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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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김성은(서울신문 기자), 김태형(프리랜서 방송작가),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박용석(출판업),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춘천별빛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이동화(아디 사무국장),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김아현/ 인권연대 연구원  “해일이 오는데 조개나 줍고 있다.”  자칭타칭 이제는 ‘작가’가 된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자 ‘전 의원’의 말이다. 그가 이런 말을 한 것은 개혁국민정당(이하 개혁당) 창당 당시 당내에서 성폭력 사건이 수면 위로 불거졌을 때다. 정확히는 2002년의 일이다. 이 발화의 대상은 해당 사건을 비판하는 여성 당원들이었다. ‘중요한’ 선거를 앞두고 ‘작은’ 문제로 당의 에너지를 소진하지 말자는 주장을, 그는 타고난 문장가답게 간명한 비유로 갈음했고 이는 종종 회자되었다. 십 여 년도 훨씬 전의 일이지만 미투 이후 최근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일들을 보며 저 말을 떠올렸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다. 그리고 행여 저 말이 실수에서 비롯되지 않았더라도, 읽고 쓰고 말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라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생각과 인식이 변하고 발전할 수 있기 때문에 십 여 년 전의 ‘그의’ 발언을 이제와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다.  작가를 자임하며 이런저런 사회적 책무와 공인으로서의 무게를 벗어낸 그가, 최근의 미투 사태를 관조하며 본인이 정치인(개혁당 대표집행위원)이던 시절 한 말을 어떻게 떠올릴지는 모르겠다. 사실 별반 궁금하지도 않다. 유시민의 말이지만 유시민만의 말이 아니어서다. 저런 말과 태도는 이른바 ‘큰 일’을 한다고 자임하는 사람들에게서 지금도 흔히 볼 수 있고 아마 앞으로도 종종 볼 수 있을 거다(더는 듣고 싶지 않은 말이지만).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자는 주장과 태도는 때로 합리적이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폭력이 된다. 중요한 것은 원칙이고 그 적용이다. 민주화투쟁이든 노동운동이든 인권운동이든 정치 등을 하면서 내세우는 목적이 공동체의 이익과 발전에 있다면,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해도 좋다는 태도가 적어도 부끄러운 것인 줄은 알아야 한다. 작은 문제로 여기고 희생을 강요해 온 것이 특히 타자의 고통이라면 더더욱 강한 자기검열을 해야 한다. 경제발전이 우선이라며 수 십 년 간 용인하고 넘겼던 크고 작은 비리와 불합리들이 내 삶을 불행하게 하는 거대한 악이 되어, 우리를 맵찬 추위 속 방방곡곡에서 촛불을 들게 했다는 것을 굳이 환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사진 출처 - freepik  크고 작은 성폭력, 위계나 경제력 차이에 의한 갑질은 늘 있어왔고 그를 향한 문제제기와 폭로 또한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미투라고 명명되고, 그에 대한 우리 사회의 대응이 바뀌었을 뿐이다. 심지어 수 십 년간 한국의 납량을 책임져 왔던 [전설의 고향]을 관통하는 소재들도 주로 폭로였다. 언로를 얻지 못해, 귀신이 되어서도 그 한을 어쩌지 못한 약자들의 ‘폭로’이자 ‘호소’를 둘러싼 이야기들이 한국사회 전설의 뼈대를 이루지 않던가. 2009년을 마지막으로 종영한 [전설의 고향]을 최근 우연한 기회로 다시 보며 흠칫 놀랐다. 여성과 약자를 희롱하고 착취하고 심지어 죽이고 나서도, 상대가 한을 갖지 않고 용서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설파하는 삿된 욕망이 주류사회의 유구한 전통이었구나 싶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사회가 일상적으로 또는 은밀하게 저질러 온 크고 작은 폭력을 새삼 ‘발견’하고 ‘경악’하고 가해자를 ‘비난’하는 데서 이 바람이 그칠까 두렵다. 근거 없는 두려움이거나 기우라면 좋겠다. 하지만 미투가 바람직하지 않은 형태로 변형되어 광고카피로 쓰이며 조롱거리로 다뤄지거나, 이제는 그만했으면 좋겠다는 말이 공공연히 들리거나, 자기편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가해자인 특정 피해에 대해서는 음모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서 두려움의 근거를 찾는다.  거창하게는 단군 이래 반 만 년이 흘렀고 가깝게는 87년 이후로 30여년이 지났다. 한반도에 서식하는 구성원들의 변화가 단지 먹고 입고 자는 일에 그쳐서야 될 일인가 싶다. 성폭력과 갑질의 직접적 가해자에게 향하는 남성사회의 비난이, ‘나는 저런 자들과 다르고 (바로 옆의 피해와 고통을 눈치 채지 못한 나는 무관심하고 무지했을 뿐) 무고하다’라는 구분짓기 혹은 자위에 그치지 않도록 스스로 경계하는 수준까지는 나아가길 바란다. 그래야 2018년이다.
2018-03-21 | hrights | 조회: 1447 | 추천: 19
1. 차별과 학교 폭력을 견디게 해준 어린 시절을 지켜준 사람들 김형수/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사무국장  나는 75년생이다. 1980년대 받아주는 유치원이 없어 동네 미술학원 원장실에서 친구들이 율동을 배울 동안 열심히 선긋기, 색칠하기를 했다. 공립 초등학교 9곳에서 입학을 거부당하고 부산의 한 사립학교에 문의 했을 때, “저희 학교는 학생을 구별해서 받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한 이름 모를 동래초등학교 선생님. 추첨할 뿐이라던 그 학교는 6명을 선발하는 제비뽑기에 모두 내 이름을 적어 놓았다.  나를 볼 때 마다 언제나 어디든 동행해 주던 짝지, 주.양.익. 이후 대학 때는 소록도에서 어르신을 위해 열심히 뻥튀기를 하던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필기를 잘 못해서 매일같이 전화를 해도 뭐든지 신나게 답을 도와주던 박.종.현. 먼거리를 갈 때 마다 늘 차를 태워주던 조.수.현. 바지에 실수를 했어도, 먹물을 뒤집어 쓰고 있어도 내 옆에서 묵묵히 미술 시간마다 그림 그리는 것을 도와 주었던 조.민.정.  받아쓰기를 못했던 나를 위해 1학년 김.인.선 선생님은 3학년에도 담임을 맡았고 5시 반 퇴근시간까지 습자지에 받아쓰기 연습을 하던 내 곁에 있어 주셨다. 엄마를 기다리는 나에게 라면도 자주 끓어 주셨던 당시 수위 이.또.범 아저씨. 나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절묘하게 잡아 사진으로 남겨주셨던 5학년 담임 미술가 이.승.희 선생님. 그 밑에는 항상 멋진 자세 멋진 모습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겨우 깨친 한글로 중학교 첫 국어 시간에 피천득 선생님의 수필 ‘내가 좋아 하는 것들’을 모방한 내 작품에 내가 본 최고의 작품이라고 칭찬해 준 국어 선생님. 당신의 그 칭찬이 지금 글 쓰고 있는 나를 만들었다.  그렇게 만난 인연들이 중고교 시절의 그 힘들었던 학교 폭력도, 처절했던 따돌림도 견디게 했고 사람에 대한 믿음을 지켜 주었다. 휴전선 최전방 특수부대 야전 훈련 같았던 청춘 생활의 버팀목.  1995년 2월 27일 서울역 새벽 4시 반 신촌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혼자 하는 서울 생활에 공황과 같은 공포에 휘감겨 있을 때, 택시 기사 아저씨께서 씨익 웃으며 던진 말 한마디.  '뭐 어때? 그냥 한번 해봐아'  늘 두려움이 밀려올 때마다 그 말은 내 심장의 가장 튼튼한 목발이 되었다.  대학에 온 첫날 모든 구성원은 신입생 오티를 가버렸고 전 세계에 목발을 짚은 사람은 나 혼자 인 것처럼 여겨지고 산꼭대기에 있던 일반 기숙사는 신청할 수 없었던 그때, 선뜻 국제기숙사에 전화해서 빈자리를 알아보고 자리를 만들라 했던 얼굴도 모르는 학생처 직원.  지나가는 학교 오솔길 500미터가 오천 미터 같은데 생전 처음 만났던 다양한 피부색깔 사람들 앞에서 넌 누구냐 하며 먼저 말 걸어와 벤치에 앉혀놓고 기숙사 입소 절차를 일사처리로 처리해주고는 나중에 기숙사에서 커피포트 하나로 해먹을 수 있는 모든 자취 요리를 알려주던 아웃사이더 아닌 아웃사이더 과 선배.  1995년 3월1일 새벽 5시 30분 외국인 기숙사 안터에서 한 시간을 기다려 6시 30분 처음으로 만난 룸메이트 가나 왕족 兄, 그는 늘 그 특유의 체취로 내가 힘들까봐 샤워에 신경을 썼고 내가 신입생이니 영어 써야 한다고 늘 방에서는 영어로 나에게 질문을 해주었다.  