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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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길주희(인권연대 연구원), 김성은(서울신문 기자), 김태형(프리랜서 방송작가),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박용석(출판업),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춘천별빛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이동화(아디 사무국장), 이라영(문화평론가), 이승은(행정사),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 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이회림/ 00경찰서  2020년 10월, 어느 아름다운 가을날 오후, 창밖으로 커다란 배롱나무의 자태를 감상하고 있는데 모르는 번호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택배 기사님이겠거니 하고 반갑게 받았습니다.  “네, 여보세요?”  “하하, 오랜만이네요. 접니다.”  모르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네? 누구신데요?”  “아~ 내 번호 삭제했나보네~ 하하, 000기자입니다.  2013년, 나름 정의로운 기자로 유명세를 날리던 A기자. 배롱나무 덕분에 즐거웠던 마음에 그림자가 드리워집니다. 택배 기사님들을 응대할 때와 180도 다른, 퉁명한 목소리가 흘러나옵니다.  “네? 갑자기 어쩐 일이세요?”  “아~ 이형사님 어떻게 지내시나 궁금해서 한 번 전화 해봤죠~ 잘 지내시나요? 나영이는 요즘 어떻게 지내요?”  머릿속에 전구가 번뜩하고 켜지는 느낌입니다.  ‘아하! 조두순 출소가 얼마 안 남으니 날 이용해서 기사 하나 쓰고 주목 받고 싶어서 이러는 구나, 으이구~ A기자 아직 정신 못 차렸군!’  저는 참으로 기가 막혔지만 일단 대답은 해줍니다.  “하이고~ 참내, 잘 지내긴 하는데요, 기자님 전화 하나도 안 반가운데요? 마지막 통화가 5년 전인가? 그 때 기자님하고 굉장히 안 좋게 대화하다가 결국 연락 안 하게 된 것 기억 안 나세요? 설마 그 대화들이 전혀 기억 안 나셔서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전화하신 거예요? 그리고 나영이요? 나영이 소식을 왜 물어보세요, 갑자기? 아~~ 알겠어요. 또 누가 옆에 계셔서 옆 사람 들으라고 일부러 전화하신 건가요? 전에도 그러시는 것 같더니 또 그러시네요~ 근데 5년 전 대화가 정말 하나도 기억이 안 나세요? 거참~”  그 당시의 황당한 감정이 저의 마음 속 어딘가에 있다가 울컥 올라 왔나 봅니다. “부끄러운 줄 아세요!” 라고 소리를 치고 끊고 싶었으나 그 말만은 참았습니다.  “아니~ 그때는 내가 잘못한 게 아니잖아~”  A기자 특유의 ‘다짜고짜 반말’이 흘러나옵니다. 문자와 전화로 사과를 줄기차게 요구했고 시정요구까지 했음에도 전부 무시하던 A기자. 정식으로 고소를 할 수도 있었지만 엄마의 암투병에 집중하고 싶어서 마음을 비웠던 그때 그 시절 황당한 일들이 기억 속에 생생한데 말이죠.  2013년 여름, 저는 A기자의 실체를 알지 못한 채, 마치 연예인처럼 메이킹된 이미지만을 신뢰한 나머지 나영이와 나영이 언니를 소개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나영이 아버님으로부터 정신과 치료를 해주실 의사선생님을 연결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던 터였습니다. 저보다는 인맥이 넓어 보이던 A기자에게 도움을 청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A기자는 이런저런 사정이 있다며 아무도 연결해 주지 못하고 시간만 흘려보냈습니다. 저는 더이상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다급히 인터넷 검색을 시작한지 하루 만에 무료로, 비공개로 치료해주실 분을 찾아냈습니다. 그 의사선생님들은 저를 직접 만나지도 않고도, 전화 통화 몇 번만으로 저의 마음 속에 들어갔다 나오셨는지 흔쾌히 결단을 내려주셨습니다.  5년 만에 전화 온 문제의 ‘A기자’는 본인의 ‘잘못’이 뭔지, 감도 못 잡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갑툭튀 전화를 일방적으로 했던 거겠지요.  저는 길게 통화하는 것이 의미 없다는 생각이 들어, “그리고 나영이요? 갑자기 전화해서 나영이요? 참내~ 할 말 없습니다. 끊습니다~” 라며 전화를 끊어버리고는 A기자의 번호를 냉큼 차단하였습니다.  A기자를 알게 된 건 서울의 모 수사부서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연락한 지 5~6년이 지난 시점인데도 뜬금없이 전화를 해 대놓고 ‘친한 척’을 하고 쉽게 말해 요즘 핫한, 기사 한 번 썼다 하면 검색어 1위에 금방 오르는 ‘나영이’를 물어 오는 그런 희한한 분이지요.  이런 사람의 마음상태는 도대체 뭘까요? 그리고 비단 A기자 뿐일까요? 빅토르 마이어 쇤베르거는 저서 <잊혀질 권리>에서 '역사가 있은 이래로 인류에겐 망각이 기본값이고 기억은 예외였지만 디지털 기술과 전 지구적 네트워크 때문에 이 구조가 역전됐다'라고 썼더군요.  2009년부터 나영이네 가족을 만나오면서 이 ‘잊혀질 권리’에 대해 줄곧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2년 전, 어떤 여성 기자에게 혹 ‘미국이나 유럽에서 범죄 피해자들에 대해 기사를 쓰기 전에 직접 허락을 받지 않으면 기사 생성을 아예 못하게 하는 법이나 규약은 없는지’ 물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곤 피해자들의 잊혀질 권리를 적극적으로 보호하는 시스템은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정도에 그쳤습니다.  조두순 사건이 일어난 2008년 겨울, 저는 관악경찰서 형사과에서 성범죄 피해자 담당조사업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안산에서 일어난 조두순 사건을 직접 수사하거나 관여한 적은 없었습니다. 나영이와의 인연은 2009년 시작되었습니다. 해바라기아동센터 직원께서 저의 전화번호를 나영이 아버지께 전달하면서였습니다. 저의 지인 중 한 분인 여성 산부인과 의사께서 평생 무료로, 그리고 비공개로 나영이의 진료를 봐주고 싶다고 하셨고 이를 연결해 드리면서 만나게 된 것이었지요.  2009년 이후부터 지금까지 가끔씩 만나, 초등학생에서 대학생이 되기까지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는 동안, 나영이가 저를 부르는 호칭은 ‘경찰언니’에서 그냥 ‘언니’로 바뀌었습니다. 저의 부모님 댁인 경주로 계절마다 여행을 가거나, 대학 입학 후에는 나영이 자매와 저, 셋이서 가까운 오키나와로 첫 해외여행을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나영이의 모든 것을 다 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함께 수다 떨고 놀고 여행을 다녀보면서, 그녀가 초등학생 때부터 어른도 웃기는 번뜩이는 유머감각이 있으며 섬세하며 자기만의 세계가 확고한 친구라는 것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나영이에게 관심을 보인다고 해도 무조건 믿고 따르거나 가볍게 감정을 표현하는 편이 아니라, 굉장히 강인한 성격이 밑바탕에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얼마 전 우연히 어떤 예능 프로그램에서 ‘조두순 사건’을 다루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거기 출연한 여러 연예인 패널들이 함께 마음 아파하고 걱정하는 말씀을 계속 하시더군요. 연예인들만 계신 것이 아니라 범죄분야 전문가도 계셨고요. 저는 그 방송을 보면서 굉장히 가슴이 답답하고 기가 막혔습니다.  조두순 출소를 앞두고 다시 떠오른 각계각층의 과도한 관심이, ‘나영이’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를 제발 좀 생각하기 바랍니다. 