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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환씨의 항소이유서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10 10:18
조회
614

1. 序

누구에게나 인생은 소중한 것입니다. 짧은 생을 살아가면서 그 누가 자신의 아름다운 삶을 희생시키고 싶겠습니다. 더욱이 그가 어렵고 힘든 시간을 견뎌온 사람이라면, 그 나름대로 계획을 갖고 자신의 삶을 꽃피우기 위해 준비해오던 사람이라면, 그에게 인생은 더욱 소중한 가치를 지닐 것입니다. 그러나 80년대라는 시대적 상황은 그토록 값지고 소중한 삶을 꿈꿔오던 젊은이들을 그들의 삶 밖으로 내몰았습니다.

83년, 푸른 꿈을 안고 첫 발을 들여놓은 대학에서 우리가 마주친 것은 핏빛 5월이었습니다. 리모두는 충격적인 광주의 진실을 접하고서 자신만의 삶에 안주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따사로운 봄볕 내리던 5월, 마치 꽃잎처럼 도서관 옥상에서 밧줄을 타다 떨어지던 선배의 모습, 짧고 섬뜩한 외침 소리와 그를 향해 달려들던 같은 또래의 전투 경찰, 그 극명한 대비 앞에서 우리들은 터질 듯한 분노와 슬픔을 느꼈습니다. 그 선배는 결국 식물 인간이 되고 말았고, 우리는 그렇게 5월의 진실, 80년 광주, 그 거대한 시대의 벽을 만났습니다.
아마 저뿐 아니라 동시대의 길을 걸어왔던 많은 사람들은 다시 태어나 그 시대의 한가운데 놓인다 할지라도 또다시 같은 길을 주저없이 걸어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고백컨대, 저는 그토록 충격적으로 진실을 접하고서도 상당 기간 사실상 방관자로 남았습니다. 어려웠던 주변 여건과 용기 부족이 저를 망설이게 하였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양심의 목소리는 끊임없이 저에게 옳은 길을 가라고 호소하였습니다.

83년 대학 입학과 함께 시작한 학생기자 생활. 저는 수습기자, 기획부장, 논설위원을 거치면서 암울한 시대의 나상을 낱낱이 지켜보았지만, 막상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하였습니다. 치열한 투쟁의 현장에서 한 걸음 물러나, 이른바 객관적인 위치에서 사물과 사건을 바라보고 분석하고 평가하며 심각한 혼돈과 갈등을 겪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에게 피할 수 없는 숙명의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예정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재단 이사장 퇴진 투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학생들은 무려 100여일 동안 수업을 거부하며 총장실 점거 농성을 전개하였습니다. 대화의 실마리는 보이지 않고, 대립은 갈수록 첨예화하였습니다. 당시 저는 '외대학보' 논설위원으로 학생 기자로서는 드물게 사설을 쓰고 있었는데, 그 무렵 사설에서 학생들의 투쟁지도부를 비판하였습니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사설의 제목은 '대아를 버리고 소리(小利)를 취한 행동'이라는 것으로, 제 나름대로 애정을 갖고 썼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투쟁지도부가 농성이 장기화하자 무리하게 정치투쟁을 시도하고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판단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사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번져 나갔습니다.

이 사설이 나가자 투쟁지도부는 격노하였고, 흥분한 학생들이 신문을 불태우는 사태까지 발생하였습니다. 학생들은 문제의 사설을 교수가 쓴 것으로 잘못 알고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였는데, 저로서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로서는 애정어린 비판이었다고 생각했는데, 행동을 함께 하지 않으면서 비판만 하면 진심이 전달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많은 학우들이 차디찬 콘크리트 바닥에 앉아 100여 일을 보내는 동안 나는 무엇을 하였는가. 그런 내가 감히 그들을 꾸짖거나 비판할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그때 저는 제 자신에게 준엄한 물음을 던졌고, 며칠 밤을 번민으로 잠 못 이루며 지새운 끝에 실천에 뛰어들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마지막 학년을 눈앞에 두고 늦깍이로 운동권 학생이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 길로 투쟁지도부를 찾아 갔고, 제가 사설을 썼다고 고백하면서 학우들 앞에서 용서를 구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그때 투쟁지도부의 한 친구가 저에게 "지적은 올바른 것이었고, 우리도 반성하고 있다"고 솔직히 말하였고, 저는 그에게 "평생을 낮은 곳에서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살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그 이후 저는 많은 오류와 잘못이 있었지만,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나름대로 충실하게 노력해왔습니다.

