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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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김성은(서울신문 기자), 김태형(프리랜서 방송작가),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박용석(출판업),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춘천별빛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이동화(아디 사무국장),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이회림/ 00경찰서  사하라에서의 사막 투어는 현지의 투어 회사를 통해 신청하여야 합니다.  사하라는 모로코 마라케시 시내에서 8시간 정도 차로 이동을 하여야 갈 수 있기 때문에 차 안에서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냅니다. 저는 독일인 대학생 커플, 미국인 커플, 이탈리아인 커플 이렇게 세 커플과 함께 차에 올랐습니다. 우리 팀 커플들은 모두 성격들이 차분하고 조용한 편이라 차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베르베르인 투어 가이드 아저씨의 새된 목소리뿐이었습니다. 북아프리카의 척추라고 불리는 광활한 아틀라스 산맥을 넘어 한 5시간 정도 지났을 때, 11세기에 건설된 베르베르인의 거주지 ‘아인트 밴 하두 성채’에 도착했습니다. 붉은 진흙으로 만들어진 도시인데 그곳을 걷고 있노라니 제가 마치 미드 ‘왕좌의 게임’의 칼리시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서 ‘왕좌의 게임’을 촬영하기도 하였답니다. 이외에도 영화 ‘글래디에이터’, ‘아라비아의 로렌스’, ‘인디아나 존스’ 등의 촬영지이기도 했습니다.  성채 꼭대기로 올라가는 동안 베르베르인 노부부가 당나귀를 가운데 두고 서서 부부싸움을 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할머니가 당나귀를 가리키며 일방적으로 할아버지를 향해 마구 화를 내시더니 휙 가버렸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머쓱하셨는지 말도 안 통하는 저에게 어깨를 으쓱하시면서 무슨 말을 하셨습니다. 뉘앙스로 추측컨대 ‘아휴~우리 마나님 잔소리에 진이 다 빠지네~ 별것도 아닌것 가지고..’ 뭐 이런 거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그런 할아버지가 너무 귀여워서 몰래 사진 한장 찍고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아인트 밴 하두’ 관광을 끝낸 후 다 함께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그제야 우리는 어색함을 깨고 대화를 시작하였고 조금씩 서로를 알아가게 되었습니다. 독일 대학생 커플은 정말 수줍음이 많았고 이탈리아 커플은 서로에게 장난 잘 치는 알콩달콩 귀여운 커플이었습니다. 미국 커플은 마치 토크쇼의 사회자처럼 분위기를 이끌고 유머감각은 넘쳤습니다. 점심을 다 먹고 다시 차로 3시간 정도를 달리니 길 한 가운데서 덩그러니 낙타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들 처음으로 사막에 와 낙타를 타게 되니 입가에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낙타를 타고 또 2시간 정도 정처없이 가다보니 서서히 해가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화장실도 가고 싶을 즈음에 도착했다는 소리가 들려 반가웠습니다.  숙소는 큰 텐트였고 안에 침대와 테이블이 있어 굉장히 아늑했습니다. 화장실과 욕실도 있었고 사막 한 가운데에서도 이렇게 물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다 같이 둘러 앉아 모로코 전통 민트차를 마시며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땅거미지며 하늘이 어두워지자 한국에서는 희미하게 보이던 화성이 너무나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흥분한 나머지 ‘Look! That is Mars’ 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평소 별보기를 너무나 좋아해서 저도 모르게 입이 트였는지 어느 때보다도 말이 많아졌습니다. 다들 제가 마구 감탄사를 내뱉어가며 이건 무슨자리, 저건 무슨자리 이러는 것을 보며 놀라는 눈치였습니다. 의외로 저보다는 별자리에 대해 모르고 있기에 자신감 넘치게 이 별, 저 별 잘 설명해 주었습니다. 고등학교때 천체관측 동아리 회장 출신인데 이 정도는 해야겠지요?  저녁 식사를 마치자마자 8시부터 저는 별바라기답게 모래언덕 꼭대기에서 밤을 지샐 준비를 하였습니다. 다행히 입고 간 패딩점퍼가 침낭처럼 따뜻했기에 2월 초 사막의 밤은 그리 춥지 않았습니다. 사구 꼭대기에 올라가니 저처럼 별을 보러 온 커플들이 하나 둘 보였는데, 밤 10시경부터는 모두 숙소로 돌아갔습니다. 커플들이 떠나고 나서는 오롯이 혼자 넓은 사구 꼭대기에 드러누워 별들이 고요히 흐르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아,,, 정말 말로 표현하기 힘든 아름다운 밤하늘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정말 너무 믿기지 않을 만큼 행복해서 연신 혼잣말로 ‘와. 이거 뭔데 진짜.. 와.. 이거 뭐야 진짜.. 이게 말이 되나,,’ 이러고 있었습니다.  단순히 아,, 좋다 너무 멋있다,, 이런 정도가 아니라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말도 안되게 신비하고 아름다워서 그런 반응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사진 출처 - 필자  사하라의 2월 밤,,  서늘한 미풍이 느껴지는데 얼굴에 와 닿는 느낌은 부드럽고 달콤했습니다. 오리온자리가 제 얼굴 바로 옆에 누워서 넓게 펼쳐져 있었는데 그 존재감이란, 한국에서도 자주 보던 오리온자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사하라에서는 정말 큰 거인이 옆에 누워있는 것처럼 더 멋지고 든든했습니다. 이럴때 제가 마음에 품고 있던 사람이 옆에 있었으면 더 좋겠다는 마음도 생겼다가, ‘아니다,, 이런 순간에는 오롯이 혼자 즐기는 것이 가장 순수하고 좋다’는 생각이 들기도했습니다. 나와 우주, 나와 별, 나와 달. 나와 내 몸 아래에 있는 모래의 촉감. 그리고 너무나 부드럽고 달콤하기까지 했던 밤공기의 느낌... 그리고 밤의 소리.. 공기 속에 소리가 있는 듯이 느껴졌습니다. 밤이 흐르고 공기가 흐르고 시간도 흐르고,, 별도 흐르고,, 이런 광경을 뭐라고 묘사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이 세상을 만든 커다란 존재가 저에게 깜짝 선물을 주신 것 아닌가 싶었습니다.  ‘야~ 너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내가 니 마음 안다, 오늘은 너만을 위한 최고의 무대를 준비했으니 실컷 즐기렴. 자~ 여기!!’ 이러시면서 말입니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크고 작은 갈등을 마주하고 거기에 몰입되어 있을 때는 우리 자신이 마치 현미경이 된 듯 시야가 좁아져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도 아주 어두운 오목거울로만 대상을 바라보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여행, 특히 다른 나라로의 여행은 비행기를 타는 것부터 시작해서 망원경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과 비슷합니다. 거창한 표현으로는 미시세계에서 거시세계로의 전환인가요? 진부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여행을 통해서 모르고 있던 내 모습을 발견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지는 것은 확실합니다. 특히 정신적으로 너무나 힘들 때는 의사선생님의 약 처방 보다도 대자연의 속삭임을 느낄 수 있는 이런 여행이 최고의 특효약인 것 같습니다.  일상에서 겪은 힘든 일들이 일단 여행의 세계로 들어오면 거울을 통해 어렴풋이 보인다고나 할까요? 힘든 기억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지만, 불투명한 유리판을 앞에 몇 장 갖다 댄 것 처럼 약간 희미해지는 것 같습니다.  물론 항상 숙제는 숙제로 남아있지만 여행을 통해서 확실히 전에 없던 에너지를 얻게 됩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여행가기 전과 후의 나는 사뭇 다른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여행은 여럿이 즐기는 목적으로 가도 좋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좋은 것은 혼자여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혼행을 하고 나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혼자 갔던 그 길을 다시 함께 가서 나의 경험을 나눌 수 있다면 행복은 배가 될 것입니다.  저는 여태껏 다닌 여행 중에서 사하라 사막에서 보낸 낮과 밤들이 가장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사하라의 밤이 제 곁에 다가오는 듯합니다. 혹시 힘든 일이 있고 머리 속이 정리가 안되면 과감히 사막으로 떠나보십시오. 물론 사하라까지 가는 과정은 피곤할 수 있지만 사막에서의 낮과 밤은 모든 수고로움을 보상하고도 남는다는 것을 경험하실 테니까요.
