권 CMA계좌”를 보유한 기존 거래 고객을 정확히 ‘사기판매 대상’으로 계획했다. 이들을 대상으로 “문자메시지 발송 또는 유선 안내 등의 방법”으로 사기판매를 한 것도 내부 문건에 명시되어 있었다. 즉, 처음부터 동양증권과 모든 임직원은 자기 거래고객을 사기판매 대상자로 선정, 그 각각의 보유 재산과 신상 등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사기판매에 나선 것이다. 그리고 동양증권의 본부 차원에서 ‘피라미드식 목표할당’을 통해 회사채를 사기 판매 하였다. 최초에 리테일 전략팀이 각 지역본부별로 목표할당과 금액을 확정하여 금융상품 전략팀에 통보하면, 금융상품 전략팀은 각 지역본부 담당자에게 유선 상으로 할당금액을 통보하고, 각 지역본부에서는 다시 각 지점별로 할당금액을 배정하는 방식이다. 즉, 사기판매를 동양증권의 본부가 진두지휘하고, 전체 지점과 전체 직원이 그 지휘에 따라서 일사불란하게 사기 판매에 가담을 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동양증권은 직원들의 회사채 판매에 따른 성과급 지급을 명시하였다. 비계열사 회사채를 판매할 때는 판매금액의 9.6베이시스포인트(bp)를 성과급률로 반영한데 반해, 계열사 회사채를 판매할 때는 무려 3.7배나 많은 35.4베이시스포인트의 성과급률을 적용하였다. 이렇게 해서 동양그룹의 “투자부적격 등급의 회사채를 집중적으로 팔고”, 그 사기범죄 수익은 전체 임직원이 나눠 가진 것이다. 그럼에도, 동양증권(현, 유안타증권)과 임직원은 간판만 새로 달고 영업을 하고 있다. 작년에 괴롭다고 자살한 직원 한명을 제외하고 말이다. 생각해보면, 그들은 동양그룹이 부도가 나고 5만 피해자가 동양증권으로 몰려들 때부터 뻔뻔했다. 우리센터가 당시 상황 파악을 위해 동양증권 노동조합에 연락을 하자 회피하고, 현재현 회장을 “업무상 배임죄”로 검찰고발을 했다. 회장 한 놈만 나쁘고, 우리는 무관하다는 식이다. 아니, 자신들도 피해자란 식이다! 여기서, 생각나는 말이 있다.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다. 히틀러를 투표로 선출하고, 그가 유대인을 학살할 때 외면을 하고, 그가 전쟁을 일으켜 승리하자 만세를 불렀던, 독일의 평범한 사람들. 히틀러는 나쁘지만 평범한 독일인은 자신들은 책임이 없다는 태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사실, 동양증권 직원만이 아니다. 내가 본 외환은행 노동조합은 자신의 고용이 위협받을 때만 항의를 하지, 투기자본 론스타가 처음 인수할 때나 4조 원을 ‘먹튀’할 때도 함께 박수치며 즐거워했다. 론스타에 의한 해고자나 KIKO사태 등 금융피해자들의 고통은 외면했다. 쌍용차사태 때나 현대차 비정규직 투쟁 때도 “구사대”로 몽둥이 들고 설치는 놈들은 대개 그 회사 직원이었다. 자신은 힘없는 노동자이고, 모든 것은 사장이 시켰다고. 그러면서도 그 “평범한” 직원들은 사장이 주는 월급 잘 받아먹고, 승진도 하며 잘 산다. 이쯤 되면, 금융당국은 즉각 동양증권(현, 유안타 증권)의 인가 취소, 해산을 통보하고, 전체 임직원을 검찰에 사기죄로 고발해야 마땅하다. 그럼에도 현실은 그렇지 않다. 지난 10월 1일, 서울 을지로 유안타증권 본사 앞에서 진행된 동양피해자대책협의회 기자회견 모습.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우리센터와 피해자들은 지금 유안타증권의 인가취소와 해산을 위해 싸우고 있다. 금융위원회와 전국의 지점에서 매일 1인 시위를 진행 중이며, 관련 신청서는 금융위원회에 제출했다. 또, 동양증권에서 유안타증권으로 대주주변경이 되는 것을 승인한 금융위원회 처분을 취소하라는 행정소송을 제기하여 재판이 진행 중이다. 이유를 짧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유안타증권의 출자금 자체가 언론에서 소개한대로 대만에서 온 것이 아니라, 조세회피지역(tax haven)으로써 악명이 높아 국제적 투기자본, 불법 자금의 온상지인, 버진 아일랜드(Britsh virjin island), 케이만 군도(Cayman Islands) 등에서 들여 온 것이다. 즉, 탈세를 목적으로 운영되는 투기자본에게 금융위원회가 동양증권이라는 금융기관을 들어 바친 것이다. 이것은 ‘제2의 론스타게이트’라고 할 만한 사건이다. 더욱 큰 문제는 대주주 적격성 심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로지, 유안타 측이 제출한 서류들로만 심사를 했다. 심지어, 자금출자 상황을 알 수 있는 “유안타금융그룹 계열사 현황”이란 문건을 보면, 문제의 버진 아일랜드, 케이만 군도 등은 심사대상에서 아예 제외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나마도 표시되어 심사한 대상은 유안타가 지정한 회사들이다. 즉, 심사 대상자-유안타가 심사 내용을 미리 지정해서 심사 담당자-금융위원회에 제출하고, 금융위원회는 그것만 확인하고 대주주 변경을 승인한 것이다. 한마디로,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심사로 유안타증권이 대주주가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동양증권㈜ 신주 71,428,571주(36.40%)를 “제3자 배정 유상증자”로 약 1,500억 원에 유안타는 인수했다. 이는 정상적인 신주 인수 방식이 아니며, 유안타에 대한 특혜 의혹을 사기에 충분하다. 이러한 점들이 금융위원회의 유안타 대주주변경 승인은 졸속처리 문제를 넘어서 ‘의혹투성이’였다. 반드시, 해명이 있어야 하며, 우선 금융위원회의 유안타대주주변경 승인 처분은 즉각 취소되어야 한다. 하지만, 금융당국은 여전히 “모르쇠”이다. 아니, 여전히 비호하고 있다. 1심 사기판결에 따라서 불가피하게 열린 금융감독원 제재심의원회에서는 유안타증권에 대해 “부분 영업정지 1개월”의 징계를 결정했다. 즉각 인가 취소, 해산을 통보해야 함에도 그렇게 한 것이다. “유안타증권으로 대주주가 바뀌어 영업 정상화를 하고 있다”는(따라서 봐주자!)것이 그들이 내뱉은 말이다! 말인지 막걸리인지... 이 제재심의위원회의 구성을 보면, 대부분이 부패하고 무능한 금융관료 출신 인사들과 금융·투기자본을 대리하는 민간 전문가로 구성되었다. 그 결과, 금융사기 범죄 집단을 비호하고 유사한 금융 범죄를 조장하는 결정을 한 것이다. 최수현 금융감독원장은 ‘유안타 투자자에게 식사 대접’까지 하며 동양증권을 넘겼다고 자랑하는 언론 인터뷰를 최근에 하기도 했다. 결국, 그들은 공범인 셈이다. ... 현실은 희대의 사기범 현재현은 감옥에 갔지만, 그의 공범들은 모두 잘 먹고 잘 산다... 칼바람 맞으며 1인 시위에 나선 피해자들에게는 매일 매일이 추운 겨울이고.
