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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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김성은(서울신문 기자), 김태형(프리랜서 방송작가),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박용석(출판업),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춘천별빛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이동화(아디 사무국장),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신혜연/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재학생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기원전 2세기 로마 공화정에서 활동한 정치인이다. 당시 로마는 전쟁이 잦았고, 시민들은 군복무를 하느라 토지를 돌볼 여력이 없었다. 이 와중에 노예를 부리는 대농장 제도인 ‘라티푼디움’이 성행하면서 군소 자작농들은 대기업 대형마트 옆에서 구멍가게를 운영하는 자영업자 신세가 됐다. 전쟁이 끝나자 대다수 시민들은 땅 한 뙤기 없는 처지로 전락했다. 이를 지켜본 그라쿠스는 호민관에 당선된 후 국유지를 공평하게 나누는 농지 개혁을 실시했다. 배를 곯던 평민들은 그라쿠스의 주장에 환호했다. 독재자 출현에 대한 우려로 호민관 자리는 재임을 허용하지 않는 게 관례였지만, 그라쿠스는 평민들의 지지에 힘입어 재선 출마까지 했다. 대중의 인기에 영합한 정치를 뜻하는 ‘포퓰리즘’의 어원이다. 청년수당은 반박의 여지가 없는 포퓰리즘 정책이다. 저성장 사회에 접어들고, 정규 노동시장 진입이 어려워지자 청년들의 처지가 궁핍해졌다. 학업, 취업 등의 이유로 우리나라 청년의 절반이 서울에 거주하는데, 서울 청년의 주거빈곤률은 40%를 훌쩍 넘는다. 적어도 3명 중 1명은 반지하, 옥탑방, 불법개조 건축물에 살고 있다는 뜻이다. 체감 청년 실업률은 작년에 20%를 넘겨 연일 신기록을 갱신하고 있다. 서울시는 이들 앞에 청년수당이라는 선심성 정책을 내놓았다. 저소득층 서울 청년들에게 매월 50만 원의 보조금을 최대 6개월까지 지급하겠단다. 취업 보조금 명목이지만 유흥비가 아니라면 본인의 필요에 맞게 자유롭게 쓸 수 있다. 사실상 ‘공돈’이나 마찬가지다. 이 정책을 적극 지원한 박원순 서울시장은 유력한 대선후보 중 한 명이다. 그도 그라쿠스처럼 연임을 노리는 걸까? 서울시 청년수당 홈페이지에 올라온 이미지 갈무리 사진 출처 - 서울시 문제는 포퓰리즘의 동의어가 민주주의라는 점이다. 포퓰리즘의 어원인 ‘포풀루스(populus)’는 라틴어로 ‘인민’이라는 뜻이다. 민주주의(democracy) 역시 인민을 뜻하는 그리스어 ‘demos’에서 파생된 단어다. 둘 모두 대중에 의한 통치를 뜻한다. 서울시는 지난 1년간 청년 당사자들로 구성된 협의 기구를 운영하며 청년들의 요구에 가장 부합하는 정책을 고민했다. 그 결과가 청년수당이다. 저임금 아르바이트에 시달리지 않고 본인의 장래를 계발할 시간을 갖는 게 절실하다는 청년들의 요구가 적극 반영됐다. 정부의 청년 예산 대부분이 비정규직 인턴 일자리를 제공하는 기업에 대한 보조금으로 흘러들어간 것과 대비되는 지점이다. 정책 집행 과정에서 청년들의 의견을 묻는 절차는 없었다. 청년들이 인턴과 단기 일자리를 원하는지와 관계없이 취업률 지표를 쉽게 높일 수 있는 수단을 택한 셈이다. 정부는 이런 식으로 수년 간 2조원의 청년 관련 예산을 집행해왔지만 청년 실업률은 악화일로를 걸어왔다. 로마 공화정에서 토지 재분배가 이뤄질 당시 공화정의 원로들과 부자 평민들은 그라쿠스의 정책을 탐탁지 않아 했다. 그들은 이런 정책을 ‘생각 없는 우중의 선택’이라며 폄훼했다. 그래도 민중들의 그라쿠스에 대한 지지가 계속되자, 호민관 투표일에 광장에 모인 그라쿠스와 그의 지지자들을 창으로 찔러 죽였다. 이후 로마 공화국은 중산층이 붕괴하면서 귀족 중심 제정으로 넘어간다. 청년들의 필요를 반영한 정책에 ‘포퓰리즘’ 딱지를 붙이는 정치인들은 그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로마 공화정의 귀족들과 같은 행보를 취하고 있는 셈이다. ‘왜 합의를 해주지 않는지’에 대한 설명 없이 ‘나와(복지부와) 합의 되지 않은 복지 정책은 시행할 수 없다’며 서울시 청년수당에 대한 직권취소 명령을 내린 보건복지부도 마찬가지다. “보통 사람들의 요구와 바람을 대현하려는 정치사상.” 캠브리지 사전이 정의하는 포퓰리즘의 뜻이다. 포퓰리즘이 민주주의다. 청년 정책에도 포퓰리즘 도입이 절실하다. 이 글은 2016년 9월 7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735 | 추천: 0
강국진/ 서울신문 기자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남성이라면 가슴에 손을 얹고 자신에게 물어보기 바란다. '내가 옷을 갈아입거나 목욕하는 모습, 심지어 화장실에서 오줌 누는 모습을 누군가 몰래카메라로 촬영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가. 나도 그렇고 거의 모든 남성들은 그런 생각 자체를 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거기에는 ‘그걸 온라인에 올린들 누가 관심이나 갖겠나’ 하는, 묘한 안도감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성들에게 이런 질문을 해보면 어떨까. 살면서 ‘내가 강간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을 느껴본 적이 한 번이라도 있는가. 십중팔구 없을 것이다. 밤늦게 술을 먹고 늦게 들어가더라도 당신의 어머니나 아내는 ‘그러다 강도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혹은 ‘넘어져 다치기라도 하면 어떡하냐’고 걱정할지언정 ‘밤늦게 취해서 집에 오다 뒷골목에서 나쁜 놈(혹은 년)에게 잘못 걸려 강간이라도 당하면 어쩌나’하는 불안에 떨진 않는다. 어떤 사회에서 소수자를 구분하는 건 뜻밖에 쉽다. 조금만 관심을 가져보면 금방 찾을 수 있다. 외국인 중에서 금발을 한 서양인이라면 한국을 찾은 손님으로서 환대받을 것이다. 혀를 찰지게 굴리며 ‘안녀하쎄여’라고 인사라도 하면 또 얼마나 화기애애해질 것인가. 반면 피부색이 검으면 검을수록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 소수자란 그런 존재다. 소수자인지 아닌지 구분하는 꽤 그럴듯한 방법이 또 있다. 10년도 더 전에 홍세화 선생이 인권연대 강연에서 알려준 건데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한 마디면 충분하다. 어떤 사람에게 “너 전라도 사람이냐”라고 물어본 다음 “너 경상도 사람이냐”라고 물어보라. 전자는 익숙한 언어습관 속에 존재하지만 후자는 매우 어색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그건 유럽에서 “너 유대인이냐” 혹은 “너 집시냐”라고 묻는 것과 같은 맥락 속에 존재한다. 한국에서 여성은 소수자인가. 그렇다. 한국에서 여성은 약자인가. 틀림없다. 여성은 여대생, 여사원, 여사장, 여검사, 여성판사 등 여성을 특정 하는 호칭과 함께 등장한다. 