혼자서는 기숙사 아침 식사를 챙겨 먹을 수가 없어서 늘 참치캔 하나로 식사를 때우던 나에게 어느 날 아침 거나하게 대만식 탕수육을 만들어 주던 말 없던 어느 대만 누나.  어렵사리 전공학과 첫 수업을 마치고 만난 62명의 과 동기들은 거의 하루 종일 나에게 인사하고 반가워했다. 그 이후 한 학기 동안은 항상 내 옆에 그들이 있었다.  1995년 3월, 장애인 노점상 최정환 열사의 노제가 학교 노천극장에서 열리고 있었고 난 신입생 오티를 못갔다는 이유로 93학번 선배와 함께 과 모꼬지를 사전 답사 가기로 되어 있었다. 이러쿵저러쿵 아무말 없었던, 그 선배는 나에게 모든 것을 목격하게 했다. 난 그날 인생 처음으로 최루탄을 맞았고 전두환이 나쁜 놈인 걸 알았다.  첫 우이동 모꼬지에서 만난 사람마다 모두 나에게 시집을 한 권씩 주었고 그 시집 첫머리엔 모두 빽빽이 나에게 주는 편지가 적혀 있었다. 같은 교실에서 공부를 하게 되어서 반갑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그 중 장애 때문에 마음이 아프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96년 연세대 항쟁 사진 출처 - 구글 안경선배와 민중가요 ‘전화 카드 한 장’  1박2일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은 부슬 부슬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신촌에서 기숙사로 가는 길은 미끄러웠고 외로웠다. 나와 정반대의 길에 사는 94학번 동갑내기 선배는 신촌역에서 기숙사까지 나와 80분을 함께 했는데, 그녀는 나를 바래다준다거나 걱정된다거나 하는 소리는 굳이 하지 않았다. 우산을 쓰지도 않았고 씌어주지도 않았다. 그냥 조용히 걸었다. 노래를 차례대로 불러 주면서.  긴 생머리, 늘 조용하고 무섭기까지 한 안경선배의 안경에는 온통 물방울이 맺혀 있었고, 물 맞은 머리결에서 물안개가 뽀얗기만 했다. 그렇게 그 안경 선배는 나에게 '전화카드 한 장'이란 민중가요를 나즈막이 불러주었었다. 내 생애 처음으로 나에게 전화해도 좋다고 해준 비장애 친구였다.  새내기 한학기가 다 끝나고 갈 곳도 못 구하고 기숙사를 비워야 했을 때, 오다가다 만난 재미 교포 형은 어느 날 제일 먹고 싶은 과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아무생각 없이 내가 제일 먹고 싶었던 과일, 그러나 내가 제일 사먹기 어려운 '수박'을 이야기 했다. 한 시간 뒤에 학교 오솔길 야외 테이블에서 남자 두 명이 커다란 수박 반덩어리를 하나씩 들고 머리 박고 먹고 있었다.  결국 신촌의 어느 하숙집도 장애인 학생을 하숙생으로 받아 주지 않았다. 그렇게 나에게 자취의 모든 노하우를 전수해주던 아웃사이더 과 선배와의 신촌 옥탑방살이는 좌절되고 학생회관 동아리 방에 얹혀살게 되었다. 총학생회실 바로 옆에서 적십자 동아리방에서 먹고 자고 화장실에서 씻는 생활을 한 지 일주일 지날 무렵 처음보는, 딱 봐도 부잣집 아들 같은 동아리 선배가 불쑥 자기집으로 가자했다. 태어나서 나는 옷방을 따로 가진 강남의 저택을 처음 보았다. 거의 5개월 만에 갓 지은 밥에 뜨거운 물로 샤워할 수 있었다. 선배는 내가 왜 동아리방에서 방학을 보내는지 묻지 않았다.  1996년 8월, 저녁마다 짜장면을 사주던 총학생회실이 긴박해졌다. 어느 날, 전공도 알 수 없던 선배가 갑자기 나를 불러 세브란스 병원으로 뛰어갔다. 세브란스 병원 응급실엔 경찰의 곤봉에 맞아 머리가 터지고 입술이 부르튼 같이 짜장면과 군만두를 나눠먹던 총학생회 누나들과 형들이 있었다. 그 중에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형이 나에게 다가와 같이 병원 밖으로 나갈 수 있냐고 했다.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러겠다고 했다. 총학생회실에서 나만 보면 그는 탕수육을 시켜주었기 때문이다.  학교 정문 옆에 병원입구를 나서는데 경찰들이 엄청나게 길을 막고 있었다. 그 중에 한 명이 나에게 물었다. 옆에 형은 누구냐고 어디 갔다가 가는 길이냐고 물었다. 왜 그렇게 대답했는지 지금도 알 수 없지만 세브란스의 재활병동에 가는 길이라고 했고 나와 전혀 닮지 않은 한총련 간부를 친형이고 내 보호자라고 했다. 신촌역까지 5번의 검문이 있었지만 정문을 나와서는 누구도 우리를 잡지 않았다. 서슬 퍼런 전경들도 초록색 어깨 완장을 얹은 간부들도 어여 비켜주라고 했다. 96년 연세대 항쟁이라는 역사 현장에서 내 장애와 내 목발은 아무도 모르는 투사가 되었다. 장애인이라 의심하지 않는 것이 살짝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들을 속였다는 것이 더 짜릿했다.  신촌역에서 만난 나만 보면 구박하던 여자 선배는 화장실 앞 자판기에서 한참을 서 있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갑자기 여자 화장실로 나를 끌고 갔다. 무서웠지만 그 선배는 조용히 울고 있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선배는 생리대 45개를 내 온몸 구석구석에 붙여 놓고는 튀어나오지 않게 압박 붕대로 감더니 우리 학교 제일 높은 곳 종합관으로 배달을 부탁했다. 목발을 짚고 있으면 유일하게 몸수색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종합관에는 갇힌 채 보름 넘게 집에 돌아가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생리대를 처음 보았고 처음 몸에 붙여 보았고 목발을 사용할 때 겨드랑이에 사용하면 훨씬 덜 아프다는 것도 그 때 처음 알았다.  그렇게 탈출시킨 학생 운동하는 사람들은 늘 분단이 한국사회모순의 출발점이며 분단 조국의 '통일'만이 이를 해결하고 장애 해방도 가능하다고 했다. 또 어떤 이는 노동 해방을 이루면 장애 해방도 이룩된다고 했다. 그들의 논리는 빈틈이 없었고 반박할 수도 없었다. 단지 궁금해졌다. 노동해방이 될 때까지 통일이 될 때까지 우리는 하숙집에서 쫒겨나야 되는건가? 노동 해방이 될 때까지 통일이 될 때까지 우리는 도서관도 못가고 화장실도 가지 못한 채로 오줌통을 들고 다녀야 하는 건가?  민주 광장에 모였다 하면 일만 명이 족히 되었던 그들, 저들 중 백 명만 있으면, 아니 50명만 있으면 당장 경사로를 만들 수 있는데, 당장 점자책이라도 구비할 텐데. 저들은 일만명이나 모였다면서 경찰에 걸려 내가 탈출시켜야 하는 걸까? 정말 궁금했다. (다음 호에 계속)
2018-03-21 | hrights | 조회: 1258 | 추천: 4
손상훈/ 교단자정센터 원장  전두환 씨는 지난 80년 말부터 2년간 백담사에서 은둔 생활을 했고, 자승원장은 약3개월을 지냈다. 전 씨가 백담사에 머무는 동안 제도권 불교종단의 일부 승려들은 2년간 온갖 친견법회를 갖고 강연을 청해 듣고 마치 전 씨가 큰 깨달음을 얻은 듯 홍보했다. 누구는 생불이니, 보살님이니 하는 황당한 단어가 거짓말처럼 유행했던 80년 말. 휴일 백담사 주차장엔 승용차와 45인 버스에 신도들을 가득 실은 행렬이 수학여행철도 아닌데 끊이지 않았다는 영화 같은 이야기도 있다. 믿거나 말거나가 아니라 거의 사실이라 생각한다. 물론 반론도 있을 수 있다.  최근 겨울철 집중수련(동안거 정진)을 한 자승원장을 대하는 일부 언론보도는 전두환 씨의 백담사 생활을 찬양했던 일부 종교언론 기사와 닮은꼴이다. 스스로 문을 걸어 잠그고 하루 한 끼 식사만 해 몸무게도 많이 줄었다고 언론에 알려졌다. 자승원장이 했던 ‘종단일은 묻지 마라’는 짧은 인터뷰 기사가 더 조용히 관여한다는 말로 읽히는 것은 과도한 해석일까. 지난 8년간 재임에 성공한 총무원장에서 ‘무문관 수행’도 하는 전직 총무원장으로 이미지 전환을 하는데 성공한 자승원장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놀랍다. 사진 출처 - 불교닷컴 조계사앞 일주문에서 진행된 언론탄압반대시위 모습  몇몇 종이신문은 자승원장의 3개월 겨울수련이 체질이고 피부도 좋아졌다고 찬양 고무의 후일담 기사를 실었다. 백담사 수행승의 이미지로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어렸을 때 부활절을 맞아 계란선물을 받았던 행복한 날이 있었다. 맛있게 먹고 예수님 덕택에 그림도 그린 즐거운 날이 기억난다. 다시 태어난 사실 여부를 떠나 후손들이 평소 못 먹던 계란도 먹고 잠시 행복해 질수 있으니 고마운 날이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백담사로 가는 뉴스를 보고, 재산을 사회에 기부한다든지, 잘못을 인정하고, 국민들에게 일부분 사과한 것을 보면서 어린마음에 정의는 살아있다는 생각을 했던 때가 있었다. 진짜 어리석었다.  그런데 끔찍하게도 3개월 백담사 겨울수련(동안거 수행) 후 부활을 꿈꾸는 자승원장을 보면서 소름이 돋았다. 전 씨처럼 재산을 나라에 헌납하지도 않았고, 자승원장이 동원 가능한 자산이 얼마인지 제대로 파악도 되지 않았는데, 국정원의 종교개입에 대해 제대로 된 조사 한 번 받지 않았는데 일부 언론에서 백담사 3개월 생활을 찬양하고 나서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제 자승원장은 퇴임 기자회견에서 밝힌 대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전 총무님과 남북평화포럼을 만들어 사회를 위해 뭔가 도움이 되는 통일운동에 나설지 궁금해진다. 마치 며칠사이 남북정상회담이나 북미정상회담을 예견한 것처럼 포장할까 걱정된다. 