2017-07-12 | hrights | 조회: 613 | 추천: 1
송채경화/ 한겨레21 기자 *영화 스포일러 주의 최근 영화 <제보자>와 <나를 찾아줘>를 연이어 봤다. 임순례 감독이 만든 <제보자>는 한 방송사 피디가 진실에 근접해가는 과정과 그가 취재한 진실을 방송으로 내보내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내용을 영화화한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2005년 한국을 뜨겁게 달군 ‘황우석 사태’가 영화의 소재다. <나를 찾아줘>는 데이빗 핀처 감독이 만든 미국 영화로, 결혼 5주년 기념일 아침에 아내가 실종되면서 사건이 시작된다. 아내를 찾는 과정에서 남편은 범인으로 몰리지만 결국 실종됐던 아내는 집으로 돌아온다. 이처럼 둘은 줄거리부터가 전혀 다른 영화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이 두 영화는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점이 있었다. 먼저, 영화 <제보자>의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보자. 윤민철 피디(박해일)는 어느 날 엄청난 제보를 듣는다. 줄기세포 연구의 대가 이장환 박사의 연구 결과가 모두 거짓말이라는 내용이었다. 윤 피디는 이 제보를 듣는 순간 굉장히 놀라는데 당시 이장환 박사는 우리나라 사람 모두가 존경하고 난치병 환자에게는 희망이 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물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행위 자체가 엄청난 후폭풍을 불러일으킬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취재를 멈추지 않는다. 윤 피디는 취재를 할수록 이장환 박사의 연구가 거짓이었다는 ‘진실’에 근접하게 된다. 이 영화의 핵심은 ‘어느 누구도 진실이 파헤쳐지기를 원치 않는다’는 점이다. 윤 피디의 취재 내용이 사회에 알려지면서 여론은 ‘윤민철 피디가 이장환 박사를 음해하고 있다’거나 ‘국익에 해가 되는 행동을 하지 말라’고 외친다. 이장환 박사는 제자들을 동원해 여론 조장에 앞장선다. 방송국 앞에서는 매일 같이 해당 프로그램이 방영되는 것을 반대하는 시민들의 촛불시위가 벌어진다. 구석으로 몰린 윤 피디도 여론을 바꿔보기 위해 노력한다. 친분이 있는 기자들을 불러 자신이 취재한 내용을 알려주고 다음날 여러 언론에 보도되도록 한 것이다. 서로의 ‘플레이’로 중간 중간 여론은 요동친다. 우여곡절 끝에 윤 피디의 취재 내용은 방송을 타게 되고 결국 ‘진실의 승리’로 영화는 끝이 난다. 영화 '제보자' 사진 출처 - 씨네21 다음은 <나를 찾아줘>를 보자. 이 영화에서 실종된 아내는 ‘어메이징 에이미’라는 동화시리즈의 주인공이다. 에이미가 실종된 이후 남편 닉과 아내의 부모는 기자회견을 통해 에이미의 실종사실을 발표한다. 이 사건은 언론을 통해 급격하게 전파되면서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는다. 이 과정에서 남편 닉을 범인으로 지목하는 증거들이 하나씩 나오기 시작한다. 특히 닉이 에이미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바람까지 피웠다는 증거가 나오면서 닉은 궁지에 몰린다. 결국 닉은 여론을 역이용하기로 결심하고 토크쇼에 출연해 자신이 바람을 피운 것은 맞지만 여전히 아내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 결과 여론은 급격히 닉을 동정하는 쪽으로 기운다. 한편, 영화는 중후반부터 남편이 바람을 피운 사실을 알게 된 에이미가 어떻게 실종 사건을 꾸몄는지 보여준다. 에이미는 남편이 사형을 받게 하기 위해 가능한 한 악랄하게 범죄를 꾸민다. 여론이 남편을 범인을 몰아가는 모습을 재밌게 지켜보던 에이미는 예기치 못한 위험에 처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옛남자를 끌어들여 그를 살해한 뒤 남편에게 돌아간다. 에이미는 ‘옛남자에게 납치를 당했는데 내 남편이 억울하게 범인으로 지목됐다. 우리는 여전히 사랑하는 부부’라고 말한다. 남편은 모든 진실을 알고 있지만 아내를 거스르고 진실을 얘기할 수는 없다. 자신도 이미 여론을 바꾸기 위해 ‘아내를 사랑한다’고 거짓말을 한데다 아내의 뱃속에는 자신의 아이가 자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닉은 진실을 덮고 ‘무서운 아내’와 함께 살아가는 길을 택한다. 이 두 영화의 흐름에 중점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여론’이다. 영화의 주인공들이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 여론과 진실은 마구 뒤섞여 요동친다. 그렇게 양 극단을 오가던 여론은 두 영화에서 전혀 다른 결과를 나타낸다. <제보자>에서는 진실이 여론을 압도하는 승리로 끝이 나고, <나를 찾아줘>에서는 여론에 의해 진실이 뒤덮인다. 영화의 ‘엔딩’은 다르지만 두 영화가 얘기하려는 지점은 같다. 여론이 언제나 진실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는 점, 여론은 때때로 진실을 땅 속으로 묻어버리는 역할을 한다는 점, 그리고 여론의 그러한 특성에 편승해 이득을 보는 이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언론인의 입장에서 이 두 영화는 그래서 매우 흥미로웠고 또한 우울해지기도 했다. 여론이 진실을 압도하는 세상, 이러한 세상에서 여론을 선동해 진실을 감추려고 애쓰는 세력들, 또한 그 속에서 진실을 찾으려 노력하는 이들이 뒤섞인 사회에서 많은 언론이 갈 길을 잃은 것은 아닌지. 진실에 대한 갈구보다는 여론을 의식하는 정보를 생산해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괴감이 느껴지는 하루하루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393 | 추천: 0
손상훈/ 소셜리서치멘토르 기획국장   1994년 서의현 조계종 총무원장의 정치권력 결탁과 3선 연임 독재에 맞서, 조계종 대중들의 활동이 시작되어 새로운 변화로 나아가는 소위 조계종 종단개혁이 일어났다. 당시 조계종 중앙종회(사회의 국회기능. 입법기관)의원들이 참여한 총무원장 3선 연임 투표에서 57명 중 56명이 찬성표를 던짐으로써 권력승려들의 쏠림현상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20년이 흘러 불교계의 한 문화재단이 지지협동조합에 의뢰하고, 한국리서치를 통해 조사한 ‘한국인의 종교인식과 불교인상(이미지)에 대한 국민여론조사’를 2014년 7월에 발표하였다. 이 조사에서 국민들이 94년 조계종단 개혁에 낙제점을 준 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되었다. 조계종 내부개혁과제 가운데 복지·봉사 등 사회공헌활동 강화에 대해 전체 20.5%가 부정적 평가를 내렸고, 54%는 보통 수준으로 보았다. 스스로 칭찬하고 만족하는 행정중심 사고에 머물러 있는 일부 조계종 관계자들에 대해 우물 안 개구리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국민들이 왜 낙제점을 주었을까 곱씹어보고 대책을 마련하여야 한다. 민주주의가 발전하는 사회일수록 다양한 측면에서 분석하고 평가하는 자유로운 주장이 가능해야 한다. 또한, 국민조사에서 조계종이 사회적으로 권력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본 응답자가 67.2%로 나타났고, 국가와 정치권력으로부터 자주적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본 응답자는 56.2%로 절반에 불과했다. 봉은사 직영사찰 논란이 언론에 많이 보도되었고, 현 종단정치 승려들의 ‘권력 해바라기’에 대해 국민들이 냉정하게 보고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소위 도박리스트에 오른 최고위층 연루자들은 정치인이나 고위직 종사들에게 정기적이고 합법적인 수백 여 만원을 매월 정기적으로 후원하고 있다는 의혹도 있다. 이런 정치인들이 도박연루 의혹 스님들을 큰스님이라 부르는 것은 당연하다고 해야 할까. 20여 년 동안 큰 사건이 일어날때마다 앵무새처럼 떠들던 국고보조금 투명성 제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불교계관련 재단과 협동조합에서 의뢰한 국민인식조사에서 국고보조금이 투명하고 목적에 맞게 집행되고 있다고 본 응답자는 32.3%에 불과했고, 부정적 의견을 낸 응답자는 37.5%였다. 불자일수록 부정적인데 국고보조금이 투명하게 집행되지 않는다는 의견이 29.3%로, 긍정적인 의견 18.2%보다 높았다. 문화재관람료의 투명성 역시 전체 응답자 39.4%가 부정적 의견을 냈고, 불자일수록 부정적 의견이 높았다(긍정 17.2% 부정 28.7%). 재가불자들이 지난 14일 인사동 관훈갤러리 2층 카페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송담큰스님의 수행가풍은 조계종의 수행가풍과 무엇이 다른가’라는 제목의 선언문을 발표했다. 왼쪽부터 우희종 서울대 교수ㆍ김경호 지지협동조합 이사장ㆍ김종규 교단자정센터 원장. 사진 출처 - 불교포커스 재가불자(평신도)나 불교계 시민단체들이 더 분발해야 하는 대목이다. 지난 해 8월22일 포항검찰청에서 도박장 개설과 상습 도박 혐의에 대한 검찰의 철저한 조사를 촉구한 불교계 단체는 후속 활동이 미비하다. 2014년 2월 검찰의 양자 무혐의 결정에 대해서 재조사를 촉구한 성명서를 발표한 이래 구체적인 활동이 미흡하다. 