2019-02-27 | hrights | 조회: 996 | 추천: 6
이상재/ 대전충남인권연대 사무국장  설 명절을 앞둔 지난 1월 29일 정부는 총 24조 1,000억 규모의 예비타당성조사(이하 예타) 면제 사업 23개를 발표했다. 천문학적인 사업비가 들어가는 사업에 대해 ‘예비’로 ‘타당성’을 조사하는 절차를 건너뛰는 것이 정당한지 의문이 들었지만 정작 선정된 SOC 위주의 전국 사업들 면면을 들여다보면 ‘이런 사업을 왜 굳이?’ 하며 고개가 더 갸우뚱해지는 사업들도 많았다.  대전광역시는 전임 시장 때부터 추진해 오던 도시철도 2호선 트램 건설이 예타면제사업에 선정되었는데 다른 지역의 사업들보다는 그나마 나아 보인다.  대전의 도시철도 기본계획은 1996년에 승인이 났지만 2007년 1호선 개통 이후 2호선은 고가자기부상열차와 트램 방식이라는 갈등 속에 지지부진을 면치 못하다가 이번에 드디어 트램 방식 건설로 일단락된 것이다.  사실 트램 방식도 일부 정치권과 시민들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반대하지만 고가자기부상열차 방식은 사업비가 트램에 비해 두 배 이상 많이 들고 도시 미관과 환경을 크게 해칠 수 있다는 점과 오랫동안 끌어온 지역 갈등을 끝낼 수 있다는 점에서 트램 방식은 그나마 차선의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1호선 지하철만으로는 경제성을 담보할 수 없다는 이유로 2호선, 3호선을 추가했던 다른 광역도시들이 추가한 노선만큼 운영비 오히려 적자 폭이 늘어났다. 이런 점에서 건설비가 저렴한 트램 방식은 향후 대전시의 부담도 줄여줄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대전의 도시철도 2호선이 트램 방식으로 결정되면서 불만과 걱정을 하는 이들의 가장 큰 이유는 트램의 노선이 기존 도로를 점유하는 방식에서 오는 자가용 운전자들의 불편인 것 같다.  허태정 대전시장은 대전 트램의 예타면제를 환영하는 기자회견에서 기대효과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취업 유발효과 9천661명, 생산유발 효과 1조5천463억 원을 거둘 것이란 경제적 전망과 트램과 연계한 교통체계 개편을 통해 2016년 37%였던 공공교통 분담률을 2030년 50%까지 올린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개인적으로는 트램 건설이 유발하는 취업과 생산증대는 4대강 사업으로 인해 수십만의 일자리가 생긴다고 했던 것처럼 손에 와 닿지도 않고 현실감도 없다. 하지만 공공교통 분담률을 50%까지 올린다는 계획은 눈에 확 띌 만큼 획기적이고 타당한 목표라고 생각한다.  사실 대전의 공공교통 분담률은 서울을 포함한 7대 특·광역시 중에서 최하위권이고 상대적으로 승용차 분담률은 광주, 울산과 함께 선두권을 이루고 있다. 다른 지역 특히 수도권에서 온 사람들은 대전의 교통이 좋은데 자가 운전하기가 편리하다는 얘기를 많이 한다. 이는 대전시의 교통정책이 60%에 이르는 승용차 편리 위주로 발전해 왔기 때문이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대전 트램 사진 출처 - 대전광역시  실제로 구도심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대전평생교육진흥원의 주차장은 수백 대가 주차할 수 있는 규모이며 무료로 사용할 수 있다. 무료이다 보니 5분 거리에 지하철 정거장이 있고 다수의 버스 노선이 지나다녀도 평생교육원을 이용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가용을 이용한다. 그러다 보니 넓은 주차장이 언제나 꽉 차서 관리인들도 꽤 고생하는 눈치다.  신도심이라고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것이 대전시청 맞은편에 있는 대전교육청도 주차장을 무료로 사용할 수 있다. 들어갈 때 경비실에서 용무를 물어보지만 적당히 둘러대면 그만이다.  대전시청은 유료이긴 하지만 1시간 30분까지는 무료이기 때문에 간단한 업무나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오는 사람들 다수가 자가용으로 온다. 대전시청도 대전교육청도 바로 코앞에 지하철 정거장이 있고 버스노선도 적지 않은데 말이다.  앞서 열거한 기관 이외에도 대전시의 많은 자치단체와 공공기관의 주차장은 무료다. 주차비를 받아도 대전시청처럼 거의 무료에 가깝게 이용할 수 있다.  그동안 대전시의 도로나 교통정책은 공공기관의 주차장 정책에서 볼 수 있듯이 자가용 운전자의 불편을 최소화하는데 중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 같았다. 자가용 이용이 편한데 누가 불편한 대중교통을 이용하겠는가 말이다.  트램 건설 방식을 비판하는 언론에서는 대전 일부 지역에서 운영되고 있는 버스전용차로 때문에 주민들이 겪는 어려움을 예로 든다. 하지만 전용차로를 없애는 것이 그 지역 주민들의 어려움을 해소하는 방법이 될 수 있을까? 대한민국의 도로는 예외 없이 도로가 새로 생기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만큼의 교통 수요가 새롭게 생기거나 넘쳐나는 것을 반복해 왔다.  대중교통을 빠르고 편하게 이용하고 자가용 운전도 편리하게 하는 방법은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대중교통을 빠르고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전제는 자가용 운전의 불편함이어야 할 것이다.  계획대로라면 대전을 둘러서 건설되는 도시철도 2호선 트램은 2025년 완공될 것이다.  기존의 1호선 지하철과 함께 2호선 트램은 대전시가 대중교통 중심으로 교통체계가 개편되는 전환점이 되었으면 한다. 트램이 도시의 차선 하나를 점유하니 당연히 자가용 운전자들은 불편할 것이다. 대신 어디서나 대중교통을 쉽게 접할 수 있고 목적지까지 쉽고 편하게 갈 수 있는 공공교통 시스템이 정착된다면 시민들의 자가용 운전에 따른 불만은 곧 사그라질 것이다. 아예 공공교통 분담률 목표를 2030년 50%까지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라 70% 정도 상향 조정하면 어떨까 싶다. 그게 가능하다면 시민들의 교통비 부담을 덜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날로 심해지는 미세먼지까지 줄일 수 있는 획기적인 방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전에 읽은 책 <걷는 남자, 하정우>는 영화배우 하정우 씨의 남다른 걷기 예찬을 보여주어 인상 깊었다. 하루 평균 3만 보 이상을 걷는다는 하정우 씨와 그의 걷기 동료들은 약속장소를 정할 때 ‘차로 몇 시간 거리’ 이렇게 설명하지 않고 걸어서 몇 분, 혹은 걷기 몇 보 정도면 도착한다는 표현을 쓴다고 한다. 시간 많은 영화배우니까 가능한 일상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하정우 씨는 실제로 약속장소나 미팅에 걸어서 가기 위해 새벽에 집에서 출발하기도 한단다.  2030년 어느 날 고향 친구가 대전을 방문한다면 약속장소를 이렇게 설명해 주고 싶다.  “대전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서대전 사거리역에서 2호선 트램을 갈아타고 세 정거장만 와서 내려, 그리고 10분 정도만 걸어오면 돼. 대전은 차가 별로 없어서 걷는 동안 도시 공기도 엄청 상쾌하게 느껴질 거야. 친구!” 
2019-02-14 | hrights | 조회: 1282 | 추천: 2
김형수/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사무국장  “두 아이가 굴뚝 청소를 한다. 한 아이는 얼굴이 새까맣게 되어 내려왔고 또 한 아이는 멀쩡한 얼굴로 내려왔다. 누가 얼굴을 씻을 것인가. 학생들은 더러운 아이라고 답한다. 선생은 아니라고 말한다. 얼굴이 멀쩡한 아이는 더러운 아이의 얼굴을 보고 자기 얼굴을 보고 자기 얼굴에도 그을음이 묻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노릇 아닌가. 선생은 다시 묻는다. 누가 얼굴을 닦았을까. 그러나 학생들은 이번에도 정답을 맞히지 못했다. 선생은 말한다. 두 아이가 똑같이 굴뚝을 청소하고서 한 아이만 얼굴이 깨끗하다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교사는 분필을 들고 돌아섰다. 그는 칠판 위에서 "뫼비우스의 띠"라고 썼다”. 1)  차별은 하나의 ‘문화’적인 행동양식이다.  그래서 어떤 특정 대상에 대해 차별을 가하는 의식, 가치관, 행동 방식도 인간의 문제이지만 사실은 그 차별의 가치와 행위를 정당화는 '과정'이 인간에게는 오히려 더 심각한 문제이다.2)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그것은 우생학과 파시즘이란 이름으로 포장되어 ‘근대’를 풍미 했고, ‘복지’란 명찰을 달고 ‘현대’를 선전하여 왔으며, 신자유주의와 인적자본 개발이라는 능력개발주의로 미래로 내달리는 것이 이러한 차별이 시대에 맞게 우리를 설득하고 합리화 해온 모습이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 모두가 100% 장애인이 될 위험 환경에 노출될 가능성이 있으며 생물학적으로 늙음으로서 ‘장애 상태’로 나아간다는 것을 우리는 이성적으로 공감한다.  그래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차별의 결과 또는 차별의 목적보다도 그 차별의 과정과 변화의 모습이다.  어떻게 차별을 합리화해왔고, 하고 있고,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우리 스스로에게 던질 필요가 있다. 그 차별의 합리화 도구들은 다음과 같은 인식체계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왜 우리 사회는 장애인이란 존재를 무언가를 도와주어야 하고 베려해 주어야 할 ‘대상’으로만 이해하는 것일까? (for The disabled) 여성들에게 여자 화장실이 꼭 필요한 것처럼 장애인들에게는 장애인이용 가능한 것들의 지원과 환경이 꼭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왜 사회는 그 '필요', 필수적인 것(necessity)을 왜 항상 사랑과 배려로 이야기하려고 할까?  왜 장애인 문제는 장애인 당사자로부터 쉬이 들을 수 없고 말해지지 않는 것일까? (not of The disabled)  또 이런 문제에 대한 대안들이 왜 장애인들에 의해 민주적으로 만들어지거나 시행되지 않는 것일까? (not by The disabled)      아울러 장애인의 권리와 인권에 대해 단체가 왜 그 문제를 구체적으로 개선하거나 변화시키지 못하고 관찰만 하고 분석에만 머무르는가? (only about The disabled)    사회 구성원 모두가 이미 장애인이란 존재의 차별과 소외를, 존재 근거 자체와 동일시하는 것을 내면화 하고 있기 때문이다. 차별의 직접적인 모습은 그 대상에게 스스로 차별 받는 존재임을 드러내라고 공격 받는 것일 것이다.  ‘자 , 장애인에 대해 한번 떠들어 보시오, 얼마나 차별받았는지 말해 보시오라고 면접하는 것 자체가 억압이지 않은가?  그것은 마치 많은 남자들 앞에서 한 여성이 알몸을 드러내며 자신이 여성임을 증명해야 하는 것과 같은 꼴이다.  사람들은 흔히들 어떤 사람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은 그들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소외 받고 억압받는 그들에게 그들의 문제에 대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 달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바꾸어 생각해 보면 ‘잘 모르는 것’은 알고자 하지 않았던 사람들의 잘 모르고자 하는 의지를 나타내는 것이고 그것은 곧 편견이지 않을까? 