전두환 씨에 대한 갖가지 포장으로 평신도 어머니들의 쌈짓돈을 쓸어 담았던 부자 승려의 얼굴이 떠오른다. 아직도 부자이고 조계종 총무원장을 아바타 삼아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전 조계종 총무원장은 과연 아무 소임도 맡지 않고 체질 같다는 ‘선원수행자’로 살아갈까. 아니면 종단권력 지지자들의 추대에 어쩔 수 없는 양, 통일운동가로 종립대학 주요 소임자로 또 ‘부활’할까 분명히 지켜봐야 한다. 불교계 일부 언론과 조계종 안팎에서는 자승 전 원장이 스스로의 의지대로 향후 조계종 종단정치에서 일정한 역할을 당연히 하리라 보고 있다. 특히 올해 조계종 중앙종회의원 선거(일반 사회의 국회의원 선거와 같다)와 종립대학 동국대 총장선출과정에서 또 다시 주도할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사진 출처 - 불교닷컴 조계사를 방문한 청와대 불자회 모습  그렇다면 종교계 시민사회는 더 분명한 꿈을 꾸어야 한다. 종교계의 부정부패, 종교계 사립학교의 부패, 특히 최근 동국대에서 일어나는 부조리에 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해 나서야 한다. 기존의 관행과 의전을 변화시키는 적폐를 청산하는 세부적인 잣대가 필요하다. 오는 5월 불교계 최대의 명절,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하여 광화문 광장에 나서 새로운 축제를 펼칠 젊은 부처, 시민 부처를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리하여 청와대 불자회가 총무원의 눈치를 보지 않고, 신행단체로 거듭나는 변화를 보고 싶다. 재벌승려와 총무원 권력자들의 다리역할을 하는 기존의 적폐 청와대가 아니라 ‘종교계 적폐청산’을 의전부터 바꾸는 기적 같은 일. 예를 들면 부패한 대학 총장이 구속되고, 대학 구성원이 안심하고 인간답게 일할 수 있는 날. 또 다른 전두환이 부활하는 모습이 아니라 진정한 스승이 다시 부활하는 기적 같은 5월이 종교계 시민사회에도 오길 함께 꿈꿔보자.
2018-03-14 | hrights | 조회: 1346 | 추천: 5
이회림/ ○○경찰서  하비 와인스타인 이라는 걸출한 미국 영화제작자가 있었습니다. '갱스 오브 뉴욕', '펄프 픽션', '캐롤', '킬빌' 등을 만들었고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신뢰하는 제작자이고 헐리우드에서 가장 '힘이 센' 제작자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사람이었지요. 그런데 이 인간이 알고 보니, 평소 여배우들에게 성폭행을 일삼고 여배우들이 항의하면 조용히 뒤에서 돈으로 무마해오던 파렴치한이었습니다. 이 인간의 만행은 기자인 우디 알렌 감독의 아들에 의해 뉴욕타임즈에서 특집기사식으로 상세히 다루어졌습니다. 여배우들이 그가 가진 영화계 내 영향력에 짓눌려 경찰에 신고 한 번 제대로 못하는 동안 발정난 개처럼 계속 피해자들을 양산하고 다녔고, 더 이상 감출 수 없을 정도로 그 피해자들의 수가 늘어났답니다.  김해에서 현직 여성경찰이 ‘성범죄, 갑질없는 직장에서 일하고 싶습니다’라고 써진 팻말을 들고 1인 시위를 하고 있다는 기사가 떴습니다. 솔직히 이 기사를 보고 그리 놀랍지도 않았습니다. '터질 게 터졌구나~' 이 정도였죠. 왜냐하면 맘속으로 수도 없이 상상해 보던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나도 1인시위라도 하고 싶다!’ 이런 마음이 든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설마,, 팀장님이 날 여자로 보겠어? 내가 잘 못 느낀 거겠지,, 우연히 스친 거겠지,,,'  아버지뻘이었던 그 느끼한 팀장이 의도적임을 알게 된 것은 그 찝찝한 기분을 3회이상 연속으로 느낀 후였습니다. 김해 여경의 일은, 기사를 차 떼고 포 떼고 읽어봐도 저간의 사정이 눈 앞에 그려집니다. 문제는 이 정도는 특이한 사례가 아니라 여경들 사이에선 꽤 일반적인 사례라는 것입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헐리우드의 하비 와인스타인,, 이 사례도 영화계 내에선 전 세계적으로 고전적인 수법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미국 사회가 우리와 다른 것은, 이런 놈(즉, 가해자)의 주변인들이 폭로 이후에 어떤 식으로 반응하는지를 보면 압니다. 피해자가 아닌 ‘엠마 왓슨’은 “나는 성추행을 당한 모든 여성 편에 서 있다”며 응원의 목소리를 냈고 ‘알리사 밀라노’는 성폭력이 어디서든 항상 일어나고 있는 범죄임을 알리고자 “성폭력을 당한 분들은 이 트윗에 ‘me too’ 라고 응답해 주세요.”라는 트윗을 올렸습니다. 이 글은 헐리웃을 흔든 ‘미투운동’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많은 여성들이 이들의 발언에 용기를 얻어 각자의 SNS에 그동안 경험한 성폭력에 대해 고백하며 ‘#MeToo(나도 당했다)‘태그를 달았습니다.  지난 가을, 하비 와인스타인 사태가 일어난 후 개최된 골든 글로브상 시상식에서는 남배우들도 피해 여배우들에 대한 연대의 마음을 표현하는 데 동참했다고합니다. 그리고 그와 친분관계에 있었던 배우, 감독들이 자성의 글을 sns에 남기거나 사실 그런 놈인지 알고 있었는데 그의 영향력 때문에 아무 조치도 못했다는 식의 반성의 글을 올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 지점에서 저는 미국 사회가 부럽기 시작했습니다. 피해자의 주변인들 뿐만 아니라, 가해자의 주변인들까지도 피해자를 위해 무언가를 하고 있었으니까요.  우리 대부분은 가해자나 피해자가 될 확률보다는 그들의 주변인이 될 확률이 높습니다. 그리고 성폭행 사건을 둘러싼 주변인들의 시선과 태도에 의해 그 사건의 성격이 달라질 수도 있고 가해자가 피해자로 둔갑하는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사실 성희롱, 강제추행 같은 흔한 성범죄들은 그 속을 들여다보면 권력 관계에서 오는 문제입니다. 약자가 강자를 희롱하거나 추행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쉽게 말해 자신보다 상대적으로 약자인 이들에 대한 배려와 존중의 문제인 것이지요. 가해자의 주변인들이 가해자가 내뱉는 부적절한 언행에 대해 나무라는 분위기만 만들어도 가해자들은 위축될 것입니다. 나쁜 버릇은 주변에서 지적하고, 야단치고, 시정을 요구하여야만 고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헐리우드의 하비 와인스타인이나, 여경에게 성희롱을 하고 추행을 하는 남자 경찰이나, 그들 주변에 있는 분들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잔소리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당장 까칠한 사람, 예민한 사람이라는 부정평가를 받더라도,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자기 확신은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2018-01-24 | hrights | 조회: 1680 | 추천: 3
이동화/ 아디(아시아인권평화디딤돌) 활동가  지난 12월말 미얀마에서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현장사업을 하고 있을 때였다. 평소에도 애청하는 JTBC 뉴스룸에 배우 정우성이 출연하여 로힝야 난민의 참혹한 현실을 소개하며 한국의 시민사회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인터뷰를 했다. 필자가 활동하는 아디는 2017년 3차례에 걸쳐 로힝야 난민들을 직접 만났고 그들의 이야기를 인권보고서로 작성하여 국내와 국제사회에 알리는 활동에 주력하고 있기에 너무 반가운 소식이었고, TV에서 손석희 앵커와 정우성 배우 두 명이 투 샷으로 로힝야 이야기를 할 때는 소름이 끼치면서 정우성 씨의 담담하고 진정성 있는 모습에 ‘인간이 저렇게 멋있을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며 감동스러웠다. 사진 출처- jtbc  인터뷰 관련 기사에 달린 대부분의 댓글이 정우성 씨를 칭찬하며 로힝야 난민의 실태에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며칠 뒤 로힝야 관련 다른 언론사의 기사 밑에 이러한 댓글이 달렸다.  “로힝야는 버마말도 안하고 종교도 달라서 그동안 이슬람 난민으로 살았다잖아 그리고 지들이 테러 일으켜서 경찰 죽이고 해서 쫓겨난거잖아”(댓글 그대로 옮김: 필자)  그리고 그 글을 읽은 나는 반사적으로 “이 씨레기 국 같은 *****삐~”라는 말이 나왔다.  로힝야 인권활동을 하다 보면 종종 로힝야 기사 관련 인터넷 댓글을 살펴보게 되는데 그 댓글들이 증오와 혐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에 놀랐다. 더 놀라운 것은 그러한 혐오댓글이 가장 많은 추천을 받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로힝야 난민에 대한 오해를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로힝야 난민은 미얀마 사람이 아니고 과거에 미얀마 사람을 학살했으며 로힝야 사태의 가장 큰 책임은 영국에게 있다는 것이 대표적인 오해다. 