생각을 한 후에 기사를 쓰고 TV프로그램을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전 국민의 트라우마처럼 되어 버린 그 사건의 주인공은 조두순이 아니라 ‘나영이’여야하고, 그 사건이 기사화됨으로써 금전적인 이익을 보는 사람은 글 쓴 기자가 아니라 ‘나영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영이를 동정하고 걱정하고 함께 마음 아파하느라 조두순 얼굴의 정면 사진을 누구나 알 수 있어야 하고, 나영이조차 원하지 않아도 그 얼굴을 사진으로라도 마주치게 된 이 상황, 여러분은 이상하지 않으신가요?  모든 범죄 피해자(생존자)들에 대해서 기자가 글을 쓰고 PD가 프로그램을 만들 때 직접 허락을 받아야만 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나영이처럼 대학생이 된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과도한 미디어에 노출되고, 이용당하고, 검색만 하면 튀어나오는 가해자의 얼굴을 감내해야 되는 사람이 지금 대한민국에 또 있을까요?  피해자(생존자)들이 자신의 트라우마를 사람들 앞에서 직접 SPEAK OUT하는 것이 가장 높은 단계의 극복법이라며 나영이가 그런 방법을 써서 극복하기를 기대한다면 그 기대는 망상이고 허구입니다. 본인의 결정으로 직접 책을 쓰거나 연단에 오르지 않는 이상, 나영이의 허락을 받지 않고 끊임없이 기사로, 방송 프로그램으로 상기시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모든 것이 피해자(생존자)들에게는 2차 가해로 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대학교 2학년인 나영이는 엄연히 성인입니다. 모든 선택과 결정은 부모님이 아니라 나영이 본인이 해야 한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부분입니다. 사진 출처 - freepik  건강한 늑대와 여성은 심리적으로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둘 다 예민하고, 장난스럽고, 강한 희생정신을 지니고 있어, 호기심이 강하며 엄청난 힘과 지구력을 가지고 있다. 또한 아주 직관적이고 자식과 배우자, 그리고 가족을 끔찍이 아끼며 끊임없이 변하는 환경에 잘 적응하며 씩씩하고 용감하다. 그러나 이들은 이리저리 내몰리고 학살당해 왔으며 열등한 존재라는 오해를 받아왔다. 늑대와 여성들은 자기들을 오해하는 이들에게서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취급을 받아왔다.  최근에 읽은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 -Women who run with the wolves>이라는 책에서 가져왔습니다. 저는 범죄 피해자(생존자), 특히 나영이 같은 아동 성범죄의 생존자에게서 ‘늑대’의 기운을 느낍니다. 우리들의 늑대 ‘나영이’는 극한의 신체적, 정신적 고통 앞에서도 고군분투하며 웃음을 잃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조두순’이라는 인물은 어른들이 만든 온갖 더러움과 악함을 대표하는 인물 중의 하나일 뿐이지만, ‘나영이’는 매우 특별합니다. 부디 특별한 사람만 특별하게 대해주시기를 호소합니다.  ‘조두순’같은 찌질하기 그지없고 특별할 것도 없는 범죄자는, 전 국민이 그 얼굴을 프린트해서 갖고 다니지 않더라도 하늘이 가만 두지 않습니다. 지난 12년 동안 ‘할 수 있었고, 해야 하지만, 하지 않은 일’을, 어른들이 상기하기 바랍니다. 안타깝지만, 세상이 그렇게 흘러온 것을 어찌하나요? 지금부터가 중요하지 않을까요?
2020-11-04 | hrights | 조회: 2563 | 추천: 66
주윤아/ 교사  이제 포스트 코로나(Post-COVID19)를 말하기보다는, 위드 코로나(With COVID19)로 코로나와 함께 살아가는 일상을 받아들여야 한다고들 말한다. 어디를 가도 마스크를 안 쓴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마스크가 마치 일상복처럼 되어 버린 코로나19 감염병 대유행의 약 열 달을 사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우울(corona blue)과 분노(corona red) 등의 후유증을 앓고 있다. 그러나 소상공인이나 자영업자처럼 코로나19로 직격탄을 맞아 모두의 안타까움을 받고 있는 이들이 있는 반면, 고충을 호소하는 다수의 요구에 파묻혀 작은 목소리조차 내기 어려워 세심히 살피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 이들도 너무 많다. 환자를 돌보다 1주일에 3명꼴로 감염되는 간호사들  지난 4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는 지난 9개월간 코로나에 감염된 의료인력 159명의 감염자 중 간호사가 101명으로 가장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감염 경로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당연히 오랜 시간 환자 곁에서 일하는 간호사의 업무가 다른 의료 직종에 비해 감염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크고, 그 중 확진자를 치료하는 음압병동 등에서 일하는 간호사들이 가장 취약할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 장기화로 인해 장기 근무는 기본이고, 충분한 휴식 시간도 보장받지 못하는 등 간호사들의 노동 여건과 안전 문제는 개선될 기미가 없다. 우리는 병원에 보이는 ‘영웅’인 의사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간호사를 비롯해 의료기사, 간호조무사, 요양보호사, 약사, 행정사무연구직, 시설관리, 영양사, 조리, 청소, 정신보건전문요원, 기술 기능직 등 60여 개의 다양한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씨줄과 날줄처럼 얽혀 환자의 질병을 치료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 와중에 여전히 간호사를 성적 대상화하는 내용의 뮤직비디오를 공개한 YG 엔터테인먼트는 그간의 관행을 반성하고, 전 세계의 대중문화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업으로서 성인지 감수성을 높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 마스크 장벽으로 세상이 사라진 청각 장애인들  카페에서 어느 청각 장애인이 종이와 펜을 이용해 주문을 하려는데 전달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자 점원이 짜증을 부려 결국 커피를 사지 못하고 돌아갔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사람들의 입모양을 읽거나 표정을 관찰하여 의사소통을 하는 청각 장애인들은 올해 ‘마스크’라는 새 장벽으로 인해 그나마 세상과 소통하던 방법이 차단되어 버린 것이다. 난청이 있는 사람들도 마스크를 귀에 걸쳐 쓰거나 벗다 보면 보청기가 빠져 곤란을 겪는 일이 다반사라고 한다. 비장애인들이 마스크를 착용하며 느낀 불편과 답답함을 토로하는 동안 1)청각 장애인들은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기 시작하며 세상이 180도 달라졌다고, 아니 세상이 사라지는 경험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당사자인 청각 장애인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는 역부족으로 그들과 소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움직여야 한다. 문제는 마스크를 쓴 사람들은 이들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도구(종이와 펜, 스마트폰의 노트 패드 기능 등)를 이용해야 하는데, 이 기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이를 이용할 인내심을 모두가 발휘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사람들이 중앙부의 입이 보이는 투명한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이 청각 장애인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고 하는데, 현실적으로 모두가 이를 사용하기도 어렵다. 