그때 이후, 15년간 운동의 길을 걸어오면서 참으로 많은 일들을 겪었습니다. 두 차례 수배가 되어 굶기를 밥먹듯 하며 길에서 노숙한 일도 있고, 인쇄렛陸◁제지럭플?노동을 하면서 코피를 흘리고 손가락이 부러지기도 하였습니다. 두 차례 징역을 살았고, 일하면서 죽을 정도의 고비도 몇 차례 넘겼습니다. 돌아보면 아찔한 순간들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 가정을 이루고, 두 아이를 둔 가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운동의 끝은 보이지 않고, 날이 갈수록 혼돈만 거듭되었습니다.

어느 날 저는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선명하게 깨달았습니다. 시대의 변화와 인식의 성숙에 따른 필연적인 깨달음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기존의 이념과 운동 이론에 대한 면밀한 검토와 분석 끝에 주체 사상이 잘못되었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이에 따라 저와 동지들은 스스로 조직을 해체하였습니다. 그때 저는 이념 운동의 최전선에서, 한 사람의 평범한 사회인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과거 운동의 그림자는 저를 자유롭게 '전향'하도록 가만 놔두지 않았습니다. 남과 북은, 미성숙한 국가 권력은 저와 같은 사상 운동가를 용납할 포용력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15년 동안의 운동권 생활을 정리한 저와 극소수의 몇 몇 사람들은 국가 권력의 제물로 바쳐졌습니다. 그것이 저에게 내려진 가혹한 분단의 재앙인 것입니다. 전향한 양심수와 사상범은 실형을 받았더라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석방하는 것이 관례입니다. 하물며 저는 법의 적용 이전에 이미 조직을 해체하고, 스스로 전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중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저 보다 높은 위치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한, 실정법상 혐의가 훨씬 무거운 사람들은 풀어주면서, 저와 같은 하범을 구속시켜 중형으로 다스리려는 사법부의 상식을 벗어난 처사를 저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토록 불공평하게 법 집행을 한다면, 이것을 어떻게 자유와 인권이 보장된 법치국가, 민주주의 사회라 할 수 있으며, 정의와 평등에 입각하여 법을 집행하는 사법부라 할 수 있겠습니까. 저에 대한 재판은 무엇인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에 대한 사법 처리는 법 적용의 형평성을 무시한 완전히 불공정한 재판입니다. 이의 시정을 요구하며 항소 이유서를 제출합니다.

2. 1998년 10월에 발생한 사건에 대하여

이때 제가 재남파된 북한 사람 진운방씨를 만난 것이 실정법에 위배된다면 처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하지만 7년여만에 나타난 사람, 같은 민족이며 저와 잘 알고 지냈으며 서로의 가족에 대해서까지 훤히 알고 지내던 사람을 제가 어찌 신고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저는 그에게 남한 운동의 변화된 실상을 알려서 더 이상 북한이 남파 공작을 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했습니다. 저는 양심과 도의상, 그리고 북한과의 관계를 단절하기 위하여 그를 만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그 당시 제가 할 수 있는 행동의 범위 내에서, 이미 민혁당은 해체되었고 사상 전향하였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린 것만으로도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라도 그 이상의 판단과 행동을 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그 당시 저의 행동이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김영환씨가 어정쩡하게 중국 북경에 머물며 자신의 변화된 입장을 북한에 명확히 알려주지 않은 상황에서 저라도 관계의 단절을 통보했어야 합니다. 이 당시 저의 행동에 대하여 불고 지죄나 북한 주민 접촉죄로 처벌한다면 이는 수용하겠지만, 97년 조직 해산 이전의 행동에 대해 처벌한다는 것은, 그것도 간첩(방조)죄를 적용하여 중형을 선고한 것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민족의 분단으로 생겨난 비극적 현실 앞에서 양심을 가진 한 사람이 취할 수 있는 행동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직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3. 민혁당 사건에 대하여