장애인을 비롯한 어떠한 개인도 다수의 대중 앞에서 또는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신에 대해 더 말하거나 덜 진술해야할 책임을 가지고 태어나지는 않았다.  이러한 내면화를 엿볼 수 있는 개념으로 장애인 인식 개선 캠페인이나 프로그램으로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 ‘장애 체험’이다. 물론 이 개념의 실천이나 그 목적의 순수함은 인정받아야 하지만 그것 자체가 온당한 개념인지는 활발한 논의가 필요하다. 시각장애인 인식개선 교육 ‘찾아가는 장애체험스쿨’ 모습 사진 출처 -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우리 사회는 '장애인'이란 존재를 이해하고 편견과 선입견을 없애고 잘 알기 위해 '장애 체험'을 권장하곤 한다. 체험(體驗)이란 낱말은 원래 본래 독일어 'Erlebnis'의 역어(譯語)로 만든 철학 상의 술어였다. 경험이라는 말이 대상(對象)과 얼마간의 거리를 예상한 것임에 대하여, 체험은 대상과의 직접적이고 전체적인 접촉을 의미하면서 개개의 주관, 속에서 직접적으로 볼 수 있는 의식내용이나 의식과정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왜 '장애인' 체험이 아니라 '장애' 체험인가? 또한 장애는 과연 체험될 수 있는 것인가? 본질적으로 장애가 체험될 수 있는 성질의 대상이라면 '비장애' 역시 상대적 경험 주체인 장애인에게 체험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또한 체험은 그 주체들이 언제 어떻게 체험을 할 것인가? 그만둘 것인가? 라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성질을 갖고 있다. 그러나 장애인의 장애는 개인의 자의적 선택이 아니라 타의에 의해 구조적으로 규정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장애인의 장애에 대한 체험 역시 사실상 언어적으로 기만이다. 사실상 그것은 비장애인의 장애인의 차별을 합리화하려는 이해와 선행의 선전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장애인의 문제와 차별을 인식하기 위한 지금의 비장애인들이 하는 장애 체험 프로그램이 어느 정도 교육적으로 유용하다 할지라도 진보적인 관점에서는 언제든 정상적인 상태, 즉 비장애적인 상태로 회귀한다는 것을 언제나 약속하고 돌아갈 수 있는 장애 체험은 또 다른 편견과 선입관을 만들어 낼 위험이 있다. 장애인이 겪는 '장애 상태'는 장기간에 걸친 사회적 상호 작용 속에 있다. 현재의 장애 체험의 대부분이 장애인이 겪는 일시적인 물리적 고통이나 단편적이고 직접적인 편견에만 노출되어 있어서 그 차별의 원인과 구조 등은 은폐시켜 버린다. 이는 또한 장애인들이 응당 풀어야 개인 삶의 부담으로만 전가되어 버릴 수 있다. 오히려 장애를 장애인 스스로의 의지로 극복해야 한다는 장애극복이데올로기를 조장하고 합리화 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 목발을 오랫동안 이용해 온 장애인이나 휠체어를 이용해 온 장애인의 경우 목발을 짚고 휠체어를 짚는 것 자체는 힘들지 않을 것이다. 비장애인들이 일상적으로 걷는 것을 힘들어 하지 않는 것처럼.   이렇게 본다면 비장애인이 쉽게 접근하는 장애 체험들은 대중적으로는 사회적으로 정상임을 확인받고 그 정상적임과 건강함을 감사해 하는 상대적으로 능력 있고 건강하다고 느끼는 비장애인들의 집단적인 여유로움로만 다가올 수 있다.  궁극적으로 장애인 차별을 없애는 것이라면 오히려 장애인에게 ‘비장애’ 체험(무장애3) 체험)을 시켜 주는 것이 보다 설득력 있지 않는가? 그토록 ‘장애’가 힘들고 고통스런 것이라면 말이다. 장애인 차별의 본질에 접근하지 못하는 장애 체험은 장애인 차별을 합리화 하는 한 과정일 뿐이다.  "얻을 수 없는 목적들의 '희망목록(wish list)이나 일련의 '모성애적(motherhood)언급'은 백해무익하다.  하나의 전략은 그것이 어떠한 영향력이라도 가지려면 실용적이고 성취가능하며 적절성을 가져야 한다" - 어느 공장 노동자로부터-  영화 피터팬에 나오는 후크 선장은 시각 장애인, 절단 장애인이다. 그러나 문자와 미디어를 통해 그는 장애인으로 잘 인식되지 않는다. 헬렌 켈러는 인간승리의 표상으로 우리나라 어린이에게도 그 전기가 널리 익히지만 그녀의 대학 이후의 행적을, 사회주의자로서의 그녀를 알고 있는 지식인은 드물다. 한국 사람이 제일 존경하는 세종대왕이 실은 심각한 시각 장애로 인해 스스로 왕의 자리에서 물러나려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 사람들이 장애인으로 인식되거나 장애인 문제로 이해되지 않는 것, 또는 헬렌 켈러4) 처럼 장애인이란 것 외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은 우리가 이 사람들을 동정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헬렌 켈러 역시 사회주의 사회운동가로 인식하지 않는 것은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그녀가 동정과 박애를 거부해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장애인과 관련된 일을 전공하려고 할 때나 직업을 가지려고 할 때 남이 그런 일을 선택할 때에는 아주 훌륭하고 그지없이 착한 일이 되지만 내 딸이나 누이가 내 아들이 내 동생이 그런 일을 하려고 하면 ‘미친 짓’이라면 말리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도 이러한 이데올로기적인 박애주의의 이중성이다.5) 한국에서 장애인에 대한 이러한 박애주의는 이 영역에서 종사하는 사람들의 동기유발 요인을 강한 종교성으로 무장하고 편향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이 정부의 장애인 정책의 기저에 현실적으로 깔려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 사회 누구든지 장애인으로 전락할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상태에서 국가는 국민들에게 장애인이 되시면 시설로 가시거나 집에만 있으십시오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얘기다. 결국 장애인 문제는 국가와 사회 공동체가 정책과 행정을 입안하고 집행 하는 한 고정된 한 집단을 향한 문제가 아니라 개인 하나하나에게 그 가능성으로 총구를 겨누고 있는 중요한 문제이다. 장애아동 한사람을 올곧게 교육시킬 수 없는 국가라면 모든 국민 개개인을 올곧게 교육시키지 못할 개연성은 이미 충분하다.  한국사회에서 장애인이란 사람들이 문제가 없고 차별받지 않는다고 논리적으로 주장하는 사람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장애인 차별의 해소를 따질 때, 인격적인 동등성보다는 단순히 동물원적인 편안함이나 안락함을 제공해 주는 것이 최고가 되어버린 것도 이와 같은 논리이다. 이것이 장애인 차별에 대한 사회화 과정이며 내면화 동일시의 절차이다. 이 절차는 장애인에 대한 낙인(stigma)과 그에 따른 온정(pity)에 뒤이은 장애인들의 온정에 대한 고마움,  그런 순환 과정을 거친 장애인 차별에 대한 저항의 무력화를 더욱 강화시키는 사회적인 시스템이다.  각종 인간시대와 같은 휴머니즘으로 지갑을 터는 프로그램에서 가장 놀라운 효과를 발휘하며 칭찬과 미덕의 최고의 상징기제가 장애인이라는 의미는 너무나도 분명하다. 그러면서도, 희망과 사랑을 표상하는 가장 뛰어난 존재임에도, 지하철에서 추락하여 죽고, 낳아준 부모에게 죽임을 당해야만 하는 한국의 장애인이란 존재는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에 대한 사회적 책임의 회피와 가벼운 처벌과 같은 면죄부 부여 행위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장애인의 자살 또는 장애 아동의 존속 살인, 또는 방치에 따른 행위에 대해 사회적 약자에게 법과 국가가 보호해 주어야 할 의무가 더 많음은 모두가 인정하고 알고 있으며 주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장애인들은 알게 모르게 ‘오죽했으면’ ‘병신자식이 효자(빨리 죽음으로써)’라는 정서적 동정론으로 법적 보호까지 받지 못하고 오히려 죽음에 내몰리고 있는 실정이다  장애인의 문제를 개개인의 이해나 인식 개선에만 국한시켜버린다면 장애인 문제를 과학적으로 사회적으로 규명하기 보다는 상호 개인 간의 정서적인 문제로 국가의 온정적인 문제로 전락시킬 위험이 있다. 인식의 개선은 제도의 개선을 가져온다.  그러나 인식 개선만을 요구한 채 그 인식 개선을 선도할 정책을 만들지 않는 정부라면 인식 개선을 핑계로 현재의 차별과 모순을 방치한다는 비난을 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정부는 허구적인 인식개선을 외치지 말고 인식을 개선할 제도와 법을 적극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앞서 언급한 대학에서의 장애 체험 프로그램들 역시 대학가에서 많이 이루어지는 타자(他者)에 대한 체험과 이해를 위한 활동은 무엇 무엇 '현장'이라 이름 짓는다.  그들이 타자에 대한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일은 드물기 때문에 그들이 처해 있는 현장을 체험하고 인식을 새롭게 하려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장애 체험 역시 장애인이란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오히려 그 장애 상태를 적극적으로 해결시켜야 한다면 장애인 생활 현장 활동이나 장애인차별체험으로 이름을 새로이 해야 한다. 요컨대, 사회 전체적으로 장애인 정책을 차별을 단순히 보상하고 차감하는 미시적이고 소극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보다 거시적이며 적극적인 사회 공동의 운명과 이슈로 가져갈 필요가 있다. 차별의 결과로써의 장애인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차별의 예방과 방지 그리고 온전한 권리의 구제를 위한 행정체계로써의 장애인을 새로이 규정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6) 장애인이라고 한 소수 집단을 규정하고 정의하는 것 자체가 차별을 생산하고 지속하는 시작이며 이러한 차별의 과정들이 차별의 결과들보다 더 큰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장애인의 차별과 그것으로 인한 문제는 ‘그들’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의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의 문제이며 우리의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장애인 문제의 주체다. 그것을 인식하는 것이 장애인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중요한 대안이 될 것이다. 1) 조세희, (1976) 「뫼비우스의 띠」-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2) 장애인 차별에 대한 대략적인 이해는 「노동시장의 장애인 차별 영향 분석」 2000, 2 서울대학교 대학원 사회복지학과 유동철 석사 학위논문 10p~15p를 참조 3) 무장애(無障碍)는 무장애 공간(Barrier Free Zone)을 만들기 위한 운동적 개념인데, 무장애 공간이란 장애물이 없는 공간을 의미하지 않는다. 무장애 공간이란 우리가 사는 공간 안에서 장애인이라고 하더라도 장애를 느끼지 않고, 활동과 참여에 제약을 받지 않는 공간을 의미한다. 건축 환경, 교통환경이 장애를 가진 사람을 “장애만 가진 사람”으로 만들어 가고 있는 우리의 도시환경, 교육환경, 근무환경, 주거환경 속에서 비록 장애를 가진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자유롭고, 안전하며, 편리하게 활동하고 참여할 수 있는 환경과 공간을 만들자는 개념으로부터 나온 것이 무장애 개념이다.  4) 보다 자세한 것은 「헬렌 켈러 - A Life」도로시 허먼, 미디어 북스를 참조 5) 장애인을 보다 직접적으로 만나고 많은 책임을 지는 특수교육과 재활관련학과 진학의 경우 학부모들이 학생들에게 장애인과 결혼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조건으로 진학을 허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6) 부산일보, 1994년7월 「장애인 새 이름 후보작품 4선 <재활인> <정동인> <되살미> <새롬이>- 부산장애인 연합회 공모마감...보사부에 채택 건의」 
