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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정치 이야기를 하지 말자는 친구들에게(조광제)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1-11-18 15:14
조회
785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대표


1. 마, 정치 이야기는 하지 맙시다.


 차기 대통령 선출을 향한 레이스가 한창이다. 필자는 이재명 후보를 지지한다. 그는 “이재명은 합니다”를 출사표의 통괄적인 일성으로 내걸었다. 이 문장은 불완전 문장이다. ‘합니다’의 목적어가 빠져 있다. 이 구호를 접하는 국민은 과연 그가 무엇을 한다는 것인가를 궁금해할 것이다. 문장의 목적어인 그 무엇은 대통령 출마자로서 내놓는 그의 공약에 담길 것이다.


 국민을 향한 공공의 약속 즉 ‘公約’은 헛된 약속 즉 ‘空約’이라는, 정치에 대한 흔한 비아냥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다들 잘 알다시피, 국가가 집행하는 모든 권력의 원천이자 주체는 국민이다. 정치에 대한 이 비아냥은 정치의 주체인 국민이 정치에 짐짓 무감하도록 한다. 그처럼 거짓말을 밥 먹듯 하니, 대통령을 하겠다는 ‘놈들’치고 그렇고 그렇지 않은 ‘놈들’이 누가 있냐는 식이다.


 며칠 전, 오랜만에 필자의 고향인 경남 마산을 찾았다. 한국기원 창원지원에 몇몇 친구들이 모였다. 저녁 내기 바둑을 둔다. 대체로 1급 고수들이다. 필자는 고작 5급 정도에다 평소 거의 바둑을 두지 않다시피 하니, 넉 점 접바둑에도 1승 2패다. 오랜만에 ‘위드 코로나’를 틈타 저녁 겸 술자리에 열 명 남짓 선후배들이 모였다. 보이지 않는 녀석들의 안부와 동정을 묻고 즐겁게 반세기 가깝게 지난 고교 시절 옛이야기를 나눈다. 술이 몇 순배 돌고, 3.15 의거와 부마 항쟁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 마산 사람들이 독재자 두 명을 날려 버렸다 아이가! 그기 우리 마산 사람들의 뚜렷한 자부심 아이것나!’ 필자가 거들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대선 정국으로 말머리가 돌아간다. ‘어이, 조박사, 니 철학박사 아이가, 우찌되는 긴지 한 마디 해봐라.’ 그러자 치과 원장 일을 하는 후배 한 녀석이 ‘정치 이야기는 하지 마입시더.’ 하고서 힘주어 말한다. 다들 정치적인 입장들이 다르니, 괜히 기분 좋은 술판을 깨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 녀석의 취지임은 물론이다. 딴은 맞는 말이다. 더욱이 필자를 포함해 다들 오랜만의 반가움에 술기운이 많이 오른 상태라 위험한 건 사실이었다. 게다가 ‘아이고, 나는 마 대선이니 뭐니 아무 관심도 없다.’ 또 한 녀석이 맞장구를 친다. 내심 기회다 싶어 이재명 후보의 정치적인 위력과 내공을 ‘선전’하려 하던 필자는 머쓱해지고 말았다. 그렇게 놓친 기회를 여기 ‘수요 산책’의 공론장을 빌려 살려보려는 마음이다.


2. 새로운 정치적 언명에 기대를 건다.


 대통령 출마자의 공약은 말이다. 본래의 공약은 그냥 말이 아니다. 통치권을 어떤 방향으로 어떤 현명한 책략으로 활용할 것인가, 그리하여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고귀한 삶을 어떻게 더욱 바람직하게 높여 갈 것인가, 대통령 출마자의 공약은 그 중차대한 일의 청사진을 제시하는바 엄중하기 이를 데 없는 말이다. 이재명 후보는 말한다. “어떤 지도자가 일을 맡느냐에 따라 시민의 그리고 국민의 삶이 얼마나 크게 바뀔 수 있는가를 보여드리겠습니다.” 너무나 절실하고 적실한 말이다. 그리고 덧붙인다. “말을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행동이 중요합니다.”