비단 마스크를 쓰는 기간만이 아니라 언젠가 마스크를 벗게 된 이후에도 청각 장애인에게 입모양을 정확히 발음해 주고, 눈을 맞추며 손짓이나 몸짓 등 비언어적인 표현 방법을 동원하여 그들과 의사소통을 하려는 열린 태도가 가장 필요한 것이다. “어제보다 늦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끝내 돌아오지 못한 택배노동자 아들  대통령이 배달 노동자를 비롯한 필수노동자들의 처우개선을 약속한 지난 8일, 40대 택배 노동자가 배송 중 갑자기 쓰러져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20년 경력의 택배기사인 그는 매일 오전 6시 30분에 출근해 밤 9∼10시에 퇴근하며 하루 평균 400여 개의 택배를 배송했다고 택배연대노조는 설명했다. 노조에 따르면 올해 업무 관련해 (과로사로 추정)사망한 택배 노동자는 현재까지 8명이고, 배달이 늘어 빨리 처리해야 한다는 부담에 과속하게 되니 이륜차 교통사고도 전년 대비 1.0% 증가했으며, 특히 사망사고도 6.3% 증가했다고 한다. 게다가 확진자가 많이 나온 지역에서 배송을 하기도 하고, 자가격리하는 이들에게도 배송을 완료해야 하므로 안전을 위협받는 것은 물론이고, 대면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집 앞에 택배를 두고 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분실 관련해서도 기사들이 책임을 져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정부는 택배 노동자들의 생필품 택배로 사회적 거리두기에 큰 도움이 되었다며 코로나19 예방의 ‘숨은 영웅’이라는 칭송을 늘어놓고 있지만 정작 감염병이 일상이 된 시대에 발생하는 다양한 사고로부터 그들을 보호하는 실질적 대책은 여전히 마련하지 않고 있다. 돌봄노동자는 누가 돌봐주나? 건강한 돌봄노동을 위하여 저자 정진주 지음 / 출판사 한울아카데미  평균 연령이 점점 높아지는 고령 여성 요양 보호사들  2)보건복지부 등의 자료에 따르면 요양보호사의 숫자는 꾸준히 증가했고, 요양보호사의 평균 연령도 올해 59.6세까지 높아졌으며 성별로 살펴보면, 여성이 94.9%를 차지해 여성 편중 현상도 큰 것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코로나 시대에도 돌봄의 공백은 역시 엄마나 딸의 무급 노동이나 또다른 여성들의 저임금 노동으로 촘촘히 메워지고 있다. 그러나 돌봄노동은 ‘사랑과 희생’이라는 허울좋은 이름으로 포장되어 실상은 보이지 않는 ‘그림자노동’으로 평가절하되어 왔고, 설상가상 돌봄대상자에게 언어와 신체적 폭력 및 성희롱·성폭력 피해를 본 경우도 적지 않다. 돌봄요양노동자 권리선언문에 따르면 4대 보험과 노동에 따른 적절한 임금 및 수당을 지급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고 경력을 통한 임금상승효과도 미비하다. 또한 돌봄대상자와 사회적 거리두기가 사실상 불가능한 이들은 당연히 감염에 취약할 수 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방역 물품도 제대로 지원받지 못하고 있다. 정부가 돌봄을 복지정책으로 지속적으로 확대하면서, 그 업무와 역할을 장애인활동도우미, 요양보호사, 학교의 돌봄전담사 등이, 그 중에서도 특히 중·노년층 여성들이 주로 담당해왔지만 응원과 감사만 전할 뿐 이들의 처우개선을 위한 관계부처의 정책적 노력은 부족하다. 이 세상어느 누구도 돌봄의 수혜없이 자라날 수 없기에, 돌봄의 위기는 감염의 위험 이상의 국가적 재난 상황이 될 수 밖에 없다. 이에 돌봄이 중심이 되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돌봄노동의 공공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우리 사회의 구조를 재편해야 한다.  코로나19 위기에 가장 큰 어려움을 겪는 이들은 사실 코로나19 이전부터 힘들게 살았던 이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코로나19 이후를 대비하는 한편, 코로나19 이전부터 열악했던 우리 사회의 그늘진 곳을 비춰보고, 그 안의 또 다른 사각지대까지 찾아내어, 늘 약자로 살고 있는 이들을 위한 제대로 된 대책을 마련하는 전환의 시기로 만들어 가야 한다. 1) ‘코로나 시대에 청각 장애인으로 산다는 것(2020.08.20. theguardian) 2) ‘고령 여성’이 돌보는 대한민국…요양보호사 평균 59.6세(2020.10.06. 참세상)
2020-10-14 | hrights | 조회: 1403 | 추천: 11
 최유라/ 지구의 방랑자  암막 커튼을 쳐 어둑어둑한 방안은 바깥이 낮인지 밤인지 알 길이 없다. 아침이 왔음을 아는 방법은 하나 있다. 사는 곳이 빌라인지라 출근하려고 집을 나서는 사람들이 문을 닫을 때 소리가 들린다.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면 더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아! 아침이군.’ 나는 그 소리를 자장가 삼아 다시 잠의 세계로 입장한다.  딩동 초인종이 한 번 울렸다. 3초 후 똑똑. 문을 두드린다. “택배 왔습니다. 최유라 씨 집에 계세요?” 의심할 여지 없이 내 이름을 불렀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택배 올 게 없는데.’ 일단은 문을 열었다. 눈이 부셔 눈을 반쯤 뜬 채로 택배를 한 손으로 받았다.  택배에 보낸 사람은 없고 받는 사람만 적혀있다. ‘이게 뭐지?’ 생각하면서 천천히, 택배를 봉하고 있는 박스테이프를 뜯어냈다. 그 안에는 이런 글자가 들어있었다. “명절”  나에게는 ‘명절前증후군’이 있다. 명절이 다가올 때쯤 우울증이 방문한다. 내가 겪고 있는 이 증후군은 기억하고 싶지 않아 묻어둔 시절들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떠오르면서 발생하는 우울증이다. 명절에 집에 내려가지 않기 시작하면서 괜찮아지는 것 같았는데 최근 다시 겪고 있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날씨가 쌀쌀해지면서 고구마를 팔기 시작하는 곳이 생겼다. 고구마를 먹을 때면 어떤 날은 목이 막혀 울게 된다. 물을 마시면 될 것을. 어리석게도 그런 생각도 할 수 없는 때가 있다. 가끔 고구마를 보면 할머니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명절날 아랫목에 모여 고구마를 먹는다. 한 손에 고구마를 쥐고 한 손에 할머니가 찢어준 경상도식 김치를 고구마에  돌돌 말아 우걱우걱 씹어먹는다. 달달한 고구마에 짭조름한 김치의 조합은 한 번 맛본 이는 있어도 맛보고 끊은 이는 없다고 해야 할 정도의 환상 궁합이다. 그에 더해 “마이 무구라.”는 할머니의 말은 그 맛에 첨가된 좋은 MSG다.  할머니를 떠올리면 할머니가 자기주장을 하던 기억이 전혀 없다. 돌이켜보면 할아버지의 목소리 말고는 기억나는 게 없다. 할아버지는 술에 취해 집이 떠나가라, 쩌렁쩌렁 자신의 살아온 이야기를 했던 강렬하고 선명한 기억은 있지만, 그 옆에 있던 할머니는 그 모든 순간에 그저 조용히 침묵 아닌 침묵을 삼키던 기억만이 있다.  돌이켜보면 할머니는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목소리로 살았을까? 자신의 목소리 없이 살아가는 것을 가족이라는 이유로 당연하게 여겼던 것은 아닐지. 그러고 보면 나 자신도 할머니의 지난 삶을 궁금해한 적이 크게 없었던 것 같다. 내게 할머니는 가정폭력의 피해자로만 기억되고 있었다. 할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할머니에 대한 슬픔 그리고 오랜 시간 묵인해온 가족에 대한 분노. 이 감정들이 한 데 뒤섞여 내 삶에 오랫동안 자리 잡아 왔다. 나는 그 감정에 익숙해진 나머지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만, 진짜 사람을 보지 못한 실수를 저질렀다.  최근 아빠가 할머니를 기억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나에게도 변화의 바람이 일었다. 아빠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알았다. 사실 우리 모두 아프다는 것을. 나에게도 불어온 이 바람이 상처 입은 우리 모두에게 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우리가 언젠가 명절에 도란도란 서로 얹어준 김치와 고구마를 먹으며 할머니를 추억하는 날이 오기를. 형식적인 제사를 내려놓고 사람을 기억하는 제의 의미로의 식탁이 존재하는 그런 명절이 오기를. 단지 혈연이라는 이유로 존재하는 가족이 아니라 서로에게 진심이 되어 이야기 나누는 날이 오기를. 그런 날을 꿈꿔보며 다시 택배 상자를 봉해본다.