2019-01-23 | hrights | 조회: 2622 | 추천: 8
손상훈/ 교단자정센터 원장, 종교투명성센터 운영위원  새해 소망한다. 직업종교인 모두가 반성하길. 특히 재벌승려들은 공개반성하고 자신의 개인재산을 사회에 기부해야 한다. 위대한 종교 가르침이 문자로 이어진 성경이나 불경을 꺼내들지 않아도 안다. 부패하고 뻔뻔한 극소수 직업종교인들만 빼고 모든 시민들은 다 안다. 평신도인 재가신자들은 더 잘 안다. 그럼에도 변할 싹이 보이지 않는다. 더 썩어 부패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니 마음이 어지럽고 아프다. 한국종교계의 새로운 질병, 바로 외면이다. 직업종교인의 생태계가 붕괴직전에 있지만 나 몰라라 하고 있다. 평신도가 변하지 않고, 어찌 교회가 변할 것이며, 재가불자가 정의를 외면하는데, 절 도량, 사찰이 변할까. 기원하고 바래본다. 말과 글로 회개할 수 있다면 가장 좋다. 그래도 변화하지 않는다면 시민들이 다시 회초리를 들어야 한다. 특히 한국불교계에서 가장 세금을 많이 지원받고 있는 조계종이 공개 반성해야 한다.  매년 수백억 원의 세금을 직간접적으로 지원받고 집행하는 조계종 총무원은 아직 재정을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고 있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 말 잘 듣던 재벌승려들은 너무 조용하다. 채울 만큼 채웠으니 더 배불릴 잇속이 없어서가 아니다. 또 다른 먹잇감을 찾아 헤매는 짐승처럼 누군가의 굶주림을 핑계 삼아 국고보조금을 더 타내려 하고 있다. 그 징조가 국립공원 ‘문화재입장료’이다. 문화재관람료라는 표현을 입장료로 바꿔 시민저항을 피하기 위한 ‘변경 마케팅’의 한 사례이다. 그동안 조계종 재벌승려들은 벤처기업처럼 발 빠르게 움직여왔다. 유력 국회의원에게 매달 수백만 원의 정치 후원금을 내는 것은 기본이고, 정통 관료사회에도 종교인연을 지렛대 삼아 로비를 해 왔다. 동국대 신정아 사건이나 최근 황제골프 접대가 상징하는 의미는 매우 크다. 자승 전 총무원장이 전직 검찰총장과 만나 ‘사찰 방재 시스템 세금 사기’ 수사를 무마해 달라는 청탁을 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더하고 있다. 불교계 인터넷 언론에 따르면, 경남지역 경찰에서 이첩되어 서울 검찰에 이첩된 지 1년여 되지만 주요한 재벌승려를 제대로 조사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부디 소망한다. 검찰은 회개하지 않는 승려들에게 공개조사 등 시민의 눈높이에서 직분에 충실해 주길 바란다. 종교투명성센터 등 시민단체들이 행정안전부 장관을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했다. 사찰들이 국립공원 입구에서 문화재관람료를 징수해 국민의 통행자유권을 침해하는데도 경찰을 관할하는 행안부 장관이 수수방관했다는 이유에서다. 사진 출처 - 필자  동국대 한 학생이 40여 일간 조명탑에서 동대총장 퇴진과 총장직선제를 주장하며 농성을 했다.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 법과 제도가 고쳐져야 한다. 대학 이사회가 정상적인 이사진으로 구성되었다면 글 도둑질한 이가 동국대 총장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사립학교법이 개정되어 극단적이고 위험한 농성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기를 소망한다. 조계종이 반걸음 나아지려면, 또 다른 자승 총무원장이 나오지 않으려면 사회가 변해야 한다. 특히 재벌급직업종교인에 관대한 시민인식이 크게 바뀌고, 사정당국의 관대한 자세가 변해야 한다. 대한체육회장이자 조계종중앙신도회장이 김영란법 위반임을 언론에서 보도했지만, 사정당국은 스스로 조사하지 않는다. 종교계가 바로 서길 소망하는 시민은 직업종교권력자가 저지른 범죄행위를 공정하게 조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설정 총무원장이 조계종 최초로 탄핵된 원장이 된 것도 시민의 요구 때문이다. 부패한 재벌급 직업종교인 봐주기는 이제 그만이다. 최근 대법원이 이웃한 유명한 교회 대표목사의 학위문제도 엄정하게 판단했다. 평신도들은 환영한다. 이제 종교재산문제에 있어 직업종교인이 주인이라는 판례도 바뀐다면 종교계 자정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될 것이다. 그러나 갈 길은 멀다. 그래도 한 걸음 나가야 할 사례가 있다. 동국대 고공농성 사진 출처 - 필자  시민단체 참여연대가 20여 년간 주장해 대법원 판례가 2차례나 난 ‘사찰문화재관람료 부당징수 구례 천은사 사례’이다. 사찰문화재입장료(옛 관람료) 위법 징수에 대해 1만 여명의 시민들이 ‘공익소송’이라는 회초리를 들어야 한다. 대법원 판례에 따라 현재 18만원의 위자료를 받을 수 있다. 공익소송에서 이기려면 자동차 내비 같은 동영상과 사진으로 국립공원을 입장하고, 사찰 문화재를 보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는 자료, 매표소에서 사찰직원에게 나는 문화재를 볼 의사가 없고 국립공원을 가려고 한다는 의사표시 녹음파일, 그리고 공익소송 신청양식을 작성하면 된다. 실제 해 보면 그리 복잡하지 않고, 근거자료만 갖추면 대부분 승소할 것이라 확신한다. 단지 귀찮고 엄두가 나지 않을 뿐이다. 수천 년 동안 변하지 않는 부패한 직업종교인에게 내릴 ‘은혜로운 회초리’ 공익소송 참여이다. 재벌승려들은 재가신자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니, 말과 글로 안 된다면 법과 제도 개선, 사정당국의 엄정함, 끝으로 시민들의 회초리로 뼈아픈 ‘교훈’을 선물하고 싶다. 그리고 2019년 봄, 여름, 가을에 1만 명의 시민이 회초리를 든다면 늦가을 지리산에서 ‘음악회’를 열고, 승소를 자축하는 소박한 잔치를 벌이고 싶다.  
2019-01-09 | hrights | 조회: 1127 | 추천: 11
서동기/ 인권연대 간사  겨울의 한라산은 고도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대학에서  마지막 시험을 마친 직후 한라산에 다녀왔다. 성판악 등산로를 9시간 정도 왕복하며 백록담과 여러 오름들을 만났다. 일출을 맞으며 조금씩 오르다보니, ‘한번 구경 오이소’라고 기억하면 된다는 1950m 높이의 한라산은 서서히 다른 모습으로 변해갔다. 가쁜 숨을 내쉬고 얼마를 오르다 문뜩 주변을 돌아보면 전혀 다른 풍경이 주위를 감쌌다. 늦가을 날씨 같았던 출발점에서 저벅저벅 오르다 보니 서리와 눈꽃들이 조금씩 피어나기 시작했다. 정상을 만나기 직전 30분은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의 거센 바람 속에서 봄까지도 녹지 않을 두텁게 쌓인 눈과 얼음들을 만났다. 산을 오르고 내려오며 종종 지나간 시간과 새로운 출발에 대해 생각했다.  대학의 시간은 한 장의 성적표로 남았다. ‘고3’이 되던 2010년 고려대 학생 김예슬씨의 자퇴 선언을 보면서 ‘나도 좋은 대학에 우선 입학하고 영 아니면 멋지게 자퇴해야지’하고 생각했는데 무엇 하나 이루지 못했다. ‘더 좋은’ 대학에 입학하려는 욕심에 수능 시험을 몇 번 더 치르느라 입학이 늦었고, 군대에 다녀온 2년을 포함해 6년의 시간동안 인문학을 전공했다. MB의 집권과 함께 고등학교에 입학했고 이제는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교육의 ‘완성’ 또는 끝 정도로 여겨지는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다. 입시 이후 대학의 수많은 시험들을 치르고 견디며 손에 쥔 마지막 전체 성적표 한 장에는 수많은 등급들이 나열되어 있다. 성실하려 노력했고 대부분 A+나 A학점이고 B+가 가끔 보인다. 기뻐해야 하나? 졸업 이후를 생각해봤다.  소위 ‘SKY’로 대표되는 대학의 서열체제 안에서 ‘인서울’과 ‘지방대’의 구분, 그리고 그 안에서 학점, 스펙 경쟁으로 이어지는 한국 교육 시스템을 졸업과 함께 벗어던질 수 있는가 했더니 그렇지 않다. 졸업 즈음에는 대학서열체제에서 그대로 연장되어, 9급 공무원‘시험’과 5급 공무원‘고시’로 상징되는 몇 등급짜리 삶 가운데 어딘가로 편입되려 다시 애를 써야한다. 대학이라도 나와 이런 시험에 응시할 기회라도 얻으면 어딘가에 편입될 기회라도 얻는 것일까. 사회생활의 ‘전선’으로 나가면 2016년 구의역의 97년생 김군, 2017년 제주에서 현장실습 중 사망한 99년생 이민호군, 2018년의 24살 김용균씨가 되어 버리고 만다. ‘전선’에 끌려 나가지 않기 위해서는 세상에 눈 감고, 귀 닫아 어딘가에 편입될 수 있도록 부단히 견뎌야 한다. 사진 출처 - pixabay  우리사회에서 체제에 편입되기 위한 견딤은 꽤나 굴욕적이다. 수능 시험에서는 외국인이 쓰지도 않는 단어로 구성된 복잡한 영어 문장들을 ‘돌파’해내야하고, 수학문제를 풀기 위해 수 만개의 문제들을 달달 풀어내는 연습을 한다. 이런 견딤을 거부하면 ‘영포자‘, ’수포자‘가 되어 사회의 ’전선‘으로 내몰린다. 이러한 견딤은 대학에서도 이어진다. 직장인이 되어 낡은 강의노트를 반복하는 교수들의 말을 빠짐없이 기억해 좋은 학점을 만들어야 하고, 외국어로 소통은 한마디도 못하지만 토익 고득점을 위해 무언가를 다시 외우고, 반복하며 견뎌야 한다. 이를 견디지 않으면 장벽의 바깥으로 밀려난다. 이를 견디기 위해 우울증 약을 처방받아 버티거나, 조금 더 여린 이들은 세상을 스스로 등진다. 견디지 못하는 자에게 선택지는 많지 않다.  그렇게 견뎌내는 시간은 그 사람에 대한 커다란 모욕이다. 고등학교에서 대학생활에 이르기까지, 수험생뿐만 아니라 직장인이 되어서도 우리에게 요구되는 견딤은 굳이 나열하지 않더라도 사람을 깔보고 우습게 여기는 것들이 너무 많다. 견딤은 사회에서 그치지 않고 가정에도 파고들어 가부장 문화의 희생과 견딤을 수많은 엄마와 딸들에게까지 요구하기도 한다, 오랜 시간을 견디며 학교에 다녔고 졸업을 앞둔 지금, 나는 더 이상 모욕을 견디고 싶지 않아졌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걸까. 운이 좋게 모욕을, 모욕이라 말하고 그것을 변화시키는 분들이 있었다. ‘전선’으로 밀려나가지 않으려 견디는 것이 아니라 모욕적인 ‘전선’ 자체를 사람답게 살만한 곳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모욕은 누군가의 희생으로 견뎌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의 연대와 구체적 실천을 통해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새해에는 모욕을 견딜 것을 거부하고 스스로 선택하는 삶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려 한다. - 2018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에 인권연대에서 새로운 출발을 합니다. 긴장과 설렘을 안고 새 길 위에 서있습니다. 겸손하지만 치열하게 배우고 일하겠습니다.
