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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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에는 강대중(서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도재형(이화여자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윤동호(국민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이동우(변호사),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장은주(영산대학교 성심교양대학 교수),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어느 10월의 기억(조광제)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4-10-02 20:52
조회
501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1979년 10월 27일 아침 10시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늦게 깼다. 잠에서 깨어나면 머리맡에 있는 라디오를 켰다. 93.1MH KBS FM 클래식 음악 방송에 채널이 고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장중한 장송곡 같은 곡이 흘러나오면서 갑자기 아나운서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나왔다. “고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서......” 독재자 박정희가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당시 나는 집 밖을 나가지 못하고 다락방에 숨어있다시피 했다. 아니, 이게 무슨 갑작스러운 축복이냐! 마루에 나와 혼자 신나게 춤을 췄다. 급히 옷을 갈아입고 시내에 나갔다. 당시 나는 군복무를 마치고 이듬해 3학년 복학 준비를 하면서 고향 마산에 있었다.



당시 마산 창동 네거리에는 10미터 안팎의 거리를 두고 클래식 음악다방 세 개가 있었다. ‘흑과 백’, ‘주노’, ‘가배 다방’이 그 이름들이다. 그때에는 주로 건물 2층에 있는 가배 다방에 모여 지인들과 시국을 논했다. 그중에는 ‘동포여 하는 소리에 놀라 깨어나 보니 똥퍼였다.’라는 시를 읊은 이선관 시인도 있었다. 그이 말고는 대부분 20대였다. 시내에 들어서니 길가에 아직 그날, 부마 민주화 항쟁의 불길이 마산으로 옮겨붙었을 첫날, 시위꾼들이 던진 유리병의 파편들이 남아 있었다. 속으로 웃음이 터졌다. 계단을 딛고 올라 다방에 들어서니 이미 많은 사람이 모여 환한 얼굴로 좋아라, 하고 있었다. “아이고, 축하합니다!”, “이게 우짠 일입니꺼”, “마, 한잔하러 가입시더”, 바라고 바라던 기적이 일어난 탓에 다들 흥분을 가누지 못했다.


10일 전쯤에 부마 민주화 항쟁으로 도시 전체가 격렬한 시위로 들끓었었다. 10월 18일 오후 5시쯤, <가배 다방>에 빈자리가 없이 젊은이들이 꽉 차 있었다. 평소 보지 못했던 몇몇 인물들이 눈에 띄었다. 전날 17일 오후 2시쯤부터 시내에서 이른바 짱돌과 빈 병 등을 던지며 진압 전투 경찰들과 강력하게 부닥쳤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아는 사람들끼리도 아무 말이 없었다. 다들 전날의 시위에 참여했었고, 그 때문에 알지 못하는 그들이 상황을 탐지하고 여차하면 체포하려는 형사들인 걸로 추정했던 것이었다. 나 역시 밤늦게까지 마산경찰서를 향해 짱돌을 던지다가 어둠 속에서 날아와 아스팔트를 치고서 솟아오른 최루탄에 무릎을 맞기도 하는 등 하면서 자정 가까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던 터였다. 오늘 또다시 뭔가 일이 벌어질 것이라 예감하고 결정적인 시간을 기다리는 긴장도 다방에 흐르는 침묵에 한몫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밖에서 “터졌다!” 하는 고함이 들렸다. 기다렸던 신호였다. 다방 안 모든 이들이 화들짝 들고 일어나 주인에게 가방 등을 맡기며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모두 창동에서 오동동 거리로 쏠려 내려갔다. 삽시간에 골목골목에서 나온 사람들로 길이 꽉 찼다. 오동동과 연결된 해안도로로 나가자, 마산수출자유지역과 창원공단 쪽에서 엄청난 시위 인파가 몰려왔다. 뒤끝이 보이지 않는 시위대로 4차선 도로가 꽉 찼었다. “독재 타도!, 독재 타도!” 구호가 끊임없이 넘쳐났다. 어느새 날이 어두워졌다. 선두에는 언제 준비했는지 제법 큰 피켓을 들고 나아가고 있었다. 나는 궁금한 마음에 최전방으로 나가 피켓에 무얼 적었는지를 보았다. ‘간첩 잡아 보상받자’라는 글귀가 크게 쓰여 있었다. 길가에 서 있던 반공 선전판을 뽑아낸 든 것이었다. ‘이야! 쥑인다!’ 나는 혼자 크게 웃었다. 도로 가의 모든 건물은 불이 커져 있었다. 본능적이었던 것 같다. 시위대는 어디선가 불빛이 보이기만 하면 ‘불 꺼!’ 하고 외쳤다. 그런 탓에 시위대의 물결은 어둠 속으로 크게 일렁이며 나아갔다. 그러다가 밤 8시쯤 되었을까, 시위대가 3‧15 의거탑을 마주하고 있는 마산 MBC 문화방송 앞에 이르러 더는 나가지 못하고 멈쳐 섰다. 총기로 무장한 진압군과 맞닥뜨린 것이었다. 진압군은 대각선으로 열 지어 군홧발을 아스팔트 바닥에 힘차게 내리누르는 시위 진압 보행을 하면서 다가왔다. 군홧발의 소리는 엄청나게 크게 들렸다. 나는 시위대 맨 앞에 서 있었고, 참다못해 혼자 진압군 쪽으로 나갔다. 4, 50미터 전방쯤이었을까? 진압군이 갑자기 총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그 총소리는 하늘마저 진동할 정도로 컸다. 시위대는 혼비백산 인도로 퍼져 나갔고 골목골목으로 숨어들었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총알이 시위대를 향한 건 아니었다. 맨 앞에서 서 있었기에 여실히 확인했다. 총소리와 함께 진압군 앞 아스팔트에서 강렬한 불빛들이 튀었다.


