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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P. 미러링’ … 우리는 언제 괴물이 됐나(안동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1-09-29 16:17
조회
856

안동환/서울신문 기자


 집에만 머문 긴 연휴, 넷플릭스 드라마 ‘D.P.’ 완주를 실패했다. 30년이 흐른 묵은 기억과 감정들이 TV 스크린에 겹쳐 떠오른 탓일까.    


 1994년 1월 강원도 화천에서 군사 훈련을 받았다. 한밤 중에 사라진 훈련병이 산 속에서 얼어죽은 채 발견됐다. 신병교육대 조교는 우리들에게 “탈영하면 무조건 서울 가는 버스 터미널로 가도록 합니다.”라고 빈정댔다. 그가 왜 읍내 방향과 반대인 산악 지대로 향했는지 알 수 없지만 우리 모두는 혹한기 탈영의 끝은 개죽음이라는 걸 절감했다. 봄이 오자 수백명의 훈련병 중 18명이 영문도 모른 채 전경에 차출(差出)됐다. 전남 광주의 전경대에 배치된 우리는 개인 의사와 상관없이 국방부가 내무부에 빌려준 자원으로 취급됐다.    


 자대 생활은 가혹행위로 실감됐다. 새벽마다 강제 기상해 화장실에서 구두 시험을 봤다. 선임들은 우리 중 1명이라도 작전 암구호와 고참 기수번호를 잘못 답하면 열외없이 주전자에 가득 든 물을 마시게 했다. 얼차려를 빙자한 기수별 구타도 잦았다. 하지만 스물 살 안팎의 우리를 엄습했던 건 ‘오월의 광주’였다.


 광주는 90년대 중반 전국적으로 사라진 화염병이 유일하게 출현하던 도시였다. 매일 시내 중심가의 민자당사와 검찰청사를 경비했다. 기습 시위는 시가지 전투를 방불케 했다. 우리는 5월이면 거의 매일 금남로 일대와 전남대 후문에서 대학생 사수 조직인 오월대(전남대)·녹두대(조선대)를 상대로 악다구니 작전을 되풀이 했다. 전대를 다니다 차출된 동기들은 행여 누군가 얼굴을 알아볼까봐 기동복 깃을 목덜미까지 세우고 마스크를 썼다.  


 소대 후임이 5월 어느날 저녁 전대 후문에서 큰 부상을 당했다. 백골단이 시위 학생들을 후문 안까지 밀어 부치는 진압 작전을 하면서 격렬한 충돌이 빚어졌다. 화염병과 사과탄을 주고 받으며 대치 거리를 유지했던 시위대와 백골단이 엉키면서 삽시간에 대열이 무너졌다. 후선 전경대가 일제히 최루탄을 쏜 순간 충청도 농사꾼 출신의 A가 고꾸라졌다. 야간 상황에서 사수들이 발사각 지침을 무시하고 시위대를 향해 직사한 최루탄 중 하나가 A의 뒤통수를 때렸다. 전경대 지휘관들은 최루탄 직사의 위험성을 알고도 현장에서는 모른 척 했다. A는 부대로 복귀하지 못하고 병원에서 의가사제대했다. 서너 달이 흘렀을까. 흰소복 차림을 한 중년 여성이 부대 정문 앞에서 한참을 흐느꼈던 초현실적인 장면이 마지막 기억이다. 부대는 얼마 후 해체됐다.


 2014년이 배경인 D.P.는 과거의 집단 기억들을 현재로 소환하는 힘을 발휘했다. 온라인 게시판마다 군필자들이 쏟아내는 병영 폭력과 부조리 ‘썰’들이 댓글 경쟁을 벌였다. 옛 고참들을 은근슬쩍 고발하거나 아예 실명으로 악행을 박제하는 ‘온라인 군투’(군대판 미투) 현상도 나타났다.    


 D.P.는 현직 국방장관도 소환했다. 서욱 장관이 국회 국방위원회에 출석해 “(D.P.와) 현재 병영 현실은 다르다”고 반박한 게 대서 특필(?)됐다. 국방장관의 발언 이튿날 선임들의 폭력과 집단 따돌림에 고통받던 해군 일병이 지난 6월 극단적 선택을 한 사실이 드러났다. 스마트폰으로 병영 안에서 주식 투자도 한다는 기사가 풍기는 방만한 자유로움과 국방통계연보 통계 사이의 간극은 컸다. 육군참모총장에서 장관으로 직행한 그의 재임 기간 군 자살자는 지난해 40명, 올 1~6월만 37명에 달한다. ‘군 폭행 및 가혹행위 입건 수’는 2019년 854건에서 지난해 946건으로 다시 늘었고, 지난 5월과 8월 성폭력 피해 여군들이 잇달아 죽음으로 내몰렸다.


 군대는 고통스러운 기억의 공간이다. 군필 남성 다수는 양가적 감정을 체험한다. 막 자대에 배치된 이병 시절 맞닥트린 가혹행위와 부조리는 강렬한 잔상을 남긴다. 스스로를 피해자의 위치에 쉽게 대입하지만 폭력적인 세계에 조금이라도 일조했다는 의구심을 떨치기 어렵다. ‘아버지 기수가 되면 애들한테 잘해주자’는 소박한 다짐만으로 타인의 고통을 방관했던 자책감이 면책되지 않는다.


 드라마가 고통스럽게 느껴진 건 현실을 완벽하게 재현했기 때문 만은 아니다. 잊고 있던 방관자 혹은 가해자로서의 자신을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1995년 소대원 누구도 A의 죽음이 오발 사고가 아니었다고 증언하지 못했다.


 극 중 선임의 가혹행위를 견디지 못하고 탈영한 조석봉 일병은 군 당국을 원망한다. “너희들도 알고 있었으면서 그냥 보고만 있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