2018-12-27 | hrights | 조회: 1215 | 추천: 8
이회림/ 00경찰서  어느 겨울, 일요일 오후 , 무전기에서 들려오는 소리.  ‘순 21. 순 21 00마을 00길 3호 우물에 사람이 거꾸로 들어가 있다는 신고. 119도 보냈으니 순 21호 신속히 출동하여 상황보고 하도록.! 아울러 순 22.23호도 지원바람‘  현장에 도착해 보니, 다행히 119 대원들이 먼저 와 있었고 대원 한 분이 이미 우물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우물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어떤 남자가 머리를 우물 바닥 얕은 물속에 박은 채 고꾸라져있었습니다.    ‘로프 좀 던져주이소~!’  우물 안에 들어 간 대원이 밖을 향해 소리쳤습니다. 로프가 아래로 던져지고 구급대원은 로프를 그 남자의 몸에 칭칭 감았습니다. 다른 대원 2명이 우물 위에서 로프에 묶인 남자를 끌어당기니 이내 거꾸로 선 다리가 먼저보이다가 마지막으로 파랗게 질린 남자의 얼굴이 올라왔습니다. 대원들이 남자를 조심스레 바닥에 내려놓고 다급히 인공호흡을 시도했습니다. 그런데 남자의 창백한 얼굴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이미 숨이 끊어진 지 한참 된 것 같았습니다.    ‘이 순경~! 가족들 인적사항 파악하고 상황실에 무전보고 해~’  ‘네~! ’  가족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니 자그마한 할머니 한 분과 그 할머니보다는 약간 젊어 보이시는 할아버지 한 분이 땅바닥에 주저앉아 ‘아이고~아이고~~’하며 울고 계십니다. 구경나온 동네 사람들에게 누구시냐고 물어보니 우물에 빠진 남자의 어머니와 어머니의 사돈뻘 되는 어르신들이라고 합니다. 저는 수첩을 꺼내들고 할머니 옆에 쪼그리고 앉았습니다. 할머니가 저를 보시더니 한 팔로는 저의 팔을 잡고 다른 팔로는 당신의 가슴 한 가운데를 주먹으로 치시면서 오열하십니다.    “아이고~ 순사아가씨요... 순사아가씨요... 우리 아가, 우리 아가... 맨날 천날 물만 보면 뛰 들어갈라 카디만 인자 우물 앞에 가서 ‘엄마 내 죽는다. 내 죽는다’ 하고 기들어가디만... 내가 그거 들어가는 거를 붙잡는다꼬 다리를 붙잡고 죽어도 안놓을려고 붙잡고... 붙잡고... 사돈이 지나가다가 그거를 보고 같이 붙잡고 한참을 버티고 그라다가... 늙으이 둘이가 무신 힘이 있능교... 마... 둘이가 힘이 빠져가 다리를 놓쳐뿌리가 우리아가 저래 되었는기라요... 아이고... 순사아가씨요... 내가 손이 이래 되도록 죽을힘으로 붙잡았는데... 아이고 우야능교...아이고...”  제 팔에 매달려 우시는 할머니의 손등을 보니 우물 표면에 긁혀 살갗이 벗겨지고 빨간 피가 송송이 맺혀있었습니다. 고목의 표면 같아 보이던 손등에 새 빨간 피. 할머니가 말씀하신 상황이 눈에 보이듯 너무나 생생하게 전달이 되어 제 가슴도 덩달아 미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끌어올리기에는 도저히 불가능한 무게였을 터인데 어떻게 해서든 살려보려고 사투를 벌였을 할머니의 절망감을 생각하니 울컥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뭐라고 위로의 말을 해야 될지도 모르겠기에 그저 할머니의 손을 꼭 잡고 떨고 있는 가녀린 어깨를 안아드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전기에서 상황보고를 재촉하는 팀장님의 목소리가 들려와 퍼뜩 마음을 가다듬고 순찰차로 돌아갔습니다. 남자의 누님에게 인적사항을 받아 적고 시신을 싣고 간 구급차를 따라 병원 영안실로 향하였습니다. 병원에서 만난 유족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남자는 마흔이 다 되도록 결혼을 하지 않은 채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고 할머니의 말대로 물가에만 가면 항상 뛰어 들고 싶어 해 정신병원에 몇 차례 수용한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며칠 후, 비번날 어머니가 경영하시는 한복가게로 갔습니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어머니와 마주앉아 이야기 나누고 계시던 어떤 할머니 한 분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아이고~~ 순사아가씨~~ 이 집 딸네미가 순사한다카더니... 이런 인연이 어데 있노~~‘  할머니의 얼굴을 자세히 보니 얼마 전 우물에서 자살한 남자의 어머니였습니다. 아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거친 우물 벽에 손을 긁혀가며 안간힘을 썼을 노모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 계속 울적했었는데 우연히 다시 만나니 너무나 반가웠습니다. 그때와는 다르게 얼굴이 많이 밝아 보이셔서 저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위에 쓴 이야기는 사실 십 수 년 전 겨울, 제가 신임 순경 시절 겪은 일입니다. 순찰 일을 하면서 꽤 많은 변사사건들을 접하게 되었는데 주로 순경때 유난히 변사사건을 많이 만났습니다. 하루에 3번 각기 다른 시신을 수습한 적도 있었습니다. 저 나름의 경험치로 통계를 내어본다면 교통사고사를 제외하면 자살이 가장 많았던 것 같습니다. 가장 구하기 쉬운 독극물인 농약(제초제)를 마시고 자살하시는 분들이 가장 많았고 목을 매어 자살하시는 분들도 다수 있었습니다.  순찰요원을 거쳐 형사과 성폭행 사건 전담 수사를 하게 되면서 ‘사람은 왜 이렇게 악한가?’ ‘왜 사람은 죄를 저지르나?’ ‘왜 남겨진 가족들의 슬픔을 뒤로 하고 자살을 택하나?’ 이렇게 나름 심각한 고민에 빠져 이런 저런 책을 뒤적여 가며 해답을 찾고자 한 적이 있었습니다. 어릴 적부터 불교집안에서 자라서 불교와 인연이 깊은 저이지만, ‘선과 악’ ‘죄’ ‘자살’에 대해서는 불교가 명쾌한 해답을 주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하루는 이런 제 마음을 선배 형사에게 토로했더니 성경책을 한번 읽어보라고 권해 주었습니다. 평소 성경을 그리스신화 비슷하게 허황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저였지만 그때만큼은 마음을 열고 성경을 펼쳐 보았습니다. 처음부터 읽기는 불편해서 성구사전을 활용해 키워드 별로 찾아 읽기 시작했습니다.  역시나 성경에서도 자살로 생을 마감한 인물들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무기담당 시종에게 검으로 자신을 찌르라고 명했다가 스스로 칼 위에 엎어져 죽은 ‘사울왕’, 다윗왕을 배신하고 집으로 돌아가 목매어 죽은 ‘아히도벨’. 그리고 예수를 팔아넘기고 목매어 자살한 ‘가롯 유다’. 이들 셋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했던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살까진 아니지만 자살 충동을 느꼈던 성경 속 인물들을 찾아보면 ‘엘리야 선지자’와 ‘사도 바울’이 있었습니다.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 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하고> - 열왕기상19:4  이렇게 엘리야 선지자는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고 하나님께 목숨을 ‘취해 달라’ 구하였다고 합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이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 고후 1:8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고 말했던 사도 바울 또한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 고 할 정도로 삶을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마주 했다고 합니다.  그 당시 저는 성구 사전에 키워드만 넣어서 찾아 본 정도이므로 ‘자살’에 대한 기독교적인 깊은 성찰까지는 못하였을지라도 어느 정도 사고의 전환은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답답한 마음이 조금은 해소되는 듯 했습니다. 사진 출처 - 게티이미지뱅크  2018년이 어느덧 한 달도 채 남지 않았고, 12월은 크리스마스가 있는 달입니다. 크리스마스나 연말연시, 이 시기는 고독감이 증가해 자살이 늘어난다고합니다. 우리나라는 지난 2016년 기준 자살 (1만 3092명), 교통사고 (4292명), 산재사고(969명) 등 총 1만 8353명이 사망했고 10만 명당 자살률에서 25.8명(OECD국가 평균 11.6명)으로 1위를 기록했습니다. 지난 5년간 이웃 나라 일본은 자살예방사업 예산에 3조 3000억 원을 투입했고 같은 기간 우리나라는 417억원을 투입하는데 그쳤습니다. 일본은 이 같은 정책적 뒷받침 이후 인구 10만 명당 자살자 수가 5년간 21.4명에서 16.7명으로 지속적으로 감소했다고 합니다.  우리도 일본처럼 자살예방관련 예산을 대폭 확대하여 자살률을 점차 줄여나갈 수는 있겠지만 그것보다 더 빠른 방법은 내 주변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는지 먼저 잘 살펴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파괴를 통해 진정한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는 없고 그러한 죽음은 남겨진 이들의 마음까지도 병들게 합니다. 새해에는 부디 외로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줄어들기를 바라고 당부하건데 주변에 힘듦을 겪고 있는 분들이 있는지 찾아보시고 있다면 주저 없이 관심과 사랑을 나누어 주시길 바랍니다.
2018-12-11 | hrights | 조회: 1341 | 추천: 5
이동화/ 아디(아시아인권평화디딤돌) 활동가  중동의 화약고로 불리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 분쟁은 한반도 분쟁과 더불어 현대사에서 가장 고질적인 분쟁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 분쟁의 원인을 종교간 갈등이나 테러와 안보간 대결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 분쟁의 원인은 줄곧 이스라엘의 ‘영토 확장’ 계획 때문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영토 확장’ 계획은 현재 팔레스타인 거주지내에 만들어지고 있는 ‘불법유대정착촌’으로 실현되고 있다.  유대인들의 종교사회적 집단 거주지인 유대정착촌은 팔레스타인지역내 소수 공동체로 오랫동안 주변 아랍무슬림과 공존했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이후 영국의 벨푸어 선언(팔레스타인지역에 유대국가 건설)으로 유럽의 유대인들이 대거 이주하면서 원주민인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쫓아내는 등 현재 이팔분쟁의 씨앗이 되었다. 이후 1948년 이스라엘 건국과 4차례의 중동전쟁을 통해 유대정착촌 지역도 급속도로 확장됐고 그 결과 수백만의 팔레스타인 원주민은 난민신세로 전락했다. 하지만 제네바협약과 헤이그협약과 같은 국제법은 ‘1967년 중동전쟁 이후 이스라엘이 차지한 현재의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는 무력점령지역이며 점령지역의 거주민을 쫓아내서도 점령국인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주시켜서도 안 된다’고 확고히 말하고 있다. 이런 이유에서 팔레스타인 내 유대정착촌은 ‘불법’인 것이다.  ‘불법유대정착촌’은 국제사회의 압박과 미국 주도의 평화협상 과정 속에서 일시적으로 가자지구에서 철수되며 변화를 거듭하다가 2016년 후반 친이스라엘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폭발적인 수준으로 증가하게 된다. 아디의 ‘2018 이스라엘 불법정착촌 인권실태보고서’에 따르면 2017년 팔레스타인지역에 건설예정인 ‘불법유대정착촌’은 그 전년도에 비하여 4배 이상 증가했는데, 특히 동예루살렘 지역에서 ‘유대화’사업 일환으로 집중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2018 아디 팔레스타인 활동보고회 모습 사진 출처 - 필자  이스라엘 정착촌 건설로 인하여 팔레스타인 사람의 인권침해는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2017년부터 2018년 8월까지 700채의 팔레스타인 소유의 건물이 철거되는데 그 중에는 유치원이나 학교도 포함되어 있었다. 총 951명의 거주민이 강제이주 당했고 퇴거 명령에 불응한 팔레스타인 마을은 파괴되고 거주민들은 구금되었다. 이스라엘 불법정착민에 의한 폭력도 한층 심각해졌는데 대표적으로 올리브나무 훼손, 토지 강탈, 농장 접근 차단, 무단점거, 물리적 폭행, 마을 공격, 재물훼손 등 다양한 폭력이 보고됐다. 이스라엘 정착촌의 지하수 독점과 장벽, 도로 건설로 인한 팔레스타인 전체 사람의 이동권 제한 등 다양한 인권침해 사례도 발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디가 보고서 작성과정에서 두 차례 현지조사방문을 통해 만난 대부분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 지역이 어느 한 국가의 소유가 아닌 2국가체제(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두 국가가 공존하는 체제)가 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하지만 기존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내쫓으며 건설되는 ‘불법유대정착촌’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생존을 위협하는 심각한 위험요소일 수밖에 없다.  최근 숙박공유업체인 에어비엔비는 팔레스타인 서안지구내 ‘불법유대정착촌’에서 운영하는 숙소명단을 제외한다고 밝혔다. 국제사회는 이미 ‘불법유대정착촌’을 ‘불법’이라 명명하고 다양한 압박을 가하고 있지만, 한국 정부는 팔레스타인을 여행제한지역으로 설정하고 지역의 폭력성과 심각함만을 강조하는 정도이다. 이 간극을 메우기 위해선 한국의 시민사회가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할 듯하다. 