잊을만하면 터져 나오는 몰래카메라 관련 뉴스는 거의 언제나 여성들이 피해자다. 성폭력 사건은 또 어떤가.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이 발생한 직후 한 후배가 페이스북에 ‘자신은 언제나 하루하루 성폭력 공포를 의식하면서 살고 있다’는 글을 올린 걸 봤는데 솔직히 그 정도일줄은 정말 몰랐다. 그래서 더 마음이 아팠다. 이렇게 항변하는 남성들도 있을 것이다. 남성도 성폭력 피해자가 될 수 있다. 남성도 남자라는 이유로 피해보고 손해보는 게 많다. 맞다. 인정한다. 그럼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성폭력은 단순히 남성이 여성에게 가하는 폭력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사람에게 가하는 폭력이다. 동성애란 그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강남역 살인사건 피해자에 슬퍼하고 가해자에 분노하는 것은 피해자가 여성이고 가해자가 남성이기 때문이 아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인게 문제다. 거기에 무슨 다른 이유가 필요한가. 사진 출처 - 미디어오늘 나는 시사IN 애독자다. 창간호부터 시작해 지금껏 한 권도 빼놓지 않고 읽었다. 시사IN은 박근혜 앞에서도 당당하고 삼성 앞에서도 꿀리지 않는다. 한마디로 진정한 언론이다. 지난주에 실린 기획기사 ‘분노한 남자들’ 기사도 꼼꼼히 읽어봤다. 매우 잘 쓴 기사다. 감정에 치우치지도 않았고 주장만 앞세우지도 않았다. 구독중지가 줄을 잇는다는 독자들 반응을 다룬 소식을 듣고 오히려 내가 더 놀랐다. 그 기사가 어딜 봐서 구독중지할만한 기사란 말인가. 시사IN 구독 중지하는 분들 중에 많은 분들이 “내가 가해자는 아니지 않느냐”고 항변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만약 어떤 일본 사람이 “내가 식민지배한 것도 아니지 않느냐. 당시 가해자들 다 죽었는데 왜 우리한테 사과하라고 그러느냐?”라고 하며 “나는 과거 식민지배에 대해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에 사과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그건 옳은 태도일까 아닐까. 그 일본인이 “한국 사람들은 틈만 나면 일본을 헐뜯고 일본을 비하해. 저러니까 아직도 저 모양이지.”라고 말한다면 그건 칭찬받을 발언일까 싸가지 없는 발언일까. 한 가지만 첨언하고 싶다. 정기구독자 급감은 시사IN에 상당히 위협적인 사태일 것이다. 이게 효과를 발휘하면 앞으로 여성인권 옹호하는 기사도 쓰기 힘들어지는 분위기가 생길 것이다. 대안은 있다. 많은 여성분들이 시사IN 구독자가 되어 주시길 바란다. 구독 끊는 분들보다 시사IN 기사를 응원하며 신규 구독하는 분들이 더 많다면, 세상이 더 안전하고 살기 좋은 곳으로 바뀔 가능성이 조금은 더 높아질 것이라고 믿는다. 이 글은 2016년 8월 31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443 | 추천: 0
이동화/ 아디(Asian Dignity Initiative) 사무국장 사례 1. 2016년 4월, 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정당투표 기호 5번 기독자유당은 ‘동성애, 이슬람, 반기독악법을 꼭! 막아내겠습니다’라는 문구를 선거 공보물에 사용하였다. 그리고 투표결과 그 정당은 2.63%(62만 6,853표)를 획득하여 비례대표 확보에 필요한 3%에 미치지는 못해 국회진출은 실패했지만 전체 정당 보조금의 2%를 고정적으로 받는 정당이 되었다. 사례 2. 2013년 3월 20일 미얀마 중부 만달레이 주 메이크틸라(Meiktila)에서 무슬림 금은방 주인과 불교도 손님 사이의 언쟁은 폭력적 갈등으로 비화되었고, 한 승려가 무슬림 패거리에게 살해당한 후 불교도에 의한 무슬림 학살은 3일 동안 이어졌다. 미얀마 정부 발표에 의하면 이 학살로 인하여 43명이 살해되었고, 이슬람 사원(모스크) 37곳, 건물과 가옥 1,300여 채가 불탔으며 만 명이 넘는 이재민이 생겼다. 사례 3. 2016년 8월 18일 BBC의 보도에 따르면, 2016년 7월 한 달 동안 하루 평균 7,000건의 ‘이슬람 혐오’ 글이 트위터에 올라왔다고 하며, 같은 해 4월 하루 평균 2,500건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3배가 늘어난 수치라고 전했다. 특히 프랑스 니스에서의 트럭 테러와 같은 IS에 의한 무차별적 테러 이후에는 그 숫자가 급증한다고 하며 글이 작성된 지역은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등 주로 유럽에 집중이 되어 있다고 한다. 언급한 사례 이외에도 이슬람에 대한 혐오, 무슬림에 대한 차별은 전 세계적으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미국 대선 후보자는 공공연히 무슬림을 잠재적 테러리스트로 규정하고 있으며, 유럽의 극우 정당들은 이슬람의 폭력성을 내세우며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고 있다. 2003년 알카에다의 911테러 이후 IS의 참혹한 테러가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세상은 이슬람과 테러를 동일시하며 이슬람을 믿는 무슬림들을 테러리스트로 몰아세우고 있다. 국내는 어떠한가? 역사적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이슬람과 무슬림에 대한 접촉이 적은 상황임에도 이미 인터넷상에서 이슬람에 대한 혐오는 넘쳐나고 무슬림에 대한 편견도 상당하다. 앞서 언급한 기독자유당 사례뿐만 아니라, 2009년 성공회대 연구교수 보노짓 후세인 씨가 버스에서 겪었던 욕설과 인종차별행위는 한국사회 내에서 혐오와 차별이 특별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전북지역의 할랄단지 육성사업에 대해 보였던 인터넷상에서의 표현을 거칠게 요약하면 ‘수십만의 무슬림이 한국에 온다. 그들은 잠재적 테러리스트이고 우리의 안전을 해칠 것이다.’라는 식의 선동이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인터넷상에서 직접적인 혐오표현을 생산하고 유통하는 것은 소수일지 모르지만 다수의 사람들은 이러한 혐오와 차별에 대해 무관심하지만 때로는 혐오와 차별을 유지하는 한 축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글을 빌어 밝히지만 인터넷 상에서의 이슬람에 대한 폭력적이고 반인권적 선동은 관련 책 몇 권만 읽어도 오류를 찾을 수 있는 허접한 것들이다. 특히 이슬람과 IS를 동일시하는 것은 공포와 무지가 만든 대표적 허상이다. 미국의 작가인 달리아 모가헤드는 ‘테드(TED)'를 통해 “테러단체 IS와 이슬람과의 관계는 KKK와 기독교만큼이나 관련이 없다”라고 하였고 전 세계 인구의 20%가 넘는 16억 명이 믿는 종교인 이슬람을 극단적 테러집단과 동일시하는 것은 다른 정치적 목적이 있지 않을까 의심이 든다. 사진 출처 - 참세상 분명히 말하지만 이슬람에 대한 혐오와 차별은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 이 잘못된 혐오와 차별은 국내외에 있는 무슬림에게 직접적인 해를 끼치는 것을 넘어서 우리 모두에게도 공포와 편견을 심어준다. 