 필자는 「현상학적 신체론」이라는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 논문의 핵심 주장 하나가 인간 주체의 근본은 생각하는 정신이 아니라 행동하는 몸이라는 것이다. 생각과 말의 관계에서, 생각은 말로 하는 것이고 말이 곧 생각이라는 것은 철학자 대부분이 인정한다. 하지만, 진정한 삶을 꾸려가는 데 행동이 시작과 끝이고, 따라서 생각이 행동을 위한 수단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인정하는 철학자는 드물다. 그런데, 이재명 후보는 이를 정확하게, 게다가 그의 삶 전체를 통해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행동은 크게 세 갈래로 나뉜다. 일과 싸움과 놀이다. 한자 말로, 일은 노동으로, 싸움은 투쟁으로, 놀이는 유희로 표현된다. 행동의 이 세 갈래는 구분되긴 하나, 완전히 따로 작동하지는 않는다. 노동에서는 자연적인 물질의 저항과 싸워야 하고 관련한 사람들의 무능력과 잔인함과 싸워야 한다. 그런 가운데, 새로운 물건들을 창의적으로 만들어내는 기쁨을 통해 노동이 놀이의 성격을 갖는다. 투쟁의 본령은 정치다. 정치는 뭇 사회적 노동이 추구하는 가치의 방향과 성격을 규정하고 그 분배의 척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를 둘러싼 투쟁이다. 정치적인 투쟁이 일임은 물론이고, 그 성취에서 기쁨이 수반되기에 한편으로 놀이이기도 하다. 바둑 두기나 여느 스포츠 경기 그리고 예술 경연에서 보듯이 유희에서도 경쟁 즉 투쟁이 필수적인 요소고 그 성취를 위한 노력은 노동일 수밖에 없다. 이재명 후보가 말이 아니라 행동이 중요하다고 했을 때, 그가 행동의 이 세 갈래의 갈등과 조화를 충분히 체화했으리라 짐작된다.


 이재명 후보는 ‘억강부약’을 자신의 통치 이념으로 내세운다. 모르긴 해도, 한국의 정치사에서 처음으로 듣는 말이지 싶다. 강한 지배력을 갖는 자들은 소수이기 마련이고, 약한 처지에서 지배당하기 일쑤인 자들은 대체로 다수이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는 강한 자들을 억누르고 약한 자들을 돕는 것이 정치의 근본이념임을 정확하게 인식하여 국민에게 제시한다. 강한 소수를 적으로 삼아 철저하게 싸우겠다는 것이고, 약한 다수를 돕는 것을 그 투쟁의 목적으로 삼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억강부약’을 그저 말로만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행동으로 관철하겠다는 것이다. 그는 기득권 세력의 강력한 저항을 예상한다는 말을 반복하고, 하지만 결코 굴하지 아니하고 끝내 싸워서 이기겠다는 말을 반복한다.


 일견 불안하지 않을 수 없다. 묘한 일반인들의 심리 때문이다. 누구나 투쟁 관계를 벗어날 수 없고, 거기에서 상대적인 우월감과 열등감을 느낀다. 그런데 누구나 투쟁 관계에서 자신이 우월하다는 인정을 받고자 하는 본능적인 경향을 지닌다. 그래서, 현실 전반으로 보면 분명히 자신이 열등한 위치에 있는데도, 가까운 주변의 관계에서 자신이 상대적으로 우월한 지점들에 눈길을 먼저 돌린다. 그리하여 은근히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강자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비록 현재의 자신의 삶을 유지 강화하기 위해 싸우는 일이 힘겹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자신의 현재 삶을 부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세계 8위의 경제력을 자랑하는 대한민국의 전반적인 사정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리라 예상된다. 만약 필자의 이런 생각이 옳다면, 자신이 강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다수고 자신이 약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소수인 셈이 되고 만다. 굳이 철학적인 개념을 끌어와 풀이하면, 보편과 특수의 불일치다. 보편적인 현실로 보면, 분명 강자가 소수고 약자가 다수다. 그 반대로, 특수한 심리로 보면, 강자가 다수고 약자가 소수인 것이다.


 흔히 정치는 심리라고 말한다. 그래서 불안하다. 이재명 후보는 보편적인 현실을 염두에 두고 ‘억강부약’을 외치는데, 유권자인 국민 중 심리적으로 자신이 어느 정도는 강자라고 여기는 사람이 많고, 그래서 그 ‘억강부약’이란 말을 자신을 억압하겠다는 위협으로 듣는 유권자가 많을 수도 있을 것 같기에 불안하다. 말하자면, 객관적인 현실에서의 진실이 주관적인 심리에서의 진실이라는 벽에 부딪혀 왜곡될 수 있기에 불안한 것이다.


