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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례] “부당한 명령 받거든 헌법과 양심을 따르라” [.txt]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6-05-22 11:08
조회
413
기사 원문 보기

이재승, 군인의 시민적 권리·책무 해설
전시에도 인간 존엄 지키는 규범의 역사
“명령 따랐을 뿐” 주장은 면책되지 않아


 



지난 2월20일 충남 계룡대에서 열린 육군·해군·공군 사관학교 통합 임관식에서 사관생도들이 국가 수호 결의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2월20일 충남 계룡대에서 열린 육군·해군·공군 사관학교 통합 임관식에서 사관생도들이 국가 수호 결의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직업으로서의 정치’(1919)에서 “근대 국가는 일정한 지역(영토) 내에서 정당한 물리적 폭력(강권력)의 독점을 요구하고 성공적으로 관철시킨 유일한 인간 공동체”라고 설파했다. 그 합법적 폭력의 핵심 수단이 군대와 경찰이다.


민주주의 국가들은 군경의 물리력 행사의 조건을 헌법과 법률로 엄격히 규정하고 통제한다. 그러나 최고 권력자의 그릇된 성정이나 오판으로 그 고삐가 풀리는 순간 군경은 가공할 국가 폭력과 살상의 도구가 된다. 그런 역사적 사례는 숱하게 많다. 거대한 체계가 굉음을 내며 작동할 때 조직의 개인은 한없이 위태롭고 무력할 수 있다. 2024년 12월3일 밤, 한국군의 많은 장병도 그랬다.


2025년 4월4일, 헌법재판소는 12·3 내란을 획책한 윤석열을 대통령직에서 파면했다. 헌재는 결정문에서 “국회가 신속하게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시민들의 저항과 군경의 소극적인 임무 수행 덕분”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군과 경찰은 그 특성상 철저한 상명하복과 지시 이행이 강조돼 왔다. 그런 조직 구성원들의 ‘소극적 임무 수행’이 민주공화국을 헌정 위기에서 구하는 데 기여했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동시에, 군인의 복종과 양심, 시민성(시민으로서의 가치관·행동 양식)과 헌법의 관계 등에 관한 무거운 질문을 남겼다.








이재승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신간 ‘제복 입은 시민’에서, 군대에 대한 시민사회의 민주적 통제를 넘어 군인도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책무가 있음을 다양한 역사적 사례와 판례, 법 이론으로 논증한다.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 상임위원을 지낸 이 교수는 부당한 지시에 대한 ‘불복종’이 군인의 권리이자 의무라는 원칙이 혼란스러울 많은 이들에게 그 이유와 당위성을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제복 입은 시민 l 이재승 지음, 앨피, 2만8000원

제복 입은 시민 l 이재승 지음, 앨피, 2만8000원

 

‘제복 입은 시민’은 제2차 세계대전 뒤 독일 군대 개혁의 슬로건이었다. 나치 독일이 저지른 홀로코스트의 충격과 반성, 재발 방지를 위한 ‘군인의 법적 지위에 관한 법률’(군인법)에도 명시됐다. 애초 이 표현은 이마누엘 칸트가 상비군 폐지를 주장하며 쓴 ‘무기를 든 시민’이란 개념에서 나왔다고 한다. “타인을 살해하거나 타인에게 살해당하도록 고용된다는 것은 인간을 단순한 기계나 도구로 만들기 때문에 인격권에 합치할 수 없다. 그러나 자신의 조국을 외적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든 시민’들의 자발적이고 정기적인 훈련에 관해서라면 사정은 완전히 다르다.”









오늘날 법의 근본 원칙은 “전시에도 법은 침묵하지 않는다”이다. 이 법언은 고대 로마 공화국의 정치인이자 법률가였던 키케로가 자신의 정적을 살해한 친구를 변론하며 “전쟁 중에는 법이 침묵한다(inter arma enim silent leges)”고 한 말을 뒤집은 것이다. 집정관이던 키케로는 공화정을 전복하려던 귀족 카틸리나를 탄핵해 ‘국부’ 칭호를 얻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로마 시민을 절차 없이 살해해선 안 된다는 규범을 어겼다는 이유로 키케로도 추방형을 당했다.