애니메이션인 주토피아에서 나온 이야기이지만 공포는 인간을 지배하는데 아주 훌륭한 무기라고 했다. 공포와 편견은 특정한 상황과 조건을 만난다면 물리적 폭력으로 비화된다. 앞선 미얀마의 사례처럼 평소 이웃이었던 주민들이 누군가의 집에 불을 지르고, 폭력을 행사하는 모습을 보면 인간의 이성이 참으로 무기력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사례 4. 2014년 10월 캐나다 어느 마을 모스크(이슬람사원)에 누군가 이슬람을 혐오하는 낙서를 썼다. ‘CANADA’ ‘GO HOME’(무슬림들은 고향으로 꺼져라) 그 이후 캐나다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이슬람 사원으로 가서 낙서를 지우고 “가지 마세요. 여기가 당신들의 집이에요.(YOU ARE HOME)"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그리고 수십만 명의 네티즌들이 동의하며 자신의 SNS를 통해 공유하였다. 혐오와 차별은 적극적인 선동뿐만 아니라 다수의 무관심과 냉소 속에서 성장을 하게 된다. 혐오와 차별이 나쁜 것임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우리 스스로도 혐오와 차별에 자유롭지 않음을 인정하며, 이를 바로 잡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더해지지 않으면 이미 강고하게 구축된 혐오와 차별은 쉽게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앞선 캐나다의 사례까지는 못 가더라도 다가오는 선거에서 특정종교 정당이 특정종교를 혐오하고 차별하는 꼴을 또 볼 수는 없지 않는가? 이 글은 2016년 8월 24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553 | 추천: 0
다솜/ 미디어 활동가 나는 요즘 두 세계를 오가고 있다. 다큐멘터리의 호흡 상대가 되는 가난한 아이들과, 학원이라는 제도 안에 있는 아이들을 번갈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내일, 나는 초등학교 3학년 아이들의 방학 숙제를 같이 봐주기로 했다. 영어 동화책 세 권을 읽고 독후감을 써가는 것인데, 만약 집안에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거나 학원에 다니지 않는 아이들은 이 숙제를 어떻게 해가는지 궁금하다. 일단 영어 동화책 세 권을 구하기 위해서도 일정한 문화자본의 문턱을 넘어야 하는 셈이다. 도서관에 자주 다녀서, 어딜 가야 영어 동화책을 빌릴 수 있는지 잘 알거나 혹은 서점에 가서 아이의 수준에 맞는 적절한 책을 골라줄 수 있는 수준의 부모를 만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학원에라도 다녀야 하는데 그것마저도 자녀의 사교육비를 매월 고정적으로 지출할 수 있는 여력을 가진 부모를 만나야만 가능한 일이다. 가난한 아이들, 특히 문화자본이 부족한 아이들이 학교에서 낙오하는 시기가 앞으로 점점 더 빨리 다가올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까짓 모범생이 한 번 되는 데에도 이렇게나 필요한 게 많다. 사진 출처 - 세계일보 개학이 다가온다. 이 숙제를 끝내지 못한, 아니 시작하지도 못한 아이들은 어디에 있을까. 그 아이들은 개학이 기다려질까? 어떤 마음으로 학교에 다시 가는 날을 기다리고 있을까. 혹시 새로운 학기의 첫날을 야단 맞는 것으로 시작하게 되는 건 아닐까. 그 아이들은 이 사회에 대해 과연 어떤 인상을 받게 될까. 학교는 미리 배워온 것을 확인하는 곳이 아니라 열린 감각으로 뭔가를 새로이 알게 되는 기쁨의 공간이어야 한다. 우리는 함께 배워야 한다. 무엇보다도, 숙제는 아이가 스스로 해낼 수 있는 딱 그만큼의 수준이어야 한다.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그 시도가 성공적이었을 때는 보람을 느낄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이 실패했을 때는 그 좌절의 경험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배워가는 것. 공부는 그런 것을 깨닫는 과정이어야 한다. 그게 아니라, 단순히 누군가가 '더 가진 것', '덜 가진 것'을 확인하는 과정이 될 뿐이라면 그런 숙제는 있어야 할 필요가 없다고 단언하고 싶다. 아이들에게 숙제 파업이라도 독려하고 싶은 심정이다. 이 글은 2016년 8월 17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488 | 추천: 0
이상재/ 대전충남인권연대 사무국장 설동호 대전교육감님, 덥다는 표현이 무색한 너무나 뜨거운 날씨에 잘 지내고 계시는지요? 저는 대전의 한 인권단체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이며 평소 설 교육감님의 대전교육행정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많아서 이런 지면을 빌렸습니다. 우선 지난 4월 25일 박병철 시의원이 주최한 대전학생인권조례 제정을 위한 공청회는 일부 단체와 종교인들의 물리적인 방해로 인해 시작도 못 해보고 무산된 걸 알고 계실 겁니다. 그날 저도 공청회를 직접 참관했는데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반대하는 분들이 고함을 치면서 하는 말들은 계속해서 듣고 있기가 괴로운 것들의 연속이었습니다. “어린 학생들에게 인권이 왜 필요해?” “외국에는 이런 법 자체가 없어!” 누구에게나 모든 인권사항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인권의 보편성은 굳이 유엔아동인권협약을 언급하지 않아도 아동과 청소년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하는 것은 이제 주장할 필요가 없는 상식입니다. 체벌 자체가 존재하지 않고 머리카락의 길이, 복장 상태를 가지고 학생들을 단속해야 할 일이 없는 인권선진국에서는 우리나라의 학생인권조례와 같은 법이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설 교육감님도 이런 사실 정도는 잘 알고 계실 줄 믿습니다. 하지만 1,000명이 넘는 설 교육감님의 지지조직인 '동호사랑'이라는 모임도 그날 공청회에 참가해서 조직적으로 반대한 사실이 있어서 설 교육감님도 설마 그날 외친 고함의 내용과 같이 생각하시는 건 아닌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얼마 전 대전의 한 초등학교가 인터넷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에서 1위에 올라간 적이 있었습니다. 기쁜 일이었으면 좋았겠지만, 그 내용은 안타깝게도 학부모가 올린 자녀들의 부실급식 사진이었습니다. 그런 사진이 인터넷에 공개된 내막을 알아보니 작년부터 학부모들이 그 초등학교의 급식문제에 대해 학교장, 서부교육지원청, 시 교육청에 문제를 제기했지만 어느 곳도 실질적인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학부모가 그렇게라도 문제를 제기하려고 했다는 겁니다. 