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수요산책

‘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경찰에게 아직 수사권 조정은 없다(이윤)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1-09-01 17:03
조회
1248

이윤/ 경찰관


 2006년 캐나다 연방경찰학교에서 교육을 받던 중 당시 다른 교육과정에 들어와 있던 한인 출신 캐나다 경찰과 이야기를 나누다 큰 충격을 받았다. 캐나다와 미국에서는 대한민국이 인신매매(human trafficking) 분야에서 심각한 수준의 국가로 분류된다는 말을 들었다! 나에게 인신매매란 1980년대 후반에 봉고차로 길 가는 여성을 납치하여 성매매업소에 팔아넘기거나 마늘을 까게 한다는 극악무도한 범죄였다. 기가 막힌 나는 “아니, 한국에서 인신매매가 사라진 게 언제인데 아직도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냐. 뭘 근거로 캐나다에서는 한국을 인신매매 국가라고 하는 거냐?”라고 물었다. 그 사람 왈, 선불금 등 빚을 못 갚아 빚쟁이들에 의해 반강제로 캐나다나 미국까지 건너와서 유흥업소에 종사하거나 성매매 하는 여성들을 인신매매 피해자로 보기 때문이란다. 더 할 말이 없었다. 그런 행태에 대해 여태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던 내 야트막한 인권감수성의 바닥을 본 느낌이었다.


 1990년대 중반 실무수사관이던 나에게 유흥업소 종사 여성들은 그저 귀찮은 업무 대상일 뿐이었다. 그 당시 속칭 신용카드 사기나 선불금 사기가 많았는데 이게 참 성가신 일이었다. 신용카드 사기란 신용카드 사용자가 결제대금을 갚지 못하여 카드회사로부터 사기죄로 고소당하는 사건이고, 선불금 사기는 유흥업소 종업원이 일을 시작하기 전에 옷, 화장품, 주거, 용돈, 홍보 등에 필요한 비용을 장만하는 명목으로 미리 업소로부터 돈을 빌려 쓴 후 갚지 않아 고소당하는 사건이다.


 흔히 돈을 빌려 쓰고 갚지 못하면 사기죄로 벌을 받는다고 생각하는데 꼭 그렇지는 않다. 사기죄가 되려면 ‘속여서 재물이나 재산상 이익을 편취’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이 속이는 건데, 보통은 있지도 않은 오징어 같은 물건을 팔겠다고 속이거나, 잔고 증명서 같은 문서를 위조하여 돈이나 물건을 받는 경우가 사기에 해당한다. 단순히 돈을 빌린 후에 갚지 못한 것일 뿐 속인 것이 없으면 사기죄로는 처벌받지 않는다. 문제는 돈을 갚을 ‘능력’이 없으면서도 있는 것처럼 속이고 돈을 빌리는 것도 사기죄로 인정하는 형법 교과서와 기존 판례 때문에 그 부분을 확인하는 수사를 해야 하는 데 소액인 경우 사기죄로 인정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일을 하면서도 의문이 들었다. 신용카드란 것이 사용자가 사용대금을 결제할 것이라고 믿고 발행하는 것이고, 그 신용의 근거는 재산이나 소득 상태를 카드회사가 조사하여 갚을 능력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에 있으니, 결제대금을 갚지 못해서 보는 손해에 대한 책임은 카드회사에도 있는 것인데 연체자를 사기죄로 형사처벌까지 해야 하는 게 맞나? 또 선불금을 미리 반강제로 빌려 줘놓고 이런 저런 명목(티켓다방에 지각을 했다거나, 아파서 하루 쉰다거나, 손님이 돈을 주지 않은 경우)으로 빚이 늘어나게 하여 아무리 일해도 빚의 족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 후에 몰래 도망갔다는 이유로 경찰에 사기죄로 고소하는 업주는 이미 빚을 상쇄하고도 남을만한 충분한 이득을 보았으니 사기죄 피해자라고 할 수 없지 않을까?