2018-11-28 | hrights | 조회: 1459 | 추천: 7
이상재/ 대전충남인권연대 사무국장  지난 11월 1일, 대법원은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해서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형사 처벌하는 것은 양심의 자유에 대한 과도한 제한이라며, 종교적 이유로 입영을 거부한 여호와의 증인 신도 오 모 씨에게 무죄 판결했습니다.  내년 말까지 대체복무제 법안을 마련해야 하는 상황에서 나온 대법원의 이번 판결은, 매년 수백 명의 젊은이가 양심적 병역거부를 이유로 교도소로 가고 있는 현실을 고려한다면 늦었지만 그나마 다행인 판결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대법원판결이 나오기 훨씬 이전부터 양심적 병역거부나 대체복무제 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접했던 반응은 부정적인 것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인권교육을 할 때 간혹 양심적 병역거부를 언급하면 군대를 제대한 남성 중에는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하는 분들이 있었고, 어떤 교육 때는 아들이 군대를 다녀온 중년 여성의 항의를 받기도 했습니다.  인생의 황금기라고 할 수 있는 청년 시절에 2년, 혹은 3년 가까이 거의 반강제로 군대 생활을 하고 왔기에 아무리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양심과 종교의 자유라고 해도 병역의 의무를 거부하는 결정을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부정적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사실관계의 오해, 분단 상황의 특수성과 헌법적 의무로서 병역을 우선시하는 태도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특히 한국 남성이 병역의 의무에 대해서 가지는 ‘억울함과 불평등’의 감정도 그 이유 중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남자들만 모인 술자리나 모임에서는 어렵지 않게 각자의 군대 시절 경험을 들을 수 있습니다. 군용 모포 한 장만 덮고 밤새 군용트럭 화물칸에 누워서 충북 충주에서 동해안의 어느 도시에 있는 부대까지 갔던 얘기, 수해 현장 대민지원을 하러 갔는데 굴삭기로 몇 시간이면 할 일을 부대원 전체가 땡볕에서 온종일 고생했던 경험, 다쳐서 군 병원에 누워 있는 아들을 재빨리 대학병원으로 옮겨서 ‘제대로’ 치료받게 했던 어느 아버지의 무용담까지 대한민국 군대에서 사병들의 경험은 일반적인 사회생활에서라면 쉽게 일어날 수 없는 불합리와 편법, 비인권적인 것들이 대부분 이었습니다.  게다가 월급이라고 부르기엔 민망할 정도라서 ‘애국페이’ 라고 폄하 받는 병사 월급까지 생각하면 군대를 다녀온 남성들이 병역의무를 하지 않는 남성들에게 가지는 ‘억울함과 불평등’의 감정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그 억울함과 불평등의 해결이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모두 1년 6개월간 교도소에 보내는 방법이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불편하고 억울한 시간을 보냈다고 해서 다른 이의 특수성과 환경을 무시한 채 나보다 더 심한 고통을 겪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소수자의 특수성을 무시하는 폭력적인 차별행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대체복무제의 한 방안으로 검토되고 있는 현역 복무자의 2배 이상 기간을 교도소, 소방서 등에서 복무하게 하자는 것 또한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대체 복무를 일종의 징벌로 간주하는 것일 뿐입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여기서 정말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대한민국 군대의 여러 가지 불합리하고 반인권적인 측면은 그대로 놔둔 채 어떻게든 군대만 가면 다 괜찮은 것일까요?  병역 비리를 막기 위해 웬만하면 현역판정을 하는 바람에 군대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관심병사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현역 입대 위주의 병역 정책에도 불구하고 출산율 저하에 따른 청년 인구 감소로 현재 60만 명 수준인 한국군 병력 규모는 몇 년 후에는 50만 명 이하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에 맞는 미래지향적인 군대 운영 전략은 현재까지는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400명이 넘는 장군 숫자가 말해주는 것처럼 나라를 지키러 간 대한민국 군대의 많은 장병은 장군과 영관급 장교의 뒤치다꺼리를 하며 청춘의 소중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작년 현역 장군의 공관병 갑질 사건이 충격이었던 것은 장군과 부인의 갑질 행태뿐만 아니라 현역 군인이 병역의무를 장군 공관의 가정부나 정원사 역할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군대 비리는 잊을 만하면 계속 적발됩니다. 여군의 숫자는 늘어 가는데 상관의 폭력에 의한 군대 내 각종 성폭력 범죄도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더 한심한 것은 그 처리도 일반 직장과 사법 기준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이 가해자인 상관에게 너그럽습니다.  우리나라 군대에는 거의 절대적인 존재인, 그래서 주권국가의 필수적 요소인 전시작전권도 넘겨준 미국 군대에서도 2016년에 이미 육군 장관에 동성애자인 에릭 페닝이 취임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군형법은 영외에서 개인 사이 합의하에 이뤄지는 동성애까지도 처벌하고 있습니다.  물론 수십 년 전에 비하면 최근의 군대가 좋아진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군대 갈 나이 즈음의 젊은이에게 대한민국 군대는 웬만하면 피하고 싶은 존재인 것이 사실입니다.  지원하는 일부 부대를 제외하고 의무 복무를 다녀온 남성에게 병역 복무 기간 동안 자기 계발을 하고 애국심이 높아지고 삶에 대한 만족도도 좋았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은 거의 없습니다. 우리나라 군대는 대부분의 젊은이에게 그냥 어쩔 수 없이 갈 수밖에 없는 곳일 뿐입니다. 그래서 자신도 이렇게 가기 싫은 군대를 갔다 왔기 때문에 양심적 병역거부자에게도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비난과 욕을 퍼붓는 양상이 계속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제대한 군대 방향으로는 오줌도 누지 않겠다며 싫어했던 군대인데 우리 사회는 이상할 만큼 그런 군대의 변화와 개혁에 대해서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처럼 입을 다물어 버립니다. 이상하고 좋지 않은 군대이지만 다녀왔으니 그만이고 내가 고생하고 싫어한 만큼 다른 사람들도 어쨌든 꼭 가야 하는 곳이 군대입니다.  분단국가의 특수성을 고려할 때 완전 모병제까지는 힘들더라도 자발적 징병제나 독일 징병제 시절처럼 10개월만 복무를 하더라도 전투력이 유지될 수 있는 방안도 연구하고 고민해야 하는 것입니다. 낮은 출산율로 줄어드는 병력과 인공 지능의 시대임을 감안할 때 최저임금에 근접하는 병사 월급도 불가능한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이 힘들다면 이스라엘처럼 제대 후 교육, 주택, 결혼에 대한 지원금을 주는 것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군 행정의 민간화는 군대의 비리와 불합리를 상당부분 개선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군의 변화가 실제 이뤄진다면 군대 기간이 인생의 더하기가 되고 미래를 준비하는 알찬 기간이 되는 것도 가능할 것입니다.  고단했던 의무복무에 대한 분풀이 수준으로 양심적 병역거부를 반대하고 징벌 수준의 대체 복무를 주장하는 것은 이 사회에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정말 가고 싶은 군대까지는 아니어도 군대 경험이 사회진출을 위한 부담이 아닌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는 수준으로 변화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헌법에서 보장하는 기본권인 양심의 자유를 지키려는 이들에 대해 타박하는 것보다는 변하지 않는 군대를 비판하고 이제부터라도 대안을 세우는 것이 우리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더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어쨌든 가야하고 갔다만 오면 끝나는 군대가 아니라 가야 하는 그 군대가 어떤 군대인지 살피고 변화시키려는 노력이 중요한 때입니다.  초등학생인 제 아들이 군대에 가려면 12~15년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습니다. 그때가 되어도 징병제가 남아있다면 그냥 자연스럽게 큰 부담 없이 군대에 가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2018-11-14 | hrights | 조회: 1077 | 추천: 6