다른 글을 통해서도 밝혔지만 로힝야 사람들은 8~9세기경부터 미얀마 라카인 지역에서 거주했고 영국 식민지배시절 미얀마 식량수탈을 위해 강제이주 되었지만 노동자 신분이었다. 또한 일본이 2차 대전 후반부에 미얀마로 진격하면서 라카인 지역의 무장세력(로힝야 무장세력 포함)간 대리전을 통해 이슬람, 불교도, 일반 민간인들을 학살했다는 사실은 여러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Rohingya_people). 현재의 로힝야 민간인들이 일방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며 미얀마 사람들을 살해하지 않았다. 그 어떤 자료에서도 현재의 미얀마 군대가 로힝야 사람들을 살해하고 방화하는 잔혹한 군사작전을 정당화하는 근거를 찾을 수 없다. 자료를 찾으면 찾을수록 미얀마 군부의 로힝야 탄압사실만 계속 확인될 뿐이다. 백번 양보하여 현재의 사태에 대한 영국의 책임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 하여도 현재의 이 지옥과도 같은 사태를 만들고 있는 것은 명백히 미얀마 군부이고 군대이다.  로힝야 난민에 대한 증오와 혐오성 댓글들의 문제점을 지적한다고 하여 댓글러들이 사과를 하며 로힝야 난민의 존엄성에 대해 생각지는 않을 것이다. 어찌 보면 또 다른 자료를 찾아 로힝야 난민이 문제라는 사실을 입증하는데 더 집중할 수도 있다. 차라리 혐오의 댓글러들에게 직접 로힝야 난민들을 만나게 하여 인터넷과 댓글 너머 존재하는 인간의 존엄을 직접 체험하게 하는 것이 훨씬 더 필요할 지도 모른다.  다시 정우성 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자. 정우성 씨는 신문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로힝야 문제는 지금 미얀마 정부의 탄압 대상이 수백 년 전 선조들이 저지른 잘못을 떠안은 후세대들과 반군과 관련 없는 민간인들이라는 점”이라고 하며 1박 2일간 본인이 직접 체험한 난민촌의 실상에 대해 “난민여성 대부분이 강간당했고, 아이들 대부분이 눈앞에서 부모의 죽음, 부모의 대부분이 아이의 죽음을 봤다”고 했다. 아디의 활동가가 몇 시간을 떠들어도 표현 못하는 상황의 심각성을 단 몇 마디로 전달한 것이다. 배우와 스타, 난민친선대사라는 타이틀을 다 뛰어넘어 진심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그의 품격에 존경을 보내고, 댓글러에 분노 가득찬 욕설을 날리는 내 스스로의 품격도 반성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정우성 씨를 아디의 홍보대사로 모시고 싶은데 어떻게 팬클럽에 먼저 가입해야 하나? 허허허
2018-01-10 | hrights | 조회: 1065 | 추천: 8
이상재/ 대전충남인권연대 사무국장  연말에 동생네와 같이 부부동반으로 영화 <1987>을 봤습니다.  관람 후 식사를 같이하면서 박종철 고문치사와 이한열 사망 사건이란 역사적 사실에 영화적 픽션을 적당히 섞은 아주 잘 만든 영화라는데 의견이 일치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서울대생 박종철 군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받다 숨진 후의 일련의 과정에서 은폐, 조작하려는 국가권력과 이를 바로잡거나 폭로하려는 개인들 간의 관계는 흥미진진함을 넘어 영화를 보는 내내, 그리고 보고 난 후에도 저를 오랫동안 상념에 빠지게 했습니다.  영화 속에서 박종철 군의 시신에 대한 화장 동의를 거부하고 부검을 밀어붙였던 서울지검의 최 검사, 당시 전 언론사에 내려졌던 보도지침을 거부하고 고문을 받다 사망한 사실을 보도한 동아일보, 부검 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거짓 보고서에 서명을 거부한 황 박사, 경찰의 고문 경찰 은폐와 조작 사실을 바깥에 알린 교도관 등 영화 ‘1987’에는 실제 사건과 인물을 그대로 가져온 대목이 많습니다. 그래서인지 영화개봉과 함께 당시의 사건과 관계된 인물들이 새롭게 주목 받고 있는데 개인의 정의로운 판단과 행동이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바꿨다는 점에서 재조명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영화를 통해 비교해 본 검찰과 언론, 의사, 공무원들의 1987년과 현재 모습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사진 출처 - 구글  먼저 검찰은 1987년에도 최 검사의 실제 모델이었던 최환 서울지검 공안부장 외에는 고문치사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파헤치기 위한 노력은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87년 민주화 이후 조직의 힘을 키워가면서 결과적으로 국가 권력기관 중 가장 힘이 센 조직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 드문드문 검사 개인 몇몇의 올바른 외침은 있었지만, 조직 전체적으로 봤을 때 권력에 머리를 숙이고 시민의 자유권에 대해서는 억압하는 전형적인 패턴은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영화 <1987>에는 동아일보가 전두환 정권이 정권의 입맛에 맞게 기사를 쓰라는 보도지침을 거부하고 고문치사에 대한 진실을 기사로 게재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명박, 박근혜 정부 9년을 지나오면서 동아일보를 비롯한 보수언론들은 5공 때의 보도지침이 되살아난 것 같은 정권 옹호와 진보 비판 내지는 탄압 기사를 쏟아내 왔습니다. 세월호 사고 이후 우리 언론이 보여준 무분별한 유족 인권침해 기사와 박근혜 대통령을 둘러싼 신변잡기성 옹호 기사는 과연 87년 이후 언론이 얼마나 발전했는지에 대해 회의를 하게 하는 것들이었습니다.  시위 도중 경찰이 쏜 물대포에 맞아 사경을 헤매던 백남기 농민이 2016년 9월 결국 사망했습니다. 하지만 백남기 농민의 주치의였던 백선하 교수는 사망원인을 ‘병사’로 발표합니다. 많은 전문가들이 백남기 농민의 사망이 머리에 입은 손상이 주원인이었기 때문에 ‘외인사’가 옳다는 의견을 밝혔지만, 백선하 교수는 자신의 주장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경찰이 직사 발포한 물대포가 사인인 ‘외인사’와 심폐 정지를 이유로 한 ‘병사’는 당시 박근혜 정권이 받는 부담에서 크게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당시 백 교수의 발표는 전문가집단의 양심과 비윤리성에 대한 비난과 함께 커다란 사회적 반발을 불러 왔습니다.  30년 전 같은 의사였던 황적준 박사가 쇼크사로 하라는 공안정권의 엄청난 압력에도 불구하고 부검 후 박종철의 사인을 사실대로 고문에 의한 사망으로 고집한 것과 비교하면 백 교수의 ‘병사’ 발표는 절로 부끄러워지는 이 시대의 한 장면이었습니다.  공무원이라는 안정된 신분, 어쩌면 출근과 퇴근을 반복하는 느긋한 일상을 보낼 수도 있었던 평범한 교도관들은 한 젊은이가 고문으로 사망한 사건에 대한 진실을 세상으로 내보내는 위험한 역사적 사명을 기꺼이 맡아냈습니다. 이 장면을 영화로 보면서는 이명박 정부 시절 정보기관의 댓글 사건과 박근혜 정부 아래에서 저질러진 공무원들의 국정농단이 떠올랐습니다.  거창한 사명감과 남다른 정의감까지는 바라지 않아도 상식적인 판단과 공무원으로서의 평범한 직업적 윤리만 생각했더라도 저지르지 않을 수 있었던 범죄행위였지만 30여 년이 지난 후의 일부 공무원들은 너무나 쉽게 국민을 배신하는 조직적 범죄행위를 저지르고 만 것입니다.  30년 전에는 위에서 언급한 직업군들이 모두 정의로웠고 현재는 그렇지 못하다는 식의 이분법으로 얘기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때나 지금이나 어느 조직에서든 정의로운 개인도 있고 부패하거나 기회주의적인 개인도 존재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역사의 발전이란 것은 어쩌면 과거의 잘못이 현재와 미래에 재발하지 않거나, 과거의 훌륭한 점은 현재에 더 발전된 모습으로 계승되는 것일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2016년 연말과 2017년 초반을 뜨겁게 달구었던 촛불 혁명은 1987년 민주 대항쟁의 훌륭한 계승이자 역사적 발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전문가와 공무원조직의 30년 전과 현재를 비교할 때 여러 가지 면에서 후퇴했거나 혹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씁쓸하기만 합니다.  1987년 이후 30년간 세상은 참 많이 변했습니다. 하지만 영화 <1987>을 보면서 우리 사회의 어떤 분야는 참 변하지 않고 오히려 후퇴한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그것이 지난 보수 정권 9년간의 전횡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시스템 자체가 가진 한계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정치와 경제, 교육, 인권 등 정말 매듭을 풀기 어려운 사회문제를 두고 2018년은 1987년 이후 30년 체제가 가진 모순과 한계를 극복하는 시작의 한 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영화 <1987>에는 여주인공이 가수 故 유재하의 노래 <지난날>을 듣는 장면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그 노랫말처럼 지난날의 추억 속에 우리들의 미래를 비춰보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루하루 더욱 새롭게 말입니다. ........... 그리움을 가득 안은 채 가버린 지난날 잊지 못할 그 추억 속에 난 우리들의 미래를 비춰보리 하루하루 더욱 새로웁게 그대와 나의 지난날 <유재하 ‘지난날’ 가사 중에서>