2020-10-14 | hrights | 조회: 1150 | 추천: 6
홍세화/ 대학생  대한민국에 코로나19가 창궐한지도 반년이 훌쩍 지났다. 마스크를 쓰지 않고 길거리를 걷던 때의 기억은 벌써 희미해져만 가고, ‘언택트(Untact)’, ‘사회적 거리두기’ 등 새로운 생활방식이 우리의 삶을 채워나가고 있다. 이제 세계는 B.C.와 A.D.로 나뉘는 것이 아닌, Before Corona(B.C.)와 After Corona(A.C.)로 나뉜다는 말이 나올 만큼 코로나는 우리 삶의 곳곳을 서서히 잠식시켜 나가고 있다.  코로나로 인해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것은 역시 경제부문이다. 세계 경제는 2008년 경제공황 이후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였다. 바이러스 감염에 대한 공포와 정부의 권고로 인해 거리의 사람들은 줄어들었으며, 이에 따라 소비가 위축되어 소시민들의 경제피해 체감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상황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에서는 지난 5월 전 국민을 대상으로 긴급재난지원금 지급을 실시했다. 사실 그 당시 다른 국가들이 이미 코로나19에 의한 경제 침체에 따른 재난기본소득 지원 등을 실시한 것에 비해 우리나라의 긴급재난지원금 실행은 늦은 감이 있다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뒤늦게라도 시행한 전 국민 대상 긴급재난지원금 덕에 소비시장이 작게나마 활기를 띄며 결과적으로 다수의 국민에게 희망과 행복을 안겨줄 수 있었다. 사진 출처 - 서울신문  그러나 코로나19 사태는 생각보다 오랫동안 이어져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은 종식되지 않았다. 국내 코로나 바이러스 N차 유행이 지속되며 2차 긴급재난지원금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2차 긴급재난지원금의 실행에 앞서 국회에서는 2차 긴급재난지원금을 보편 지급할 것인지, 선별 지급할 것인지가 쟁점으로 떠올랐다. 갖은 토론 끝에 결국 2차 긴급재난지원금은 선별 지급하기로 결정되었지만 이에 대한 아쉬움은 가시지 않는다.  우리나라는 코로나 바이러스 창궐 이후 많은 의료진들을 비롯하여 관련 종사자들의 희생과 노고, 정부의 방역대책과 국민들의 협조로 다른 국가에 비해 적은 피해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에 우리나라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고, 전 세계적으로 경제 성장률이 마이너스대를 기록하는 와중에 2020년 6월 기준 경제성장률 –1.3%에 머물러 상대적으로 매우 적은 하락세를 보여주었다. 이에 따라 OECD 국가중 재정건전성 2위를 기록하게 되었다.  이렇게 탄탄해진 재정을 바탕으로 전 국민 대상 2차 긴급재난지원금을 시행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선별적 복지가 시행되는 것의 안타까움은,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저마다의 이유로 기준을 충족하지 못해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에서 더욱 커진다. 코로나 사태 이전에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서류상으로 부양자가 있다는 등의 이유로 국가의 복지제도를 누릴 수 없는 사람을 주변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또한 도움을 받기 위해 자신의 가난을 증명해야하는 과정도 당사자에게 비참하게 느껴질 수 있다.  정부의 이번 2차 긴급재난지원금의 선별 지급 선택은 여러 단계의 합리적인 토론과 고민을 통해서 나온 결과일 것이고, 나의 이러한 주장은 경제개념과 원리를 명확히 알지 못하는 사람이 늘어놓는 푸념으로밖에 들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코로나19로 국민 모두가 힘든 이 시기에, 2차 긴급재난지원금과 통신비 지원 등 힘이 될 수 있는 복지제도를 한시적으로라도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지원해 주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원 대상에서 제외될까 누구도 걱정하지 않게, 모두를 위해.
