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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정치적인 수사학이 필요하다(조광제)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4-04-30 10:33
조회
122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3년은 너무 길다.” 적중했다. 창당 한 달 남짓 만에 <조국혁신당>이 열둘의 국회 의석을 확보했다. 당 대표인 조국 씨는 부산 연설에서 대통령 윤석열 씨를 향해 “이제, 고마 치아라 마!”라고 호통을 쳤다. 이 사투리는 “이제, 그만 해라! 알겠나!” 정도로 번역될 수 있다. 다소 강하게 더욱 직설로 해석하면, ‘이제 그따위 대통령 짓은 그만하고 내려와라!’다. 그렇다면, 이 호통은 “3년은 너무 길다”라는 구호에 담긴 뜻을 아예 노골적으로 풀이해 제시한 게 된다.


<조국혁신당>과 대표인 조국 씨의 정치 행위는 이번 총선에서 크게 뜻깊다기보다는 가장 흥미로운 대목이지 싶다. 다 알다시피 그는 검찰총장에서부터 대통령에 이르는 윤석열 씨의 권력에 의해 원한이 골수에 새겨질 정도로 더없는 수난을 당했다. 그런 그가 당을 만들어 대통령 임기 최대한 단축을 목표로 내걸었는데도 국민 대다수는 그것이 정치를 통한 복수라고 여기지 않고, 정당한 정치적 행위라고 평가한 것이다. 그래서 아이러니한 방식으로 흥미를 자아내는 것이다.


사진: 서울신문


조국 씨의 교수에서 낭인으로, 낭인에서 정치인으로 본격적인 변신을 했을 때, 그 변신이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이루어졌다고 여겨진다. ‘3년은 너무 길다’라는 구호 설정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그의 입에서는 문제 상황을 비켜 갈 수 있는 적절한 말들이 나왔다. 민주당과의 경쟁 구도가 불가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해소하는 말들이었다. 지역구 후보를 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비례 의석 확보의 경쟁에서 분명히 <더불어민주연합>과 크게 다툴 수밖에 없기에 <더불어민주당>과 현실적으로 선택적인 적대관계에 있음에도 그 적대관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하는 말들을 구사했다. 이른바 검찰 독재정권을 <더불어민주당>의 거대 함선이 나서서 파멸시키는 데 먼저 나서서 완전히 얼어붙은 윤석열 정권의 두껍고 단단한 얼음판을 깨면서 나가는 ‘쇄빙선’ 역할을 하겠다거나 <더불어민주당>과 함께 연합해 펼치는 학익진의 전투에서 가장 선두에 선 ‘망치선’ 역할을 하겠다는 각오를 제시한 것이다.


특히 총선과 같은 정치 투쟁에서는 흔히 현실의 정치 구도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규정하는 ‘프레임 짜기’가 중요하다고들 한다. 이번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전격적으로 지속해서 내세운 ‘정권 심판’이 그 정확한 예다. 그리고 <조국혁신당>이 내세워 ‘지민비조’도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조국혁신당>이 내세운 “3년은 너무 길다”라거나 “쇄빙선” 내지는 “망치선”은 그 속뜻을 보면 크고 작은 정치 구조에 따른 ‘프레임 짜기’라고 할 수 있지만, 표현 그 자체로 보면 수사학적인 정치 언어의 개발이고 구사다.


중요한 사실은 <조국혁신당>이 우리네 정치에서도 수사학적인 정치 언어가 정확하게 효과를 내면서 작동할 수 있음을 보였다는 점이다. <더불어민주당>의 정청래 의원도 수사학적인 비유를 활용하는 데 일가견이 있다. 하지만, 정치 상황을 정확하게 꿰뚫어 적중했다는 그 효과에서 보자면, <조국혁신당>의 조국 당선자를 따라가지 못한다.


언어는 여러모로 강력한 기능을 발휘한다. ‘촌철살인’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언어는 말 그대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아닌 게 아니라, 형사재판에서 한마디의 말이 피고인을 더욱 죽이기도 하고 구사일생으로 살려내기도 한다. 이런 당연한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정치는 근본적으로 사회적인 가치 배분의 기술(技術)이다. 그리고 그 기술은 기본적으로 언어 구사를 통해 실현된다. 법안을 제출하고 논쟁을 통해 정당화하거나 정해진 법률을 준수하거나 위반한 것을 따지고 비판하는 일은 모두 언어 행위다.


문제는 매사의 판단이 오로지 합리적인 논리에 따라서만 결정되고 수용되는 게 아니라, 감정과 정서의 움직임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이에 따른 부작용도 만만찮지만, 좋은 점도 많다. 어떤 표현을 어느 수준에서 어떻게 적절하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당사자들의 인격적인 품위를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는 자는 말을 듣는 자의 주체적이고 나아가 자율적인 인격의 자발성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야 한다. 그럴수록 말하는 자의 말이 갖는 효력이 더욱 커진다. 어차피 말은 말을 듣는 자의 행위를 향한 것이고, 행위는 행위자의 자발성이 보장될 때 이행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조국 씨의 오랜 세월 교수 일을 해왔다는 사실이 그의 수사학적인 정치 언어의 구사에 대한 대중의 신뢰를 강화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부수적이다. 정작 중요한 건 그가 개발해 구사한 정치 언어가 ‘할 말은 반드시 해야 한다’라는 국민의 심정에 정곡을 찔렀다는 사실, 그리고 그 내용을 듣는 순간에 바로 아무 노력 없이 이해하고 수용하게끔 수사학적으로 간명하게 처리했다는 사실이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채해병 사건’에 대해 “이것은 좌파나 우파의 문제도 아니고, 진보나 보수의 문제도 아닙니다. 국민의 상식에 따른 문제입니다.”라는 표현 역시 겉으로 보기에는 그다지 수사학을 활용한 것 같지 않지만, 사실은 수사학적인 측면이 강하다. 실제 정치적인 지형에서는 ‘채해병 사건’이 좌파와 우파 또는 진보와 보수에 따라 달리 해석하고 접근되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이번 총선에서 <조국혁신당>이 이른바 ‘돌풍’을 일으켜 놀라운 소기의 성과를 거둔 데는 분명 조국이라는 인물의 여러 영역에서 역량이 주된 요인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그중에서 특별히 돋보인 건 그의 수사학적인 정치 언어의 개발과 구사의 역량이다. 22대 국회가 개원하게 되면, 그의 정치적인 행보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나로서는 급진적이라고 할 정도로 적극적인 그의 정치적인 발언과 행동이 과연 어떤 방향으로 어느 정도로 실제로 힘을 발휘할지 전체적으로 궁금하긴 하지만, 무엇보다 특별히 흥미를 갖는 대목은 그가 국회 활동을 수행할 때 과연 또 어떤 정치적인 수사학을 멋지게 구사할 것인가다. 바라건대, 그의 발언 방식이 우리네 정치판에서 새로운 기운을 불러일으켰으면 하고 기대해 본다.


사족 삼아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덧붙일 것은 그런데도 <더불어민주연합>이 14석의 비례 의석을 얻어 <조국혁신당>의 12석을 능가한 결과를 보면서, 내심 ‘이야, 그 참 민주 진영의 유권자들이 대단한 집단적 균형감각을 갖추었구나.’ 하고서 생각했다는 점이다. 다들 그러했으리라 짐작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