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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할 말은 하는 대미외교(길윤형)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5-10-21 19:55
조회
354
길윤형/ 한겨레 논설 위원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구호를 내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재등장으로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만들어낸 자유주의적 국제질서 속에서 착실히 성장해 온 대한민국은 ‘국난’이란 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큰 위기를 맞게 됐다. 한국은 미국이 떠받쳐 온 ‘자유무역 질서’ 속에서 지금의 번영을 이뤄냈고, 미국과 맺은 ‘상호방위조약’(1953)을 통해 안보 문제를 해결해 왔다.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으로 이 두 기둥이 동시에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제 세계는 미국·중국·러시아 등 여러 강대국이 자신들의 국익을 배타적으로 추구하면서 필요한 경우엔 ‘더러운 거래’마저 서슴지 않는 ‘다극 체제’의 시대로 접어들려 하고 있다.
충격적인 사태 – 조지아주 구금사태
이런 가운데 우리에게 매우 큰 충격을 안겨 준 사건이 발생했다. 미국 이민세관단속국(ICE)과 국토안보수사국(HSI)이 지난 9월 4일 새벽 조지아주 엘라벨에 위치한 현대차와 LG에너지솔루션의 합작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을 급습해 한국 국적자 317명을 포함한 475명을 체포·구금한 것이다. 이들은 배터리 공장을 가동하기 위해 꼭 필요한 장비를 설치하기 위해 입국한 단기 인력들이었다. ‘하늘의 별따기’라고 불리는 미국의 ‘전문직 비자’(H1B)나 ‘일반 주재원 비자’(L1)를 얻지 못해 ‘단기 상용비자’(B1)나 ‘무비자 전자여행허가’(ESTA) 등을 통해 공장 가동을 위한 작업을 수행해왔다. 이런 사정을 뻔히 잘 아는 미 이민당국은 문제를 합리적으로 푸는 대신, 단속 실적을 올리기 위해 장갑차·헬리콥터 등을 동원해 300명이 넘는 동맹국 국민을 수갑과 쇠사슬로 잡아 가뒀다.

지난달 12일 귀국한 이들이 증언한 체포 과정과 구금 시설 내의 상황은 우리의 상식을 초월한 수준이었다. <한겨레>의 9월 15일 3면 보도에 따르면 피해자들이 증언한 구금 시설의 상황은 △위생 △외부와 연락 △이의 제기 상황 설명 등과 관련해 국제 사회가 정한 ‘구금자 처우의 최소 규칙’(넬슨 만델라)을 어긴 것이었다. 이민세관단속국 요원 등은 쇠사슬로 노동자들의 팔·다리를 묶다가 부족해지자 ‘케이블 타이’를 사용했다. 구금 초기엔 많은 이들을 72인실에 몰아넣다가, 3~4일 정도가 지나자 순차적으로 4.96㎡(1.5평) 정도 되는 2인 1실 방을 배정했다.
심각한 인권침해 당한 한국인들
졸지에 구금된 이들이 가장 고통을 느낀 것은 배변을 보는 일이었다. 화장실이 하체를 가릴 천 하나만 둔 채 완전히 노출된 구조였기 때문이었다. 협력업체의 노동자 조영희(44)씨는 <한겨레>에 “생리 현상에 있어 인권 보장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며 “오픈된 화장실에서(이를) 해결할 수 없었다”고 했다. 바깥 공기를 쐴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은 하루 2시간씩 농구장 절반 크기의 ‘야드’에 나가는 것뿐이었다.
<연합뉴스>가 9월 14일 소개한 한 노동자의 구금일지를 보면, 구금시설 안 침대 매트에는 곰팡이가 핀 상태였고, 치약·칫솔·담요 등 기본적인 물품들도 구금 이튿날에야 전해졌다. 물에서는 냄새가 나 입술만 축이는 노동자도 여럿이었다. 제공된 음식도 통조림·콩·토스트 정도였다. LG에너지솔루션의 협력직원 ㄱ씨는 <한겨레>에 “(내가) 무엇을 이렇게까지 잘못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반인권적 감금을 강하고 있는데, 누구도 사과하지 않은 현실이 크게 다가왔다”고 말다.