2020-10-07 | hrights | 조회: 1083 | 추천: 2
= 사람은 혐오받는 만큼 혐오하며 존중받는 만큼 존중한다. 김형수/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 친밀한 관계(부모)와 실제적 권력 관계에서의(관리자, 교사) 혐오표현에 대하여 더욱 민감해져야 합니다. 그들의 혐오표현을 학대 및 폭력으로 규정하고 사회적으로 선언해야 합니다.  요즘 청소년의 혐오표현이 너무나도 심각한 문제라고 합니다.  그 표현이 언어 사용을 의미한다면 과연 청소년들은 그 언어들을 어디서 습득했을까요? 청소년들은 그 언어를 무슨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일까요? 혐오와 차별을 연구하는 많은 전문가들은 '혐오표현의 문제는 청소년의 인성 문제가 아니다'라는 입장이 대부분입니다. 근래에 부쩍 청소년의 혐오표현이 늘어나는 것은 그것을 막거나 걸러줄 방어막이 아예 없거나 필터가 아주 미비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라고 보고 있습니다. 양과 질에서 혐오표현이 심각한 까닭은 이미 사회에서 다른 사람들이 많이 부리고 사용하고 대화하기 때문입니다. 혐오표현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을 듣고 수용하는 대상이 있어 어떤 언어적인 목적을 가지고 소통하기 때문이며 그 소통이 구체적인 사회적 행동인 차별과 폭력으로 행사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청소년에 의한 혐오표현과 청소년에 대한 혐오표현은 서로 상관관계가 깊으며 서로 상승효과가 많습니다. 청소년들이 스스로 혐오표현의 피해자가 되거나 혐오표현에 노출되면 자연스럽게 혐오표현의 가해자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혐오표현의 현상은 그 동안 쌓여온 우리 사회의 청소년에 대한 혐오가 당사자인 그들에게 내재화 동일화 되어 바이러스처럼 N차 감염을 시키고 있는 것이지요.  상황과 조건에 따라 다르지만 항상 혐오표현은 그 효과의 결과에 주목합니다. 혐오를 극대화하고 그 혐오의 감정을 서로 나눌 수 있으면 그만입니다. 혐오표현은 그래서 그 결과값에 따라 대상과 표현을 선택하고 그 선택은 어른과 사회가 고르는 약자의 순서를 주로 따릅니다.  심리적, 정치적, 경제적 약자로 만들고 그런 대상이 되는 것이 사회적 저주이자 개인적 불행이자, 느끼고 싶지 않은 슬픔이 될 때 그 표현들은 혐오표현이 됩니다. (그런 정의에 따라 일각의 주장대로 ‘한남’이란 표현은 아직 혐오표현으로써의 언어적 힘은 가지지 못했습니다, 혐오가 특정한 주제와 목적을 두고 주제와 대상을 고르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자기가 소속된 그룹이나 소속되고 싶은 그룹에서 집단적으로 약하거나 배제시키고 싶은 ‘약자’를 고를 뿐입니다.  청소년의 혐오표현이 심각한 것은, 언어 사회학적으로 또래문화의 소통의 도구로 혐오표현이 많이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많이 사용된다는 뜻은 혐오표현을 했을 때 그것을 수용하고 이해하고 동의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이고 이것은 혐오를 재생산하고 증폭시키다 못해 결국 다시 자기혐오에 빠지는 악순환에 빠지게 만듭니다. 예) 초등학생들을 비하하는 인터넷 용어들  청소년들은 혐오표현을 하나의 어휘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각자의 감정을 배설하거나 현상을 풍자하는 욕이나 육두문자와는 다르게 사용합니다. 서로의 문화와 관점을 가장 강렬하게 전달하는 문학적 시적 표현으로 인식합니다. 아니 이미 우리 사회가 그것을 관용 표현으로 사용하고 있지요. 예) 일베 청소년 병신들, 지랄하는 청소년들.  그래서 청소년의 혐오표현의 증가는 이미 어른들과 (특히 정치인) 언론 사회가 엄청나게 혐오표현을 일삼아 온 것의 결과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혐오표현을 제거하는 것에 있어서 청소년들에게 익명성 자체는 그렇게 큰 영향이 없습니다. 인터넷 실명제를 시행한다고 한들, 그들은 또다시 다른 캐릭터 형성이나 익명성 공간으로 이동할 것입니다.  오히려 청소년을 향한 과도한 실명제와 같은 규제는 그들의 언어표현과 존재를 더욱 은폐시키고 사회화하기 어렵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교복에 이름표를 다는 것과 같은 이치- 그것이 왜 인권문제가 되었겠는가?) 익명성을 보장하되 그 표현과 행위가 문제가 되었을 때만 실명 확인이 가능한 시스템이 더 필요하고 그렇게 처벌되는 것을 널리 홍보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익명보장에 책임과 의무를 부여하는 것이고 그 책임과 의무는 혐오표현이 의사소통으로 이어지거나 대상을 공격하거나 구체적인 차별이나 폭력으로 이어졌을 때 그것에 대한 처벌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혐오표현을 혼자 있을 때 개인 공간에서, 따로 듣거나 보는 사람이 없을 때 사용했다면 그것은 스트레스를 푸는 욕의 순기능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런 혐오표현은 IMF 사태 이후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하여 2000년 이후 초단핵화 가족이 늘면서 증가했습니다. 특히 혐오표현의 심각성과 강도와 수용성은 생활공간에서, 오프라인 공간에서 일어나는 어른들의 직접적인 표현이 더 큰 문제입니다. 그들의 언어 사용은 청소년의 자존감을 떨어뜨리고 공격성을 강화합니다. 이런 혐오를 당한 청소년들은 이러한 심리적 보상과 방어기제로 또 다른 공격 대상과 혐오 대상을 찾습니다.  ex) 대견하다. 어른들의 위계적, 도덕적, 사적, 강압적, 평가적 혐오표현 (자신보다 위거나 강자들에게는 이 표현을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으로 청소년들의 혐오표현이 문제다라고 단정적으로 표현하는 것 자체가 혐오를 잉태합니다. 그 혐오표현의 뿌리는 주로 청소년들이 만나는 교사와 부모가 대부분입니다.)  청소년들의 의사소통 방식이 고립된 또래문화 중심으로 이루어지면서 혐오표현은 하나의 문화 현상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표현 자체를 폭력과 차별로 보고 적극적으로 억제하지 않으면 혐오범죄나 집단적 증오범죄로 조직화할 위험이 있음을 다른 나라에서 이미 충분히 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이미 노인 계층이나 태극기 부대 등과 같은 문제에서 그 단초를 보고 있었고 그 어른 세대의 단초와 동기로 말미암아 N번방 같은 사태가 야기됐습니다. N번방 사태야 말로 혐오표현으로 만들어진 혐오문화가 어떻게 조직적인 혐오범죄로 가는지 잘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혐오는 그 생존 방식과 전파방식이 감염병 바이러스와 매우 비슷합니다. 숙주를 단박에 죽이거나 힘들게 하지는 않지만 서서히 약하게 만들고 면역이 약한 존재는 죽음에 이르기도 합니다. 보이지 않는 소리나 익명성 뒤에 문자로 조용히 전파되지만 어느 순간 폭발적으로 늘어나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생존하기 어렵기 때문에 끊임없이 스피커를 찾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일간 베스트 사이트와 극우 단체들이라고 할 수 있지요. 사진 출처 - freepik  그것은 때때로 심각하고 장기적인 후유증을 남기기도 합니다. 우리가 학교 폭력의 피해자들이 충분히 사과하거나 보상하지 않은 가해자들을 몇 십 년이 지난 후에도 미디어에서 만났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혐오표현 피해를 당한 후에 어떻게 대처해야할까요?  우리는 사회적으로 혐오표현을 범죄로 모두가 합의하고 선언해야 합니다. 이후에 모든 범죄의 기본을 따르면 됩니다. 즉 피해자는 피해를 복구하고 보상하고 치료하며 가해자에게는 응분의 책임과 처벌을 하면 됩니다. 그런데 혐오범죄가 죄질이 나쁜 이유는 성범죄와 마찬가지로 피해자가 가해의 책임의식을 가지고 죄책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혐오의 책임이 피해자에게 있지 않음을 인식시키고 표현하는 것, 가해의 책임을 명확히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혐오에 대하여 피해자를 비난하거나 평가하거나 책임을 묻지 말아야 합니다. 가해자의 행위와 표현을 단순한 인성적인 해프닝으로 취급하지 말고 책임이 있는 실제적 폭력임을 명확히 할 것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혐오를 또 다른 혐오로 풀어내는 순환혐오나 자기혐오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특히 장애인 혐오를 들여다보면 그 원리를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장애인 혐오의 문제를 사랑이나 배려 따위의 개인의 감정이나 윤리 문제로 바꿔버리거나 실수라고 무마하거나 (이것은 결국 피해자에게 그 책임을 묻는 낙인일 뿐입니다.) 장애인을 혐오하는 것이 진짜 장애라는 표현, 장애인을 혐오하는 미친 짓, 결국 정신 장애인이 하는 일이라는, 또 다른 장애 혐오인 것이지요.  자폐가 있어서 군대를 가지 않은 21살의 청년을 두고 ‘신변처리 못하는 자폐아라서 슬프다’는 어느 국회의원의 표현이 오히려 어느 악성 댓글보다 청소년들에게는 영향이 클 수도 있다는 사실, 인권을 고민하고 자신의 말에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은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특히 부모님과 교사들이요. 그러기를 진정 바랍니다.  