또한 모 장학재단에서 장주스님에게 제기한 소송에서 민사지방법원은 검찰과 상반된 결론을 내렸다. 검찰과 법원의 상반된 결정에 대해 불교계 시민사회는 진실을 규명하고, 내부의 투명성을 높이고 사회의견을 반영하는 적극적인 활동을 하여야 한다. 경남 P사 주지가 도피하다 자수하여 수십억 원대 횡령사건의 진위가 법정에서 다뤄질 때도 시민단체는 고요했다. 검찰청 앞에서 1인 시위 한번 하지 못하였고, 기초 사실을 확인하고 추가 근거를 추적하는 후속 자정활동이 부족했다. 깨어있는 언론과 함께 하는 켐페인도 진행하지 못했다. 조계종 주변의 자정과 쇄신기구들은 벙어리였고, 최고위층과의 연루설만 무성하다 P사 주지의 개인일탈로 끝나가는 과정인 듯 하다. 최근 조계종에서 무늬만 그럴싸하게 사회의 아픔을 같이 한다고 하는 행동 이면에 숨은 거짓이 있다. 도박의혹 최고 권력승들이 떠나가는 자리에 더 나쁜 권승이 온다는 논리에 취해 내면의 타협을 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국민이 진실을 알게 하고, 올바른 인식을 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지난 2014년 7월 실시한 ‘조계종에 대한 국민인식조사’에 따르면 국민들은 조계종 스님들 중 행정·포교 종사자를 신뢰하지 않거나 일반인과 비슷한 수준에서 신뢰했다. 특히 조계종 총무원장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의견이 27.4%로, 신뢰한다는 의견 17.2%(불교인) 보다 높았다. 이는 농어촌의 작은 절 주지에 대한 불교인들의 신뢰도 19.9%보다도 낮은 수준이어서 대체로 불자들은 총무원장을 신뢰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원로 스님과 수좌 스님에 대한 신뢰도는 각각 36%, 51.6%로 총무원장 신뢰도에 비해 적게는 두 배, 많게는 세 배 이상 차이가 났다. 우희종 서울대 교수 등 재가불자 모임대표들은 지난 10월14일 조계사 인근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조계종의 부패한 권력집단을 비판했다. 현 총무원 집행부와 돈과 이권, 재정이 우량한 사찰 주지자리만 탐내는 권력승려, 즉 권승을 비판 한 것이다. 앞으로는 매월 토론회 등을 개최하고, 승려답지 못한 승려에게 시주를 거부하겠다고 한다. 공동선언에 그치지 않으려면 실천할 의지가 있는 세 사람이라도 모여 구체적인 실천을 해야 실효성을 거둘 수 있다. 시민사회의견을 대변한다고 자처하며, 돈 있는 권력승려들의 생 얼굴을 가리는 짝퉁인사부터 분리수거가 필요하다. 부패한 권력승려는 거꾸로 돈 많고 사회적 영향력도 막강하다. 타협하지 않고, 국민들과 함께 걸어갈 재가불자(평신도)지도자는 실천을 통한 신뢰에 만들어진다. 특히 앞으로 20년을 함께 해 갈 20대 젊은 활동가를 양성하기 위한 노력이 절실하다. 맑고 향기로운 종교계를 꽃피울 지난한 겨울이 시작되고 있다. 부패한 소수의 권력승을 몰아내고 청소하려는 재가불자 모임에 박수를 보낸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372 | 추천: 1
허창영/ 광주교육청 조사구제팀장, 전임 간사   직선2기 광주광역시교육청의 슬로건은 ‘질문이 있는 교실, 행복한 학교’입니다. ‘질문이 있는 교실’이라는 말, 참 매력적입니다. 학교 외벽에는 ‘대화가 있는 학교’라고 써 붙이고도 복도와 교실에는 ‘정숙’을 곳곳에 붙여놓고 있는 학교의 모습이 우리 학교의 전형이기 때문이지요. 질문은커녕 숨소리조차 내기 쉽지 않은 학교 현실에서 질문이 있는 교실을 만들겠다는 것은 거의 혁명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전 이 ‘질문이 있는 교실’이라는 슬로건이 아주 마음에 듭니다. 광주시교육청의 슬로건을 홍보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를 해석하는 것에는 일정한 온도차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학교의 일반적인 교실 풍경은 대화나 토론이 없고 교사가 일방적으로 전달해주는 내용을 습득하는 방식입니다. 때로는 수업과 관련해 질문을 하는 것에 대해 짜증을 내는 교사가 있기도 합니다. 최근 들어 다양한 수업방식이 연구되고 있고, 모둠별 수업이나 참여형 기법들이 늘어나고는 있지만 한계는 분명합니다. 이조차도 초, 중학교에서나 가능할 뿐 고등학교에 가면 주입식 교육이 여전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사회에서 학생의 역량을 평가하는 방식이 대학수학능력시험으로 귀결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암기하도록 하고 툭 건드리면 줄줄줄 나올 정도가 되도록 주입하고 또 주입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양도 방대합니다. 그러니 묻고 답할 시간조차 부족한 실정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이 ‘질문이 있는 교실’이라는 말에 대해 수업시간에 질문과 토론이 잘 되도록 하는 것으로만 이해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수업에 대한 질문조차 막았던 것을 극복하자는 취지이겠지요. 그래서 어떤 교사는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의무적으로 한 개 이상 질문을 하도록 하고 있다고도 합니다. 혁신학교인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흥덕고등학교에서 2013년 5월 2학년 학생들이 고전문학 수업 시간에 질문지를 만들어 토론하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물론 질문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토론이 활성화되는 수업은 권장해야 합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질문이 있는 교실’이라는 말이 갖는 의미가 과연 그것 뿐일까요? 수업과 관련해서 질문할 거리를 찾아내고 그에 대한 자기의 생각과 의견을 표현하도록 하는 것이 전부일까요?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수업시간에 질문을 잘 한다는 것은 현재의 교육체제에 잘 적응한 모범생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질문도 잘 합니다. 아는 게 없는데 수업과 관련한 질문과 토론을 잘 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지요. 전 오히려 ‘질문이 있는 교실’은 ‘질문을 잘 하는 아이’가 아니라 ‘문제제기를 잘 하는 아이’를 상상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육 내용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왜?’라는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때로는 수업내용과 관련 없는 ‘뚱딴지’같은 얘기도 할 수 있는 교실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의 교육은 지나치게 모범생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이것마저 자칫 질문을 잘 하는 또 다른 모범생을 길러내는 것이어서는 곤란하다는 겁니다. ‘삐삐롱스타킹’에 나오는 ‘삐삐’와 같은 아이들이 자연스러운 교실, 이것이 ‘질문이 있는 교실’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위기의 시대’인 요즘 ‘시민성의 복원’을 많이 얘기합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시민성이란 무엇입니까? 시민이라는 지위는 근대 시민혁명 시기에 구체제에 대항해 권리를 쟁취하는 과정에서 획득된 것입니다. 시민성은 순응하고 복종하는 존재가 아니라 기존의 체제와 질서에 의문을 제기하며, 주체성을 기반으로 권리를 주장하는 존재의 특징을 설명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시민성을 복원하자는 말은 ‘딴지’를 걸고, 행동하는 주체로서의 지위를 회복하자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의 교육은 이 시민성을 거세하는 방향에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체제에 잘 순응하고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모범적인 시민’(다시 말하면 나쁜 의미에서의 국민)을 양성해왔던 것이지요. 그 결과가 현재의 암담한 시대입니다. 그래서 이제 교육은 달라져야 합니다. 기존의 체제와 내용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다운 시민으로 성장하게 하는 교육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면 시민적 주체성을 획득하는 과정으로서의 교육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질문은 수업내용을 잘 이해하기 위한 것을 넘어 자신의 시민성을 획득하기 위한 과정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니 문제제기적이고 때로는 엉뚱한 얘기가 튀어나올 수도 있겠지요. 이런 점에서 ‘질문이 있는 교실’은 거친 야생의 들판에서 자라나는 잡초 같은 아이들이 차고 넘치는 교실이라고 생각하는데,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2017-07-12 | hrights | 조회: 463 | 추천: 0