골목골목을 통해 빠져나와 북마산파출소를 향한 대로로 접어들었다. 파출소 앞에 헤드라이트를 환하게 켠 버스 두 대와 진압 군인들이 열 지어 있었다. 이쪽으로 접어든 시위대는 20명 가까운 정도에 불과했다. 우리는 길가 알루미늄판으로 만든 자그마한 주차 관리소를 엎어 아스팔트 길로 끌고 나갔다. 이를 바리케이드로 삼아 뒤에 숨어 군인들을 향해 밀고 나갔다. 고요하기 짝이 없는 캄캄한 도로, 엎어진 알루미늄판이 아스팔트에 쓸리며 내는 소리는 엄청나게 크게 들였다. 버스 가까이 짱돌 사정거리 정도로 좁혀졌을 때 다들 튀어나와 호주머니 속에 장만한 돌들을 버스의 헤드라이트를 향해 던졌다. 일단 우리를 향해 쏘아대는 버스 헤드라이트를 깨 우리의 모습이 노출되는 일부터 해결해야 했다. 그런데 서 있던 버스가 우리를 향해 갑자기 돌진했다. 놀란 탓에 다들 인도로 재빨리 도망쳤다. 지나가는 버스를 힐긋 돌아보니 운전자 혼자뿐이었다. 저들마저도 우리의 규모를 몰라 경계했던 것이었다. 그러고 얼마 있지 않아 진압 군인들이 우리를 향해 달려왔다. 우리는 ‘서원골’을 향하는 길로 2차선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좁은 도로로 도주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진압 군인들이 뒤쫓아 왔다. “부산 기동대 모여!”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부산을 진압하고 마산으로 넘어온 군인들이었다. 도망쳐 올라가면서 누군가가 동사무소를 향해 돌을 던졌다. 동사무소를 독재자의 명령을 수행하는 국가 기관으로 본 것이었다. 나는 ‘그러지 마! 동사무소가 무슨 죄가 있어!’ 하고 소리 질렀다. 어느새 진압군이 쫓아와 2, 30미터 거리였다. 그들은 M16 소총 같은 걸 어깨에 걸고 기다란 진압 곤봉과 철판으로 된 큰 방패로 무장하고서 우리를 뒤쫓아 왔다. 내 옆에는 아직 창원의 39사단에서 방위로 근무하는 친구가 함께 있었다. 일촉즉발의 위기였다. 나는 성호동 철길 위 잘 아는 교회 집사님의 대문을 급하게 두들겼다. 곧바로 그 집 며느리인 누님뻘 되는 분이 나와 문을 열어주어 친구와 함께 들어가 숨었다. 그러고는 대문 위에 설치된 슬라브로 올라가 엎드려 아래 지척 어둠 속에서 벌어지는 아비규환의 장면을 지켜보았다. 진압 곤봉에 두들겨 맞으면서 붙들린 시위꾼에게 철판 방패로 내려찍기도 했다. 한쪽에서는 “한 번만 살려주이소! 한 번만 살려주이소!”(한 번만 살려주세요!) 하는 애달픈 애원이 터져 나왔고, 다른 쪽에서는 “아나! 죽이라!”(어디 죽일 테면 죽여봐!) 하는 강렬한 저항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반항하는 그를 향해 진압군이 철판 방패로 사정없이 내려찍었다. 그런데 어느 시위대 한 명이 급한 김에 길 맞은편 집 대문을 급하게 두들기고 곧바로 주인이 나와 문을 열어주어 집안으로 숨어들었다. 주인은 대문을 닫았다. 불행히도 어느 한 군인이 이를 확인했다. 군인이 그 집 대문을 총 개머리판으로 두들겼다. 그런데도 주인은 곧바로 문을 열지 않았다. 그사이 숨어든 시위꾼은 어느새 어떻게 올라갔는지 그 집 기와지붕 위에 납작 엎드렸다. 주인이 대문을 열었다. 그러자 군인은 “이 새끼 죽고 싶어 환장했어!” 하면서 주인을 총 개머리판으로 돌려쳤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아비규환이었다. 몇몇은 서원골을 향해 도망쳐 올라갔고, 몇몇 사람들이 끌려가는 등 해서 그곳에서의 사태는 마무리되었다. 교회 집사님이 마련해 준 방에 친구와 함께 누웠다. 잠이 오지 않았다. 어디선가 멀리서 ‘독재 타도! 독재 타도!’ 하는 소리가 들렸다. 다음 날 슬그머니 집으로 돌아온 뒤 집에 칩거하다시피 했다. 