이후 뒤늦게 학부모, 시민단체, 교육청이 함께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려서 조사한 내용의 결과는 실제 충격적인 것들이었습니다. 영양 교사와 조리사 간의 갈등은 몇 년째 심각한 수준이었고, 이로 인한 급식실 내 위생 수준은 엉망이었습니다. 조리원들은 부인하였지만, 다수의 학생은 배식을 받는 과정에서 조리원에게 욕설과 “그만 처먹어”와 같은 인권침해 발언을 수시로 들었다고 합니다. 취임 이후 몇몇 학교 급식 현장에서 교육감님이 직접 학생들과 점심을 같이 하는 모습과 함께 급식환경을 개선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는 언론 기사를 접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진상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는 교육감님의 행보가 말뿐인 전시행정이 아니었나 하는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게합니다. 1년 전 대전지역 고교생 4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대전교육청에서 열린 ‘대전교육 공감토크’라는 프로그램에서 학생들이 꺼낸 얘기 중에는 놀랍게도 “배가 고프다”는 내용이 있었다고 합니다. 돈이 없어 급식을 먹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고 등교 시간이 이르기 때문에 아침을 제대로 먹지 못해서 배가 고프다는 의미였다고 합니다. 2014년 지방선거 이후 경기도 교육청에서 시작된 ‘9시 등교’는 인근의 충남북교육청과 세종시를 비롯해 서울, 경기, 전북 등 전국 대부분의 교육청이 추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설 교육감님은 학교장의 권한이라며 사실상 9시 등교 정책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아침밥은 학교에 가기 바빠서 집에서 먹지 못하고, 학교에서 먹는 점심은 불안한 급식환경에 노출된 것이 대전지역 학생들의 현실인 것입니다. 설동호 대전시교육감 사진 출처 - 아시아뉴스통신 설 교육감님은 지난 교육감 선거 당시 전교조 대전지부의 질의에 대한 답변에서 학생인권조례 제정 뜻을 밝힌 바 있었지만, 막상 조례제정이 어느 정도 가시화되자 “현재로선 학생인권조례 제정이 교권의 침해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신중하게 접근하겠다.”는 진부한 논리를 내세워 사실상 거부의 뜻을 밝히셨습니다. 대전지역 학생인권의 향상을 위해서 다른 방안과 제도적 장치가 마련된다면 저도 굳이 학생인권조례 제정만을 고집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기본적인 인권이라고 할 수 있는 안전하게 먹을 권리가 침해당하고 있는 학생들과 근무 이후 인권교육은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는 급식종사자의 현실, 그로 인해 험한 욕설을 들으며 급식을 먹어야 하는 학생들의 인권을 제대로 보장해 줄 수 있는 실질적인 방안은 무엇인지 묻고 싶습니다.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갈수록 각박해지는 노동환경에서 제대로 된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받기 위한 학생 대상의 노동인권 교육은 다른 시도에서는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데 대전지역은 좀처럼 그런 소식을 들을 수 없습니다. 대전지역의 고등학생들은 그런 교육 없이도 충분히 직장생활을 잘할 수 있다는 것인지 그것이 아니라면 왜 대전에서는 학생들에게 노동인권 교육을 시행하지 않는지도 궁금합니다. 지난 3월 지역 언론에는 설 교육감님이 대전에서 1박 2일간 열린 한 모임에서 축사를 했다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날 전국에서 모인 40여 명의 참석자들은 ‘전국학부모단체연합’이란 단체를 결성하기로 하고 출범과 함께 당면 현안 대응 과제로 ▲ 대전학생인권조례 저지 ▲ 충북교육공동체헌장 제정 저지를 위한 단체 행동 돌입 ▲ 전교조의 세력화로 망가진 교육 정상화 등을 결의했다고 합니다. 지역의 학생인권 관련 의제에는 철저히 무관심한 행보를 보이셨던 설 교육감님께서 아직 만들어지지도 않은 단체의 워크숍행사에까지 찾아가서 그것도 학생인권과 전교조를 반대하는 활동을 하겠다는 사람들 앞에서 축사했다는 사실에, 대전에서 아이를 키우고 있는 학부모의 한사람으로서 자존심까지 상하는 것은 저만의 감상적인 느낌일까요? 축사까지 가셨던 단체에 대한 관심의 절반만이라도 학생들의 인권에 관심을 두시길 부탁드립니다. 설 교육감님! 인권운동을 하는 사람으로서 감히 한 말씀 드리자면 ‘인권’이란 것은 그렇게 성가시거나 무서운 것이 아닙니다. 앞에서 제가 궁금했던 문제도 대전시 교육청의 행정이 인권을 기준으로 제대로만 이뤄졌다면 크게 문제가 될 일도 성가실 일도 없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실제 그 무섭다(?)는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된 지역에서도 우려와는 달리 교사가 연일 학생들에게 폭행을 당하거나 학생들 대부분이 장발족에 진한 화장을 하고 다니지는 않습니다. 학내 종교의 자유를 준다고 갑자기 이슬람으로 개종하지도 않고 성적지향과 미혼모를 차별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성애자인 학생이 동성애자가 되거나 갑자기 아이를 업고 학교에 나타나는 미혼모 학생이 많아지는 경우도 없다고 합니다. 2년 남짓 남은 설 교육감님의 임기 후반기에는 학생인권에 대한 관심과 실천이 많아져서 인권에 기반을 둔 대전시 교육행정이 실현되길 기대합니다. 이 글은 2016년 8월 10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470 | 추천: 0
신혜연/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재학생 “내가 여기 일일 사장님이야.” ‘사장님’은 바퀴 달린 낡은 회색빛 의자에 앉더니 몸을 젖혔다. 표정과 몸짓에서 자부심이 묻어났다. 올해 일흔일곱 살인 신백동 씨는 제천 중앙시장에서 주차관리요원으로 일한다. 주차장 맞은편 상가 차양 아래 놓인 의자가 신 씨의 야외 사무실이다. 아스팔트가 뜨겁게 달궈지는 여름에도, 빙판이 어는 겨울에도 신 씨는 이곳에서 하루 11시간을 버틴다. 노인 인구가 전체의 4분의 1에 달하는 충청북도 제천시에서는 일흔을 넘은 주차관리요원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제천시 공영주차장에서 일하는 노인들은 모두 개인사업자다. 제천시는 2년마다 입찰을 통해 공영주차장 운영권을 민간 업체에 수탁하고 있다. 주차관리요원은 이 민간업체와 구두계약을 맺고 시민들에게 걷은 주차요금의 일부를 수입으로 챙긴다. 주차요금을 걷을 권리를 얻는 대신 민간 수탁업체에게 날마다 정해진 금액을 입금하는 형태다. 택시기사들이 회사에 내는 ‘사납금’과 비슷하다. 제천시 주차관리요원인 신백동씨가 시민에게 주차요금을 걷고 있다. 사진 출처 - 필자 개인사업자인 탓에 정해진 임금은 없다. 주차요금은 10분에 300원. 회사에 보내야 하는 돈은 정해져 있는데 주차요금이 덜 걷히면 그만큼 손해가 나기 때문에 주차요원들은 필사적으로 주차장을 지킨다. 