2020-09-22 | hrights | 조회: 1080 | 추천: 2
김아현/ 인권연대 간사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제주 강정마을의 구럼비 바닷가에는 붉은발 말똥게들이 살고 있었다. 다른 생물들도 많이 살았지만 유독 그 ‘게’가 주목받은 이유는 그들이 처해있던 위기 때문이었다. 붉은발 말똥게는 멸종위기 야생생물 2급으로, 가까운 장래에 멸종 위기에 처할 우려가 있는 207종의 동식물이 여기에 해당한다. 삵이나 맹꽁이처럼, 듣기로는 친근하지만 실제로는 오랫동안 목격된 적이 별로 없는 동물들도 2급의 멸종위기종이다.  멸종위기종의 지정과 연구는 국가와 국제기구 모두를 통들어 이뤄지는데 우리나라는 환경부가 소관부처고 국제적으로는 국제자연보전연맹(IUCN, International Union for Conservation of Nature)이라는 기구가 가장 강력한 공신력을 갖는다. 멸종위기종 지정은 당연히, 전문가 집단의 체계적인 연구와 논의를 거쳐 이뤄진다.  구럼비의 붉은발 말똥게는 국가(환경부)가 전문가의 식견을 빌어 지정한 멸종위기종이었지만, 결국 그들에 의해 강제이주를 당했다. 해군기지 공사를 하려면 구럼비 바위를 발파해야하는데 그 게의 희소가치가 걸림돌이었기 때문이었다. 갯가 바위 위에서 살아야 하는 게를 통발로 포획해, 서귀포시 시내에 있는 큰 절인 약천사 앞으로 이주시킨다는 것이, 국가의 용역을 받은 소위 전문가 집단이 내 놓은 대안이었다.  강제이주를 당하기도 전에, 한낮의 열기로 달궈진 바위 위 통발 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말라 죽어있는 붉은발 말똥게들의 사체를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 광경은 너무나 강렬하고 기이해서, 인간 세상에서 벌어지는 많은 일들을 떠올리게 하기도 했다. 통발 안에서 어렵게 살아남아 강제이주 당하는 데 성공한 붉은발 말똥게들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사진 출처 - 한겨레  어떤 전문가들은 이처럼, 용역 발주자의 요구에 맞춰, 합리를 벗어난 황당한 결론을 내리기도 한다. 앞서 예로 든 경우에, 나와 동료들은 붉은발 말똥게의 강제 이주를 권고한 전문가들을 지식범죄자라고 여겼다. 강제이주 권고가 범죄는 아니지만 심정이 그랬다.  그런데 지금, 고쳐 생각하면, 그 전문가들이 도덕적으로 옳지 못한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사용한 재료가 과연 ‘지식’인가 싶은 것이다. 전문성을 올곧게 사용했다면 그런 결론이 나올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성이나 지성, 전문성이 아니라 다른 기제를 사용해 그런 결론을 도출했을 것이다(그것이 계산이나 일신에 관한 욕심, 굴종 같은 것이 아니길 바란다).  어쨌거나 그 전문가들은 지금도 존중받으며 잘 살고 있을 것이다. 전문가는 대체로 존중받는다. 자주 호명당하고, 존경을 받기도 한다. 황당한 주장도 마이크를 가진 전문가가 하면 사회에 유통될 자격을 얻는다.  그런데 전문성에도 계급이 있다. 어렸을 때 공부를 아주 잘 해야 얻을 가능성이 높은 어떤 분야, 이를테면 법률이나 의료 분야의 전문가가 지니는 힘은, 궁중복식이나 김치유산균을 오랫동안 연구해 온 전문가에 비할 바 없이 크고 강하다. 게다가 성공적인 입시를 통해 한 번 얻은 전문가 자격은 놀이공원 프리패스처럼 기능한다. 이를테면 정치평론으로 유명해진 변호사가 그의 전문이 아닌 다른 분야에도 진입장벽 없이 쉽게 진출하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전문의가 토크쇼나 관찰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이유를 당췌 이해할 수 없지만 모두 실제 일어나는 일들이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여기에 근원적인 질문을 던질 기회가 없었다. ‘저 자격의 기원은 무엇인가’를 궁금해 했다면 많은 것들이 달라졌을지 모른다. 어려서 공부를 잘 했고, 성적이 좋았고, 상위권 대학의 좋은 과에 진학해서 얻기 시작한 호감과 명성과 자격이 대체 어디까지 힘을 발휘해도 좋은 것인지에 대해 지금부터라도 따져물어야 한다. 오래전 성적표가 평생 가는 상징자본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박근혜 정부 때까지는 필요했던 공공병원과 공공의료인력이 단지 정권만 바뀌었다고 엄청난 악(惡)이 되는 극적인 변질은, 근거가 없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진이라면 전문가 생태계 피라미드의 최상위를 차지하는 계층이다. 최고의 전문가집단이 스스로 자기 결론을 뒤집는 이 촌극에 많은 이들이 상처받았다. 평범한 이들의 말 바꾸기는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되고 어떤 경우에는 법으로도 처벌받지만,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이들의 말 바꾸기는 다른 대접을 받았다. 그 때문에 누군가 목숨을 잃고 고통 받을 때조차 어떤 책임도 지지 않았다. 문득 다시, 궁금해진다. 사실은 늘 궁금했다. 갯가 바위 아닌 곳으로 강제로 옮겨진 붉은발 말똥게들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2020-09-09 | hrights | 조회: 1416 | 추천: 28
이동화/ 사단법인 아디 활동가  팔레스타인 나블루스(Nablus)의 부린(Burin)마을은 이스라엘 불법점령촌에 의한 가장 피해가 심각한 마을중 하나이고 사단법인 아디가 2017년부터 인권피해조사와 같은 현지 활동을 수행할 때 꼭 방문했던 마을이다. 그리고 아디의 방문시마다 도움을 주었던 부린마을 출신의 활동가인 갓산 나자르(Ghassan Najjar)가 이스라엘 군에 의해 체포되어 두 달 반이 지난 지금까지도 구금 상태에서 풀려나지 못하고 있다.  이스라엘군은 지난 6월 25일 한밤중에 마을에서 가족들과 함께 지내던 갓산을 체포해 알-잘리메(Al-Jalimeh) 심문 센터로 끌고 갔다. 이스라엘 군사법원은 갓산의 구금을 일주일 단위로 계속 연장했고, 그는 7월 말부터 8월 초까지 이어진 이슬람교 명절인 이드 알 아드하(Eid al-Adha) 기간도 가족들과 함께 보낼 수 없었다. 8월 중순이 되자 갓산은 다른 팔레스타인인 수감자들과 함께 알-잘리메 심문 센터에서 메기도(Megiddo) 감옥으로 이감되었으며, 이때부터 3일 단위로 구금이 연장되기 시작했다. 8월 27일에는 다음 재판 날짜를 10월 11일로 연기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갓산이 언제쯤 석방될 수 있을지는 더욱 예측하기 어려워졌다. 8월 8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진행한 팔레스타인 양심수 석방 캠페인에서 갓산 나자르의 석방을 기원하는 포스터를 들고 있는 스페인 국제활동가. (사진출처: 페이스북 페이지 Free Ghassan Najjar)  갓산의 체포와 구금은 어떠한 기소나 재판 절차도 없이 이루어졌으며, 현재까지도 그의 체포 사유는 명시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행정 구금(administrative detention)’이라고 불리는 이스라엘의 독특한 제도 때문에 가능했다. 