2018-01-03 | hrights | 조회: 1791 | 추천: 16
김형수/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사무국장 ※ 이 원고는 월간 서울교육 11월에 기고한 원고를 대폭 수정 보완한 원고입니다. 「'진실은 발을 차갑게 하는 이불 같은 것입니다. 잡아당겨도 늘어트려도 이불은 부족합니다. 무슨 수를 써 봐도 이불을 우릴 전부 덮어주지 못합니다. 울면서 태어난 날부터 죽음으로 떠나는 날까지 울고 절규하고 신음하는 우리의 얼굴만을 덮을 겁니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중에서  올해 들어, 1977년 12월16일 특수교육진흥법이 국회를 통과한 이후 40년 동안 누구도 하지 못한 특수학교의 사회적 인식이, 국회 위원이 무릎을 꿇은 장애인 학부모를 외면한 사건으로 변화되었다. 이 사건은 국무총리까지 나서서 ‘특수학교’를 짓게 하라는 담화문까지 발표케 했다. 집 근처 좋은 시설의 특수학교를 열망하는 일부 학부모들은 환영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장애인 학생의 통합 교육의 정책 방향이 후퇴하지 않을까 심각하게 우려하기도 한다. 그러나 특수학교냐 특수학급이냐 라는 논란은 현재의 돌발적인 여론과 정책 흐름의 본질이 아니다. 통합 교육이라는 가치가 사회 통합과 차별 금지에 있다면 그 가치는 공간의 특성이나 학교의 종류로 정해지는 것이 아닐진대, 유독 장애인 학생에게만 그것이 ‘정답’이라고 강요하는 과도한 일반화에 문제의 본질이 있다. 모든 학생들이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교육을 선택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왜 이런 현상과 결과가 나왔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학교는 학생을 가리지 않습니다.” 학교가 문제일까요? 사람이 문제일까요?  글쓴이는 뇌병변 장애가 있다. 부산에서 12년 동안 특수학급은커녕 장애인 화장실, 경사로도 없는 일반학교를 다녔다. (입학하고 나서 좌변기를 화장실을 설치해 주었다.) 당시에는 교육청에서 취학 통지서도 제대로 보내지 않았고 당시 두 곳 밖에 없던 특수학교는 대기자만 수십 명이었으며 열 곳 넘는 일반 공립학교는 ‘위험하기에 나를 위해서’ 입학을 거부했다. 5살 때부터 입학가능한 학교를 찾아 전국을 헤메였으나 입학을 허락하는(?) 학교들은 부모와 떨어져 시설 입소를 해야 하는 곳들뿐이었다.(장애인학생이 법적으로 완전히 의무교육대상자가 된 것은 1995년이다.)  결국 이미 지적 장애인을 포함한 장애인 학생을 두 명이나 받았던 부산의 사립학교에 혹시나하는 마음에 전화를 걸어서 입학 허가를 문의했다. 수화기 너머 얼굴도 모르는 입학 담당 교사는 딱 한마디만 했다. “학교는 학생을 가리지 않습니다.” 추첨으로만 학생을 뽑던 명문 초등학교였던 그 학교 교장은 필자를 위해 비장애인 학생 6명에게 일부러 불합격 제비를 뽑도록 제비뽑기를 조작하기까지 하셨다. 1981년의 일이다.  결국 취학통지서는 부모님께서 장학사에게 헌법 제31조 1항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받을 권리를 가진다)를 들고 가서 직접 받아왔다. 개인적으로는 단 며칠 만에 취학통지서를 준 그 장학사가 내 인생의 방향을 정하는데 크게 기여 했다고 생각한다. 초등학교 때, 그 어떤 특수교사도 만날 수 없었고 지원인력도 없었지만 하교길에 데리러 올 부모를 기다리던 나에게 라면을 끓여 주시고 가끔 바지에 실수라도 할 때면 손수 씻겨 주시던 학교 수위 ‘이또범’ 선생님이 계셨다.  사춘기가 불타는 중학교 때 자잘한 학교 폭력과 놀림에서 벗어나고 싶어 청산가리를 가지고 다니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를 붙잡아 준 것은 학교 현장에서 만나기 힘든 중한 장애를 가진 학생을 만나서 너무 좋다면서 두 번이나 담임을 맡았던 초등 때 스승님이었다. 고등학교 때는 손이 불편해도 컴퓨터로 얼마든지 글 쓰는 작가가 될 수 있다고 격려해주는 국어 선생님도 계셨다. 드물지만 가끔 나의 장애를 매력있다고, 목발이 섹시하다고 격려해주는 비장애 친구들도 있었다. 그리고 놀리는 학생들을 피할 수 있도록 해주는 도서관도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 있어야 비로소 사람이다”  특수학교를 늘리지 않았던 그 시간 동안 우리는 무엇을 했는가? 정규 특수교사를 늘려야 할 자리에, 1년이면 떠나야 하는 비정규직 자리와 특수교육 지원인력만 늘렸다 학부모에게 특수교육대상자로 선정되는 것이 당연하고 필요한 권리라는 것을 알려주기보다 낙인과 혐오, 그리고 차별로 스며드는 것을 막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특수학급 신설이나 장애인 학생 입학을 거부하는 교장이 없었다면, 동네 학교의 특수학급이 중증 장애인 학생의 통합 교육에 기여했다면, 교육청을 포함한 지역 사회가 수화 통역사와 점역 지원을 제공하고 편의시설 전문가를 각 학교에 지원 해주었다면 부모가 다시 특수학교를 요구하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지역 주민이 특수학교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동네 학교에 시설 좋은 특수학급을 요구하고 특수교사의 전문성과 안정성을 확보하라고 요구했다면,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이 장애인학생 옆에 앉겠다고 자처했더라면, 졸업 이후에 지역사회에서 그들을 적극 고용하고 이웃 주민으로 초청했더라면, 그들이 원하는 한방병원을 얻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사진 출처 - 필자  반대로 교장이 편의시설이나 특수학급을 만들 수 없으니 특수학교로 가시라는, 선의로 은폐한 차별과 모욕을 하지 않도록 각 교육청의 교육감과 특수교육지원센터가 교육과 징계를 강화했다면, 특수교육계가 학벌과 파벌로 얽혀서 특수학교 자리를 나눠먹기를 하지 않았다면, 특수학교가 지역에 완전 개방되고 민주적이어서 장애유형이나 정도를 가려서 선발하지 않고, 특수학교를 다녀도 장애인 학생들이 자기 동네에서 원하는 만큼 비장애인 친구를 사귀고 함께 활동할 수 있다면, 특수교사를 보면서 장애인 학생 스스로 장애인임을 자부할 수 있다면, 비장애인 학생과 부모가 당신들을 보면서 장애인을 낳아도, 장애인 등록을 해도, 특수교육대상자가 되어도 괜찮구나 하는 믿음을 얻는다면, 부모들이 명절 때마다 친인척들에게 특수학교 학생증을 당당히 내보이고 특수학교 졸업식에 초대할 수 있다면, 많은 장애인 당사자와 인권 활동가들이 작금의 현상을 걱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 교육과 교육 환경이 사회 통합과 교류와 존중을 향하고 있고 그것을 추구하기 위해 각자의 한계와 모순을 성찰하고 개선하고자 한다면 그것이 특수학급이든, 특수학교이든, 대안학교이든, 홈스쿨이든 상관이 없다. 장애인 학생이 장애에 대해 죄책감이나 수치심을 가지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교육 환경을 선택할 수 있는 것. 그것이 핵심이다. 어떤 교육 기관이든 교육 환경이든 장애인 학생들이 자신에게 적합한 개별 서비스와 교육, 통합을 위한 서비스를 제공받는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 어떤 교육이든 어떤 기관이든 그것이 ‘통합’에 기여하고 ‘사회화’와 ‘다양성’에 충실하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국가와 학교는 장애인 학생에게 최선의 교육 환경을 제공하려고 최선을 다했는가?    장애인 부모 당신들이 시선이 싫어서 놀림이 싫어서 특수학교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 학생 당사자들에게 충분히 기회를 주고 선택할 수 있는 자기 결정권을 주고 있는가? 적어도 비장애인 학생들은 학교가 맘에 안 들면 전학을 가거나 유학을 가거나 자퇴라도 할 수 있다. 국가가 장애인 학생의 교육권을 위해 고등학교까지 마음대로 자퇴조차 할 수 없도록 했다면 적어도 특수학급이 특수학교 만큼의 서비스를 받고 권력을 가질 수 있도록 정책 투자를 해야 한다. 특수학급에서 특수학교로 전학이 자유로운 만큼 그 반대도 그 만큼 자유로워야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특수학급의 교사가 장애인 학생을 특수학교로 배제하는 일, 너무 자주 일어나지 않는가? 사진 출처 - 필자 “헌법을 던져라”  눈물을 흘리고 무릎을 꿇는 부모의 마음은 이해 하지만 그 모습을 보면서 차별과 상처를 내면화하고 죄책감을 느끼면서 자존감이 무너져 가는 장애인 당사자들도 여기에 있다. 