- 장애인이 나오는 영화! 장애인 문제를 다룬 영화? 장애인이 만드는 영화......  - 김형수/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사무국장 「김 교수님이 새로운 학설을 발표했다. 소리에도 뼈가 있다는 것이었다. (중략) 한 학기 내내 그는 모든 수업 시간마다 침묵하는 무서운 고집을 보여주었다.(중략) 그의 견해는 너무 난해하여 곧 묵살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그 다음 학기부터 우리들의 귀는 모든 소리들을 훨씬 더 잘 듣게 되었다. 」 ( 1984. 기형도 시집 [입속의 검은 잎] 중에서 소리의 뼈.) 우리에게 지금까지 보여진 것들·····  왜 장애코드이고 장애인 캐릭터인가?  ‘문화’는 타일러(Tylor, 1871. 1. 1)가 정의하듯, 한 사회 집단이 공유하는 생활양식의 총체(a whole way of life)로써 지식·신앙·예술·도덕·법·관습 그리고 한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인간에 의하여 획득된 능력과 습성을 포함하는 복합적인 전체다. 뒤집어 말하면 어느 특정한 집단의 능력과 습성, 즉 그 존재성을 구별할 수 있고 인식할 수 있는 ‘실천’ 및 ‘행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는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현대의 영향 있는 문화 ‘매체’다. (ex. 도가니 2011, 감독 황동혁)’에서 목격하듯이. 또한 그 자체가 또 하나의 ‘문화’를 이루고 있다. 수많은 지역에서 진행되는 장애인 영화제와 제작되고 있는 장애인 영화들 다큐멘터리 등등에서. (ex. 글러브 2011, 감독 강우석). 그렇게 영화는 문화의 산물이자 문화의 ‘도구’이다. 또한 산업이기도 해서 소비되고 소모된다. 산물이자 도구이며 산업이기 때문에 영화의 구성요소와 코드들과 기호들은 서로 관계가 있고 서사적이며 권력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영화는 ‘극장의 우상’ 효과와 ‘동굴의 우상’ 효과를 함께 일으킨다. 우리는 영화가 전달하는 이야기를 영화관에 불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성찰하거나 피드백하기 어렵다. 그 상태에서 우리는 영화가 전해주는 사물이나 대상을 바라보는 가치관 및 관점을 보고 따라가고 몰입하고 감동한다. 영화의 막강한 힘은 매체로서의 파급력(필름 복사를 통해 전 인류가 동시간대에 볼 수 있다)으로 드러나는데, 이는 사람들의 물리적 공간을 재배열하고 일상생활의 많은 활동들과 장소들을 시간적으로 재조직하면서 우리 사회의 관계 자체를 변화시킨다.  그래서 문화로서의 영화는 기존의 생각을 바꾸어 놓기도 하고 새로운 가치를 일깨워 주기도 하지만, 왜곡된 가치관이나 잘못된 관점을 부여하기도 한다.1)  영화는 진실을 만들고 진실을 발견하기도 하지만, 본의든 아니든 간에 진실을 숨기고 왜곡시키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영화 속 캐릭터로서의 장애인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거 대부분의 장애인 영화 - (여기서 ‘장애인 영화’는 공식 용어가 아니다. 장애인 영화가 여성 영화나 페미니즘 영화나 퀴어 영화처럼 정체성을 가지고 장르화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 -가 ‘장애인의 것’과 ‘비장애인들의 것’을 확연히 다른 것처럼 억지로 나누고, 다시 그것을 서로 비교하여 충돌시키면서, 그 관계를 긍정적으로 재통합시키지 못하고 되레 왜곡시키고 있다. 왜냐하면 절대 다수의 비장애인 관객은 장애인이라는 사회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존재를 영화라는 거대한 매체를 통해 우선 접촉하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 영화에서의 장애 코드는 이야기의 논리성과 상상력을 완결하기 위해서 표현되는 장애를 가진 인간 캐릭터의 ‘완성’이나 ‘발견’이 아니라 인간 캐릭터의 왜곡과 두려움, 상징이 주된 목적이었다. 장애 코드를 영화 기호화 하는 것은 장애를 가진 당사자가 등장한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게 그들은 대상화 되었고 그들의 장애는 커밍아웃하는 것이 아니라 강제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아웃팅 되어왔다. 또한 장애 자체나 장애인이란 캐릭터가 영화라는 것과 직접적으로 긴장 관계를 가진 것은 한국 영화에서는 얼마되지 않았다. 한국 영화에서의 장애코드나 장애인의 등장은 주로 문학과 텍스트영역에서 변용되고 각색되고 재구성되어왔다. (ex. 소설 <백치 아다다> - 1935년 5월 조선문단에 발표한 계용묵의 단편소설이 1956년과 1987년 두번에 걸쳐 영화로 만들어 졌다. 1956년은 이강석 감독에 의해 ‘백치 아다다’, 1987년엔 임권택 감독에 의해 ‘아다다’라는 이름으로 개봉됐으나 영화적으로 재창작되는, 즉 패러디되거나 풍자됐다고는 보기 어렵다. ) 우리나라 영화 중에 ‘만종’(An Evening Bell, 1970)이란 영화가 있다. 한국 영화중 최초로 수화가 비중있게 나오면서 농아인 연인들이 우여곡절 끝에 결혼을 한다는 이야기인데 둘 사이에 결합을 방해하는 것으로 한 의사가 ‘장애가 유전된다’는 잘못된 정보를 활용하는 부분이 나온다. 이 영화가 수화를 사용하는 남녀 주인공이 등장한다는 의미이외에도 그 시대의 장애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도 잘 드러내고 있다.  이런 흐름이 90년대까지 이어 오다가 2000년 초 각종 인권영화와 여성 영화 및 퀴어 영화들의 등장으로 장애 코드와 장애인 캐릭터는 본격적으로 영화 자체와 긴장 관계를 가진다. (ex. 오아시스 2002. 감독 이창동.) 영화 ‘오아시스’의 등장은 영화에서 장애코드와 장애인 캐릭터의 본격적인 논쟁의 시작이었다. 영화 기호로서의 장애여성에 대한 묘사, 이야기, 비장애인 주연 배우가 장애 연기를 하는 것에서 촉발된 장애인 당사자 배우 등장에 대한 논쟁 등이 그것이다. 장애인을 연기했고 장애인 문제를 다루었던 것이 장애인 영화냐 아니냐 하는 장르적 토론까지 영화적 담론을 뜨겁게 끌어냈던 영화였다. 아마도 감독이 가족 중에 장애인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영화 기호로서의 장애와 영화 주제로서의 장애인 또는 장애 코드 등등. 즉, 어떤 주제를 그 영화에서 잘 형상화 해내기 위해 장애인이 그려졌는가? 아니면 장애인을 형상화한 영화인가? 하는 문제의식이었다. 2)  그리고 이런 영화를 시대 흐름에 따라서도 분석하고 분류했다면 글쓴이가 드러내고 싶은 주제의식이 –고정 관념의 변주와 확장에 따른 장애인 캐릭터의 변화- 이  더욱 분명해 질 수 있겠다.     매체는 문화적 경험을 매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라는 메시지를 그 매체를 통해 무의식적으로 강요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 위협받게 되는 문화적 경험을 결정한다.  이는 비장애인에게나 장애인에게나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과거에 영화를 통해 드러난 장애 코드는 장애인에게는 자기 장애를 극복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을 심어 주고 비장애인에게는 장애인들은 우리가 먼저 이해하고 무조건 사랑해 주어야 한다는 인식을 심어 준다. 그리고 우리들은 은연중에 삶의 방식을 강요받게 된다. 장애인을 약하거나 나쁘게 혹은 왜곡되게 그리는 영화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을 있는 그대로 다양하게 그리는 영화가 없다는 사실을 비판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미 짜여진 의식이나 틀에 의해 만들어진 장르로서의 장애인 영화는 역설적이게도 끊임없이 파괴되어야 한다. 장애 코드도 마찬가지다.  이제 우리가 보아야 할 것들······.  “청각장애라는 것은 장애(handicap)가 아니다. 이것은 문화이고, 언어이다. 그리고 나는 청각장애인인 것을 자랑스러워한다. 만약 의학이 발달해 내 청력을 돌아오게 할 수 있다 하더라도, 나는 결코 그것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결코, 결코 내가 죽을 때까지...”   미식축구선수 영화배우청각 장애인 존 림니즈 청각장애는 또 다른 문화다. (The Deaf Celebration of Separate Culture)  나의 개성, 나의 장애, 나의 영화. 우리는 결코 성립되지 않는, 적어도 납득할 만한 규정이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 용어들을 아주 쉽게 사용하곤 한다. 일상에서야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대충 소통이 되지만 사실은 분명치 않은 용어 말이다. 그런 용어 중의 하나가 바로 ‘영화 언어’이다. 앞으로 규정해야 할 대상이 그 규정 전에 전제되는 논리의 오류가 발생한다. 장애가 무엇인가에 대한 규정도 할 수 없으면서 영화에서 장애 코드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장애인이 등장하는 (비장애인이 등장하는 또는 장애인이 직접 연기하는) 것이 장애 코드인가? 장애인 문제를 다루면 그게 영화에서 말하는 장애 코드인가? 장애인 감독이 연출하고 영화에서 장애인들이 직접 자문을 해주면 장애 코드가 충실히 반영된 영화인가?  장애인의 문화 행위와 문화 실천이 ‘문화’ 그 자체로 인정받을 수 있으려면, 먼저 ‘장애(Disability)’ 자체가 문화적으로 가치 있어야 한다. ‘장애(Disability)’가 문화적으로 가치를 지닌다면 ‘장애인’ 역시 문화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할 수 있을 것이고, 문화적으로 가치를 지닌 ‘장애(Disability)’ 상태의 사람들이 생산하고 누리고 즐기는 문화 역시 사회적인 힘과 영향을 지닌 문명으로서의 ‘장애인 문화’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꼭 항상 긍정적일 필요도 없고 좋을 필요도 없다. 다양하고 풍부하게 있는 그대로 영화에 나오면 그만이다. 장애가 흡연보다 나쁘지는 않으니까. 3)  ‘장애’가 과학적으로 사회적으로 가치 있음을 검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핵심은 ‘장애’ 자체가 문화적으로 가치 있다고 믿고 신념으로 확인해야 우리들에게 그 가치가 부여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장애’가 가진 소수성을 창조하고 획득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소수성을 창조하고 획득하고 확인 하는 과정을 통해 영화에서의 장애 코드는 완성될 것이다.   tvN 드라마 ‘마이 디어 프렌즈’처럼, 주인공이 3년 전에 사고 당했다는 설정을 고려하면 오히려 사실적이다.    미국 영화 ‘SuperHero Movie (2008, 한국제목:잠자리맨)’를 보면 유명한 장애인 과학자 ‘스티븐 호킹’이 온갖 비속어를 내뱉으며 자기비하를 일삼아 관객들에게 웃음을 주는 패러디 장면이 나온다. 우리나라에서는 코메디 프로그램이나 영화 등에서 장애인을 비하하는 장면이나 대사가 가끔 등장하면 미국에 비해 훨씬 민감하게 반응하며 사회물의를 일으키기도 하는데, 그 미국 영화의 개봉 이후 호킹 박사나 장애인 단체 등이 문제제기를 하거나 소송을 했다는 소식은 찾을 수 없다. 왜 그럴까? 외국의 경우 개그의 소재로 장애인이 등장해도 별문제가 없는 것은 아마도 누가 보더라도 장애인 당사자라고 인식할 수 있는 캐릭터가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이면을 폭로해 웃음을 유발하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은 아닐까?  논의를 막는 도구로써 문화는 장애인 개인이나 집단의 개별성으로 도드라지는 문화가 아니라, 장애인들이 비장애인들의 주류 문화에 용해되어 자신들의 장애를 ‘극복’하거나, 불굴의 의지로 인간 승리를 하거나, 가능하다면 적극적으로 감추어야 하는 것으로써 ‘장애’를 사회화시키는 중요한 기제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가 끊임없이 중요한 주제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정치의 이용가치 때문인지도 모른다. 장애인과 그의 장애가 뭔가 멋있고 강력하고 폼나는 것으로 표상된다면(피터팬의 후크선장처럼), 장애가 손해나 패배로 작용하지 않는다면(미국 드리마의 명탐정 뭉크처럼), 그런 문화실천과 행위로 문화를 생산할 수 있다면, 장애인의 문화 그 자체가 장애인의 정체성을 바로 세워주고 그들에게 자부심의 권능을 심어주고 그들의 삶에 긍정적인 에너지로 발산하게 될 것이다(미국 애니메이션 ‘드래곤 길들이기’의 절단 장애 소년 주인공과 투슬리스 용처럼). 