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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와 평화의 정치를 위한 대통령의 하야(조광제)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4-12-04 10:19
조회
463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정치는 아무나 해서는 안 된다.


생명체의 기본 특성이 ‘자기 생산’(autopoiesis)이라고 한다. 이는 식물에도 해당한다. 그리고 영혼은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영혼을 가진 자는 자기의 존재를 생산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활동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 못한 자는 영혼이 없는 셈이다. 우리는 영혼이 없는 자를 인간이라고 하지 않는다. 더욱이 영혼을 갖더라도 제대로 갖추어야만 인간이다. 유전인자에 따라 인간의 몸을 지녔기에 겉으로 보기에는 인간인 것 같지만, 인간이라 일컫기에 무척 난감한 자들도 있다는 이야기다.


생명체는 반드시 외부의 환경에서 주어지는 자극에 반응하기 마련이다.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따라 온갖 형태의 생명이 나뉜다. 수준이 낮은 생명체일수록 주어지는 자극에 반응하는 속도가 빠르다. 오로지 본능으로만 활동하기 때문이다. 또 그럴수록 자신이 지각하는 공간의 범위가 좁고, 시간의 길이도 짧다. 최고로 복잡하고 그래서 수준이 높다고 여겨지는 생명체인 우리 인간의 경우, 본능으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자극의 반응 간의 속도는 다른 동물들에 비해 느리다. 그만큼 삶의 공간의 범위와 시간의 길이가 길다. 말하자면 다양한 형태로 폭과 깊이를 갖춘 기억 능력을 갖추고서 그에 따라 본능 외에 요컨대 지성과 상상력을 발휘한다.


편의상 동물과 인간을 본능과 지성의 배분 정도로 구분해서 생각해 본다. 본능적일수록 동물에 가깝고 지성적일수록 인간에 가깝다고 생각해 본다. 지성적일수록 행동이 이루어지는 시공간이 범위가 넓고 다양한 형태를 띤다. 그만큼 행동의 종류도 많고 행동에 관계하는 변수들이 많고, 그래서 행동하기 전에 생각을 많이 할 수밖에 없다.


변수가 많은 행동도 있고 변수가 적은 행동도 있다. 인간 역시 동물이다. 그래서 동물과 마찬가지로 먹고 싸고 자고 입는 등, 이른바 생물학적인 단순한 말하자면 변수가 적은 행동을 한다. 변수가 많은 행동은 무엇인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변수로 하지 않을 수 없는 행동이다. 그래서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하고 정치적인 동물이라고 한다.


인간이 하는 행동 중 가장 변수가 많고 그만큼 고려해야 할 조건들이 많은 행동이 바로 정치다. 정치는 나의, 나에 대한, 나를 위한 행동이 아니다. 정치는 다른 사람에 대한, 다른 사람을 위한 행동이다. 다른 사람과 어울려 하는 행동을 통해서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의 인간 고유의 삶의 영역들이 마련된다. 이 영역들이 서로 얽혀 영향을 미치는 건 물론이다. 하지만, 그러한 상호 작용 중에서도 중심에 놓여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정치이다. 말하자면, 다른 영역의 행동에 비해 정치적인 행동이야말로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가장 강하게 영향을 미침으로써 그들의 삶과 존재를 결정한다. 그런 만큼 정치적 행동은 가장 변수가 많고 그만큼 골똘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행동이다.


인간 삶의 여러 변수를 최대한 놓치지 않고 생각하고 성찰하는 데서 이른바 덕이라고 일컫는 탁월함이 성립한다. 전통적으로는 분별, 절제, 정의, 용기 등을 덕으로서 꼽고 이를 총망라한 덕을 지혜라고 일컬어 왔다. 이는 그 누구보다도, 예를 들어 철학자나 종교가들보다 정치하는 자들이 갖추어야 하는 덕목이다.


동물의 정치를 당장 끝내야 한다.


현실 정치에서 누가 과연 이러한 정치의 덕을 더 많이 갖추었는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가 가장 큰 문제다. 정치의 핵심은 흔히 입법, 행정, 사법으로 나누는 바, 올바른 법의 제정이고, 올바른 법의 집행이고, 위법 여부에 대한 올바른 법의 판단이다. 이들 행위는 정적으로는 국가라는 이름으로, 동적으로는 주권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행위다. 국가는 각자 타인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누려야 할 인간 활동의 권리를 양도함으로써 더욱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만든 공동체다.


주권이 왕이나 소수의 귀족이 아니라 국민 모두에게 있는 민주 공화국에 살고 있는 우리는 누구나 정치적인 행동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와 참여해야 하는 의무를 지닌다. 그 권리와 의무는 당연히 법, 특히 기본법인 헌법과 현행법인 각종 법률을 통해 명시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투표를 통해 우리를 대표해 입법을 담당하는 국회의원들을 뽑고 법 집행을 책임지는 대통령을 뽑는다. 그런데 과연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이처럼 정치 대리인들을 선출할 자격과 자질을 지녔는가? 이에 대한 의심은 우리가 뽑은 정치 대리인들이 얼마나 어떻게 정치를 올바르게 해서 얼마나 바람직한 성과를 많이 내는가, 하는 그 결과에 따라 증폭되기도 하고 감소하기도 한다.