시선이 박히고 놀림을 받더라도 그냥 동네 비장애인 친구들과 학교를 다니고 싶은 장애인 학생들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특수학교가 있는데 왜 우리학교 오냐’라는 말을 ‘교사’로부터 들어야 할지도 모른다. 중도에 어떤 이유로 장애가 생긴 학생은 적응할 시간도 없이 특수학교로 가야 할지도 모른다. 부모들은 무릎을 꿇기보다는 웃으면서 헌법을 그 토론회 자리에서 당당하게 던져야 했다. 특수학교든 특수학급이든 뭐든 그것은 배려가 아니라 국가의 의무이자 우리들의 당연한 권리이다. 전문가들과 특수교사들은 그들의 전문성이나 실력이 사회 변화나 인구 변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음을 성찰해야 한다. 장애인 당사자들은 그들의 당사자 주의, 자기의사 결정권, 정체성을 위해 교육계와 투쟁하지 못했다.     특수학교냐 특수학급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모든 학교와 교육이 진행되는 곳은 사람들이 모여서 공동체를 습득하고 사회화 하는 곳이 되고 있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차별과 배제가 일어나지 않으려면 얼마나 다양한 사람이 얼마나 서로 존중하고 공존하는가 불편함을 익숙하게 견디는가가 관건이다.  문제는 그 학급이 어떤 학급인가, 그 학교가 어떤 학교인가일 것이며, 우리가 장애에 대하여 자긍심을 주며 선택권을 보장하는 학부모가 될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며, 특수교사가 진정으로 통합교육의 가치와 의미를 실현할 수 있는 실력 있는 전문가인가 아닌가 그것이 중요할 것이다. 국어 사전은 통합을, 1. 여러 요소들이 조직되어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일. 2.인격의 구성 요소가 조화로운 구조를 이루는 일. 이라 정의 내리고 있다. 그 동안 우리는 장애인과 함께 특수학교에서 특수학급에서 이 정의를 어느만큼 실현했는가? 그리고 학교를 정할 때 부모들은 전문가들은 장애인 학생에게 의견을 묻고 설명을 하고 양해를 구하고 있는가?    「교육의 목적은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에 있지 않다. 어떻게 생각하여야 하는 것인가를 가르치는 데 있다.」  (삐디이)
2017-12-13 | hrights | 조회: 1367 | 추천: 2
김아현/ 인권연대 연구원 “그 피자, 범죄자들 주는 거에요?”  대놓고 불쾌한 표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기사님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놀람과 비아냥이 분명 섞여 있었다. 열 판의 피자를 들고 30여분을 걸어갈 자신이 없어 잡아탄 택시였다. 초겨울 쌀쌀한 공기에, 들고 가는 동안 방금 만든 피자의 김이 식을까봐 걱정이 되기도 했다. 뒷좌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구치소로 가자고 했을 때 기사님은, 젊은 아가씨가 들고 가기 벅차했던 상당한 양의 피자가 구치소 재소자들에게 주려는 것임을 알고는 저렇게 물었다.  한 달에 삼일 일정으로 인권연대가 진행하는 평화인문학 마지막 날엔 그동안 강의를 듣느라 수고한 수강생, 그러니까 구치소 재소자들에게 피자를 드리곤 한다. 토핑이 화려하고 값이 많이 나가는 피자를 드리지는 못하지만, 구치소 가까운 곳에 있고 가성비가 꽤 좋기로 알려진 곳에 신경 써서 미리 주문을 하고 시간에 맞춰 픽업하러 간다. 밖에서는 흔하고 쉬운 음식이지만 안에서는 귀한 음식이라고 생각하면 그 피자배달, 보람도 있다.  택시기사님과 의견이 다를 때는 을이 되어야 잠깐의 안전과 평화를 확신할 수 있다는 경험치를 쌓아왔기 때문에, 그분과 언성을 높이거나 각을 세울 수는 없었다. 그리고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다. 조근조근, 그러나 빠르게 내 할 말을 해야 했다. 돈을 빌리고 갚지 못해도 사기와 횡령이 되어 경제범으로 저 안에 갇힐 수 있다고, 지금 서울구치소 독방에 계시는 분이 집권하는 동안 그런 경제범들이 아주 많이 늘었다고, 기사님이 생각하시는 것만큼 구치소 재소자들이 그렇게 악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이 아닐 수 있다고, 실정법을 위반한 게 그가 나쁜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라고.  기사님은 ‘좋은 일 하신다’면서도 위의 말에 반응하기보다는 피자를 구입한 돈의 출처를 더욱 궁금해했다. 세금으로 범죄자들에게 피자 사 주는 것 아니냐는 거였다. 그 분이 걱정하는 것처럼 ‘혈세’로 나가는 돈이 아니라는 것을 재차 확인하고 나서야, 구치소 앞에 차를 세워주는 기사님 목소리에서 불만이 조금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차로는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 거리를 달리는 동안 주고받은 대화는 짧았지만 택시에서 내려 구치소로 들어가는 동안 명치에 쌓인 답답한 기분은 열 판의 피자보다 무거웠다. “죄 지은 사람은 피자 먹으면 안 되나요?” 라는 한 마디를 했어야 했다는 후회가 아직까지 남았다. 사진 출처 - 구글 “아우, 걔네들한테 무슨 피자를 먹여. 밥이랑 반찬이면 되지.”  그녀는 이른바 사모님이다. 넉넉한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란 덕에 비슷한 연배에 비해 공부를 많이 했고, 남편도 꽤 잘 나가는 지위에 있었다. 일을 하지 않아도 경제적으로 부족하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를 할 시간도 주어졌다. 그녀가 하는 봉사라는 것은 이를테면 보육원이나 조손가정의 아이들에게 주기적으로 쌀과 반찬, 학용품들을 가져다주는 일이었다. 몸 위에 두른 것으로 자신의 부를 과시하지 않으면서도 기품은 놓지 않는 미적 감각도 지녔다. 그녀의 활동이 알려지자 지역사회에서 존경도 받게 되었고 누군가의 롤모델이 되기도 했다. 그녀가 하는 좋은 일을 함께 하려는 사람들도 제법 생겨났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아이들에게 줄 특별한 선물을 논의하던 어느 자리에서 그녀는 위와 같이 말했다. 누군가 ‘만날 주던 쌀과 부식 말고, 피자나 브랜드 운동화 같은 것을 선물하는 것은 어떤가’ 하며 낸 의견에 대한 답이었다. 그녀보다 오래 봉사하지도, 많은 돈을 부담해오지도 못했기 때문인지 그 자리에서 대번에 그녀의 말에 토를 단 사람들은 없었다. 하지만 그 한 마디는 그걸 들은 사람들의 마음에 남았고,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그 일로 그녀는 아마 조금 외로워졌을지도 모른다.  그간 그녀가 해 온 좋은 일의 무게를 굳이 깎아내릴 일은 아닐 것이다. 두루 동의할 만한 철학으로 해 온 일이건 아니건, 그녀는 분명 좋은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설령 그녀의 활동이 위선이라 해도 위악보다 위선이 백 배 낫다. 누군가의 위선 덕에 하루의 근심을 덜고 이웃의 존재를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도 가치 있다.  하지만 그 한 마디에는 ‘하루하루 먹고 자고 싸는 일만 해결하면 다행인 존재, 의식주를 벗어난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욕망을 드러내면 안 되는 존재, 결국 인격과 개성을 지닌 인간이기 보다는 동물에 가까운 존재’로 자신이 돕는 아이들을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갸웃거리게 하는 위력이 있었다. 가난이, 그것을 짊어지고 사는 사람의 인격을 모르고 지나쳐도 된다는 말과 같지는 않을텐데.  욕을 하고, 대놓고 손가락질을 하는 것만이 혐오는 아니다. 그리고 모든 혐오가 나쁜 것은 아니다. 욕하고 싫어해도 좋은 나쁜 짓은 꽤 많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 누군가를 차별하고, 무시하고, 상대가 어떤 지점에서 상처를 받는지 알려고 하지 않는 행위도 넓은 의미에서 혐오다. 그래서 혐오는 가장 낮은 곳, 가장 약한 고리를 향해 흐르고 자주 정당화되곤 한다. 관습과 논리와 도덕의 탈을 쓴 채로 유통되고 굳어진다. 농담인데 뭐 어때, 네가 예뻐서 그 남자가 그랬나보지, 걔네들에게 피자라니 과분하지, 범죄자는 피자 먹으면 안 돼. 성희롱에 가까운 말에 정색하는 동료직원에게, 용기 내어 성폭력을 신고한 피해자에게, 가난하고 부모 없는 아이들에게, 실정법을 위반한 사실이 발각되어 갇혀있는 사람들에게 사람들이 무심결에 내뱉는 말들에 혐오가 있다. 그리고 그런 말을 쉽게 하는 사람들은 대개의 경우, 그게 혐오라는 걸 인정하지 않는다.  피자를 먹으려면 값을 치러야 한다. 나쁜 짓을 저지른 사람이나 가난한 아이들이 사 먹을 수 있는 피자와, 연봉이 어마어마한 사람이 먹는 피자의 값이 같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피자를 먹는 입에는 귀천이 없다는 것은 기억해도 좋지 않을까. 삶을 욕망할 권리에는 차이가 없다는 것도.
