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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험생 딸에게 무심한 아빠가 보내는 편지(윤요왕)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1-10-25 14:54
조회
1167

윤요왕/ 재)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장


 민지야(가명) 요즘 많이 힘들지? 학생부종합전형으로 대학원서를 다 써놓고 최저점 공부만 하니 오히려 맘이 좀 편해진 건가 싶기도 하네. 솔직히 얘기하면 다양하고 복잡한 대학가는 방법도, 네가 원서를 쓴 여러 곳의 대학과 학과를 아빠는 아직 다 모른단다. 아빠와 딸인 우리의 대화가 적었던 것은 아닌데 등하굣길 오가며 참 많은 이야기를 지난 1년간 했던 것 같은데 정작 고3 딸의 대학입시를 이렇듯 외면하고 있는 아빠가 너무 무심했었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구나.


 귀농한 아빠 때문에 어려서부터 시골의 아이로 살아온 19년이 네게 어떻게 기억될지 궁금하단다. 산과 들의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져 있고 풀벌레 소리에 잠이 들고 산새 소리에 아침을 맞을 수 있는 농촌 마을이 네에게도 너무 좋은 환경이지 않았을까 가슴 벅찬 설레임도 있었단다.


 그러나, 자연과 아빠와만 놀고 지낼 수 있는 건 한계가 있다는 걸 우리는 금방 알아버렸지. 유치원에 가도 동갑내기 친구 한 명 없는 시골 학교 유치원 생활에 외로웠을 거고, 방과 후 40~50도를 오르내리는 그 뜨거운 비닐하우스에서 토마토 따는 아빠와 함께 있어야만 했던 어린 시절 민지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니 미안해지더구나.


 뭘 배우고 싶어도 학원차 하나 들어오지 않는 시골 마을의 교육환경은 어쩌면 네게 다양한 배움의 기회를 빼앗은 건 아닌가 박탈감도 들었단다. 그나마 별빛공부방을 만들고 별빛선생님들과 마을 아저씨, 아줌마,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너의 든든한 마을 선생님으로 함께했을 때 아빠의 마음이 비로소 흐뭇해지고 자랑스럽기까지 했었지. 농촌유학을 한다고 7년여를 매년 도시유학생들과 함께 살았던 기억도 네게는 미안함으로 남아있단다. 우리 가족 네 식구가 아닌 다른 아이들과 한방에서 자고 먹고 또 놀아야 하는 추억이 좋은 것만은 아니었겠지? 매년 유학생을 집으로 받을 것인지 너의 의견을 묻기는 했지만, 아빠가 하는 일이 그렇다 보니 큰 반대 없이 유학생들을 받는데 찬성했던 너의 마음이 아빠와 별빛유학센터를 배려한 건 아닌가 감사한 마음도 들더구나. 울기도 많이 울고 다툼도 많았던 너의 초등시절 유학생들과의 생활이 나중에 더 큰 어른이 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좋은 거름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중학교, 고등학교는 시내로 나올 수밖에 없었으니 등하굣길이 얼마나 고되고 힘들었을지 아빠 마음이 많이 아팠단다. 하교 후 학원에 다니는 것도 친구들과 수다 떨고 놀다 오고 싶은 것도 시골의 이른 막차 버스 시간에 맞추는 게 쉽지만은 않았으리라 생각해. 그래도 밤길을 혼자 걷기도 하고 뜨거운 여름, 추운 겨울 시내로 가는 버스 타는걸 짜증 한번 내지 않고 씩씩하게 다니던 민지를 보면서 자랑스럽기까지 했단다.


 우리 부녀지간은 그래도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인 게 아빠는 늘 뿌듯하단다. 너는 친구 얘기, 학교 얘기, 공부 얘기를 스스럼없이 아빠에게 털어놓고 아빠는 일 얘기, 철학 얘기(^^), 정치 얘기 등 편하게 네게 이야기할 수 있어서 무척 기뻤는데 이제 그럴 시간이 많지 않겠다고 생각하니 아쉬움도 크단다. 수험생이 된 지난 1년 아빠는 네가 대학을 가겠다고 한 거에 반대를 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수험생에 도움이 되는 조력자는 못 되었던 거 같구나. 아빠는 대학만능주의 대한민국의 프레임 속에 네가 빨려 들어가 세상의 아름다움과 너의 행복을 잃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컸기 때문이라고 변명하고 싶구나. 언제나 밝고 당당하고 쿨한 우리 민지가 저 세상에 나가 사회의 잣대와 기준의 폭력 앞에 너 자신을 잃을까봐 걱정도 된단다.



사진  출처 - adobe stock


 아빠는 민지를 19년 함께 옆에서 지켜보면서 늘 자랑스럽다는 생각을 했단다. 딸자식 자랑하는 게 아니라지만 민지는 어디에 내놔도 자랑스러운 아빠의 딸이고 그 자체로 빛이 나고 멋진 아이이기 때문이야. 가끔은 시골을 선택한 아빠 때문에 할 수 없었던 공부를 좀 더 시켰더라면, 생활기록부를 좀 더 신경 써서 봐줬더라면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하단다. 다만 민지야, 아빠의 삶의 관점과 철학으로 인해 너의 청소년기를 소홀히 생각한 건 아니었음을 생각해 주었으면 해. 성적이 좀 부족해도 꼭 좋은(?) 대학을 가지 않더라도 너의 인생은 너의 노력과 너의 삶의 가치로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음을 아빠는 너를 통해 보고 싶단다. 좀 더 큰 어른이 되었을 때 지난 19년간의 시골에서의 생활이 불편했지만 아름다운 추억으로 오래 남을 거라 믿어.


 수능이 11월인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잘 마무리하고 시험도 즐겁게 편안하게 노력한 만큼 잘 볼 수 있기를 기도할게. 늘 너를 믿고 기다리고 응원할 수 있는 아빠로 또 세상에 부끄럽지 않은 어른으로 살도록 아빠도 노력하겠다고 약속하마. 그동안 고생했고 사랑한다 민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