이현정/ 흥사단 민족통일운동본부 부장   “세금은 올리더라도 국민들 약은 올리지 말자.” 최근 SBS 웃찿사 개그 코너에서 나온 멘트다. 코미디보다 더 웃긴 박근혜 정부의 증세를 비판했다. 증세 없는 복지 대선공약이 ‘복지 없는 증세’로 돌아왔다. 물론 정부의 2015년 예산안이 국회에서 최종 통과된 것은 아니지만, 담배세, 자동차세, 소득세, 주민세 등 어마어마한 서민 죽이기 증세가 기다리고 있다. 담배를 사치품으로 몰아 개별소비세를 높게 부과하는 이유로 “흡연에 대한 자기통제의 실패를 국가가 교정해주는 수단이다.”라는 학계의 지지 발언까지 등장했다. 뻔뻔하기 그지없다. 늘렸다는 복지 지출 예산도 모두 껍데기에 불과하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국 4대보험 등 자연 증가분이고, 대선 공약이었던 고교 무상교육도, 영유아 지원도 모두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적자 재정을 부자 증세가 아닌 서민 증세로, 심지어 서민 복지공약 파기까지 저지르고 있다. 내년에 소득세 5.7%, 개별소비세 29.6% 증대에 반해 법인세는 불과 0.1% 증대로만 예산안을 준비했다. 헌법에서도 규정한 경제민주화를 위한 소득재분배 실현이라는 국가의 기본적인 역할마저 짓밟고 있다. 역시 서민 등골 빼먹는 박근혜 정부다. 당신들답다. 여기 그런데 서민들 주머니를 털어왔던 게 또 하나 있다. 바로 통신사 담합으로 인한 통신비 부정 폭리다. 그리고 이러한 이동통신 3사와 결탁해온 정부의 용인이 밝혀졌다. 오늘부터 단말기 유통구조개선법이 시행되면서 오늘 낮 광화문 KT 본사 앞에서 시민사회 기자회견이 있었다. 최근의 주요 통신 관련 이슈에 대해 참여연대, 통신소비자협동조합 등이 주도했다. 기자회견의 주요 골자는 이동통신 3사 담합과 폭리 반환 요구, 정부 용인에 대한 비판과 공익감사 청구, 현실적 통신비 인하 요구, 향후 공동대응 선포 등이었다. 감사원의 미래창조과학부 감사 결과, 이동통신 3사가 국민 1인당 1년에 15만 원의 폭리, 즉 3년 동안 총 45만 원의 폭리를 취한 게 밝혀졌다. 통신 3사가 최근 3년간 5조 원에 가까운 법인세와 투자보수 비용을 부풀려 원가로 산정하고, 18조 원이 넘는 과다한 마케팅 비용 등 모두 22조 8000억 원의 비용을 소비자들에게 고스란히 통신비로 떠넘겨온 것이 드러났다. 그동안 소비자들에게 20만 원대의 보조금을 주었지만, 뒷통수를 친 격이다. 결국 소비자들은 실제 원가보다 자기 돈을 더 주고 단말기를 구입한 것이다. 이제는 1인당 45만 원씩 돌려받자. 이동통신 3사에 반환요구를 하자. 더 이상 호갱이 되지 말자. 물론 소송 절차도 필요하고 장기전이 될 수 있다. 지금 주도하고 있는 시민사회단체에 요청하고, 힘을 실어주면 충분히 가능하다. 또 이러한 운동의 연장선에서 통신비와 단말기 인하도 가져오자. 물가 대비 통신비와 단말기 가격이 비현실적으로 너무 높다. 이번 기회에 확실히 바꿔보자. 사진 출처 - SBS 여기에서 우리가 짚고가야 할 문제는 기업만이 아니다. 담합과 폭리 비리를 알고 있었음에도 용인하고 비호해준 못된 정부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감사원은 작년 9월부터 미래창조과학부를 감사해서 이러한 비리를 확인하고도, 불문처리하기로 하면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이는 감사원의 직무 유기이자 또 다른 부정 유착관계를 조성해왔다. 특히 김영호 감사원 사무총장이 지난 2월 SKT 주요임원을 만났다는 것도 사실로 밝혀졌다. 이러하기에 감사 자료 및 불문처리 경위를 명명백백하게 밝혀내야 하며, 관련자들을 엄중 처벌해야만 한다. 오늘부터 시행된 단말기 유통구조개선법을 계기로 엄정한 제재를 가할 수 있는 근거는 마련되었다. 그러나 정작 내부를 들여다보면 단말기 가격 및 통신비 인하는 오히려 더 어려워질 수 있다. 바로 단말기 보조금 분리공시제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제조사와 통신사의 독과점 속에서 제조사와 통신사별로 제공 판매가 노출이 불가능해졌기에 판매 폭리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단말기 가격 현실화를 위해서 보조금 분리공시제는 반드시 도입되어야 한다. 눈 뜨고 코 베인다는 속담이 있다. 3년 동안 45만 원이나 폭리를 취한 이동통신사들, 그리고 독과점 단말기 제조사들의 비현실적 단말기 가격, 담합과 비리를 알고도 눈감아준 정부와 감사원. 도둑놈들 천지다. 이제 밝혀낼 것은 밝혀내고, 45만 원도 꼭 돌려받자. 참여연대 등 이 캠페인을 공동주도하고 있는 시민사회단체 국민소송에 이름을 걸자. 장기전이 될 수도 있다. 그러면서 현실적 통신비와 단말기 가격 인하도 가능해진다. 바로 그 길은 지금부터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374 | 추천: 0
이상재/ 대전충남인권연대 사무국장 지난여름 대전에 위치한 모 대학 군사관련학과 1학년 학생 60여 명이 선배 학생회 간부들에게 1시간 넘게 계속해서 집단 기합을 받다가 그 후유증으로 열 명이 입원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선배들이 기합을 준 이유는 후배들이 수업에 자주 빠지고 태도가 바르지 않아 기강을 잡겠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비단 이번 사례뿐만 아니라 매년 전국의 대학에서는 위와 유사한 집단폭력 사건이 심심찮게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리고 그럴 때 마다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는 폭력을 휘두른 이유는 거의 언제나 후배들의 ‘기강을 잡는다는 것’이다. 하나의 성숙하고 독립적인 인격체로서 존재해야 마땅한 대학생들에게 과연 일률적인 ‘기강’이란 것이 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은 둘째 치고라도, 도대체 그 기강을 잡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인 집단적인 폭력행사는 도대체 어디에서 배워온 것일까? ‘기합’이란 말과 함께 ‘얼차려’ ‘선착순’과 같은 군대에서 흔히 사용하는 용어도 대학 내 폭력사건을 언급할 때 언론에서 자주 볼 수 있다. 학원 내에서 벌어지는 폭력행위는 군대에서 병사들에게 집단적 혹은 개인적으로 육체적인 고통을 주는 일련의 행위와 많은 점에서 유사한 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폭력’의 행사는 비인권적인 처사로 비난받거나 심하면 법의 심판을 받을 수 있는 매우 반사회적인 사건이지만 그것이 ‘군대’ ‘기강’ 등과 한 문장에서 사용되면 우리 사회의 한편에서는 같은 폭력이라 할지라도 용인하거나 덮어두려는 분위기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미국독립선언과 프랑스인권선언이라는 1차 인권혁명의 시발점에서 현재까지로 인권의 역사를 좁혀서 살펴봐도 인류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인권침해의 현장은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간 ‘전쟁’이었다. 그 전쟁을 수행하는 군대의 기본적인 행동원리는 갖가지 무기를 이용한 폭력의 행사이기 때문에 군대는 태생적으로 ‘폭력’과 떨어져서는 이해할 수 없는 조직이다. 하지만 그 ‘폭력’은 전쟁이란 특별하고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적에게만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최근 대한민국 군대에서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군대내 폭력사고의 일반적인 형태는 전쟁시 적군에 맞선 아군의 폭력행사가 아니라 비전쟁상태에서 아군이 아군에게 행하는 폭력이라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과거에 징집의 형태로 군대를 모집했거나 현재도 대규모 군대병력을 보유하고 있는 독일, 미국과 같은 서구 대부분의 군대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군대 내에서 폭력적인 방법으로는 기강과 강한 전투력을 유지할 수 없다는 사회적 합의를 이루고 병영 내 상하급자 관계에서 오는 폭력문화를 없앴다. 하지만 대한민국 군대는 전신인 일제 강점기 시절부터 전해져 왔다고 알려진 병영 내 악습인 각종 얼차려와 기합, 언어폭력과 같은 폭력행위가 아직까지도 여전히 잔존하고 있다. 사진 출처 - 레디앙 그러한 불미스런 군대 내 폭력이 정지 없이 내 달릴 경우에는 ‘윤일병’ 사건과 같은 참혹하고 비극적인 사건까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현재 대한민국 군대의 우울한 자화상일 것이다. 우리의 군대 폭력문화가 더욱 심각한 것은 서두에서 예로 든 대학 내에서 행해지는 기합문화와 같이 사회의 많은 영역으로 군대의 비합리적인 폭력문화가 유입되고 있다는 것에 있을 것이다. 군대에서 벌어진 폭력사고의 공통점은 엄격한 위계질서 하에서 계급이 높은 상관이나 선임자가 부하에게 비합리적이고 비정상적인 권위를 지시하고 강제한다는 것이다. 