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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단체가 동네북인가(석미화)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1-10-27 13:49
조회
794

석미화/ 한베평화재단 사무처장


 종종 뵙는 월남 참전군인이 한 분 있다. 3년 전 처음 만나고 조금씩 활동을 같이하며 지금은 평화활동의 동료가 되었다. 최근에는 더 자주 만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서울시 NPO지원센터에서 지원하는 ’활동가 역량 향상을 위한 연구지원사업‘(약칭 ‘활력향연’) 때문이었다. 활력향연은 공익활동가들이 스스로 연구주제를 탐색·개발하여 활동 분야의 전문성을 키울 수 있도록 지원하고, 이를 통해 활동의 지속가능한 성장 기반을 만들도록 돕고자 매년 10개 팀·개인을 선발해 연구비를 지원하고 있다. 나는 ‘참전군인의 평화활동에 대한 연구’로 2021활력향연에 참여하고 있다.


 이 연구를 위해 평화활동에 함께하는 주변의 참전군인을 만나 그들로부터 평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45년 전후에 태어나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두 번의 전쟁을 겪었던 그들은 피카소의 작품 <한국에서의 학살>에 등장하는 인물들처럼 어린아이 시절엔 총부리 앞에 섰고 청년이 되어서는 총을 들고 전장에 가야 했다. 나는 전쟁경험이 어떻게 평화로 이어지고 있는지(혹은 이어져야 하는지), 꼰대와 태극기 할배를 넘어 다양한 그들을 만나고자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첫 번째로 주변에서 함께하는 참전군인의 생각을 듣고자 했다. 종종 뵙던 분을 자주 만나게 된 것도 그런 이유다.


 사실 잦은 만남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는데, 그것은 고맙게도 참전군인으로부터 연구 활동에 여러 가지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꺼이 주변 참전군인을 소개하거나 설문조사 응답받는 일을 함께 해주었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코로나 상황에서 평소 연락도 없이 지내던 이들에게 한 장 한 장 설문을 받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말없이 연구를 위해 애써주었다. 그것은 소리 없는 응원이었다. 나는 이 연구를 통해 좋은 동료를 만나는 행운까지 얻었다. 11월 말 연구 결과가 나오려면 아직 더 정성을 들여야 하지만 이미 과정 속에 많은 배움이 있었다.


 이러한 지원프로그램은 나와 같은 활동가에게 전문성과 재충전의 기회를 제공해준다. 나는 서울시 NPO지원센터가 시민운동 중간지원조직으로서 더욱 확대되길 바란다. 활력향연을 비롯해 비영리 스타트업 지원, 활동가 장학지원, 시민운동 역량강화와 활성화를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더 확장되어 시민운동이 발전하는데 토대가 되었으면 좋겠다. 좋은 생각과 열정이 있다면, 누구에게나 뜻을 펼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익활동가들의 선의와 열정이 시민운동을 만들어가고, 지방정부와 국가는 그것에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지난 9월 13일 서울시청에서
시민사회 분야 민간 보조와 민간 위탁 사업 관련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얼마 전, 두 번이나 기자회견을 자처하며 ‘서울시 곳간이 시민단체 ATM기로 전락했다’라는 오세훈 시장의 발언이 있었다. 그 말은 마치 쌈짓돈으로 엉뚱하게 공짜 인심을 쓴 것 같은 인상을 주기까지 한다. 국가와 지방정부의 공적 영역을 함께 담당하고 있는 시민사회에 대한 그의 막말에 기가 막힌다. ‘서울시 곳간’, ‘시민단체 ATM기’라니? 그런 경박한 상상과 단어의 조합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궁금하다. 대장동 일색이었던 (심지어 서울시 국감에서조차) 이번 국정감사에서 그 발언의 배경이 나올까 싶었지만, 오세훈 시장은 아직 감사 중인 사실이라 똑 부러지게 답변하지 못한 채 모든 시민단체를 지칭하는 건 아니라는 궁색한 말만 내놓았다. 실제로 민관협치의 내용과 결과에 일부 문제가 발견된다면 그것은 행정적으로 처리하고 관련 제도를 정비할 일이지 기자회견을 자처해 공적 가치를 전면 부정하고, 모든 시민단체를 ATM에서 돈 빼먹는 날강도로 만들어버릴 일은 아니다. 민관협치의 취지를 존중하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행정적 불의, 부조리를 잡아내는 것은 그렇게 기자회견으로 결심을 전달하는 방식이 아니라 서울시 최고 의사결정권자로서 얼마든지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일 것이다.


 오세훈 시장의 발언으로 세간에는 내년도 관련 예산 삭감, 시민단체 출신 공무원에 대한 대량 정리해고, 시민운동 중간지원 조직에 대한 과다 인건비 지출 등을 문제 삼는 기사들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이러한 발언의 배경이 박원순 전 시장의 흔적을 지우기 위한 정치공세라는 분석도 나온다. 확인되지 않은 의혹에 불을 지피고 내년 지방선거 때문이든, 정치공세 때문이든 애먼 시민단체를 잡는 일은 이제 없었으면 한다. 올 초 정의연을 둘러싼 후원금 문제가 불거졌을 때 시민단체 전체가 부도덕한 집단으로 매도되었다. 언론의 무분별한 시민단체 때리기로 시민들의 후원 해지가 잇따랐다. 심지어 조선일보 같은 매체는 ‘시민단체를 못 믿어 나눔도 직거래로 한다’는 따위의 기사를 여전히 생산하고 있지 않은가.


 시민운동을 하며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서울시나 어떤 기관의 재정지원을 받아 사업을 한다는 것은 보통 품이 드는 일이 아니다. 사업이 채택되는 것부터가 치열한 경쟁을 뚫는 일이고, 사업을 수행하는 과정과 증빙을 구하는 일까지 행정적인 업무가 어마어마하다. 단돈 천 원도 증빙 없이는 지출할 수 없으며 심지어 야근을 하며 무엇을 먹었는지까지 사진으로 증빙해야 하는 것이 서울시 사업보고의 현실이다. 인건비 사용도 제한이 있어 대부분 사업비에만 지출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원을 받고자 함은 사업을 통해 조금이나마 우리가 실현하고자 하는 가치들을 이루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현장의 어려움은 외면한 채 손쉽게 국고를 편취하는 집단으로 시민단체를 매도해선 안 된다. 행정기관의 장으로서 언행은 신중하게, 표현도 숙고했으면 한다. 시민단체는 당신들의 동네북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