한 주일쯤 지나 수요일 예배를 보기 위해 저녁에 집을 나섰다. 하지만 중도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키 큰 떡대 같은 몸집의 군인들이 골목마다 M16 소총을 허리에 대고 곧추세워 경계를 서고 있었다. 당시 스무 살부터 서른 살까지 모든 청년을 잡아간다는 소문이 돌았다. 시위를 하지 않은 ‘놈’들이 없다는 식이었다. 도시 전체가 공포 분위기였다. 그러다가 언젠가부터 군인들이 사라졌다. 다름 아니라, 독재자 박정희가 그의 심복이었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살해된 것이었다. 꿈같은 일이었다. 만약 그가 살해되지 않았다면, 부산과 마산은 색출, 체포, 구금의 살벌한 일들이 오랫동안 지속했을 것이다.


그 이후, 18년 독재로부터 해방된 정치 공간에서 김대중과 김영삼을 중심으로 민주정치를 회복하기 위한 연설회 등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그 와중에 한때 박정희의 심복 중 심복이었다가 잠시 그와 거리를 두고 있었던 김종필도 이에 가세했다. 이른바 1980년 서울의 봄, 3김 정치가 민심을 얻기 위해 동분서주 급하게 움직인 것이다.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박정희 살해 사건을 수사한다는 명목으로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위시한, 이른바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이미 암약하면서 정권을 장악하려 한다는 소문이 크게 돌았다. 3학년에 복학한 나는 내가 다니던 신학교 역사에서 처음으로 일곱 명의 학우와 함께 정치 투쟁 서클 <비아 돌로로사>(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올라간 언덕길의 이름)를 만들었다. ‘전두환, 신현확은 물러나라!’ 하는 구호 아래 각 대학에서 베껴 온 대자보의 내용들을 수렴 ‧ 개작하여 밤새 대자보를 만들어 교내 몇 군데에 붙였다. 4월 말쯤이었다. 우리 서클 학우들이 교문을 박차고 숭실대학으로 올라가는 가파른 길을 따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하는 구호를 외치며 달려 올라갔다. 갑자기 검은 세단 네다섯 대가 겨우 8명밖에 되지 않는 우리 앞뒤를 에워쌌다. ‘제발 학교 안으로만 들어가 달라.’라는 게 그들의 요구였다. 그때만 해도 시위를 하더라도 함부로 체포할 수 없는 분위기였던 거다. 학교로 돌아온 우리는 교문 바로 안에서 데모했다. 길 맞은편에 초등학교 앞에 페퍼포그 차를 동원한 1개 중대 정도 되는 규모의 전투 경찰들이 열 지어 섰고, 학교 안에서는 모든 강의가 중지되어 학생과 교수 등 약 800명이 ‘구경’했다. 그렇게 미온적이었던 마침내 5월 13일 서울 시내에서 대학 연합의 대대적인 시위가 있었을 때 300명 정도의 신학생들이 사당동에서 광화문까지 ‘전두환은 물러가라!’ 구호를 외치며 도보로 참여했다. 격렬하게 투쟁해 저희 신학생들이 3대의 경찰차를 불태웠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착한’ 목사 지망생들이 속에서 자유를 향한 열정을 뿜어내자 ‘무서운’ 폭력도 마다하지 않은 것이었다. 학생들의 시위는 15일까지 간간이 이어졌고, 전두환 일당은 이를 빌미로 그들의 계획대로 5월 17일 확대 계엄령을 선포해 모든 정치 활동을 중지시켰다. 그다음 날인 5월 18일 광주에서 대대적인 비극을 몰고 온 민주항쟁이 시작되었다. 나는 짐을 싸서 고향인 마산으로 도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