평균적인 근무시간은 아침 9시부터 저녁 8시까지 하루 11시간에 달한다. 일요일을 뺀 주 6일로 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1년 중 쉬는 날은 명절 연휴 당일과 그 다음날이 전부다. 주차요금을 걷지 못하는 일이 생길까봐 점심, 저녁은 길 위에서 도시락으로 해결한다. 그렇게 해서 한 달에 120만 원 정도를 번다. 당연히 최저시급 미만이다. 사장님은 아플 수도, 다칠 수도 없다. 직접적인 고용관계가 없으니 고용보험, 산재보험같은 기초적인 사회보장제도에서도 소외돼 있다. 제천 중앙시장 용두천 1지구에서 주차요원으로 일하는 일흔다섯 살 남영기 씨는 하루에도 몇 번씩 4차선 도로를 넘어 다닌다. 관리하는 주차구역이 중앙선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어, 주차요금을 걷기 위해 황급히 차로를 가로질러가는 일이 다반사다. 일터가 차도 한복판인 업무의 특성상 교통사고가 나기 쉽지만, 사고가 났을 때 이들이 지급받을 수 있는 보상금은 한 푼도 없다. 노년유니온 고현종 사무처장은 제천시 공영주차장 주차관리요원들의 이야기를 듣고 혀를 내둘렀다. 하루 11시간 노동에 대해서는 “젊은 사람들도 못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노인들이 체력적인 부담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건 소득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노인 일자리 중에는 30시간 이상 일하고도 20만 원을 주는 등 임금이 형편없는 경우가 흔하다고도 했다. “한 가지 일만 해서는 소득이 낮다보니 폐지를 줍거나 투잡, 쓰리잡을 뛴다”는 게 고씨의 설명이다. 재레드 다이아몬드 교수는 현대 사회에서 노인의 지위가 떨어지는 이유 중 하나로 ‘노동을 인격으로 보는 문화’를 꼽았다. 사진 출처 - pixabay ‘일자리가 복지다.’ 한국에서 흔하게 들을 수 있는 이 말은 노인들의 삶을 나락으로 모는 기폭제다. 수탁업체 측에서 열악한 노동실태를 지적하자 “주차관리 일은 걸을 수만 있으면 할 수 있어서 노인들에게 유리한 일자리”라며 “오래 일하는 사람은 10년 넘게 이 일만 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실제로 주차관리요원 중에는 “이 일 외에 달리 할 일이 없다”며 5년 이상 해왔다고 답하는 이가 적지 않았다. 사회복지학자 에스핑 앤더슨은 현대 국가의 복지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로 ‘노동력 상품화’를 꼽았다. 노동력을 팔지 않고 어느 정도로 삶을 유지할 수 있는지를 보면 복지 수준을 판단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한국은 부양의무자가 없는 궁핍한 이들에게만 제한적으로 복지 혜택을 제공하는 전형적인 잔여적 복지모델이다. 이마저도 복지 수혜자의 근로능력을 파악해 ‘가상소득’을 집계하고, 근로능력이 있는 이들은 복지 혜택에서 제외한다. 자신이 ‘사회적 약자’라는 점을 증명하지 못하면 복지 혜택을 전혀 볼 수 없기에 한국 사회의 노동력 상품화 정도는 최상에 가깝다. 죽기 직전까지 뒤틀린 고용구조 속에서 열악한 노동조건을 감내해야 하는 노인들의 삶을 바꾸려면 노동력 상품화 정도를 낮추고 복지 제도를 구축해야 한다. 재러드 다이아몬드 교수는 현대 사회에서 노인의 지위가 떨어지는 이유 중 하나로 ‘노동을 인격으로 보는 문화’를 꼽았다. 노동력을 제공하지 못하는 노인은 사회적 유용성이 떨어진다며 평가 절하된다. 노동력을 팔아 생존하는 것이 제1원칙인 자본주의 사회라고 해도 노동력을 팔 수 없게 된 이들이 어려움에 처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반인권적인 행위다. 오늘도 차로 한복판에서 땀을 흘리며 주차요금을 걷고 있을 노인들은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 사회 노인들에게는 언제쯤 인격이 허락되느냐”고. 이 글은 2016년 7월 27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580 | 추천: 0
손상훈/ 교단자정센터 원장 지난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불교계 인권운동의 대명사였던 J스님은 서울 조계사 대웅전 마당에서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는 성명과 기자회견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조계종 총무원 호법부 관계자들에 의해 조계사 밖으로 내 몰렸다. 당시 큰 충격을 받은 사람이 많았고 여전히 못 믿겠다고 하는 분도 있다. 최근 현대사를 연구하는 한 분도 스님의 행동을 처음 들었다고 믿기 어렵단다. 민주화 운동을 하는 영령들의 진실이 밝혀지기 전에는 일반적인 승복이 아니라 검은 옷을 입겠다고 했고,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목탁을 치면서 거리를 다니던 분이 한 일이라 쉽게 납득이 되지 않았다. 시위 현장에서 약자의 편에 서던 이 스님이 이런 행동을 하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자신을 알아주지 않고, 소외당하고 미래가 막막해 보이는 것, 승려라도 견디기 힘든 보상받고 싶은 심리, 우리가 모르는 다른 이유도 있을 것이다. 여러 이유 가운데 하나가 ‘부패한 종교권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대통령 선거 전후에서 불교계 여러 종단의 총무원에서 주요 직책을 맡고 있거나 맡았던 이가 서로 ‘대통령 후보와 여당’에 잘 보이려고 경쟁하는 사례가 많았고 그 일부가 언론에 보도 되었다. J스님의 기자회견을 막은 총무원도 유력한 대통령 후보를 서로 지지하고 잘 보이려다 일어난 일이라는 지적이 더 설득력이 있다. 또한 조계종 한 교구본사 행사에서 주요한 직책을 맡은 승려이자 관계자는 신라시대 모 여왕이 다시 태어났다며, 박근혜 후보를 칭송해 언론에 보도 되었다. 총선을 앞두고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스님이 유력 후보들을 잇달아 찾아다닌 가운데, 종교자유정책연구원이 “종교인의 정치개입행위는 자제되고 근절되어야 마땅하다”며 “정교분리원칙에 따라 선거개입행위를 즉각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사진은 자승스님이 새누리당 나경원 후보를 만나 악수를 하고 있는 모습. 사진=나경원 후보 페이스북 화면 캡쳐. 사진 출처 - 불교포커스 “차량까지 이동하는 과정에서 인사를 나눈 것 뿐”이라는 답변 역시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자승스님과 해당 후보자들과의 만남 과정, 이동 경로 등이 SNS를 통해 모두 공개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진=더불어민주당 박영선 후보 페이스북 화면 캡쳐. 사진 출처 - 불교포커스 그러나 당시 조계종 총무원의 공식적인 입장은 선거 엄정 중립이다. 조계종은 대변인을 통해 여러 차례 승려 개인의 행동으로 조계종 전체의 뜻이 아니라고 밝혔다. 