여군에게 뿐만 아니라 같은 성(性)인 남성군인에게도 성추행과 성폭행을 저지르고 변기를 핥게 하고 물고문까지 시키는 반인권적인 범죄행위를 해 놓고도 가해병사는 별다른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고, 피해병사는 참는 것 외에 자구책을 찾지 못한다. 이는 대한민국 군대의 구조적 문제이기도 하지만 명백하게 잘못된 권위에 대해서 반대하거나 항거하는 방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우리 사회 전체의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군대라는 특수한 공간과 지나치게 엄격한 계급문화가 던져준 잘못된 권위에 대한 순응과 학습은 고참이 되어서 후배병사에게 그대로 폭력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 이른바 폭력의 내면화로 귀결된다. 비극적인 인권침해 사건은 타인을 나와 다른 존재로 이원화 시키는 ‘타자화’가 일어날 때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나치가 저지른 홀로코스트 만행이 그랬고 지금도 끊이지 않고 있는 종교분쟁, 종족 분쟁 시 발생하는 제노사이드 역시 마찬가지 사례일 것이다. 대한민국의 군대 시스템은 군대라는 특수성을 강조하면서 부하나 후배병사를 타자화 시켜 폭력의 행사를 둔감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 군대내 폭력의 본질이 아닌가 의심해 볼 때다. 현재의 대한민국 군대는 혈기왕성한 20대 초반의 젊은 남성 청춘들에게는 너무나 불편한 곳이다. 인권은 불편함을 먹고사는 개념이기 때문에 당연히 군대 내에서 인권문제는 제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불편을 강요된 애국심과 폭력적 방법으로 뭉개고 있는 것이 지금 대한민국 군대의 불편한 모습이 아닐까 싶다. 전후세대를 지나, 한국전쟁이 언제 일어났는지도 잘 모르는 세대가 군대에 징집되는 시대로 시간은 흘러왔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갈수록 다원화되고 개인주의화 되는 우리의 젊은 세대가 인생을 통틀어 ‘국가’라는 존재와 정면으로 마주하는 거의 유일한 시간이 입영해서 병영생활을 하는 기간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그동안 우리의 국가와 군대가 젊은 청춘들에게 이제는 좀 더 인권적이고 합리적인 모습으로 다가서야 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과제가 되었다. 그 과제를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깨어있는 시민들의 참여와 노력은 언제나 중요할 것이다. 특히 군대 경험을 한 남성들, 어떤 면에서는 군대폭력의 사회적 내면화가 진행된 사람들의 생각이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남성들이 “요즘 군대는 우리 때에 비하면 편하지”, “좀 맞아야 사람 되고 군인이 되는 거야” 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안에도 그 분들의 아들과 손자들이 군대에 입영해야 하는 시간은 계속해서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정말 자신들이 겪었던 군대와 똑같은 병영 환경에 자신들의 후손을 보내고 싶다는 것인지 스스로 반문해 봐야 할 것이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487 | 추천: 0
강국진/ 서울신문 기자   담뱃값 인상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난데없이 ‘서민증세’란 말이 횡행한다. 다양한 반론이 쏟아진다. 시민단체는 물론 야당에서도 정부 발표를 비판한다. 먼저 몇 가지 쟁점에 대해 정리해보자. 담뱃값 올리는 게 세수확대를 위해서일까? 그건 분명해 보인다. 정부가 담뱃값 인상에서 설득력을 가지려면 늘어나는 세입을 대폭 건강증진에 써야 앞뒤가 맞을 것이다. 하지만 정부는 그렇게 할 생각이 없는 듯하다. 정부가 마치 국민건강 핑계 대는 게 짜증난다는 반응을 보이는 분들이 있다. 전적으로 공감한다. 만약 정부가 국민건강을 그렇게나 염려했다면 담뱃값을 1만 원(혹은 9,900원)으로 올린다고 발표했을 것이다(사실 개인적으로 정부가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국민건강을 생각하는 정부라면 카지노와 토토, 로또 등 ‘보이지 않는 세금’인 도박에 대해 중과세를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역시 정부는 그럴 의사가 없어 보인다. 담뱃값 인상 때문에 서민부담이 늘어날 것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그것 역시 동의한다. 21세기에 담배란 대체로 한줄기 연기 속에 버거운 일상을 씻어내고 싶은 사람들이 자주 찾는 물건이다. 우리 모두 분명히 알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 이하 국무위원을 비롯한 장관급 인사들 중 담배 피우는 사람이 있다는 얘길 들어본 적이 없다. 정부 행태는 분명 비판받아야 한다. 담뱃값 인상은 확실히 꼼수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말이다.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뱃값 인상을 찬성한다. 담뱃값은 올라야 한다. 자동차세도 더 올라야 하고 주민세도 더 올라야 한다. 물론 소득세와 법인세도 올려야 한다. 특히 종합부동산세와 금융소득종합과세는 대폭 올려야 한다. 거기에 더해, 필요하다면 부가가치세도 올라야 한다. 담뱃값을 올리면 정부 세입이 늘어날 수도 있고, 흡연율이 낮아져 세입이 오히려 줄어들 수가 있다. 이건 마치 나막신 파는 아들과 우산 파는 아들 사이에서 고민하는 어머니 같은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옛이야기에서 나오듯이, 양쪽 모두 국가로서 혹은 국민으로서 나쁘지 않은 결과를 유도한다. 거칠게 표현한다면, 담뱃값 올렸는데 흡연율이 낮아지지 않으면 세수가 늘어 좋고, 흡연 인구가 줄어들면 간접적으로라도 건보료 부담 줄어들고 국민건강에 도움이 되니까 좋다. 좀 더 깊이 들어가 보자. 담뱃값 인상에 대한 비판론은 “조세부담률을 높이는 등 좀 더 근본적인 대책마련이 필요하다”는 지적과 함께 등장하는 직접세 인상, 즉 부자증세 얘기가 많다. 특히 서민부담 증가, 이른바 ‘서민증세’ 얘기는 꽤나 강력한 비판담론이고 국민들에게 적잖은 호응도 얻고 있다. 심지어 어떤 신문은 폭탄 이미지를 사용함으로써 과거 종합부동산세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등장했던 ‘세금폭탄’ 이미지를 차용하기도 했다. 근본적인 해법. 그걸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담뱃값이 올라서 관련 세금이 늘어나면 조세부담률도 늘어난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 복지확대를 위해서는 조세부담률을 늘려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서민부담도 늘어나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에겐 부자증세도 필요하지만 좀 더 ‘근본’적으로 보편증세가 필요하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 복지국가는 부자에게만 세금을 많이 걷는다는 환상이다. 사진 출처 - 서울신문 사실은, GDP 대비 전체 사회지출이 많은 국가일수록, 즉 복지국가일수록 총소득 중 세율이 높다. 또한 이런 국가들은 전체 조세 가운데 간접세 비중도 높다. 심지어 보통 죄악세라고 부르는 세금 비중도 높다. 다시 말해 복지국가는 모든 국민에게 세금을 많이 거둬서 모든 국민을 위해 복지지출을 한다. 나로서는 세금폭탄과 부자감세가 끊임없이 충돌하는 도돌이표 속에서 정작 조세문제는 해법을 찾지 못하는 상황이 매우 위태로워 보인다. 직접세만 늘리면 되는 것처럼 얘기하는 분들이 많은데 전체 조세 중에서 직접세 비중이 높은 걸로 치면 오히려 미국이 스웨덴보다 훨씬 낫다. 북유럽은 간접세 비중이 매우 높다. 최신 연구 성과를 간략히 인용한다면, ‘높은 복지지출 수준이 높은 조세수준을 요구한다’고 할 수 있다. 복지지출 수준이 높은 유럽 복지국가들이 간접세 의존도가 높은 이유는 뭘까. 한마디로 말해 이런 나라에선 조세수준이 높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높은 조세수준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 왜 조세수준이 높아야 할까. 바로 세입을 최대한 확보해서 그 예산으로 복지예산을 늘리기 위해서다. 중요한 건 직접세냐 간접세냐 하는 게 아니다. 조세를 통한 소득재분배도 사실 따지고 보면 핵심을 놓치고 있다. 중요한 인식차이는 우리 사회가 전반적인 ‘선호’를 연대와 평등에 둘 것이냐, 효율성과 경쟁에 둘 것이냐 하는 것에서 갈라진다. 우리가 연대와 평등을 지향하는 사회를 원한다면 어떻게든 조세수준을 높이는 방향을 고민해야 한다. 간접세라 하더라도 '우리 모두를 위한 복지재원'으로 쓸 수 있다면 그 길을 택해야 한다. 복지는 부자한테 뺏은 돈으로 하는 '홍길동' 방식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낸 돈으로 우리 모두를 위해 사용하는 '공동구매'이기 때문이다. 비록 그것이 눈에 빤히 보이는 꼼수일지라도 말이다. 지금 ‘서민증세’를 무기로 담뱃값이나 주민세 인상조차 못하는 사회에선 부자증세도 어림없는 노릇이다. 서민증세에 동의해주고, 거기서 더 나아가 부자들 세금도 더 늘리자고 요구하는 게 좀 더 미래지향적인 방향이 아닐까? 우리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담뱃값을 올려서라도 '유아교육과 영유아보육 완전국가책임제'와 '소득에 상관없이 모든 노인에게 기초연금 20만 원 지급' 같은 공약을 지키자고 하는 것과, 담뱃값을 줄여서라도 세금을 줄이고 복지요구도 흐지부지하는 두 가지 길이다. 박근혜 대통령 입장에서는 어떤 국민 여론이 더 무서울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344 | 추천: 0