2017-12-06 | hrights | 조회: 1329 | 추천: 34
이회림/ ○○경찰서 골목길, 공연음란죄, 그리고 용기 골목골목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을 이웃사촌이라고 부르면서 가족처럼 친하게 여기던 때가 있었습니다. 옆집 동갑내기 남자아이와 딱지치기를 하거나 동네 언니들과 고무줄놀이를 하며 정신없이 놀던 장소는 주로 ‘골목길’ 이었습니다. ‘골목길’에는 유년시절의 따뜻함, 아련함, 그리움과 포근함이 오롯하게 담겨있습니다. 그런데 추억의 ‘골목길’에 다소 어두운 이면이 있습니다. ‘범죄 불안장소 1위’가 바로 ‘어두운 골목길’이라는 것입니다.  법무부가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범죄 불안감을 많이 느끼는 장소를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55.2%가 ‘어둡고 후미진 골목’을 꼽았습니다. ‘유흥업소 밀집지역’이 35.6%로 뒤를 이었고, ‘놀이터나 공원’(29.5%), ‘지저분한 거리’(25.8%) 순으로 나타났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였습니다. 집에서 학교까지 걸어서 15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고 저는 주로 혼자 걸어서 통학을 했습니다. 학교 가는 길에는 골목길이 하나 있었는데 반드시 그 길을 통과해야만 제 시간에 도착했습니다. 아침 8시30분정도 되었을까요? 골목길을 중간 정도 걸어가고 있는데, 후미진 모퉁이에서 어떤 아저씨가 갑자기 툭 튀어나왔습니다. 그 당시 40대이던 저희 아버지보다는 훨씬 나이가 많아 보였고 외할아버지보다는 적어 보였으니 아마 50~60대 정도로 되는 아저씨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세상에나,,, ’ 성기를 속옷 밖으로 꺼내서는 흔들흔들 대면서 저를 향해 느끼하게 웃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우뚝 서서, 본의 아니게 아저씨의 흔들거리는 ‘그것’을 한참동안 쳐다보게 되었습니다. 생전 처음으로 갑작스럽게 성인 남성의 성기를 그것도 환한 대낮에 정면으로 보게 된 터라 낯설음과 불쾌함 속에서 어떤 말을,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 당시 한 살 먹은 아기였던 막내 남동생의 ‘그것’과는 다르게 귀엽지도 연약해보이지도 않았습니다. 마치 생김새가 연못가에 자라는 ‘부들’같다고도 생각하다가 계속 보고 있기는 참으로 불편하고 싫다는 마음이 확 밀려왔습니다. 다행히 그 아저씨는 본인이 정한 그 자리에서만 그 ‘부들’ 같은 것을 계속해서 열심히 흔들대고 계셨고 저에게 가까이 다가오지는 않았습니다. 학교를 가기 위해선 그 아저씨 앞을 지나쳐 가야만 하는데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불쾌한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고, 발은 안 떨어지고 이래저래 가슴속이 답답해 왔습니다. “엄마야!! 이 양반이 미쳤나!!” 매우 높고 새된 목소리가 허공을 가르며 들려왔습니다. 뽀글뽀글 파마머리의 어떤 아주머니께서 대문을 열고 나오시다가 아저씨를 보자마자 소리를 꽥~지르셨습니다. 이내 저를 발견한 아주머니는 ‘너는 얼른 학교나 가라’며 저를 향해서도 소리를 빽~ 내시더니 다시 아저씨를 향해 격렬히 욕설을 퍼부으셨습니다. “이 미친 @#$%&*가~ 어디서 &*()^%$~!!” 뭐랄까요.. 그 생명력 넘치시던 아주머니의 목소리 덕분에 정신이 확 들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아주머니의 카랑카랑한 사자후를 뒤로 하고 마구 마구 뛰어서 학교 정문까지 내달렸습니다. 그 날 이후, 그 골목길에 차마 혼자 걸어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골목길을 통과하지 않으면 길을 멀리 돌아서 가야했지만 다시 그 길로 갔다가 또 징그러운 아저씨와 마주칠 것 만 같았습니다. 3년이 지나 초등학교 4학년이 되었습니다. 하루는 다른 동네에 사는 친구네 집에 놀러갔다가 그 근처 골목길에서 또 다른 이상한 아저씨와 마주쳤습니다. 이 아저씨도 자기만의 소중한 ‘그것’을 꺼내서 미소 띤 얼굴로 저를 쳐다보며 흔들대고 있었습니다. 보자마자 불쾌감이 엄습했고 살짝 몸이 굳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3년 전인, 1학년 때와는 달리 저는 가던 길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뒤통수가 화끈거리고 간지러웠지만 나름 용기를 쥐어 짜 내서 그 아저씨 앞을 지나쳐 왔습니다. 겨우 초등학교 4학년 이었지만, 그런 아저씨들을 두어 번 보게 되자 더 이상 무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그런 분들은 3년 전 뽀글 머리 아줌마처럼 대차게 빽~소리 한 번 질러주거나 아예 아무런 반응을 하지 말고 그 자리를 피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마주친 아저씨들의 행위는, 공연(公然)히 음란한 행위를 하는 죄, 즉 형법상 ‘공연음란죄’에 해당하고 당장 현행범인으로 체포를 해야 하는 범죄행위입니다. (“공연음란죄” : 형법 제 245조  1년 이하의 징역, 500만 원 이하의 벌금, 구류 또는 과료) ‘공연음란죄’는 건전한 성도덕 내지 성풍속을 보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공연히’란 불특정 다수인이 인식할 수 있는 상태를 일컫고 ‘음란한 행위’는 성욕의 흥분 또는 만족을 목적하는 행위로서 사람에게 수치감·혐오감을 주는 것을 말합니다. 음란성의 판단에는 행위가 행하여지는 주위환경이나 사건이 일어나는 생활권의 풍속·습관 등 모든 사정을 고려합니다. 초등학생때 두 번이나 ‘공연음란죄’의 피해자 경험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그런 행위 자체가 ‘범죄’라는 인식조차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냥 머리가 이상한 아저씨들이라 병원에 가야된다고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사진 출처- 구글 흔한 피해자 중의 하나였던 제가 경찰이 되고나서는 가해자를 체포하는 입장으로 상황이 역전되는 경험을 하게 되니 범인들을 체포할 때마다 통쾌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혼자 체포한 것은 아니고 항상 남자 경찰들과 함께 인데다 보조적인 역할에 그쳤지만, 아무리 작은 역할이라도 최선을 다했고 보람을 느꼈습니다. 지구대나 파출소에서 순찰요원으로 112신고 사건을 담당할 때는 동료들과 함께 직접 체포에 나서는 상황이 많았지만, 형사일을 시작하고 나서는 현행범인으로 체포되어 온 가해자와 마주 앉아 ‘피의자 신문조서’를 작성하는 일을 주로 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봄 밤, 순찰요원들께서 한 30대 남성을 ‘공연음란죄’로 체포해 왔습니다. 광화문 사거리의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던 여고생들 앞에 ‘짠~’ 하고 나타나 옷을 하나씩 벗으며 아무도 원하지 않은 스트립쇼를 벌인 남자였습니다. 지나가던 행인들이 112에 신고를 했고, 피해 여고생들은 ‘아저씨한테 가라고 말했는데도 안 가고 계속 옷을 벗고 성기를 꺼내서 자위를 했다, 너무 놀라고 무서워서 눈물이 났다’ 는 내용을 진술서에 꼼꼼히 적어 왔습니다. 가해자와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나름 심도 깊은 대화를 시도하여 보았으나 그 남자는 저를 쳐다보며 방긋 방긋 웃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역시나 여느 공연음란죄 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조용하고 말 수가 적었습니다. ‘진술거부권’을 행사함에 있어서는 적극적이었지만 말입니다. 시종일관 묵묵부답이라 범죄 사실에 대한 ‘자백 진술’을 이끌어낼 수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자들의 진술, 목격자들의 진술 그리고 촬영된 영상이 있었기 때문에 ‘기소’ 의견으로 보고서를 작성하기에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여성을 놀래키는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남성다움’을 인정받고자 하거나 자신의 소중한 ‘그것’을 보고 놀라는 여성을 보면서 ‘성적 쾌감’을 느끼는 행위는 정신질환의 일종입니다. 실제로 극심한 우울증이나 여성으로부터 큰 열등감을 가진 사람들에게 자주 발견되기도 합니다. 