이미 지난 일이고 널리 알려진 일을 새삼 꺼내는 이유는 2017년 12월 20일 예정된 대통령 선거에서 다시 보게 되지 않을까 우려스럽기 때문이다. 특히 조계종 총무원장 선거도 종법에 명시되어 있어 2017년 10월에 개최되어 ‘부패한 종교권력’이 되고픈 극소수 권승들이 정치권력에 잘 보이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하지 않을까 걱정된다. 역사를 보면, 국가권력을 짝사랑하거나 이권을 독점하기 위해 국가권력의 시녀역할을 한 교훈은 많다. 멀리 고려 말의 부패한 불교계의 사례를 나열하지 않더라도 1994년 ‘상무대 비리 사건’은 당시 서의현 조계종 총무원장과 신도회장 그리고 정치권이 맞물린 사건이다. 현재 불교계는 이런 비슷한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바른 목소리를 내는 불교계 인터넷 언론에 사찰 광고를 내지 못하게 하고, 심지어 기고나 글을 게재하면 총무원 호법부에서 징계하겠다고 한다. 지난 해 동국대에서 한 학생이 50일 단식을 하고 만들어낸 조계종의 결단 가운데 청량한 조치는 아직 매우 미흡하다. 이사진은 모두 사퇴했지만 총무원장의 뜻에 거스르는 인사는 없어 보인다. 특히 학생들로부터 논문표절, 글 도둑질 의혹을 받고 있는 현 동국대 총장은 자신의 논문 표절을 심사할 재심위원회를 지난 해 3월 이후 구성조차 하지 않고 있다. 1년 4개월 동안 늘어진 재심 때문에 학생회 회장단은 일본으로 가 대학과 일본 언론에 호소하고 있다. 조계종 총무원은 국민의 세금으로 수백억 원을 지원받는 종교단체로서 반복되는 국고보조금 횡령사건의 근절대책을 세우고 실천해야 한다. 또한, 동국대 총학생회 등 문제를 제기하는 학내 구성원에게 신뢰받는 조치를 해야 한다. 현 총장의 재심위원회를 구성하고 빠른 시일 내에 논문표절 의혹을 검증하여, 진실을 규명해야 할 것이다. 조계종 총무원장은 지난 1994년의 ‘상무대비리’ 역사를 교훈 삼아 ‘부패한 종교권력’이 저지른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갈수록 집중되어 가는 총무원장의 권한에 확인되지 않은 소문도 무성하다. 중앙정부나 산하 공단의 인사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거나, 적극 추천도 하고 있다는 소문이다. 찬성하는 측에서는 인재를 추천하는 것이니 문제가 없다지만 자칫 내 사람 심기로 개입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부패한 종교권력’을 구별하는 방법은 헌법과 법률, 그리고 종교 자체적으로 정한 ‘종헌 종법’을 지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총무원장이나 유명 사찰의 주지 같은 종교계 지도자는 헌법을 준수하고, 헌법 정신을 유린하거나 파괴하는 애매한 행동을 하지 않아야 한다. 지난 총선 당시 나경원 후보나 박영선 후보 선거과정에서 총무원장이 전통시장에서 사진을 찍는 행동은 부적절한 행동이다. 조계종언론탄압대책위. 국회공청회 사진 출처 - 불교닷컴, 조계종언론탄압대책위 총무원장이 특정 후보의 선거를 돕는 이미지를 주는 것으로 해당 지역구 다른 후보에게 역차별을 주는 일은 신중했어야 했다. 또한, 1만여 명을 동원하여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개최한 집회에 내건 ‘총선필패’라는 현수막과 피켓도 마찬가지다. ‘조계종 한전부지 환수위’가 게시했다고 하나, 책임은 총무원장에게 있는 것이고, 민감한 총선선거기간에 조계종의 권익을 위한 무분별한 모습이었다는 혹독한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이런 행위가 쌓이고 사과와 참회, 행동의 수정이 없다면 결과적으로 ‘부패한 종교권력’이 되어 갈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조계종 총무원장은 반복되는 국고보조금 횡령사건, 동국대 총장의 글 도둑질 의혹, 부도덕한 동대 이사 파견, 불교 언론 탄압 등 시민사회 단체가 지적하는 사항에 ‘공식사과’를 하고 재발방지 대책을 세워야 한다. 특히 동국대 총장 인사에 개입한 행적을 사과하고, 사립학교법에 명시한 덕망 있는 이사를 추천해야 한다. 또한, 이웃 종교계 사립학교의 기준이라도 참고해 동국대를 정상화 시켜야 한다. 총무원장이 책임져야 할 일로 학생이나 평신도가 1년 넘게 집회와 시위를 하지 않도록 특별하고 시급한 조치를 촉구한다. 참고 ■ 상무대 비리란 대선 정치 자금 40억 원 유입…조계종 총무원장과 정치권력 유착 사례 1994년 조계종 종단개혁 계기 정부가 광주 민주화운동 명예회복사업으로 추진한 상무대 이전공사에서 공사 수주업체인 청우종합건설 회장 조기현 씨가 6백 99억 원의 선급금 중 233억 원을 유용했다는 사건이다. 이중 80억 원은 대구 동화사 대불 건립비로 시주하고 40억 원을 대선 직전 여권 고위층에 정치자금으로 헌납했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주장이다. 노태우 정부 아래에서 안기부장, 참모총장을 역임한 실세와 김영삼 대통령의 측근에게 돈이 들어갔다는 것이다. 1994년 2월 25일 민주당 정대철 의원이 국회 국방위에서 폭로한 이 주장에 따라 국회는 국정조사권을 발동, 조씨와 서의현 전 조계종 총무원장 등 10명과 청우종합건설 관계자와 대불 조성 당시 동화사 주지 등 불교계 인사 20명을 참고인으로 채택해 조사를 벌였으나 진상규명에는 실패했다. 검찰은 조씨가 동화사 시주금으로 80억 원, 법회비로 44억 원, 차입금 변제로 44억 원, 업무추진비로 34억 원, 개인빌라 구입에 20억 원을 쓰는 등 회사돈을 횡령했다고 수사결과를 발표했고 조씨는 이해 11월 1심에서 횡령죄로 징역3년을 선고 받았다. 상무대 비리는 종단 권력자와 신도가 돈을 매개로 연계되는 시스템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결국 부정한 고리가 종단개혁의 단초를 제공했다. 정부 관급공사를 확보하기 위해 권력자의 힘이 필요했던 건설업자와 종단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돈이 필요했던 종단 최고위층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다. 정치권은 종교단체를 통해 들어오는 비교적 안전하다고 여긴 비자금을 받는 대신, 민원을 들어주는 부패를 매개로한 연결고리가 형성된 것이다. 이 글은 2016년 7월 20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525 | 추천: 0