자신의 장애가 인생의 멍에나 고통이 아니라 뛰어난 문화 콘텐츠 아이콘으로 변환된다면, 장애인의 장애를 기적과 구원의 대상이 아닌 향유하고 즐겨야 할 예술로 만들어 낼 수 있다면, 비장애인으로 하여금 그 문화를 닮게 할 수 있다면 장애인 문화는 그 자체로 가치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미국에서 시청률 1, 2위를 달렸던 미국 드라마 ‘Glee’를 보면 실제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는 소녀가 고등학교 치어리더로 등장하면서 극의 진행을 이끌고 있으며, 유명한 ‘C.S.I’에서는 시즌별로 약 2편씩 발달장애인 당사자를 주인공으로 에피소드가 진행된다.  그리고 철저하게 자폐인의 관점에서 미국의 동물학자를 다룬 영화 ‘템플 그랜딘(Temple Grandin)’도 개봉했다. 그 실존 주인공은 정보 공유 강연 사이트(Ted)에 나와 15분 동안 ‘우리 사회는 왜 자폐를 필요로 하는가’란 제목으로 대중강의를 진행하기도 했다. 미국 제작자들은 반드시 제작 과정에서 장애인 당사자들을 참여시킨다. 이는 장애인 당사자들을 실제로 주연 배우로 등장시켜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그들의 삶을 세밀하고 일상적으로 그리기 위해서다. 그렇지 않다면 극으로서의 재미도 떨어지지만, 장애인 당사자에게 당장 장애인차별금지법으로 고소당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미국에서 코미디 소재나 풍자의 소재로 발달장애인이 희화화된다 하더라도 넘어갈 수 있는 것은 장애인 당사자들 스스로 그것에 대한 방어권을 행사할 기회가 많을 뿐 아니라 희화화한 것 외에도 장애인을 멋있고 능력 있게 그려낸 다른 다양한 콘텐츠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영화 스타워즈 다스 베이더처럼, 영화 아이언맨처럼. 그리고 아카데미 최연소 최초 여우주연상을 받은 농아인 배우 말리 매틀린(Marlee Matlin) 4)처럼.  템플 그랜딘(Temple Grandin, 1947년)은, 보스턴 출신 미국의 동물학자이다. 비학대적인 가축시설의 설계자이며, 콜로라도 주립대학 준교수이다. 초등학교 졸업 후 좋은 지도자를 만난 덕분에 1960년대에는 뉴햄프셔 주 린지에 있는 기숙학교 햄프셔 컨트리 스쿨에 들어가 1970년에 프랭클린 피어스 컬리지에서 심리학 학사, 1975년에는 애리조나 주립대학 에서 동물학 석사, 1989년에 일리노이 대학에서 동물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010년 그녀의 이름을 딴 극 영화가 제작되어 2011년 1월 미국 LA서 열린 제17회 미국배우조합상(SAG) 드라마 부문 여우주연상을 받기도 했다. 물론 장애인당사자가 주인공을 맡지는 않았지만 그 누구도 이영화가 당사자의 관점을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근자에 와서야 1960년대 바보 캐릭터 ‘영구’가 만든 발달 장애인에 대한 이미지를 ‘내 마음이 들리니’라는 드라마를 통해서 겨우 넘을 수 있었고, 영화 ‘도가니’를 통해 장애인의 현실을 ‘착한 일’, ‘좋은 일’로, 도덕적 면죄부에서 벗어나 외면하고 있던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다. 이제야 시각 장애인을 그릴 때는 시각 장애인에게 물어보고 청각 장애인에게 자문을 구하고 그들을 참여시키기 시작했다.  우리는 언제쯤 장애인 배우가 주인공이 되는 영화를 스크린에서 볼 수 있을까? 장애를 극복하지 않고 인정하는 것이 진정 자아를 찾아가는 올바른 길임을 강조하고, 굳이 장애코드를 드러내지 않고 장애인을 등장시키며 네 장애는 가치 있고 의미 있다고 재미있게 설득하는 ‘X-man’이나 ‘닥터 스트레인지’ 같은 영화를 만날 수 있을까?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며 본질을 통찰하고 다름을 인정하고 익숙해지자는 류 감독의 장애인 캐릭터 상의 시도는 중요한 출발이 될 것이다.  이와 더불어 문학에서 예능으로, 그리고 사진 영역으로까지 넓혀보자. 그래서 장애인을 문화 속에서 새롭게 해석하고 새롭게 창조해보자. 물론 이를 위해서 장애인들의 영화적 창작 활동이 적극적으로 확대되어야 할 것이고 기존 영화마당에도 장애인 당사자들이 더욱 많이 뛰어 들어가야 할 것이다. 메가폰을 들고, 카메라를 들고, 조명판을 들고, 시나리오를 들고서. 특히 보다 많은 지적 자폐성 장애인들이, 정신 장애인들이, 희귀 장애인들이.      「당신의 편견에 도전하라. 아니면 그것들이 당신에게 도전할 것이다. - 미국 드라마 스타트렉 엔터프라이즈 시즌 1기 4부 중에서」 1) 우리가 문둥병이라고 잘못 부르는 한센병은 현대에 와서 의학적으로는 단순 전염성 피부병에 불과하다. 하지만 여전히 ‘문둥이’란 단어는 그 어떤 모욕어나 차별어보다 그 힘이 강하다. 문둥병이란 호칭은 단지 당사자에 대한 차별을 넘어 아직까지도 자식들이 파혼까지 당할 수 있는 세대간 차별이나 전지구적인 모욕을 야기한다. 오죽했으면 지난 1월 일본의 유엔 친선 대사가 "폐기된 용어를 차별적 의미로 사용"한다고 개탄하면서 "문둥병"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말자고 촉구하고 유엔인권위원회에서 결의문까지 발표했을까? 한센병에 대한 이해할 수 없는 공포를 사회화 시키는 가장 강한 무기 중 하나가 ‘영화 벤허’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아직 그것을 뒤집을 만한 영화는 나오지 않았다.   2) 전자의 대표적 예인 찰리 채플린의 <City Lights>에 나오는 시각 장애인인 꽃 파는 소녀는 이 영화에서 하나의 영화적 형상화를 거친 언어일 뿐이었다. 채플린은 시각 장애를 가진 소녀가 어떻게 해서 룸펜을 재벌이라고 여기게 되는가를 형상화 해내야 했다. 그래서 마침내 그는 교통이 매우 혼잡한 곳을 오락가락하다가 모퉁이에 주차해 있는 리무진의 한쪽 뒷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다른 쪽 문으로 나오는 방법을 썼다. 눈먼 소녀는 무거운 차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는 ‘재벌’이 값비싼 차에서 내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후자의 예로는 1995년 베니스 영화제 은곰상 수상한 팀로스의 비열한 거리 (1994)에 나오는 장애인 폭력배, 우리나라 영화 <그 섬에 가고 싶다>에서 심혜진이 밑은 정신 장애인, <고래 사냥>에서 이혜숙이 분한 실어증 언어 장애인등이 있다. 3) 뮤지컬 ‘킹키부츠’에서 주연 배우가 여장남자를 혐오하는 사람들에게 대응하는 대사를 변용했다. 4) 1986년 《작은 신의 아이들》로 영화 데뷔를 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이 데뷔작을 통해 아직까지 깨지지 않는 기록을 만들어 놓고 있다. 하나는 현재까지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유일한 장애인 연기자라는 기록이며, 또한 그가 수상했던 여우주연상은 해당 부문의 역대 최연소로 기록되고 있다(수상 당시 21세 218일). (출처-위키백과) 
2018-10-31 | hrights | 조회: 2883 | 추천: 4
서동기/ 대학생  강력 범죄가 발생한다. 가해자 X의 잔혹한 범죄와 피해자의 참혹한 피해가 연일 언론에 정밀하게 묘사된다. 가해자의 심신미약, 정신질환에 의한 형벌 감경 가능성이 언급된다. 분노는 더욱 타오른다.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는 강력 처벌을 요구하는 청원이 등장하고 많은 이들이 동참한다. 사악한 X의 신상 공개결정이 내려진다. 끔찍한 짓을 하고도 살아있는 뻔뻔한 X의 얼굴과 목소리는 브라운관과 4G, 5G의 인터넷망을 통해 실시간으로 전국에 중개되고 가해자에 대한 각종 분석과 피해자 가족의 고통에 찬 일상이 후속 기사로 따른다. 그리고 조금 뒤 X는 어디선가 등장한 또 다른 사악한 X’로 대체되어 있다.  며칠 전 친척들 여럿이 모였다. 대화는 ‘피시방 살인사건’으로 흘렀다. 어른들은 뉴스에서 본 범죄의 잔혹함을 공유하고, 아이들은 페이스북에 담당 응급실 의사가 올렸다는 글을 이야기한다. 범죄의 잔혹함에 치를 떨고, 사형을 해서라도 강력하게 처벌해 재발을 방지해야 한다고 분노한다. 그리고는 각자 조심하라는 안쓰러운 당부로 대화는 마무리된다. 누구나 이러한 사건이 재발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것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지 않나. 아마 이러한 사건은 다시 발생할 것이다, 하지만 그때도 비슷한 패턴으로 사건을 지나갈 수는 없지 않은가. 사진출처 - pixabay  우리 사회를 다시보자. 가해자의 가족을 끈질기게 쫓고, 주변인들을 찾아내어 온갖 가십들이 사명감에 찬 언론에 의해 근엄하게 보도된다. 이번 사건에는 담당 응급실 의사까지 등장했다. 피해자 담당 의사는 피해자의 참혹한 상태와 분노를 SNS에 작성한다. “목덜미에 있던 상처가 살이 많아 가장 깊었다.” 등의 자세한 설명이 이어지는 글은 20만의 공감을 받으며 퍼져나갔다. 담당의는 자신의 글이 ‘가해자의 엄중한 처벌과 진상 조사, 재발방지’의 도화선이 되길 바란다고 말한다. 언론의 사명에 찬 보도와 응급의학과 의사의 분노 표출은 무언가 닮아있다.  다수 언론의 보도와 모 의사의 사명감에 찬 분노를 보면서 ‘주석궁으로 탱크 진격’을 말하던 이른바 ‘대북강경파’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은 과도할까. 그들의 주장은 과격한 언어와 묘사를 기반으로 형체 없는 분노와 적대심만을 재생산한다. 그것이 결국 오래토록 분단 상황을 고착화해왔음을 우리는 경험했다. 이런 ‘수구적’ 행태에 언론과 모 의사의 선의에 찬 경솔함을 빗대는 것이 과도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는 우리 사회의 죽음과 사건사고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음, 해결의지 없음을 방증하는 것은 아닐까. 단지 분노에 차서 엄벌을 말하고 주목경쟁을 하는 것으로 우리는 아무 것도 넘어설 수 없다.  냉정하게 지금 우리 사회가 정밀 묘사해야 할 것은 무언인가. 통계청이 발표한 2017년 사망원인 통계에 따르면 작년 한 해 자살로 12,463명, 운수사고로 5,028명, 산업재해로 2,040명의 사람들이 세상을 떠났다. 하루에 자살로 34명, 운수사고로 14명, 산업재해로 5.5명이 죽었고 비슷한 숫자의 사람들이 올해도 죽고 있을 것이다. 한편 타살로 세상을 등진 이들은 지난해 총 415명이다. 과도한 분노 표출과 이를 자극하는 주목경쟁들이 가해자 하나를 엄벌에 처하자고 목소리를 높이는 동안 우리 사회의 주목받지 못하는 죽음은 그렇게 이어지고 있다.   엄벌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도 명확하다. ‘조두순 사건’ 이후 흉악범에 대한 처벌이 강화되어 유기징역의 가중 상한이 최대 50년까지 늘었지만 사악한 X는 X’가 되어 끊임없이 등장해왔다. 이것은 단순히 형벌의 강화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을 보여준다. 사명감에서 비롯된 비판(의식)과 범죄에 대한 분노가 단순히 가해자에게 엄벌을 내리게 하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분노와 엄벌을 넘어서는 논의와 정치, 장치를 마련해야 하는 숙제 앞에서 우리는 너무 비슷한 패턴으로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
2018-10-29 | hrights | 조회: 996 | 추천: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