미국 정부의 법률 위반
이번 단속이 단순한 인권침해가 아닌 법 위반일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다. 미국 인권변호사 캐럴라인 오코너는 9월 28일 <한겨레> 인터뷰에서 “영국 <가디언> 등의 보도를 보면 이민관세단속국은 B1을 가진 노동자가 체류자격을 위반하지 않은 사실을 알고도 자진 출국을 요구했다”며 이에 대해 “행정권 남용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고 했다.
미국의 ‘이민 및 국적법’에 따르면, B1을 가진 노동자는 미국이 아닌 본국에서 급여를 받으면서 최대 6개월까지 공사를 감독하는 일을 할 수 있다. 즉 체포·구금된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비자가 정한 업무 범위 안에서 정상적으로 일을 하던 중, 즉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상황에서 며칠 동안 끔찍한 일을 당한 뒤 출국당하는 험한 꼴을 겪었다는 얘기다.
미국 정부가 자신들을 위해 공장을 설치하던 동맹국 국민을 대상으로 이런 반인권적이고, 위법적 단속을 벌인 것이라면, 그에 적합한 사과가 이뤄져야 한다. 사과를 구성하는 요소는 크게 세 가지다. 먼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명확한 사실관계를 밝히는 것’, 두 번째는 상대가 ‘납득할 수 있을 만큼 용서를 구하는 것’, 마지막은 다시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재발 방지 대책 등 후속 조처를 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일 첫 단계인 ‘사실관계를 인정하는 것’, 즉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지금까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사실관계를 인정한 적이 없다. 두 번째 용서와 관련해선 9월 14일 방한 중이던 크리스토퍼 랜다우 미 국무부 부장관이 박윤주 외교부 제1차관에게 “이번 사태가 일어나게 된 데 대해 유감”을 표했을 뿐이다. 피해 당사자들은 지금껏 아무 얘기도 듣지 못했다.
재발방지 대책 마련 이전에 필요한 것들
현재 모든 논의는 재발방지 대책 마련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외교부 발표에 따르면, 9월 30일 열린 첫 ‘한-미 상용방문 및 비자 워킹그룹’ 회의에서 미국은 “우리 기업의 대미 투자 과정에서 수반되는 해외 구매 장비의 설치·점검·보수를 위해 B1을 활용할 수 있”고 “ESTA로도 이와 동일한 활동이 가능하다는 점을 재확인”했다. 또, 대미 투자기업들의 비자 문제에 관한 전담 소통창구를 주한 미국 대사관 내에 만들고, 우리 공관과 미 이민당국과 사이에 접촉선을 구축해 협력하기로 했다.
이재명 정부는 이 정도 선에서 조지아 한국인 체포·구금사태를 마무리해선 안 된다. 이번 사태는 미국 정부가 비인도적이며 위법 가능성이 큰 단속을 통해 우리 국민의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한 문제이자, 트럼프 정부가 진행 중인 안하무인식의 대외정책의 야만성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이 전선에서 쉽게 물러나면 자칫 우리 경제를 파국으로 몰아갈 수 있는 3500억 달러 대미 투자나 우리나라를 미-중 경쟁의 최전선에 ‘소총수’로 내몰게 되는 주한미군 ‘전략적 유연성’ 교섭 등에서도 불리한 위치에 설 수밖에 없다.
우리 국민의 인권을 보호하고 우리의 소중한 국익을 지켜내기 위해 미국을 상대로 끝까지 할 말을 하며 물고 늘어져야 한다. 조지아 사태에 대해서도, 관세·투자 문제에 대해서도, 한미동맹의 미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