강국진/ 서울신문 기자 역사에 관심 있는 이들 가운데 적잖은 분들이 신라가 삼국통일을 했던 게 불행이라는 인식을 공유한다.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다면 저 광대한 만주벌판이 지금도 우리 영토였을 텐데’ 하는 상상을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역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자각하고 국민으로서 자긍심을 가지라고 배우는 게 아니다. 부동산 투기를 고대사까지 확장하라고 있는 건 더더욱 아니다. 우리가 진짜로 고민해야 하는 건 오히려 ‘왜 고구려·백제가 아니라 신라였을까’ 하는 주제다. 헬조선 탈출 해법도 역사에서 배울 수 있다. 지도를 펼쳐 보면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는 게 기적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고대사회는 농업생산력이 국력이던 시절이다. 농경지가 부족한 신라는 약소국의 숙명을 타고났다. 험준한 자연지형이 방어벽이 돼 주는 게 그나마 행운이었다. 초기에는 가야한테 치이고, 고구려 속국으로 전락한 적도 있었다. 7세기엔 날이면 날마다 외침에 시달리는 말 그대로 ‘헬 신라’였다. 그런데 어떻게 신라였을까. 고구려·백제의 분열과 당(唐)나라와 고구려의 갈등 같은 외부요인들 덕분에 어쩌다 보니 호박이 넝쿨째 굴러 온 것일까. 삼국은 모두 강력한 신분제 사회였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인민(人民)은 원래 고대사회에서 지배계급인 인(人)과 피지배계급인 민(民)이라는 완전히 다른 신분을 가리키던 용어다. 당시에 ‘민’이란 말 그대로 개·돼지나 다를바 없는 존재였다. 골품제라는 건 ‘인(人)’ 중에서도 많아봐야 수백 명에 불과했을 극소수가 모든 권력을 독점하는 구조였다. 역사 시간에 배웠던 성골과 진골을 생각해보면 금수저도 이런 금수저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와중에 신라에선 극히 제한적이긴 하지만 신분제를 조금은 완화하는 개혁 조치를 취했다. 가야 왕족 출신인 김유신이 태종 무열왕을 도와 신라군을 이끄는 총사령관으로 활약했다는 점, 화랑 제도를 통해 특진이라도 할 수 있었던 이들이 존재했다는 점이 그런 변화를 보여준다. 특히 눈여겨 볼 대목은 김유신이 전장에서 무단이탈했다는 이유로 친아들인 원술을 내쳤다는 점이다. 그 정도 책임감이 있었기에 지배계급으로서 부하들에게 희생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신라는 지배집단이 단결해서 국가능력을 총동원할 수 있는 체제를 갖췄다. 사진 출처 - 네이버 캐스트 외교를 통한 통일이라는 것도 손쉽게 폄하할 문제가 아니다. 신라로서는 고구려와 백제한테 고립돼 있었다. 국가를 운영하는 사람이라면 외교는 필수다. 적어도 김춘추, 그러니까 태종 무열왕은 목숨을 걸고 직접 험난한 바다를 건너 당나라를 찾아가 동맹관계를 맺었다. 뒷날 신라는 국가의 명운을 걸고 당나라에 맞서 대규모 전쟁을 치렀고 승리했다. 국제관계에서 영원한 동지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것을 당시 신라 지배층은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고구려나 백제는 당시 국제관계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 했다. 물론 신라는 통일 이후 안정을 찾자 급속히 옛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신분제가 다시 공고해지며 활력을 잃어갔다. 그 결과 후고구려, 후백제, 고려가 차례로 등장해 결국 신라를 무너뜨렸다. 왜 고구려·백제가 아니라 신라였는지 생각해보면 왜 견훤이나 궁예가 아니라 왕건이었는지 납득이 간다. 결혼동맹을 통해 지배세력을 단일대오로 묶어냈고 신라를 전략적으로 우대함으로써 스스로 항복하도록 유도했다. 견훤은 군사령관으로선 정말이지 특출난 영웅이었고 전투에선 여러번 왕건을 패망 직전까지 몰아붙였지만 끝내 전쟁에서 이긴 건 왕건이었다. 신라와 고려를 되돌아보면 지배집단, 요즘말로 국가 엘리트들이 전략적인 목표를 갖고 그 목표를 위해 힘을 합하는지, 그리고 적절한 양보와 솔선수범을 통해 민중들의 동의와 참여를 이끌어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느끼게 된다. 특히 국제관계를 제대로 인식하고 외교에 힘을 쏟는 것은 국가의 생사를 가른다. 안으로는 '개·돼지' 피를 빨아먹는 것으로 호구지책을 삼고, 밖으로는 호구짓과 동네북으로 일관하는 21세기 한국 집권 집단에게 이렇게 권하고 싶다. "금수저들이여, 야망을 좀 가져봐라." 이 글은 2016년 7월 13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465 | 추천: 0
이동화/ 아디 사무국장 사람들에게 저를 소개할 때 셀림이라고 합니다. 2003년 이라크 전쟁 때 찾아간 바그다드에서 동네 아이들이 저를 보고 “셀림, 셀림”이라 불렀을 때부터였고, 뜻은 아랍어로 건강한 청년, 한국어로는 돌쇠나 마당쇠 정도일 것입니다. 2003년부터 2006년까지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에서 저를 셀림이라고 소개하며 힘들었지만 즐겁게 반전, 반점령 활동, 그리고 아랍어 공부를 하였습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운이 좋게 민변이라는 훌륭한 단체에서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민변에서 국제연대 및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많은 것들을 배우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조금씩 셀림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주저했습니다. 아무래도 국내인권상황을 중심으로 활동했기에 마음속으로 현장에 대한 부채감이 더 쌓여갔기 때문이겠지요.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의 부담이 커져갔습니다. 사진 출처 - 필자 꽤나 긴 시간 동안 고민을 했습니다. 활동가의 삶과 가장이라는 현실적 조건을 놓고 진지하게 고민하였습니다. 그리고 2년 전 다시 팔레스타인에도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현장에서 활동하는 그곳 친구들을 만나면서 고민했던 것들이 서서히 풀렸습니다. 그곳도 현장이고, 한국도 현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생존 그 자체도 녹록치 않지만 본인들의 존엄성과 권리를 위해 저항하며 싸우는 모든 이들이 있는 곳이 바로 현장이었습니다. 반드시 팔레스타인이고 이라크일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아시아가 다가왔습니다. 저는 현장에서 싸우고 있는 그들과 함께 할 때가 가장 즐겁고 행복했고, 현장의 현실을 한국에 알리고 한국에서 사람들을 조직하고 활동을 진행할 때 보람을 느꼈습니다. 그러면서 주변에 함께 할 사람을 찾으려 할 때 아디가 곁에 있었습니다. 우연과 인연이 만나는 순간이었지요. 저는 20대 때 학생운동을 했고,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을 다녀오면서 현장의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30대에는 그 경험을 바탕으로 민변에서 국제연대활동을 익혔습니다. 그리고 40대 초반인 지금 3명의 아디 활동가분들과, 한국에서 아시아의 평화와 인권이 지켜지는 세상을 꿈꾸는 여러분들과 함께 10년의 활동을 시작해보려 합니다. 조금 천천히 갈지라도 현장과 주변의 활동가들과 함께 긴 호흡으로 꾸준히 가보려 합니다. 이 공간을 빌어 아디의 시작을 알립니다. 감사합니다. 이 글은 2016년 7월 6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550 | 추천: 0