행정 구금은 이스라엘군이 별도의 사법 절차 없이도 체포 및 구금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이다.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에서 행해지는 행정 구금은 ‘군사명령 1651’의 제285조에 근거하고 있는데, 이 조항에 따르면 이스라엘군은 해당 지역의 안보와 공공의 안보를 위해서는 구금이 필요하다고 추정할 합리적 근거가 있는 팔레스타인 민간인들을 사법 절차 없이 구금할 수 있다. 구금의 타당성은 이스라엘 군사법원이 체포 및 구금이 행해진 지 8일 이내에 비공개 심리를 진행한 후에 결정하는데, 군 지휘관이 요청한 기간대로 승인이 이루어지며, 피구금인의 항소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스라엘 인권단체인 B'TSELEM에 따르면 갓산처럼 행정 구금제도에 의해 이스라엘에 수감된 팔레스타인인은 2020년 6월 기준 357명에 이른다고 한다. 가장 최근의 이스라엘 군사법원의 결정이 이행되더라도 갓산의 유무죄를 다투는 재판은 10월 11일에 시작되고 최종판결은 언제 확정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그동안 갓산은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도,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도, 소중한 가족과 접견할 권리도 박탈된 채 최소한의 인간적 존엄성을 지킬 처우가 존재하지 않는 이스라엘 감옥에서 갇혀 지내야 한다. 이것이 중동에서 유일한 민주주의 국가라 홍보하는 이스라엘의 민낯이고 팔레스타인을 수십 년간 무력점령한 이스라엘 군의 지배정책이다.
2020-09-09 | hrights | 조회: 963 | 추천: 9
이회림/ 00경찰서  응답하라 시리즈로 인기를 끈 신원호 PD가 슬기로운 의사생활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세계 최대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 업체인 넷플릭스에서도 시청률 1위를 달릴 정도로 화제의 드라마가 되었지요.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전작 '슬기로운 감빵생활' 도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었다고 합니다. 여동생의 성폭력범을 응징하다가 체포 된 야구스타가 별난 재소자들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는 내용이라고 하던데 아직 한 회도 제대로 챙겨 보지는 못했습니다.  병원과 교도소는 경찰이라면 입직과 동시에 가장 많이 왕래하게 되는 장소 중의 하나이기에 매우 익숙한 공간이지만 드라마의 주요 배경으로서 보고 싶지는 않은 곳입니다. 익숙한 공간이긴 하나 결코 친숙하지는 않기 때문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기로운 시리즈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슬기로운' 으로 시작하는 이 드라마의 제목부터가 무한한 호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오랜만에 국어사전을 열어 글자 모양마저 남달라 보이는 곱디 고운 '슬기로운'을 한 번 찾아보았습니다. <슬기로운> 슬기롭다의 ㅂ 불규칙 형용사 '슬기롭다'의 활용형 슬기롭다 즉, 슬기가 있다 ‘슬기’ 사리를 바르게 판단하고 일을 잘 저리해 내는 재능 유의어는 기지, 재치, 현명  처음 '슬기'라는 단어를 배운 때가 아마 초등학교 1학년 때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바른 생활, 즐거운 생활, 슬기로운 생활" 예전에는 세상에 나온 지 겨우 7년에서 8년 된 어린이들을 학교라는 생소한 공간에 모아 놓고 등교 첫 날 위의 책 세 권을 줬습니다. 선생님들은 이 세 권의 가이드북을 길잡이 삼아 바르고 즐거우며 슬기롭게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려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쳤습니다. 사람의 기본적인 인성과 자아 정체성은 가정이라는 기초적인 사회화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지만 사회생활을 위한 체계적 교육은 이렇듯 인위적 단체인 학교에서부터 책 세권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사진 출처 - 서울책보고  초등학교 1학년 입학식 때의 기억을 되살려 봅니다.  학교는 유치원과 분위기부터 매우 달라서 다들 긴장한 표정이 역력합니다. 어떤 아이는 긴장해서 과도하게 떠들고 또 어떤 아이는 긴장해서 아예 말이 없는 등, 각자 천성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반응합니다. 어수선한 교실 안, 처음 보는 또래 아이들 사이에서 역시 처음 보는 어른인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책 3권을 받았습니다. 책을 받아들고 제목을 보며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바른’과 ‘즐거운’은 알겠는데 ‘슬기로운’은 정확히 뭘 말하는 거지?였습니다. 바른 생활과 즐거운 생활은 어렵지 않게 감이 잡히는데 ‘슬기로운 생활’은 다소 차원이 다른 단어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슬기로운 생활은 국어사전의 뜻풀이처럼 ‘사리를 바르게 판단하고 일을 잘 처리해 내는 재능’을 필요로 하는 고차원적인 생활입니다. 즐겁게, 바르게 사는 사람이 곧 슬기로운 사람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슬기로운 사람은 즐겁고 바르게 삽니다. 모든 것을 순수하게 받아들이고 대처할 수 있는 유연함을 가진 어른이 되어가는 것은 참으로 힘든 과정이 예약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어른이 되어서도 늘 초등학교 1학년 같은 맑은 마음으로, 슬기롭게 생활하는 방법을 계속해서 업데이트하고 배워나가야 되나봅니다.  혹시 신원호 PD의 “슬기로운”시리즈에 "초등학교 1학년 슬기로운 생활'에 바치는 오마쥬가 조금이라도 들어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 봅니다. 어느 공간에서 어떤 일을 하게 되든 늘 ‘슬기롭게’ 사람들과 관계 맺음할 수 있도록 도움 주는 인생 첫 가이드북 “슬기로운 생활” 에 대한 언급이 한 번은 있지 않을까요? 아직 시리즈의 한 회도 보지 못한 시점에서 하는 말이라 드라마 내용과는 상관이 없을 수도 있지만요.  요즘 모 포털 사이트의 커뮤니티에서 “감빵생활” 과 “의사생활”을 잇는 다음 직업군은 “경찰생활”이나 “형사생활” 이 될 것 같다는 예측놀이가 한창입니다. 현재 스코어로는 경찰생활이 우세한데 소방관, 군인이 그 뒤를 바짝 쫓고 있더군요. 그나저나 슬기로운 시리즈의 세 번째 이야기가 나오기 전에 감빵생활ㆍ의사생활부터 챙겨봐야겠습니다.
