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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호] 장발장은행 5년, 배움과 성장의 시간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0-03-25 16:07
조회
51

서보학/ 장발장은행 대출심사위원, 경희대 교수


 지금으로부터 5년 전 장발장은행이 문을 열었다. 장발장은 빅토르 위고의 장편소설 ‘레 미제라블’(Les Miserables)에 나오는 주인공이다. 굶주린 누이와 조카를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총 19년간의 옥살이를 한 비운의 주인공. 장발장은 19세기 프랑스나 21세기 한국에서 굴곡진 삶으로 고통받는 사회적 약자들을 상징하는 이름이다.


 2015년 인권연대가 설립한 장발장은행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여느 은행과는 다른 일을 한다. 경미한 잘못으로 벌금형을 선고받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담보· 무이자 대출을 해주어 벌금을 납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은행이다. 대출금은 모두 개인 및 (종교)단체의 후원금으로 충당된다. 벌금형을 받은 미성년자, 소년소녀가장, 수급권자, 차상위계층 등 장발장들에게 6개월 거치 1년 균등상환 방식으로 최대 300만 원을 빌려준다.


 지난 5년 동안 - 2020년 3월 9일까지 - 모두 8,098명(개인·단체)에게서 1,103,917,525원을 후원받아 791명에게 1,412,707,000원을 대출하였다. 이 가운데 현재 134명이 대출금을 모두 상환하였다. 마르지 않는 화수분처럼 매달 장발장은행의 예금계좌에는 필요한 손길에 도움을 줄 수 있는 후원금이 모이고 있다.


 장발장은행이 설립된 이유는 우리나라의 총액벌금제도가 갖고 있는 심각한 문제점 때문이다. 총액벌금제란 동일한 범죄행위에 대해 동일한 벌금을 부과하는 제도이다. 얼핏 공정할 것 같은 이 제도가 갖는 문제점은 형벌효과의 불평등을 낳는데 있다.


 쉽게 말해 경미한 범죄에 대해 선고되는 100만 원의 벌금이 부자에게는 가벼운 형벌인 반면 가난한 사람에게는 매우 무거운 형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술 한 잔 먹고 취기에 싸움을 벌이거나 과실로 교통사고를 야기한 경우 부자들에게 수백만 원의 벌금은 무죄방면에 가깝지만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서민들에게 100만 원의 벌금도 매우 중한 형벌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이들이 벌금을 납부하지 못해 노역장(교도소)에 수감되는 상황이 닥치면 그 고통은 몇 배로 커진다.
물론 현재도 형편에 따라 벌금의 납부를 연기하거나 매월 조금씩 분납하는 제도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법 현실은 사회적 약자들에게 관대하지 않다. 형집행의 책임을 지고 있는 검찰의 무관심으로 인해 실제 허락대상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벌금형을 선고받고 제때 납부하지 못해 교도소에 수감되는 사람들이 매해 평균 4만 명을 오르내린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가장이나 어린 자녀를 양육해야 하는 젊은 부모가 벌금미납으로 교도소에 수감되는 경우 가족들이 겪는 고통은 심각할 수밖에 없다. 가족 중에 돌봄이 필요한 환자나 노쇠한 부모가 있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경제력이 있는 사람은 벌금을 납부해 교도소 수감을 면하지만 정작 가족 곁을 떠나지 못할 절박한 사정이 있는 가난한 사람들은 교도소에 들어가 몸으로 벌금을 때우는 현상이 계속되고 있다. 앞문으로는 벌금형을 선고해 풀어주고 뒷문으로는 마구 잡아들이는 상황은 매우 비정상이다.


 이러한 안타까운 현실을 개선하고자 지난 2015년 6월 장발장은행은 염수정 추기경과 함께 국회에서 ‘국회로 간 장발장’ 행사를 개최하였고, 당일 행사에 참여한 여·야 지도부 및 60여 명의 국회의원들에게 사회적 약자들에게 특히 고통스러운 벌금형 제도를 개선해 줄 것을 촉구하였다. 이에 국회가 응답해 형법 제정 64년 만에 벌금형의 집행유예제도가 도입되었다. 500만 원 이하의 벌금형 선고시 법원이 피고인의 경제적 형편을 고려하여 벌금형의 집행을 유예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과거 수십 년 간 많은 형사법학자들이 벌금형에도 집행유예제를 도입할 것을 촉구하였지만 냉담하던 국회가 장발장은행의 진심어린 호소에 마음의 문을 연 것이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현실은 다시 실망을 안겨주고 있다. 통계를 보면 벌금형의 집행유예 선고 건수가 극히 미미하기 때문이다. 이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법원 및 검찰의 관심도가 여전히 낮다는 것을 보여준다.


 총액벌금제가 갖는 형벌불평등의 효과를 피하기 위해서는 우리나라도 서유럽 국가들과 같이 일수벌금제를 도입해야 한다. 일수벌금제란 범죄의 중한 정도에 따라 벌금 일수를 정하고 행위자의 경제적 사정에 따라 하루벌금액을 정한 뒤 이를 곱하여 벌금액을 산정하는 방식이다.


 예컨대 가벼운 폭행 사건이나 교통사고에 대해 벌금일수가 30일로 정해지고 경제적 사정을 고려해 하루 벌금액이 2만 원으로 정해지면 총 60만 원의 벌금이 부과되는 방식이다. 재벌 3세의 폭력행위나 교통사고에 대해서는 하루 벌금액이 100만 원으로 정해져 총 3,000만 원의 벌금이 부과될 수도 있다.


 실례로 2002년 핀란드에서는 차량 과속으로 단속된 대기업 부회장에게 경제력을 고려해 약 1억 3,000만 원의 벌금을 부과한 예도 있다. 이 제도의 장점은 형벌의 고통이 부자와 가난한 자 모두에게 동등하게 부과되도록 하는데 있다.


 우리나라에서 매년 4만 명에 가까운 사회적 약자들이 벌금형을 선고받고도 감옥에 수감되는 현실을 그대로 두고 정의가 실현되는 사회, 인권이 보장되는 국가를 말할 수 없다. 경제력을 고려해 벌금액을 산정하면 교도소에 유치되는 사회적 약자들의 수를 현저하게 줄일 수 있다. 21세기 한국 사회의 장발장들을 위해 벌금제도의 개혁이 필요하다. 이러한 제도의 개선에 장발장은행이 앞장서 노력할 것이다.


 필자는 운 좋게도 지난 5년간 장발장은행의 운영에 관여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구체적인 직함은 대출심사위원이다. 장발장 은행과 함께한 지난 5년이 나에게는 소중한 성찰과 성장의 시간이었다. 장발장들의 대출신청서를 검토하면서 아직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벗어나기 힘든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형사법학자이지만 책을 통해서는 알지 못했던 숨겨진 진실, 즉 우리의 법제도가 실제로는 본래의 취지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것, 법제도가 여전히 계급사법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는 것, 특히 사회적 약자들에게 불필요하게 큰 고통을 안겨주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지혜롭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동료 은행원들과 함께 일하면서 우리 시대의 장발장들을 돕기 위해 어떤 구체적인 행동을 취하고 어떤 지점에서 제도를 개선해야 하는지도 깨닫게 되었다.


 형사법제도를 연구한 지난 30여 년보다 장발장은행에서의 5년이 더 많은 깨달음과 배움을 안겨주었다. 부족한 나에게는 감사하고 또 감사할 일이다. 필자는 앞으로도 계속 대출창구를 지킬 것이다. 장발장은행의 설립 목표처럼 ‘은행 문을 닫는 그 날’이 올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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