이동화/ 민변 국제연대위 간사   약 2달에 걸친 이스라엘의 공습과 폭격이 중단되었습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무기한 휴전이라고 합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공포 속에서 지냈을 가자지구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생각하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에 의해 좌지우지될 휴전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불안하기만 합니다. 지난 6월 8일, 3개월간의 안식월을 보내기 위해 팔레스타인으로 향했습니다. 개인적으로 국제연대활동을 시작했을 때의 초심을 되찾기 위해 여행을 떠난 것이지요. 팔레스타인에 도착하여 짐 정리도 마무리 못했던 6월 12일, 이스라엘 정부는 자국민 불법정착촌 3명이 납치되었다고 발표하면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시와 마을을 공격하였습니다. 매일 밤 중무장한 이스라엘 군인들과 국경수비대원들은 팔레스타인 서안지구 전역의 마을에 난입하여 무차별적으로 집에 쳐들어가서 사람들을 위협하고, 가구를 부수고, 돈을 몰수하며 저항하는 사람들을 구타하고 체포하였습니다. 체포이후에도 어디에 수감되어 있는지 알려주지 않았기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납치된 것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상황이었지요. 이러한 반인권적이고 무법천지의 상황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 지프차나 장갑차에 돌을 던지는 것 뿐 이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군인들은 최루탄 또는 고무탄, 때때로 실탄을 발포하였고, 이로 인해 수십 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당했습니다. 그렇게 20여일이 지나서 납치된 3명이 살해된 채로 발견되자 이스라엘은 가장 먼저 납치된 지역 인근의 마을에 쳐들어가서 하마스 조직원으로 추정되는 집 2채를 날려버리고 수십 명을 체포하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아는 바처럼 가자지구를 51일 동안 공습하고 포탄을 쏟아 부었습니다. 가자지구는 가로 40킬로미터, 세로 5~10킬로미터 크기로, 전체 인구가 180만 명으로 세계적으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 중 하나이며, 도시 전체가 10미터 콘크리트 벽으로 막혀있고, 콘크리트 벽으로부터 500미터 이내의 지역은 출입통제구역으로 무단으로 들어가면 이스라엘 군인이 발포하는 끔직한 구역입니다. 또한 가자지구로 출입할 수 있는 통로는 고작 3군데에 불과하고 이 역시 이스라엘에 의해 출입이 통제되며, 2달간의 공습기간에 이 곳을 막아버려서 가자지구의 사람들은 피난을 가고 싶어도 나갈 수가 없는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감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곳에 이스라엘은 51일 동안 수천발의 미사일과 포탄을 쏟아 부었습니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활동하는 인권단체인 PCHR(Palestine Center for Human Rights)에 따르면 2달간의 이스라엘 군사행동으로 가자지구에서만 2,168명이 사망하였고(이중 519명은 아이들이고 297명은 여성이었음), 10,895명이 부상당했고, 수천채의 가옥이 파괴되었다고 합니다. 정말 엄청나게 많은 이들이 무고하게 희생되었습니다. 이스라엘 공중 폭격으로 부서진 가자지구 건물 사진 출처 - ISM 팔레스타인에서 체류했던 5주 동안, 눈앞에서 벌어지는 이스라엘의 반인권, 전쟁범죄 앞에 무엇이라도 해야 했기에 원래의 계획을 접고 팔레스타인 내에서 활동하는 인권단체에서 자원 활동을 지원하였습니다. 돌을 던지며 저항하는 팔레스타인 사람 옆에서 그들이 이스라엘 군인들에 의해서 체포되거나 희생되지 않게 하는 활동, 이스라엘 정착민과 군인들에 의한 직접 피해를 당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집에 함께 있었고, 또한 피해를 받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이를 외부에 알리는 활동 등을 하였습니다. 이 활동을 통해 만난 많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통해서 대부분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가족 중 1~2명은 이스라엘 군인에 의해 희생당했고, 수 명이 현재 감옥에 복역 중이거나 수감생활을 한 적이 있다는 나라 전체차원의 공통의 경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수 십 년 동안 이스라엘의 점령 전쟁에 저항하며 지내왔다는 사실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외부 사람들은 이 지역에서의 피해자와 가해자를 혼동하며,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테러를 저지르고 이에 대해서 이스라엘이 최소한의 수준으로 군사대응을 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는 전 세계의 주요한 언론이 사실과 진실에 부합하지 않고 이스라엘의 일방적인 내용을 중심으로 보도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번 가지지구 침공을 통해 더욱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은 언론이 자꾸 현재의 상황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전쟁 또는 분쟁으로 묘사를 하는데 이로 인하여 사람들은 마치 양측이 어느 정도 대등한 위치 또는 수위의 군사력이 있고, 이 비극의 책임이 쌍방에게 있는 것이 아닌가하게 생각하게 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현장에서 보았던 모습은 언론이 말하는 것과 정반대이거나 적어도 이 비극을 만들고 유지하며 확대하는 쪽은 쌍방에 있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불안한 휴전선언으로 인해 팔레스타인의 참상을 보여주었던 사진과 뉴스는 점차 사라져 가고, 더불어 팔레스타인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도 서서히 희미해져 갈 것입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에 아직 평화는 오지 않았고, 2천명이 넘는 사망자와 만 명 이상의 부상자, 그리고 그 수배에 달하는 사상자들의 가족들은 그 슬픔을 치유할 새도 없이 여전히 이스라엘 총구 아래서 살아가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점령 종식을 이야기하지 않은 채 팔레스타인의 평화를 바라는 것은 허무한 주장입니다. 수십 년 동안 자신이 살고 있던 땅에서 쫓겨난 채 자신들 앞마당에 어느 날 폭탄이 떨어져도 자신의 잘못이라고 치부 받는 이 현실 속에서 5주 동안 짧게 보았던 것은 그 곳에서 여전히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며 싸우고 있는 팔레스타인 민중들의 저항과 그들의 의지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점령이 끝나는 그날까지 저항하며 싸울 것입니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315 | 추천: 0