국민 개개인은 자신의 평가와 판단에 따라 정치 대리인들을 선택하여 지지하고 투표한다. 그 성향들을 결집해 정치 집단인 정당을 만들고 정당에 가입하고 지지한다. 각자 자신이야말로 제대로 된 정치 대리인들을 선출할 자격이 있고, 자신과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들은 정치 대리인들을 선출할 자격이 없다고 내심 평가한다. 투표를 통해 이러한 선택적인 평가와 판단의 결과가 다수결에 따라 결정되면 어떤 이유에서건 모두 따라야 한다. 정치적인 판단에 있어서 개개인의 평가와 선택이 무조건 전체적으로 옳을 수는 없다. 각자 자신의 이해관계를 벗어나 최대한 공공의 이익을 위해 판단한다는 건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설사 그렇게 공공의 이익을 위해 판단한다고 할지라도 그 판단이 옳다는 건 결국 자신의 판단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투표 결과는 법에 정해진 대로 따라야 하는 것이다. 특히 국가의 법 집행의 행정을 책임지는 대통령을 선출했을 때는 더욱 그러하다. 대통령이 국가를 이끌어가는 책임과 의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으려면 국민 대다수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통령으로 선출된 자가 선출의 과정에 국민 대다수를 크게 속여 선택을 위한 평가와 판단을 근본적으로 왜곡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렇게 속이고 왜곡했다는 사실을 국민은 어떻게 알고 중시하게 되는가? 그의 통치 행위를 통해서이다. 자신에게 위임된 대통령의 국가권력을 선용하면 설사 선출 과정에 속이고 왜곡한 행위가 있더라도 국민은 굳이 문제 삼지 않을 것이다. 경제를 잘 일으켜 국민 민생과 복지의 수준을 높이고, 외교를 잘 해서 국민의 안녕과 평화를 강화하고, 교육과 문화의 다양성과 폭과 깊이를 더해 국민의 정신적 삶의 질을 높이는 쪽으로 크게 힘쓰는 데 진력해 곳곳에서 성과를 낸다면 그 누가 굳이 그의 과거를 문제 삼겠는가.


그러나 너무나 불행하게도 우리가 선출한 윤석열 대통령은 정확하게 거꾸로 가고 있다. 국민을 철저히 속인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이 국민을 속였다는 사실을 아예 노골적으로 드러내어 ‘그래서 어쩔래? 어디 할 테면 해보라.’ 하는 안하무인의 태도를 내보인다는 점이다. 21번씩이나 국회에서 의결한 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한 데서 여실히 드러난다. 총선에서 야당의 의석을 크게 해 ‘우리가 당신에게 속았으니, 지금부터라도 정신 바싹 차리고 잘하시오.’라는 경고를 보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마치 국민이 자신을 배반한 양 오히려 분노에 차서 적반하장의 태도를 보인다. 결국에는 국정 지지율이 20%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는데도, ‘나는 잘못한 게 없다’라는 핑계로 일관하고 제대로 된 반성의 기미는 전혀 내보이지 않는다. ‘나를 대통령으로 뽑을 때는 언제고 왜 이렇게 내팽개치려고 하느냐. 나는 내 길을 알아서 간다.’ 하는 식이다. 국민은 이러한 그의 심보를 짐작하면서 그게 영 틀린 말은 아니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기에 자책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더욱 미칠 지경이다.


검찰권력을 통한 통치행위


대통령 윤석열 씨는 이루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죄책이 많다. 그중 가장 큰 죄책은 국민 대다수의 의식을 암암리에 동물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것이다. ‘한번 기소당하면 패가망신 하기 마련이다’라는 그의 말에서 드러나듯이, 검찰총장 출신의 대통령이기에 조금이라도 악용했을 경우 검찰의 행위가 얼마나 큰 부작용을 가져오는가를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검찰의 중립적인 독립성을 위해 검찰을 더욱 삼가 존중해야 한다. 그런데 정확하게 그 반대다. 그 아래에 불안과 공포를 숨기고 있는 자존심과 위세를 부리기 위한 목적으로 볼 수밖에 없는 정적 죽이기를 위한 통치 행위의 핵심 수단으로 삼아 마음껏 검찰 권력을 휘두른다. 이 얼마나 심각한가를 잘 알기에 더욱 삼가 존중해야 할 검찰을 통치 행위의 핵심 수단으로 삼아 휘두르는 것이다. ‘털어서 먼지 나지 않는 놈 어디 있겠어. 끝까지 물고 늘어져.’ 하는 강압을 행사한다. 아울러 행정 관료들은 물론이고 독립성을 보장해 주어야 할 각종 감시 기구의 수장들, 그리고 여당의 지휘부를 자신의 호위 무사로 만들어 채운다. ‘지록위마’의 손가락질로 그들에게 위선과 허위와 아부를 몸에 배도록 한다. 가장 염려스러운 건 그럼으로써 인간 삶에서 지성에 따른 정의를 향한 분별과 용기, 그에 따른 절제와 겸양의 덕을 추구하는 게 오히려 위선이고 악덕인 양 호도하고 그 대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생존 본능에 따른 행위야말로 가장 진실한 인간 됨의 길인 양 몸소 보여주면서 강압한다는 사실이다. 즉 살기 위해서는 인간이어서는 안 되고 동물이어야 한다고 암암리에 강요하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참으로 어이가 없다. 워낙 중요한 대통령의 책임을 지고 있기에 국민 생활을 도탄에 빠뜨리는 무능도 결단코 용서할 수 없거니와, 거기에 더해 거짓으로 일관하는 불성실에다 그 불성실이야말로 삶의 유일한 방책인 양 무의식을 퍼뜨리고 있으니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 어떻게든 법적인 조치를 통해 끌어내려야 한다. 그나마 자진해서 하야한다면, 비록 국민의 강압에 의한 것이라 할지라도 반성에 이어 참회한 것으로 평가해 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향후 보복의 정치를 마감하고 조화와 평화의 정치를 향한 길을 여는 계기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 사는 길일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사는 길이기도 하다.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분노와 복수심을 잠재웠으면 애원하는 심정으로 바라 마지않는다. 이제 우리가 노벨 평화상에 이어 노벨 문학상을 받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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