 하지만 내 맘대로 고소장이 접수된 사건을 수사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피고소인을 불러 사실관계를 확인해야 하는데, 연락이 되지 않는다거나 출석하지 않으면 수배를 해야 하고, 나중에 검거되면 고소인에게 연락하여 대질조사를 이유로 만나게 해 준다. 그러다 보면 때로는 내가 대한민국 경찰 수사관인지, 신용카드 회사나 사채업자, 유흥업소 사장의 채권추심 대행 똘마니인지 의심스러웠다. 나중에는 선불금 족쇄 때문에 외국까지 가서 일하는 여성들이 인신매매 피해자라는 말을 들었으니 이제는 인신매매 조력자 역할까지 했던 것인가 하는 마음에 큰 충격과 상처를 받았다.


 내 마음 같아서는 악질적 또는 조직적인 사기범죄가 아니라면 단순한 채무불이행을 이유로 고소한 사건은 고소인과 면담 후 더 이상 수사를 하지 않고 끝내고 싶었다. 그러나 경찰은 피고소인 조사 없이 수사를 종결할 권한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수사권 조정이란 수사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사건을 경찰이 알아서 종결할 수 있는 것이었다. 미국에서는 신고나 고소된 사건에 대해 경찰이 임의적으로 수사착수 또는 계속 수사 여부를 결정한다고 들었다. 기소할 사건은 검사와 상의하지만 기소하지 않는 사건에 대해서는 검사의 개입이 없다고 한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개정된 형사소송법에 따라 올해부터 수사권 조정이 시행되고 있지만, 25년 전 내가 기대한 수사권 조정은 오지 않았다. 예전과 실무상으로 달라진 게 거의 없다. 2020년 접수된 43만 건의 고소사건 중 피의자를 기소(재판을 받게 하는 것)한 비율은 20%가 되지 않을 정도(매일경제, 21. 7. 29.)이니 80%는 불송치 결정을 하게 되는데, 지금도 경찰이 불송치 결정한 모든 사건을 검사에게 보내 숙제검사 받는 것처럼 검토받고, 검사가 재수사하라고 하면 재수사를 한다. 송치한 사건에 대한 검사의 보완 수사요구도 들어줘야 한다. 이런 것까지 더 수사를 해야 하나 싶은 요구·요청도 꽤 있다. 거기에 더해 예전에는 피의자가 여러 명인 사건 중 일부만 기소의견이어도 모든 피의자를 한꺼번에 검사에게 송치하였는데, 이제는 송치와 불송치 피의자를 나누어 처리해야 하므로 그 두꺼운 사건 기록을 복사하는 일까지 생겨 수사관들이 해야 할 일은 더 늘어났다. 수사관 수는 예전과 그대로 또는 미미한 정도로 늘어났지만 할 일은 더 많아지고, 사건 관련자들의 불만은 민원이 되어 괴롭히니 경찰의 수사부서 기피 현상이 심각해진 것도 당연하다.


 경찰에게 수사권 조정의 핵심은 스스로 범죄 수사에 대해 판단할 권한이다. 수사를 더 이상 진행할 필요가 없는 사건은 경찰에서 바로 종결할 수 있어야 한다. 경찰이 사건 말아먹는 게 걱정되실 분들도 있으나 지금도 경찰 수사가 맘에 안 드는 고소인이 해당 경찰서에 이의신청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바로 송치하여 검사가 수사하게 되어 있으니 걱정 마시라.


 80%에 이르는 불기소 사건에서 풀려나면 경찰은 한층 여유로워진 인력과 자원으로 유사수신이나 가상화폐 사기, 보이스 피싱, 인신매매 등 사회에 큰 해악을 끼치는 범죄를 더 적극적으로 수사할 수 있을 것이다. 경찰은 범죄를 수사하는 곳이지 떼인 돈 받아주거나 도망간 유흥업소 종업원 찾아주는 곳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