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책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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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책 위원회’에는 강대중(서울대 교수), 김상미(너머북스 대표), 김종진(삼인출판사 편집장), 김진규(초등교사), 방효신(초등교사), 서유석(호원대 교수), 손하담(중등교사), 안혜초(중등교사), 은종복(서점 ‘풀무질’), 이광조(CBS 피디), 이제이(방송작가), 장의훈(중등교사), 정상용(초등교사), 주윤아(중등교사), 최보길(중등교사), 홍성수(숙명여대 교수)님이 함께 해 주십니다.
<내가 라면을 먹을 때> 글·그림 하세가와 요시후미, 장지현 역 - 방효신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13 15:21
조회
1755
「내가 라면을 먹을 때」 글·그림 하세가와 요시후미/ 장지현 옮김, 고래이야기
이어져 있어요
방효신/ 서울교동초등학교 교사
"불쌍해요." 그래, 불쌍하고 가난하고. 못 사는 나라에 사는 어린이.
못 먹고, 아프고, 학교에 다니지 않는 다른 나라 어린이를 돕자는 내용이 초등학교 1학년의 마음에 닿을 수 있을까? 어려운 사람을 돕자는 이야기는 당연하고, 뻔하고, 아니 나도 어려운데 뭘 다른 사람을 도우라는 건지 싶다. 예나 지금이나 '가난'이라는 것은 상대적이어서 난 항상 부족한데, 더 갖고 싶은데, 빨리 어른이 돼서 내 마음대로 뭘 해보고 싶다는 욕망은 20살이 훌쩍 지나서야 사그라졌다. 예쁜 수첩을 가진 옆 친구가 부러운 어린이가 용돈을 아껴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 필리핀 어린이를 도울 수 있을까. 우리 반 아이들은 어떨까. 이기적인 모범생 역할놀이에 충실했던 나만의 이야기일까.
사진 출처 - yes24
매일 아침 1교시 시작 무렵에 책 1권을 읽어주는데, 습관이 되니 말 많은 아이들도 눈치껏 진지하게 듣는다. 제 3세계 아이들에 대한 이 진지한 책을 월요일부터 읽을까 말까 싶었지만 마침 '겨울' 통합 교과서 내용과도 딱 들어맞으니 분위기를 잡아보았다.
"내가 라면을 먹을 때, 옆에서 방울이는 하품을 한다.
옆에서 방울이가 하품을 할 때, ……."
"아, 나 저거 봤는데."
"우리 엄마가요, 그 책은, 으음, 슬프대요."
이미 읽은 아이들이 한 마디씩 거든다. 가볍게 보기 좋은 책이다. 글이 짧고 그림은 친근하다.
"…… 이웃나라 남자아이가 자전거를 탈 때
이웃나라의 이웃나라 여자아이는 아기를 본다.
이웃나라의 이웃나라 여자아이가 아기를 볼 때
그 이웃나라 여자아이는 물을 긷는다……."
아기를 돌보고, 물을 긷고, 소를 모는 아이가 나오자 우리 반 아이들은 숙연해진다. 이렇게 고요한 적은 없었는데.
"아프리카!"
"아프리카 말고 다른 나라도 있어."
아이들은 끼리끼리 말을 주고받으며 책 보기에 몰입했다. 책 읽어주기가 끝나면 내용을 분석하는 질문은 하지 않는 편이나, 이번 책은 교과서 내용과 굳이 연결시켜 보았다.
"이거 다 보고 나니까 어떤 생각이 들었어?"
남자아이가 답한다. "불쌍해요."
"왜?"
"쓰러져 있으니까."
"또, 무슨 생각이 들었어?"
여자아이가 답한다. "이어져 있어요."
이어져 있다. 맞아, 네 말이 맞아.
담임이 책을 다 읽고 나면 보고 싶은 아이들은 손을 드는데, 이번 책 역시 손을 번쩍번쩍 든다. 이 책은 "이어져 있다"고 말한 아이 손에 건넸다. 말이 이어져있다고 한 걸까, 사람이 이어져있다고 한 걸까, 하지만 질문하지 않기로 한다. 말하지 않아도, 아이는 느꼈을 테니까.
초등학교 1학년 통합교과 교과서 '겨울' 책에는 1단원에 나눔, 봉사, 실천 같은 단어로 버무려진 내용이 있다. 구세군 냄비, 어려운 이웃에서 나아가 지구촌의 구호단체들에 대해서도 약간 언급한다. 이미 아이들은 1학기에 학교에서 진행한 월드비전 사랑의 모금활동에 동참한 적이 있다. 2학기에는 사랑의 열매 모금에 참여한다. 돈을 모아 힘을 보태는 것, 나보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 아, 다시 당연한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돈을 내고 착한 일을 했다고 기뻐하며 다시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오는 것 말고, 다른 걸 말하고 싶었다. 앵글로 색슨족의 착취, 멈추지 않는 전쟁, 합법적인 환경 파괴. 그 나라들이 가난해진 건, 그 나라 탓이 아니다. 먼 나라 이야기 말고 내 주변부터 살펴보면, 내 나라에서 벌어지는 도시 사람들의 이기심, 현란한 광고와 물건들, 조선족과 탈북자에 대한 무시, 외모와 돈에 대한 추종 같은 것도 있다. 그래서 아이들이 보고 배우는 말과 행동이 있다. 약하고 부족한 타인에 대한 외면이나 수군거림, 3번만 참고 그 다음에는 똑같이 복수해주면 된다던지 하는 이상한 규칙 같은 거 말이다. 우리는 모두 이어져 있는데, 그래서 내가 한 말과 행동은 다시 나에게 돌아오기도 하고, 나의 다음 사람에게 돌아가기도 하고…….
진실한 '마음'을 가르칠 수 있을까? 약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던지 ‘부족한 사람과 내 것을 나누어야 한다’ 같은 규율적인 말보다, 「내가 라면을 먹을 때」와 같은 짧은 이야기가 마음에 와 닿는다. 항상 그랬듯이, 무언가 느껴야 몸도 움직이니까. 잘 아는 사람 말고 아는 것을 실천하는 사람을 기르는 곳이 학교다.
내일은 우리 반 아이들끼리 엮어볼 참이다. '상근이가 아침운동을 할 때, 우주는 일어난다. 우주가 일어날 때, 수훈이는 자고 있다. 수훈이가 자고 있을 때…….' 우리 반의 평화부터, 보송보송한 마음으로 내가 도울 수 있는 사람부터. 그리고 내 돈 2천원이면 영양가 있는 한 끼를 먹을 수 있다는 다른 나라 어린이 3명도 떠올려 보자. 우리들은 일학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