가. 결 성
우리 나라는 일제의 36년간에 걸친 강점 끝에 1945년 해방이 되었으나, 강대국들의 이익 논리에 의하여 우리 민족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남북 분단의 아픔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분단의 비극은 양쪽 체제의 상이한 입장으로 인하여 적대적이고 대립적인 관계를 낳아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21세기를 맞이하였으나, 통일은 여전히 요원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남북의 대결적 상황에서 접하게 된 주체사상은 정보와 혜안의 부족으로 인하여 그 당시에는 우리 민족의 통일을 위한 최고의 이론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따라 민족의 통일을 향한 일념으로 조직을 결성하였으나, 시대의 흐름에 따라 한계를 가지면서 스스로 해산하였던 것입니다.

나. 활 동
조직은 결성하였지만 그 활동은 스스로의 이론 무장과 이를 전파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1심 재판부도 인정하였듯이 우리는 폭력적인 활동을 하거나 직접적인 국가 전복 행위를 시도한 적이 없습니다. 사회과학 서적을 읽고 이에 대해 토론하고, 남북의 통일방안을 연구하는 것이 우리들의 주된 활동이었습니다. 북한과의 연계 활동은 진운방이 출국한 뒤인 92년 8월 이후 중단되었으며, 그후 민혁당은 치열한 자기 고민 끝에 친북 활동을 정리하였습니다.

다. 활동 기간 및 중지, 그리고 해산
89년 조직 결성 후 92년 8월까지 북과 연계된 활동을 하다가 중지하였으며, 이런 상태로 몇 년의 세월이 지난 뒤인 97년 민혁당 중앙위원회의 결정으로 공식적으로 조직을 해산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저를 비롯한 대부분의 성원들이 전향하여 활동을 종식한 바 있습니다. 국정원도 인정하였듯이 민혁당 사건은 한마디로 '전향한 조직 사건'인 것입니다.

라. 본 사건에 대하여
이처럼 본 사건은 정보 부족 및 그 시대적 상황 등으로 인하여 자발적으로 조직을 결성하였다가, 스스로 그 오류를 깨닫고 방향을 전환하고 조직 해체를 선언한 이미 정리된 조직사건인 것입니다. 정상적으로 성장하여 대학에 입학한 후 시대적 상황과 남다른 민족에 대한 열정으로 한 때 운동했던 것이 간첩(방조) 행위란 말입니까. 저의 지난 행동에 대한 대가는 저나 제 가족의 희생으로 족한 것이지, 이미 과거에 해산해버린 조직의 일을 가지고 무슨 대역죄나 저지른 것처럼, 그것도 전혀 형평에 맞지 않는 법의 잣대를 적용하여 저만 중죄로 단죄할 수 있단 말입니까.