흔히 ‘바바리맨’으로 대표되는 노출증은 자신의 성기가 잘릴지도 모른다는 ‘거세공포증’에 그 원인이 있다고 합니다. 즉, 자신의 성기를 사람들에게 과시하려는 욕구, 성기를 드러냈을 때 당황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보고 쾌감을 느끼려는 행위는 ‘거세공포증’을 해소하고자 하는 욕구의 발현이라는 것입니다. 가해자가 피해자를 직접 만지거나 물리력을 행사하지는 않기 때문에 그다지 중한 범죄로 여겨지지 않는 경향이 있고 개그 프로에서 가볍게 희화화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피해자들에게는 오랫동안 뚜렷한 기억으로 남아 트라우마를 일으키기도 하는 엄연한 ‘범죄 행위’ 입니다. 범죄의 피해자가 되는 상황은 우리 삶에 갑작스럽게 끼어든 우연입니다. 지금까지 유지해온 삶의 모양과 다르게 놓여진 생소한 사건들 앞에서 자기 자신을 지키는 일은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마주하게 되는 크고 작은 다양한 삶의 위기에 잘 대처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용기’ 입니다. 우리 안에 ‘용기’가 살아 있으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위험을 무릅쓰고 나아가게 하고, 견디게 하고, 또 자신을 지키게 하는 정신력으로 나타납니다. 처음 가해자와 골목길에서 1대1로 마주 섰을때 아무 소리도 못 내고 가만히 있기만 했던 제가 3년 후에는 달라졌습니다. 긴장하고 있던 두 다리를 움직여서 자리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은 마음 속에서 ‘용기’라는 감정이 튀어나왔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용기’라는 단어는 왠지 남성스러운 단어로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단어 그 자체에는 성별이 따로 없습니다. 국어사전에는 ‘씩씩하고 굳센 기운, 또는 사물을 겁내지 아니하는 기개’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어려움이 있는 상황에서 위험을 감수하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마음 그 자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용기’가 없으면 아무리 육체적인 능력이 뛰어나도 소용이 없습니다. 악당들 앞에서 눈도 똑 바로 못 마주치고 머리 싸매고 웅크리고 앉은 연약한 슈퍼히어로에 지나지 않습니다. 슈퍼히어로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그러한 능력을 끄집어 낼 마음가짐, ‘용기’가 없으면 다 무용지물입니다. 오즈의 마법사에서 겁쟁이 사자가 도로시, 허수아비, 양철 나무꾼과 함께 여행길에 오른 것도 ‘담대한 용기’를 찾기 위함이었습니다. 살아가다보면 위험이 없을 수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 위험이 닥쳐올지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위험에 직면했을 때 그것을 올바르게 인식하는 것입니다. 위험을 올바르게 인식하는 능력, 그 위험에 지혜롭게 대처하는 능력, 이것이 진정한 용기입니다. 자~ 여러분은 ‘용기’ 있는 사람인가요?
2017-11-29 | hrights | 조회: 1268 | 추천: 5
이동화/ 아디(아시아인권평화디딤돌) 활동가 지난 8월 25일 미얀마군의 대대적인 로힝야 무장세력 색출 작전과 함께 시작된 로힝야 인종청소사태, 현지에서 전해오는 참혹한 소식에 아디를 비롯한 국내 시민단체들은 긴급기자회견을 준비했다. 기자회견 당일 날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국내 거주 로힝야 난민 모하메드 이삭 씨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1988년 미얀마 반군부 민주주의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군부의 표적이 되어 주변국에 피난하였다가 2000년대 초반 한국으로 밀항했고 국내 종교인의 도움으로 난민지위를 획득하여 지금까지 서울에서 거주하고 있다. 미얀마에 있는 가족친지를 통해 참상을 접하고 있던 그는 우연찮게 국내 기자회견 소식을 듣고 생업중임에도 기자회견에 나와서 로힝야의 참혹한 실상을 전해주었다. 아디는 올해 현지 인권실태 조사를 위해 두 차례 방글라데시 난민촌에서 로힝야 난민들을 만났다. 그리고 피해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이 전해준 이야기들은 너무도 충격적이어서 현실감마저 들지 않을 정도였다. 마을에 들이닥친 군인들은 사람들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했고 사람들을 집안에 몰아넣고 불을 질렀다. 여성들을 강간하고 아이들도 무자비하게 살해했다. 죽음과 극한의 공포가 번져나가면서 로힝야 여성과 아동, 그리고 늙고 병든 사람들은 무엇 하나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무작정 이웃나라로 피신했다. 피난하는 그들의 뒷모습에 사격을 하며 행여나 돌아올까 봐 길에 지뢰를 매설했다. 이것이 그들의 이야기였다. 광기가 몰아쳤고 인간의 존엄은 상실됐다. 유엔에서는 피난민의 숫자가 60만 명이 넘는다 했고 이는 미얀마 로힝야 전체인구의 절반이 넘는 숫자이다. 국내에서 외국의 인권이슈는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한다. 대부분이 관심이 없거나 관심을 낼 여력이 없다. 그래서 로힝야 사태가 많은 언론을 통해 알려지는 걸 아디는 환영했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국제적 압박여론이 국내에서 형성되길 바랐다. 그리고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미얀마군대의 반인권적 전쟁범죄를 성토했다. 하지만 국내 인터넷 댓글들은 뭔가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갔다. 로힝야 관련 기사의 댓글들 중 상당수는 “로힝야 족은 친일파이며 과거 미얀마 사람들을 학살했다” “무슬림 불법이민자가 갑자기 분리 독립을 요구해서 발생한 사태이다” 등으로 로힝야 역사관련 여러 논쟁들을 역사적 진실로 간주하며 이슬람 혐오에 가득차 ‘로힝야 사람은 당해도 싸다’식의 내용이다. 그리고 이러한 댓글은 아주 높은 추천을 받았다. 이 주장들은 섬뜩하면서도 위험한 논리를 기반으로 한다. 20세기의 대표적인 인종청소 사례였던 유대인 학살, 르완다 학살, 코소보와 보스니아 인종청소 사태들을 살펴보면 특정 종교와 민족에 대한 혐오와 차별, 정치집단의 적극적 선동, 내부집단의 적극적, 암묵적 용인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고 현재의 로힝야 사태와 상당히 유사하다. 소위 가해자의 전형적인 논리인 것이다. 사진 출처 - 필자 하지만 만약 한국의 댓글러와 혐오 댓글을 추천한 사람들이 실제 로힝야 사람을 만나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전해 들으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여전히 로힝야 사람들을 폄훼하고 혐오하는 댓글을 남길까? 장담할 순 없지만 로힝야 인권사태에 대해 꾸준히 입장을 밝혀온 국내 시민단체들은 이러한 가정을 했을 것이다. ‘한국의 시민사회가 로힝야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의 현재 모습을 바라본다면 분명히 변화가 있을 것이다. 혐오는 줄어들고 이해는 높아질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상황논리로 자신들의 눈과 귀를 멀게 했던 혐오와 편견을 걷어내고 사태를 객관적이고 인간적으로 바라볼 것이다’ 그래서 아디를 포함한 국내 시민단체는 국내에 거주하는 로힝야 난민과 로힝야 난민촌을 방문한 두 명의 활동가를 모시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을 마련하였다. 이런 식으로 행사를 소개하는 것은 처음이다. 하지만 로힝야 관련하여 한국 인터넷 상 댓글은 최악의 인권사태를 겪고 있는 로힝야 난민들에게 큰 상처를 내고 있다. 한국전쟁을 통해 민족간 폭력의 결과와 피난의 고통을 DNA속에 인식하고 있는 한국의 시민사회가 난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무엇인지 함께 이야기하고 혐오와 증오가 아닌 평화와 공감의 분위기를 만들어 가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로힝야 난민들에게 전해야 할 첫 번째 댓글이다.
2017-11-17 | hrights | 조회: 986 | 추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