 그런 점을 염두에 둔 것일까? 이재명 후보는 “저는 우리 국민의 집단 지성을 믿습니다.”라는 말을 한다. 필자가 알기로는, ‘국민의 집단 지성’, 이 말도 대한민국의 정치사에서 처음으로 듣는 말이다. ‘집단 지성’은 프랑스의 사회철학자인 피에르 레비가 만든 개념이다.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사이버 공간이 보편화하면서 하나의 사안에 관해 특정한 한 사람이 아니라 주도해서 정보 문건을 작성하고 그에 따라 그것에 대해 배타적인 저작권을 주장하는 것에서 벗어나 불특정한 여러 사람이 자발적으로 수정과 개작을 통해 정보 문건을 계속 새롭게 발전시켜 나가는 데 누구나 참여하여 그 지식 정보를 공유하는 현상을 보고서 거기에서 작동하는 공동의 지성 활동을 일컫는 말이 ‘집단 지성’이다.



사진 출처 - Adobe stock


 그런데 이 ‘집단 지성’이란 개념을 이재명 후보가 국민에게 적용한 것이다. “저는 우리 국민의 집단 지성을 믿습니다.” 이를 옛날식으로 들으면, ‘저는 우리 국민이 바보가 아님을 믿습니다.’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보편적인 국민 권리에 따른 복지 정책에 대해 상대편에서 매표행위라고 비판하자, “이제 막걸리 한 사발, 고무신 한 켤레로 표를 사는 때와는 다릅니다.”라고 응수한다. 한때 국민이 너무나 열악한 상황에서 바보가 될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 누구나 쉽게 대학교육을 받을 정도가 되었고 그에 따라 우리 국민이 얼마든지 공통의 지성적 결집체로서 집단 지성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재명 후보는 ‘국민의 집단 지성’이란 말을 함으로써 한편으로는 국민의 지성에 대한 신뢰를 나타내고, 다른 한편으로 국민이 정치적인 판단을 하는 데 있어 개인의 주관적인 심리에 이끌리는 데서 벗어나 보편의 지성적인 판단을 해 달라고 요구한다. 거기에는 우리 국민이 얼마든지 그런 정치적 지성을 발휘할 수 있는 위력을 갖추었다는 그의 믿음이 깔려있다.


 지성의 근본 힘은 반성이다. 지성은 감정적으로 불쑥 떠올라 왜곡되기 일쑤인 자신의 심리적인 판단을 곰곰이 반성해서 검토함으로써 그 부당함을 제치고 진정 올바른 판단을 하도록 생각을 이끄는 힘이다. 이때 지성은 판사인 양 객관적인 진실을 척도로 삼아 저 자신의 심리를 피고로 삼아 판정한다.


 그런데 심리적이건 지성적이건 그 판단의 기준은 이익이다. 감정에 따른 심리적인 판단은 어떤 일이 무조건 나에게 이익이 되면 그 일을 옳다고 여김으로써 내려진다. 지성적인 판단은 어떤 일이 나에게 이익이 되려면 그 일이 다른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어야만 그 일을 옳다고 여김으로써 내려진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돕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나를 공격할 수도 있음을 정확하게 잘 파악하는 것이 본래 지성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지성은 제대로 된 자신의 이익 즉 우선은 자신의 이익이 적게 느껴지더라도 결국에는 자신의 이익을 더 크게 가져가는 쪽으로 판단해서 행동하도록 하는 능력이다. 그 반대로, 감정은 잘못된 자신의 이익 즉 우선은 자신의 이익이 크게 느껴지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이익을 더 적게 가져가는 쪽으로 행동을 몰아가는 힘이다. 지성을 통해 감정을 억제하고 조절해야 이유는 모두가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모두가 제대로 된 이기심을 더 잘 충족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재명 후보가 ‘국민의 집단 지성’을 믿는다고 할 때,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이 이익을 더 많이 얻으려면 반드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이익을 얻도록 판단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아실 것이라 믿는다는 것이다. 과연 국민에 대한 이러한 이재명 후보의 믿음이 현실을 바탕으로 한 것일까, 아니면 이념적인 당위를 바탕으로 한 것일까, 아니면 양쪽을 왔다 갔다 하면서 ‘막연한 승부수’를 던지는 것일까?