2020-09-02 | hrights | 조회: 1294 | 추천: 6
최유라/ 지구의 방랑자  “어디 사세요?”, “자취하세요?” 이와 같은 질문으로 시작해서 대부분의 대화는 ‘고향이 어디예요’까지 이어지곤 한다. 그러면 그 순간 나는 입을 다문다. 일부러 라기보다는 저절로 닫히고 만다. 남들이 그토록 가보고 싶어 하고 아름답다고 상찬하는 그 도시가 내게는 기억에서 도려내고 싶을 만큼의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고향에는 바다의 굴만큼이나 다방이 많았다. 다방은 청소년들의 일자리이기도 했다. 나이를 가늠하기 어렵게 하려고 짙은 화장을 하고 짧은 치마를 입은 소녀들의 한 손에는 다방 커피를 감싼 보자기가, 다른 한 손에는 오토바이를 모는 이의 허리가 붙들려 있었다. 오토바이를 모는 그도 청소년이었다. 하지만 도시는 이 모든 풍경을 못 본 체했다. 청소년의 흔한 비행일 뿐이라고 여겼다. 누구도 이 사실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렇게 아이들은 도시에서 버려졌다. 단지 청소년이 해야 할 학업이라는 ‘본분’에 충실하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침묵을 선택한 도시는 때때로 혐오로 침묵을 깼다. 다방에서 일하는 여자아이에게 “더럽다”느니 “이미 버린 몸”이라느니 하며 여성혐오로만 소비했고, 그 아이들은 ‘여자가 공부해야 하는 이유’의 예시가 되었다. 부모가 다방이나 술집을 운영하는 집의 딸들은 뒷말에 시달려야 했다. 학교에서도 바깥에서도, 편견의 꼬리표는 끈덕지게 달라붙어 있었다.  고향에는 특정 광고의 현수막도 수없이 많이 내걸렸다.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와 같은 문구의 매매혼 중개였다. 엄마의 지인 가족 중 한 명도 매매혼을 통해 결혼했다. 내 또래인 베트남 여성은 마흔 넘은 남성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 나는 이 사실을 듣고 울분에 찼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엄마에게 화를 냈지만, 엄마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받아넘겼다. 그 후 그녀의 임신 소식을 들었고, 매니큐어를 하고 밭일하다 시어머니에게 혼났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나는 매일 억지로 학교에 갔지만, 그녀에게는 학교에 가는 일은 꿈도 꿀 수 없는 것이었다. 누군가에는 평범한 일상이 누군가에는 애초에 주어지지 못하는 선택지였다. 사진 출처 - pixabay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망치듯 서울에 온 이후 고향에 거의 가지 않았다. 나 또한 방관자라는 사실로부터 도망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곳을 벗어나면, 이 모든 것들이 내 눈에 띄지만 않는다면 괜찮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대한민국 곳곳에서 숨 돌릴 틈도 없이 사건들은 터졌고, 그것들은 고향에서의 감정들을 고스란히 되살려냈다. 현실에서도 꿈속에서도 나는 고향이 아닌 곳에서 자꾸만 고향과 대면해야 했고, 더는 달아날 곳이 없어 괴로웠다. 살기 위해 방황하는 나를 마주하는 것도 괴로웠고 내가 이 문제를 바꿀 힘이 없다는 사실에도 힘들었다.  손정우가 재판 도중 매매혼을 했다는 것도 충분히 역겨운데, 그게 저 어처구니없는 판결에 영향을 주었다니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서울시장의 성추행 사건을 두고 가해자에 이입한 채 터져 나오는 언어들에도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밤은 매일 찾아왔고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이 쌓인 채 밤을 맞이하면 현실과 꿈 사이에서 헤맨다. 오늘도 또. 벗어나지도 마주하지도 못하는 이곳, 대한민국은 나의 고향인 것이다.
2020-07-29 | hrights | 조회: 1253 | 추천: 6
홍세화/ 대학생  인간이 살아갈 때 ‘의(衣)·식(食)·주(住)’중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과거였다면 생명과 직결되는 ‘식(食)’이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혔겠지만, 요즘 같은 시대에는 제대로 된 거처를 마련하는 것이 먹을 것을 구하는 것보다 어렵기 때문에 아마도 ‘주(住)’가 삶을 영위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히리라 생각된다. 어떤 고된 하루를 보내었다 하더라도 내 몸 하나 편히 뉘일 수 있는 공간, 돌아가서 쉴 수 있는 ‘집’이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사람들은 심리적으로 큰 위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심리적 위안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대한민국에는 몇이나 될까? 사진 출처 - 1boon 카카오  대한민국의 주택보급률은 2018년 기준 104.2%이다. 주택 보급률이 100%가 넘어가는 기괴한 수치는 주택 소유의 양극화를 보여준다. 어떤 사람은 주택을 한 채도 갖고 있지 못한 반면, 어떤 사람은 수십 채, 수백 채의 집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몇몇 아파트에는 공실이 많아 문제라는데도 당장 잘 곳이 없어 길을 헤매는 홈리스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이유다.  최근 정부에서 주택 공급 확대를 위해 서울의 그린벨트(개발제한구역) 해제를 검토한다는 입장을 밝힌 후 이에 대한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결과적으로는 그린벨트를 보존하는 것으로 일단락됐지만, 이러한 논란이 생겨난 배경에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부동산 불패신화’가 한몫했다고 생각한다.  현재 발생하고 있는 주거난은 주택보급률 수치에서도 알 수 있듯이, 주택 공급 부족이 문제가 아닌, 불균형한 주택 소유율이다. 대한민국에서 집은 더 이상 살아가는 곳이 아닌 경제적 수단으로 여겨지고, 이에 따라 부동산은 투기의 장이 되어가고 있다.  주거난을 해결하기 위해서 정부에서는 청년 전세지원금 제도, 행복주택, 임대주택, 주거급여 등등 다양한 주거복지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그러나 얼마 전 주택공사의 한 간부가 임대주택 입주민 대표에게 “못 사는 게 집주인한테” 등의 망언을 남발한 것을 보면 주거 복지 수혜자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저변에 어느 정도 깔려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주거난은 주거복지사업 선에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인 원인이 되는 부동산 투기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직 우리 대한민국에는 집 없이 살아가는 많은 ‘민달팽이’들이 있다. 우리나라가 진정한 선진국 반열에 오르기 위해서는 이들을 따스히 감싸줄 수 있는 확실한 방안을 찾아내야할 것이다.
2020-07-22 | hrights | 조회: 1106 | 추천: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