4, 국가 기밀 누설에 대하여

가. 범죄 사실
저의 혐의로 인정되어져 있는 국가 기밀 누설은 조사 과정과 원심 재판 과정에서도 밝혀진 것처럼, 이미 신문에 보도된 내용 및 논문으로 기 발표된 내용으로 국가 기밀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일반 사람이 손쉽게 접할 수 있는, 공지의 사실을 국가 기밀로 적용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처사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나. 국가 기밀로 분류될 수 없는 내용
누구나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신문보도 내용이나 학설로 발표된 논문 내용이라 해도 국내에서 구해 볼 수 없고 국내에서만 접할 수 있다고 한다면, 넓은 의미에서 국가 기밀로 분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 신문은 조간 신문의 경우 당일 오후만 되면, 중국렝?본렷訶?�말레이시아 등 아시아 국가 어디에서나 쉽게 받아볼 수 있으며, 그 다음날이면 우리 나라 교민이 사는 전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아주 손쉽게 구해 볼 수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북한 쪽에서 마음만 먹으면 아주 쉽게 어떤 신문이든 구해 볼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논문은 더 쉽게 구해 볼 수 있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를 가나 도서관을 이용하면 자유롭게, 이미 발표된 것이면 어느 나라 논문이든 쉽사리 열람할 수 있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어떻게 하여 신문에 발표된 기사나 학술 논문이 국가 기밀이라는 말입니까. 세계화 시대에 이런 현실이 정말 답답하고 한심한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지난 2월 26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지난 2년간 8천여 명의 국민이 북한을 다녀왔다고 합니다. 이는 금강산 관광객은 포함되지 않은 숫자입니다. 또한 지난 2월에는 우리 어민들이 북한 당국과 만나 정부 승인 없이 어업 협정을 체결하고 돌아왔으나, 처벌받지 않았습니다. 또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의 김정일 총비서를 가리켜 '판단력과 식견을 갖춘 지도자'라고 언급하여 논란을 빚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남한 에서 나고 자란 제가, 신문 보도나 논문을 취합한 자료를 과거에 진운방에게 건네주었다고 해서 간첩(방조)죄를 적용 받아야 하는 겁니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 법의 적용에 대하여
위와 같은 현실 속에서 신문에 발표된 기사와 논문이 전혀 국가 기밀이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국가 기밀이라고 억지로 갖다 붙이는 것은 남북 화해의 시대, 국가보안법 개정 시대에도 맞지 않고, 세계화려ㅊ맬?시대의 현실에도 맞지 않는, 권력을 가진 자들의 입맛에 맞추기 위한 사건화를 위한 억지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1심 재판부가 저에 대해서만 중형을 선고 한 것은 처벌을 위한 처벌일 뿐, 그 외에는 그 어떠한 논리로도 설명될 수 없는 비상식적인 부당한 처사입니다. 최소한 법의 형평성 만큼은 지켜져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정말 궁금합니다. 주범은 풀어주고, 종범만 단죄하는 것은 어떤 근거에 의한 것인지요? 세계 사법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부끄러운 재판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시대착오적인 국가보안법으로, 그것도 전혀 형평성에 맞지 않는 이와 같은 재판은 국제 사회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5. 법의 형평성에 대하여

가. 공소외 김영환
공소외 김영환은 본 사건의 조직을 결성하고 모든 활동을 총괄한 최고 책임자입니다. 그는 조직의 최고 결정 기관인 중앙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있으면서, 북한에 밀입북하여 당시 김일성 주석을 두 차례 만났고, 김일성 국기 훈장을 받고 4억 원이 넘는 자금까지 수수하여 집행한, 저에 비해 훨씬 무거운 혐의를 가진 사람입니다. 게다가 본 사건으로 조사를 받기 위해 중국에서 귀국하였다가, 조사 과정에서 불리함이 느껴지자 다시 국외로 도피하려다가 공항에서 긴급 체포된 사람입니다. 이런 그에게 검찰은 '공소 보류'라는 기상천외한 면죄부를 안겨 주었습니다.

그 이유를 저는 권력 핵심 인물이 개입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었던 김중권씨와 '월간 조선' 조갑제 편집장이 결부되지 않았다면 과연 있을 수 있는 일이었겠습니까. 정부가 공표한 것처럼 전향한 사람은 대국적 견지에서 포용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왜 저는 구속되어 4년 6월이라는 중형을 받았는지요? 김영환은 저의 모든 활동을 지시한 사람인데, 그는 왜 풀어주고 저만 가둬 두는 것인지요?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나. 공소외 박금섭
공소외 박금섭(현 한미합동법률사무소 소속 변호사) 역시 본 사건의 조직을 결성한 최고 책임자 3인 중의 한 사람입니다. 중앙위원으로 활동하던 그는 지난 해 9월 9일 국정원이 자수하면 선처한다는 방침을 발표하기 전까지 혐의 사실을 전면 부인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국정원 발표 이후 국정원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국정원이 그에게 "자수하시는거죠?"라고 유도성 질문을 하였고, 박금섭이 "예"라고 대답하여 자수자로 처리하였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코미디 같은 광경입니까. 검찰은 그에 대해 기소유예라는 관대한 처분을 내린 바있습니다. '가재는 게 편'이라고 같은 법조계라고 봐주는 겁니까?

그는 민혁당 중앙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사법연수원에서 공무원의 신분으로 근무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구속되지도 않고 소리 소문없이 조용히 아무 일 없던 것으로 처리된 것입니다. 너무하지 않습니까.

