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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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봄, 나이 듦, 죽음(박상경)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2-04-26 16:53
조회
546

박상경/ 인권연대 회원


봄, 생명의 시작


 봄이다. 긴 겨울의 끝에서 생명이 움트는 소식을 전하는 봄이다. 옥상에 올라 바라보는 산은 하루가 다르게 초록으로 물들어간다. 개나리 진달래가 피고 지는 곁에서 조팝나무의 하얀 물결이 눈이 부시다. 산매화며 벚꽃이 피는가 하더니 목련꽃이 진다. 그 자리에 연둣빛 잎이 달린다. 이제 올라온 가녀린 잎새는 제 몸을 가누지 못해 돌돌 말려있다. 하루 이틀 지나면서 돌돌 말린 잎새는 생명의 기지개를 펴듯 스스로 제 몸 가누어 쭉 펴 올리더니 봄바람에 살랑인다. 신기하다. 여린 잎을 단 나무들이 하나 둘 어린 초록빛으로 물들더니 이제는 좀 더 진한 초록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초록의 향연이다. 눈이 부시다.


 봄, 움터오는 생명의 탄생, 문득 아주 오래전 홍도에서 새 생명의 탄생을 눈앞에서 지켜본 기억이 났다. 해산일이 가까운 임신부가 때마침 불어온 태풍으로 미처 뭍으로 나가지 못하고 집에서 아이를 낳게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공소회장님 댁이 산파를 자처하였다. 회장님댁은 “아이를 받아본 게 10년도 넘었는디….”하시면서도 차근차근 아이 받을 준비를 하였다. 나도 곁에서 물 끓여 가져와라 하면 물 들여가고, 소독한 가위 가져오라면 방에 들여놓고 안절부절못하면서 잔심부름을 하였다.


 그렇게 방 밖에서 숨죽여 아기가 태어나기를 기다리는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찰싹하는 소리에 이어 세상에 첫소리를 내는 갓난아기의 “응애~” 하는 울음소리가 들린다. “아들이랑게! 산모도 아도 모두 건강허요!” 순간 나는 알 듯 모를 듯한 조심스러움과 두려움을 느꼈다. 부서질 것만 같은 연약한 생명에 대해 본능적으로 느낀 두려움은 생명에 대한 경외감이었을까?! 죽은 것만 같던 나뭇가지에 움터 나오는 잎새를 보며 새삼 생명의 시작은 작고 여리고 연약한 것이었다는 걸 생각하는, 봄이다.


나이 듦, 느려지는 시간


 “어쩌면 가사가 저리도 곱냐….” 고운 봄볕 길게 드는 마루에서 화투장을 만지던 엄마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다가 탄식하듯 혼잣말을 한다. “열아홉 시절은 황혼 속에 슬퍼지더라….” 백설희의 ‘봄날은 간다’이다.


 울 엄마 올해 여든셋, 행동거지도 기억력도 많이 느려지고 있다. 앉았다 일어나기도 힘들고, 좀 전에 있었던 일도 기억하려면 시간이 걸리고, 오늘이 며칠인지 알려면 몇 번씩 달력을 들여다봐야 하고, 전날 만나 인사 나누던 앞집 사는 이가 며칠째 안 보인다며 걱정하고~. “자꾸만 기억이 안 난다! 왜 그러지! 걱정이다!” 철없는 딸내미는 “나이 들면 다 그렇지 뭐, 젊을 때하고 같아? 뭔 그런 걸 걱정해!” 하며 타박이나 한다.


“그럼, 오늘은 저 웃소사 복숭아꽃 활짝 폈으니 그리로 꽃구경 갑시다!”
“싫다! 걷는 것도 그렇고, 모양도 그렇고….”
“봄볕도 좋고, 복사꽃이 활짝 펴서 장관이야! 천천히 걸어보지 뭐!”


 어린애 달래듯 하여 느릿느릿 산책길에 나서자니, “지팽이는 싫다! 그냥 걸을란다!”며 딸내미한테 손을 내민다. “니 손 잡고 걷는 게 더 좋다!”


 그렇게 딸내미 손 붙들고 느릿느릿 걷다 보면 복사꽃 화사하게 핀 저 무릉도원에 도착할진저, 그 그늘 아래서 한숨 졸다 보면 서녘으로 기우는 해를 배웅하는 시간이 올 것을. 굽이굽이 돌아왔을 엄마의 삶의 길을 천천히 동행하자니 “힘들구나!” 하면서 잠시 숨을 고른다. “좀 쉬었다 가자!” 그러지 뭐, 느릿느릿 걸어도 우리는 저 무릉도원에 닿을 것을.


죽음, 기억하는 삶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우리는 늘 부고를 들으며 산다. 비록 그 부고가 오늘은 몇 명이라는 통계 수치로 나타나는 것이어서 만성적으로 들리는 것이지만.

 가까운 지인의 부고를 받았다. 육십 초반의 지인의 죽음은 뜬금없는 소식이었다. 코로나19로 인한 것도, 지병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먼 이국땅에서의 교통사고! 작별의 징조란 것도 없이 그저 황망하였다. 꼭 한 달 전에 “미국 다녀와서 다시 보자고!” 하던 그이의 말이 아직도 귀에 쟁쟁 울리며 되살아나곤 한다.


 생로병사, 나고 늙고 병들고 죽음에 이르는 삶이지만, 우리의 의식은 늘 삶에 방점을 찍고 살아간다. 그러다 가까운 그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그제야 죽음이란 걸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 삶의 종착역이 죽음이란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마치 죽지 않을 것처럼 살아가지만 우리의 삶은 죽음에 이르러 끝이 난다.


 한 달 뒤, 사십 후반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후배가 안치된 봉안당을 찾았다. 말기암이던 그니는 죽음을 앞에 두고도 죽을 것 같지 않다고 하였다. 하염없이 착한 웃음으로 맞아주던 생전의 그니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리고 며칠 뒤, 속절없이 파릇한 생명을 잃은 세월호 참사 8주기를 맞았다.


 칙칙한 옷을 벗은 세상을 화사하고 싱그러운 빛으로 물들이는 봄에, 죽음을 생각한다. 마치 죽은 것 같던 고사목에 움터 오른 잎새들이 넓게 퍼져 그늘을 만드는 걸 보면서 새삼 죽음과 마주한다. 내 친구들은 죽음으로 죽은 걸까? 파릇한 아이들은 죽음으로 끝인 삶인 걸까, 생명이 소생하는 봄에 기억으로 삶이 시작되는 이들, 죽음은 기억 속에 시작하는 삶이 아닐까 싶은데….


 마치 우리에 갇힌 것 같던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우리가 마주한 죽음은 어떤 모습이었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