홍성준/ 투기자본감시센터 사무처장   변양호라는 사람이 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한 때는 총망 받던 금융관료였고, 얼마 전까지는 금융시장에서 큰 손으로 활약을 했던 사람이다. 1954년생이니, 올해로 60 갑자를 산 사람이다. 경기고와 서울대를 나와, 미국 노던일리노이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가 되어 귀국했다. 소위 말하는 ‘엘리트 코스’를 모두 밟을 정도로 학벌이 무척 높다. 그리고, 관운도 좋았다. 행정고시 19회를 수석으로 합격하였고, 재경부에서 금융관료로서 승승장구 했다. 이른바, ‘모피아’ - 금융 마피아의 일원이다. 그보다, 그의 선배 모피아 중에 유명한 이헌재에 대해 알아야 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헌재는 70년 전 중국 상해에서 태어나 경기고, 서울대를 나와 미국 유학을 했고, 1968년도에는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그 후, 재경부 모피아로서 승승장구하여 재정경제부 장관을 2번, 부총리를 1번, 국무총리 권한대행을 2번 역임했다. 관운이 참 좋은 자이다. 그러다 보니, 그를 따르는 모피아 관료집단이 있는데, 이른바 ‘이헌재 사단’이라고 한다. 그와 그의 집단이 유명한 것은 IMF사태를 당한 한국에서 기업의 구조조정과 해외 매각, 금융자유화, 그에 따른 정리해고 등을 그들이 주도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금융·투기자본의 본거지인 미국 월스트리트에서는 환호했고, IMF의 관료들이 당시 남긴 보고서에는 ‘김대중 정권은 우리가 요구하는 것 이상으로 경제개방, 재벌개혁, 해외매각 등을 매우 잘 한다’라는 칭찬이 남았다. 이헌재는 IMF사태 당시 김대중 정권이 신설한 ‘금융감독위원회’ 초대 위원장이었다. 얼마 전, 귀국한 전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은 당시 대우자동차, 대우전자 등의 해외매각과 “국부유출”을 거론하며, 이헌재 사단과 당시 김대중 정권에 대해 강도 높은 비판을 해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이헌재는 인기 많은 정치인 안철수의 “멘토”로 소개되는 등 여전히 살아 있다. 아무튼, 당시 정권이 한 악행은 역사에 뚜렷하게 기록으로 남아 있어서 더는 언급하지 않겠다. 다만, 김대중 대통령과 “민주화 운동”을 했다는 그의 동지들이 ‘무식’해서, ‘신자유주의로 무장한 모피아 관료집단’에게 속아서 이런 짓들을 했다는, 얼토당토 않는 평가에 대해서 한마디 하고자 한다. 그것은 마치 왕조시대에 “왕은 천성적으로 좋은 성품을 지니셨지만, 주변의 ‘간신들’ 때문에 ‘혼군’이 되었다”는 말처럼, 웃기는 소리일 뿐 이다. 그들의 정치 - ‘자유주의’는 신자유주의와 이미 친연성을 가진 상태에서, 자본주의의 세계적 동향에 대한 고급 정보를 가진 관료들, 학자들에게 쉽게 동화되어서 한국의 국부를 금융·투기자본에게 헐값으로 팔아넘긴 것이다. 이것이 소위, “민주정부”에 대한 공정한 평가일 것이다. 아무튼, 그런 이헌재 사단의 총아가 바로 변양호였다. 관료들의 익명성을 넘어 그가 언론과 세상에 노출된 것은 ‘론스타게이트’사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이 드러나면서 부터이다. 2003년 당시 변양호는 시중 은행을 관리감독 하는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국장이었다. 실무적으로 그가 주도하여 투기자본 론스타에게 외환은행을 불법적으로 매각을 한 것이다.(참고로, 당시 김진표 재경부 장관-이후, 새정치연합소속의원-은 검찰조사만 받고 풀려나 그의 뒷선은 의혹이 여전히 남는다.) 2006년, 검찰이 그를 기소한 부분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부실은행이 아닌 외환은행을 법에도 없는 “예외승인”을 하여 ‘사모펀드’인 론스타에게 매각한 것, 그 과정에서 외환은행 회계(BIS비율) 조작, 인수가에서 특혜 등등에 대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론스타로부터 뇌물수수를 한 혐의이다. 하지만,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무죄판결을 받았다. 관료의 정책결정에 대해 형사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지어, 론스타 측의 뇌물을 전달한 하종선 변호사(현대해상 전 회장)가 구체적으로 자신의 범죄사실을 법정 진술했음에도 “수뢰 당사자가 뇌물로 생각하지 않으면 뇌물이 아니다”식으로 무죄판결이 났다. 생각할수록 웃기는 대법원 판사들이다. 나는 당시 론스타게이트 사건 재판을 참관하면서 그를 처음 보았다. 그때 받은 두 가지 인상은 지금도 내게 강하게 남아있다. 단언컨대, 그는 ‘확신범’이다. 자신이 외환은행을 불법적으로 투기자본 론스타에게 매각을 하여 천문학적인 “국부유출”이 일어났고, 은행공공성이 무너지고 노동자와 시민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음에도, 그는 그것이 올바른 정책결정이었다고 재판 내내 주장했다. 최후 진술에서도 당시 발생한 ‘남대문 화재’ 사건을 예로 들며, 자신이 선제적으로 외환은행을 해외매각을 하여 한국경제 전반으로 번질 불안정성을 잠재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애국심’을 의심하는 시민단체(내가 일하는 투기자본감시센터를 의미하는 듯)에 의해 고발당해서 억울한 구속과 재판을 받고 있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중국 드라마 ‘강호풍운정’에서 명나라 신종의 의심으로 죽은 명장이며 충신인 원숭환(袁崇煥)과 자신을 비교하기도 했다. 훗날, 자서전 『변양호 신드롬-긴급체포로 만난 하나님』에서도 같은 주장을 되풀이 했다. 되돌아보면, 참 가소로운 소리이다. 내가 보기에는 변양호의 일생은 같은 시기를 산 오삼계(吳三桂)와 오히려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오삼계는 젊은 나이에 황제의 신임을 얻어 대치중인 청나라와의 최전선인 산해관 수문장이 되었지만, 청나라의 앞잡이가 되었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관문을 열고 청나라 군대를 맞이하고 “대명천지(大明天地)”를 청나라에 바치며 출세했고, 평서왕(平西王)에 올라 운남성을 차지했다. 하지만,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청나라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망하고 자살했다. 변양호에 대한 또 다른 인상은 그에 대한 후배 모피아들의 존경심이 엄청 크다는 것이다. 그의 뇌물수수 재판에서 안 사실이 있다. 그의 생일이 7월 30일인데, 해마다 매년(!), 그의 생일날에는 재정경제부 후배 모피아들이 주축이 되어 생일잔치가 열린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그의 학교 동기동창 변호사들도 초대되어 온다고 한다. 뇌물을 전달한 하종선도 손님이고, 변양호를 변호하는 변호사들도 손님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생일잔칫날에 변양호가 소위 ‘스폰서(sponsor)’ 노릇을 해준다는 여가수가 등장을 했다.(이때, 나는 연예인 X파일이 대부분 진실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당일, 그 여가수의 옷값으로 쓰라고 수백만 원짜리 수표를 하종선이 변양호에게 줬는데, 그 수표를 가지고 여가수는 실제로 옷을 샀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변양호를 위해 증언석에 앉은 후배, 현직 모피아는 검사가 묻지도 않았는데, ‘순수한’ 스폰서라는 말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아마도, 법정에서 재판참관 중이던 변양호의 아내와 딸에게서 선배 변양호를 변호하고자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표현 하나하나까지 세심하게 변양호의 인격에 흠집을 남기지 않으려 노력하는 후배 모피아의 태도와 그런 모피아들이 현직을 떠난 지 꽤 된 선배 모피아를 위해 매년 잊지 않고 그의 생일잔치에 모인다는 그들 패거리 내의 갸륵한 ‘의리’를 난 보았다. 아마도, 같은 생일잔치는 지금도 열리고 있을 것이다. 변양호가 모피아로서 관료사회는 물론, 우리사회에 남긴 것 중에는 “변양호 신드롬”이란 말이 있다. 이 조어는 중앙일보에서 처음 생산해낸 것인데, 변양호 이후 세상의 비난이 두려운 관료들이 소신 있는 정책결정을 못한다는 의미란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인허가권을 가진 고위 관료가 권한을 사용하지 않아 자본이 시장에서 수익을 남기지 못했다는 의미, 고수익의 기회를 놓친 소수의 자본, 금융·투기자본들이 내는 안타깝다는 목소리일 것이다. 이런 유치한 조어가 있는 것도 문제이지만, 이 조어가 주요 시사용어라고 해서 언론과 기업 등에서 입사 문제로 출제된다는 소문을 들고 아연실색 한 적이 있었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변양호는 2005년 재정경제부 금융정보분석원 원장을 끝으로 잘 나가던 관료의 길을 접고, 같은 9월 2일 ‘보고 펀드’라는 사모펀드를 설립, 금융감독위원회에 등록을 했다. 바로 이 때문에 후배 모피아들은 그를 더욱 존경하게 된 것이다. 보고 펀드의 출자금은 대부분 자신의 현직 모피아 시절 관리감독을 하던 시중은행에서 받은 것이다. 당시 외환은행의 경우, 그에게 은혜를 입은 론스타가 장악하고 있었는데, 400억 원을 출자했다. 이 때문에 “사후 뇌물”이라고 검찰 고발을 한 바도 있다. 거기에 실제 수익률은 형편이 없음에도 고가의 수수료를 은행들은 매년 그에게 바쳤다. 여전히 ‘갑-을 관계’인 것이다. 또한, 한국의 자유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언론은 이 보고 펀드에 대해 우호적인 보도를 쏟아냈었다. 론스타 등 해외 투기자본으로부터 국내의 금융기관과 기업을 지키면서, 고수익도 내게 되었다고 호평을 한 것이다. 