 필자는 그의 그 믿음이 현실을 바탕으로 한 것임을, 즉 우리 국민의 집단 지성이 실제로 힘을 발휘하고 있음을 믿고 싶다. 하지만, 이런 필자의 믿음을 확증할 길이 없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적이 불안하다. 다만, 이재명 후보가 ‘국민의 집단 지성’을 향한 이념적인 당위의 부분을 최대한 현실로 바꾸어낼 수 있는 정치적인 행보를 보일 수 있으리라 기대해 마지않는다.


 어떤 사안이건 거짓을 진실로 믿고 행동하면, 그 행동은 반드시 자신에게 불이익으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우리는 진실 자체를 숭상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알고 그에 행동하는 것이 우리에게 이익을 가져오는 길이기 때문에 진실을 추구한다. 이재명 후보가 자신이 현실주의자임을 주장하고 실용주의자임을 주장할 때, 필자로서는 그가 이념을 포기해서가 아니라, 이념 자체가 목표가 아니고 이념이 현실적 이익의 수단임을 정확하게 파악한 바탕에서 제기되는 것이라 여긴다.


 이재명 후보가 뭔가 복합적이고 그래서 이중적인 측면을 지닌 것처럼 비칠 수도 있다. 철저히 민주적인 것 같은데, 왠지 독자적으로 고집을 부리며 밀고 나가는 독재의 통치를 할 것처럼 비칠 수도 있다. 그 순진한 유아적인 미소에서도 잘 나타나듯이 인격적으로는 한없이 부드러운데, 정작 현안에 대한 논변이 시작되면 즉각 진지하기 이를 데 없는 표정으로 돌변하는 데서 나타나듯이 정치적으로는 한치 물러남이 없는 고집을 부릴 것처럼 비칠 수도 있다.


 하지만, 필자로서는 그를 보면서 고대 그리스에서 민주주의를 주장했던 아리스토텔레스가 시민의 자격으로 제시한 것, 즉 “올바른 시민이 되려면, 지배할 줄도 알고 지배받을 줄도 알아야 한다.”는 말을 떠올린다. 간단히 말하면, 필자가 보기에 이재명 후보의 부드러운 인격의 면모는 그가 제대로 지배받을 줄 안다는 것을 일러주고, 그의 단호한 정치적 표정은 그가 제대로 지배할 줄 안다는 것을 일러준다. 그리고 이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뫼비우스 띠처럼 결합해 있다.


 이재명 후보는 자신이 권력 자체를 위해 권력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권한이 필요하기에 권력을 원한다고 했다. 권한은 국민이 국가의 권력으로써 제정한 법의 한계 내에서 즉 국민에 의해 지배받는 가운데 권력을 행사할 것을 요구한다. 이재명 후보가 강조한 ‘권한을 위한 권력’은 ‘지배받기 위한 지배’로 번역될 수 있다.


 오로지 지배할 줄밖에 모르는 자, 자신이 행사하는 권력이 마치 자신의 배타적인 능력에서 생겨난 것인 양 정확하게 착각하여 가능한 한 기회가 닿는 대로 줄곧 자의적으로 권력을 행사해 온 자는 진정 지배할 줄 모른다. 그런 자가 나라의 통치권을 장악할 경우, 국민이 권력을 상실하고 따라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


 필자의 필설이 길어졌지만,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덧붙였으면 한다. 그동안 우리네 정치사에서 쉽게 들을 수 없었던 이재명 후보의 적어도 네 가지 언사, 즉 “말이 아니라 행동”, “억강부약”, “국민의 집단 지성”, “권한을 위한 권력”에 국민 모두 특별히 귀 기울였으면 한다. 그리고 이를 관류하는 이익 우선의 실용주의와 이익을 위한 참다운 이념의 설정과 조절에 아울러 귀 기울였으면 한다. 그리하여, 대내외적으로 명실상부하게 창조적인 평등과 평화의 위력을 갖춘 새로운 나라를 향해 진력하는 대통령을 선출할 수 있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