박금섭은 제가 간첩(방조)죄로 3년 6월의 유죄가 인정된 문제의 '주체기치 9호'의 바로 그 원고를 쓴 장본인입니다. 세상에 이런 웃기는 처사가 어디 있습니까. 공소외 김영환과 박금섭은 이처럼 저보다 책임이 무거운 중앙위원들이며, 국가 기밀로 분류된 신문기사와 논문 등을 문서로 만들어 전달하도록 지시한 최초의 원인 제공자들입니다. 그들이 무죄라면 저도 당연히 무죄인 것이며, 제가 유죄라면 그들 또한 유죄인 것입니다.

6. 結

김영환, 박금섭, 조유식 그외 자수한 핵심 조직원 20여 명에게는 면죄부를 안겨주고, 저는 법정에 세워 처벌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98년 재남파된 진운방을 만난 것이 문제라면 그것은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97년 조직 해산 이전의 사실을 유죄의 근거로 삼아 중형을 선고한 것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청와대 인사가 결부되었으면, 같은 법조인이면 면죄부를 주고, 힘 없고 빽 없는 사람은 혐의가 가벼워도 처벌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까.

정상적으로 사회 생활을 하고 있었고, 이미 전향하여 친북 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비판해 온 사람을, 이미 국정원과 검찰 조사과정에서 전향한 것이 확인되었고, 수사에 협조하여 자발적으로 증거 자료(백금 반지)까지 제출하였고, 사건이 발생하여 체포될 것을 알면서도 도주하지 않았던 저에 대해서만 이토록 가혹한 법의 잣대를 들이미는 이유가 진정 무엇이라는 말입니까. 이 점에 대해 재판부는 명확한 입장을 표명해야 합니다.

우리 나라 헌법 제 11조에는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저의 재판은 이상하게도 기본권인 평등권의 적용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검찰에게 '기소 독점'과 '기소 편의'의 권한이 전가의 보도처럼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걸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최소한의 '법 집행의 형평성' 만큼은 고려되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권력 가진 자의 편리한 입맛대로 재판이 좌지우지된다면 누가 그런 법의 집행을 수긍하고 인정하려 하겠습니까. 본 사건과 같은 법 집행 방식이 과연 민주주의 국가라는 나라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상식을 잣대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올해 2월 28일 일부 신문에서 보도한 미국무성 보고서에는 우리 나라 검찰과 사법부의 문제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언제 우리 나라가 참다운 민주 국가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인지 이제 기대조차 갖기 힘들게 하는 현실이 절망스럽습니다. 그냥 그러한 현실을 인정하고 죽은 듯이 살아야 하는 겁니까? 사법부가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섭니다.

다시 한 번 묻습니다. 이것이 과연 공정한 법 집행입니까? 저는 이 자리를 빌어 권력을 가진 자의 눈치를 살피는 검찰과 사법부를 질타합니다. 정상적인 사법부의 법집행이라면, 독립적인 사법부로서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당당하다면 어떻게 법관의 입에서 "정치적으로 해결하라"는 따위의 얘기가 나올 수 있단 말입니까. 참으로 이 나라의 장래가 염려스럽습니다. 이런 사법부에 어찌 공정한 법 집행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지혜의 여신 아테네는 한 손에는 저울을, 한 손에는 칼을 들고 있습니다. 법은 공정하게, 그리고 엄격하게 집행해야 한다는 상징인 것입니다. 2심 재판부에 간곡하게 당부합니다. 수사 기록과 재판 기록을 꼼꼼히 살펴보시고 공명정대하게 판결하십시오. 그래야 법의 기상과 권위가 설 수 있습니다.

저는 양심의 목소리에 따라 생각하고 판단하고자 노력한 사람입니다. 저와 같은 사람이 납득할 수 있어야 제대로 된 법 집행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저의 양심에 비추어 보건대 1심의 재판 결과는, 백보를 양보한다고 해도 너무도 부당한 것입니다.

저는 무죄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공평한 재판을 원합니다. 수긍하고 인정할 수 있는 재판을 원합니다. 2심 재판부의 현명하고 이성적인 재판이 이루어지기를 일말의 기대를 갖고 기대해 봅니다. 더 이상 법의 권위가 실추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으로 항소에 대한 저의 입장을 밝히며, 글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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