보고 펀드의 “보고”도 신라 말 해상왕 장보고(張保皐)에서 따온 것이라니, 얼마나 좋은 것이냐는 것이다. 이른바, 투기자본에 맞서는 ‘토종 펀드’라는 것이다! 하지만, 단기간에 고수익을 내기 위해 생산과 고용을 파괴하고, 납세조차 회피하는 사모펀드의 본질을 왜곡하는 보도일 뿐이다. 도둑놈, 강도도 외국인이 아니고 한국인이라면 다 좋다는, 허무맹랑한 소리를 만들어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 보고 펀드가 드디어 망했다. 2006년 동양생명보험, 노비타, 2007년 아이리버, LG실트론, 2009년 비씨카드, 2011년 한국 버거킹을 운영하는 BKR, 2013년 미국 셰일오일과 가스를 생산하는 아나다코, DSLR용 카메라의 교환렌즈를 생산하는 삼양옵틱스 등에 대해 공격적인 투자를 했었다. 또한, 설립 파트너로 리먼 브라더스의 전 한국 대표 이재우, 모건 스탠리 한국지사 신재하, 2010년에는 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 박병무를 불러 모았는데, 모두가 투기자본 먹튀에 조력한 한국인들이다. 그런데, LG실트론 등에서 수 조 원의 투자실패가 발생했다. 그리고, 투자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변양호가 최근 보고펀드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천년만년 흥청망청 할 수 는 없는 법이다. 보고펀드의 존립도 어려울 것이라는 말이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그에게 출자한 시중은행들은 엄청난 손해를 입었음에도, 그의 투자실패에 대해 책임을 묻는 그 어떤 법적조치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불만의 소리조차 없다. 오히려, 그를 찬양했던 언론은 변양호와 그가 만든 국내 1호 토종펀드가 실패했지만 사모펀드 전성시대가 저문 것은 아니라고, 열심히 “쉴드(shield)”를 치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애쓴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 모피아의 총아, 변양호의 성장, 출세, 위기, 도약, 그리고 몰락을 내가 아는 바대로 짧게나마 정리해 보았다. 그는 이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시대를 살다간 전형적인 엘리트 모피아였다. 그의 극적인 몰락을 보며, 이 시대는 소멸해 가고 있고, 이 시대의 전형도 이제 사라졌다고 생각한다. 마치, 빚더미 호화주택 풀장에서 오지 않는 옛 애인의 전화를 전전긍긍 기다리다 복수의 총탄으로 허무하게 죽어간 영화 속의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 같다고나 할까. 그런데, 아직도 사라진 그 전형을 그리워하며, 헛된 꿈을 꾸고 있는 후배 모피아들, 그들의 동료들 - 자유주의 정치인, 금융자본을 대리하는 교수, 기자, 변호사, 온갖 사이비 전문가 등등은 아직 많이 있다고 보인다. 여전히 “사모펀드 활성화”야 말로 위기의 한국경제를 구원할 것이라고 떠들고 있다. 이제, 곧 가을이다. 모든 것이 사라지는 가을이다. 더는, 끼리끼리 패거리를 만들어, 까불며 세상을 농락하지 말고, 부디 자숙하기 바랄 뿐이다. 더는 과거가 반복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768 | 추천: 0
임아연/ 당진시대 기자 군대. 보통의 삶에서 군대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을 개진하는 것은 조금 껄끄러운 일이다. 내 주변의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러하듯, 거의 모든 대한민국 남자들이 군대를 경험했기 때문에, 군대에 대한 내 생각을 얘기하면 별로 좋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특히 수년이 지났어도 군대에서 경험한 일들을 무용담(?)처럼 얘기하거나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는 사람일수록 더 그랬다. 나는 군대가 싫었다. 지금도 그렇다. 어렸을 때 주입 당했던 것처럼 ‘군인 아저씨’들이 나라를 지켜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요즘 같이 버튼 하나로 도시 전체를 날려 버릴 수 있는 시대에 매년 팔팔한 청춘들로 군대 내 머릿수를 채운다 한들 국방이 더 튼튼해진다고 믿지 않는다. ‘군대를 다녀와야 진정한 남자가 된다’는 말은 결국 자기 위안과 합리화일 뿐이다. 나는 대한민국 모든 남자가 군대에 감으로써 사회에 끼치는 악영향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징병제와 모병제에 관한 것은 여기에선 차치하도록 하자. 오로지 군대의 영향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사회 곳곳에 군대 문화가 스며 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의 지독한 위계와 토론 아닌 복종을 강요하는 것이 그렇다. 다수가 소수를 짓밟고, 다양성 보다는 획일을 강조하고,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 짓는 전형적인 집단이 군대다. (생물학적 구분으로) 남과 여를 반반으로 본다면, 인구의 절반이 군대를 경험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회에 군대 문화가 퍼질 수밖에 없다. 특히 군대는 효율적이고 손쉬운 방법으로 사람을 통제할 수 있어, 대부분의 조직에 군대 문화가 스며 있다. 나는 군대를 직접 경험한 바 없지만, 사람들이 군대와 비슷한 문화를 경험하는 건 학교라고 생각한다. 그땐 당연하게 여겼는데, 조회시간마다 운동장에 아이들을 전후좌우로 일렬로 세워놓고 앞으로 나란히, 좌우로 나란히를 시켰는지 모르겠다. 반듯하게 줄을 잘 서야만 교장 선생님의 목소리가 귀에 쏙쏙 들어오는 것은 아니었을 텐데 말이다(요즘 학교도 이러는지는 모르겠다). ‘차렷, 경례, 뒤로 돌아, 좌로 한발, 우로 한발, 앞으로 가’와 같은 통제의 언어와, 엎드려뻗쳐, 선착순 달리기 등 아무런 상황 설정을 두지 않는다면, 이게 학교의 모습인지, 군대의 모습인지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교사와 학생 간의 관계는 물론이거니와, 선배와 후배 사이도 그랬다. 나는 여고 출신인데 동아리 활동을 했던 친구들은 대부분 선배들의 ‘쪼임’에 시달려야 했다. ‘왜 90도로 인사를 하지 않느냐’부터 시작해서 별의 별 것으로 후배들을 쪼아대는 선배들 때문에 동아리 활동을 계속 해야 하나 고민하기도 했다. 선배들이 혼낼 땐 절대 선배의 눈을 쳐다봐서는 안 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야만 했다. 더 큰 문제였던 건, 그렇게 선배에 대한 불만과 분노 속에 1학년을 보낸 아이들이 2학년이 돼서 신입생에게 똑같은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언어)폭력과 정신적 스트레스의 대물림이 꼬리의 꼬리를 물고 해마다 이어졌다. 군대를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여고생들이 군대에서나 있을 법한 문화를 그렇게 체득해 갔다. 전남 화순군 북면 금호리조트 옆 빈 공터에서 광주·전남지역 대학 신입생들이 선배들로부터 팔굽혀펴기, 귀잡고 뜀뛰기 같은 얼차려를 받고 있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대학에 입학하니 MT때마다 남학생들은 선배들 앞에서 엎드려뻗쳐와 같은 얼차려를 받았다. 내가 속한 학과의 경우 그나마 여학생들은 얼차려에서 제외됐는데, 갓 입학한 남학생들은 군대를 다녀온 선배들로부터 ‘이 새끼’ 소리부터 들어야 했다. 학생들은 얼차려 때문에 뉴스에 나온 다른 학생들을 그저 운이 없는 ‘놈’들 이라고 말했다. 그만큼 많은 대학에서 해마다, 지속적이고 보편적으로 얼차려가 행해졌다.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남자들 사이에선 나이에 따라, 직급에 따라 어딘지 모를 불편한 문화가 자꾸만 눈에 띈다. ‘윤 일병 사건’으로 다시 군대를 생각한다. 나는 윤 일병을 악마처럼 괴롭힌 이 병장과 가해자들이 윤 일병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 병장은 또 다른 윤 일병이다. 윤 일병이 그 ‘군대 문화’에 빠르게 적응하면서 살아남았다면, 그는 또 다른 이 병장이 됐을지도 모른다. 군대의 특성상 어느 정도의 통제가 필요하다고 인정한다 하더라도 인구의 절반이 군대를 가고 수개월 동안 폭력적인 문화를 체득해야 한다면, 이는 고스란히 사회 곳곳에 이식될 수밖에 없다. 군대 문화의 폭력성은 계속해서 대물림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람은 결국 체제에 순응하면서 익숙한 대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윤 일병 사건은 수면 위로 드러난 한조각의 비참한 단면이다. 군대 체제가 변하든지, 군대의 문화가 변하든지, 혹은 한국 사회가 변하든지, 악순환을 끊기 위한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 왔다. 2
2017-07-12 | hrights | 조회: 424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