이상재/ 대전충남인권연대 사무국장 인권이 ‘지역’과 만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도 인권의 보편성에 관한 것이다. 대한민국 내에 현재 존재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어느 지역에 있건 차별 없이 헌법적 권리와 인권을 보장받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대상이 청소년이라 해도 보장받아야 함은 지극히 당연하다. 하지만 2016년 대전지역 청소년들의 인권보장은 자동차로 불과 1~2시간 거리에 있는 서울, 경기, 충북, 전북, 광주지역의 그것과는 현격히 차이 나게 낮은 수준을 보인다. 30분~1시간이나 이른 등교 시간, 자율이 아닌 강제 야간학습,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행해지는 체벌, 수준별 이동수업이라고 포장되는 차별 수업, 매 학기 언제나 치러지는 일제고사 시험, 초등학교까지만 지원되는 무상급식 등 대전지역에서 초, 중,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청소년들의 삶은 적어도 인권적 기준에서는 다른 지역과 비교를 해도, 절대적 기준을 들이대도 문제투성이다. 대전지역이 이렇게 청소년 인권에 대한 문제점들이 끊임없이 나열되는 청소년 인권침해 지역이 된 이유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첫 번째 지적되는 문제점은 학생 인권에 무관심한 대전의 교육행정이다. 대전은 대구와 울산, 경북과 함께 교육감 직선제 이후 진보적 성향의 교육감이 한 번도 당선된 적이 없는 광역도시이다. 대전과 비슷한 처지에 있던 부산, 경남, 인천 등의 지역은 2014년 지방자치 선거를 통해 첫 진보교육감을 배출했지만, 대전은 진보교육감을 자처하는 후보가 두 명이나 출마하는 바람에 보수적인 성향의 설동호(前 한밭대 총장) 씨가 비교적 낮은 득표율인 31.42%를 득표하고도 무난하게 당선됐다. 이것은 특정 개인의 당선 여부를 떠나 인권 개념 자체가 가진 진보적인 성격을 고려했을 때 보수성향 교육감의 연이은 당선은 매우 아쉽고 지역 시민사회운동 진영의 책임성도 느껴지는 대목이라 할 것이다. 보수적 성향의 교육감이 연이어 펼치는 지역 교육행정은 학생 인권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반면 이명박, 박근혜 정부의 교육정책에 대해서는 거의 100% 수용하는 행태를 보여왔다. 2011년 무상급식 도입을 놓고 논란이 벌어졌을 때 대부분 무상급식을 도입했던 다른 시도 교육청과 달리 당시 김신호 교육감은 끝까지 무상급식에 대한 반대 소신을 굽히지 않다가, 마지못해 초등학교 일부 학년에 대한 무상급식을 전국에서 맨 나중에 도입했다. 이 밖에도 전교조 등에서 성적을 통한 학생들의 줄 세우기와 무한 경쟁을 유발하고 불필요한 선행학습과 사교육을 부추길 우려를 들어 일관되게 반대를 주장하고 있는 일제고사는 매 학기 치러졌지만 서울과 경기도에서는 학생인권조례 규정에 의해 한 학기에 한 차례 이상 의무적으로 시행되는 학생 대상의 인권교육은 접하기 힘든 상황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올해 의원입법으로 제정하려고 했던 대전학생인권조례는 지난 4월 25일 공청회에서 현 교육감 지지 세력과 개신교, 보수단체 세력들이 물리력으로 행사 자체를 저지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학생인권조례와 함께 교육현장에서 전국적인 관심을 끌고 있는 혁신학교 또한 대전에서는 거의 무풍지대이다. 경기도의 경우 관내 2,250개의 초, 중, 고등학교 중에서 혁신학교는 2015년 3월 현재 356개로 15.8%에 이른다. 하지만 대전은 전혀 없는 실정이다. 민선 자치 이후 이제껏 대전시의 교육행정에 학생 인권을 기준으로 한 변화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대전지역의 학생 인권침해가 심각해진 두 번째 원인은 시민사회와 학부모의 무관심을 지적할 수 있겠다. 대전은 올해 박병철 시의원의 학생인권조례 제정 시도가 있기 전까지는 교육청은 물론 시민사회에서도 학생인권조례에 대한 논의와 시도가 없었던 지역이다. 서울과 전북, 충북, 경남 등의 지역이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위해 시민들이 제정운동을 하고 시민발의 형태를 취하는 지역 교육 개혁 운동의 한 형태로 발전했지만, 대전은 그러한 시도가 없었다. 참교육 운동을 앞장서 펼쳐왔던 전교조의 활동이 유독 대전에서는 조직력이나 활동력에서 상대적으로 약했던 것도 한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전교조 외에도 대전지역 내에서 지방권력 감시, 환경, 노동, 통일운동 등이 나름 활발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고려한다면 교육과 학생 인권에 대한 지역 시민사회의 이러한 무기력은 아쉽기만 할 뿐이다. 사진 출처 - 굿모닝충청 학생 인권에 관심이 없고 쟁점이 되지 않는 지역 분위기와 맞물려서 대전지역의 학부모 성향 역시 자녀들의 성적에만 관심이 있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상태이다. 매 학기 시행 여부를 놓고 교육시민단체와 힘겨루기를 하는 일제고사 시행도 대전지역 대부분의 학부모는 문제 제기는 고사하고 시험일정이 발표되면 시험 준비에 적극적으로 매달리는 형편이었다.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의 비유가 될 수 있겠지만, 보수적인 교육행정 때문에 학부모의 성향이 그렇게 굳어 버린 것인지, 원래부터 대전지역의 학부모들이 자녀들의 성적 외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지금의 대전지역 학부모 분위기에서 학생 인권이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기에는 무리라는 것은 대체로 지역사회의 일치된 의견일 것이다. 문제는 있는데 문제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다는 데서 대전지역 학생 인권침해 문제의 본질이 있는 것이다. 대전지역의 학생 인권침해에 대한 생각을 하다 보면 애거사 크리스티의 유명한 추리소설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이 떠오른다. 유럽횡단 열차를 배경으로 열차 안이라는 밀실에서 벌어지는 살인사건과 용의자로 의심받는 12명의 승객을 소재로 다룬 추리소설의 걸작에서 왜 대전의 학생 인권이 뜬금없이 생각났을까? 적어도 학생 인권과 관련해서는 다른 지역과 소통하지 않은 밀실과 같다는 점에서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의 주 무대인 기차 안이 주는 막연한 답답한 분위기와 대전의 학생 인권 관련 분위기는 많이 맞닿아 있다. 또 하나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에서 마지막에 밝혀지는 범인은 누구였던가?를 다시 생각해 본다. 대전 지역의 학생 인권침해가 심각해진 원인과 책임을 묻는다면 이는 아마도 대전지역의 학생을 둘러싼 모두가 원인 제공자고 책임주체가 아닐까? 이 글은 2016년 6월 22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534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