그러나 국가 공동체의 중대 위기나 전쟁 중 ‘법이 침묵’하는 상황, 다시 말해 보편적 인권의 잠정 유보가 불가피한 게 아니냐는 통념을 지우기란 쉽지 않다. 특히 군대는 인권의 사각지대가 될 위험이 상존한다. 1775년 영국 군형법은 “장교나 병을 막론하고 상관의 명령을 거부하는 자는 명령이 적법하든지 법을 위반하든지 관계없이 사형에 처한다”고 규정했다. 이런 원칙은 현실적인 한계와 논란으로 차츰 느슨해진 듯 보였다. 그러나 20세기 초반 제국주의 전쟁을 거치며 대다수 국가들은 절대적 복종을 강조하는 상관 책임주의로 돌아섰다.


19세기 이후 군인과 국가의 관계는 ‘특별권력관계’로 설명됐다. 기본권의 제한을 법률에 근거하지 않고 직무명령으로 적용할 수 있다는 논리다. 그러나 1972년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이를 부정하는 판결로 논란에 마침표를 찍었다. 20세기 이후 국제사회는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최소한의 법적·윤리적 한계를 유지하기 위한 규범들을 발전시켜 왔다. 나치 독일의 반인도적 전쟁범죄를 처벌한 뉘른베르크 국제 전범재판은 기념비적 이정표다.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들이 나치 전범들을 처벌한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1945년 11월~1946년 10월)의 판사석을 내려다 본 모습.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들이 나치 전범들을 처벌한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1945년 11월~1946년 10월)의 판사석을 내려다 본 모습. 위키미디어 코먼스

 

“나는 명령을 따랐을 뿐”이란 주장은 전쟁범죄나 심각한 인권 범죄에 가담한 군인·경찰·공직자들의 한결같은 항변이다. 나치 독일이 저지른 홀로코스트의 핵심 실무 책임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도 그랬다. 한나 아렌트는 그의 사유하지 않음에서 ‘악의 평범성’ 개념을 창안했다. 이 책의 지은이도 국방부의 ‘불온서적 지정’을 외국의 규정과 비교해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책을 읽을 권리’를 강조했다.


뉘른베르크 재판은 명령과 복종에 관한 대원칙을 세웠다. △정부나 상관의 명령을 따랐다고 범죄를 면제하지 않는다, △정부 수반이나 책임 공직자가 국가 정책을 수행한 행위라고 면책 사유가 되지 않는다, △국내법상 적법 행위라도 국제법에 위반되면 국제범죄를 구성한다.


인간의 생명권, 신체의 자유와 안전에 대한 권리, 고문이나 잔혹하고 비인도적 처우를 받지 않을 권리 등은 전시와 평시를 막론한 보편적 인권이다. 그런데 “인간 사회는 무력을 동원해 살해하고 살해당할 위험을 항상 군인에게 전가한다”는 점에서 “군인이야말로 양심의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위험한 직업”이라고 지은이는 말한다. “많은 군인들이 그 딜레마를 견디지 못하고 거대한 명령 체계의 부품으로 왜소화”하는 순간 “어김 없이 대형 참사, 중대한 국가 범죄, 제노사이드, 전쟁범죄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부당한 명령에 불복종하는 것은 어떤 영웅적 담대함이 아니라 자신의 본분을 차마 저버리지 못하는 마음”이라며, ‘12·3 내란 이후 군인을 위한 5분 법철학’으로 책을 마무리했다. ‘명령과 (불)복종’에 관한 법리와 행동 수칙을 5가지로 정리한 선언문이자 매뉴얼이다. 핵심은 이렇다.


첫째, 위법이나 범죄를 지시하는 명령은 거부할 수 있다. 그에 대한 탐문과 발설은 기밀 범죄가 아니다.


둘째, 병사는 총부리를 시민에게 겨누라는 지시를 받거든 탈영하라. 지휘관은 불복종의 교리를 학습하고 부당한 명령 앞에서 모범이 되어라. 장관급 장교는 불법적인 명령의 거부를 공개 천명하고 정치가와 언론에 즉시 알려라.


셋째, 불법적 명령을 거부하면 항명죄로 기소될 수 있으나 머잖아 제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자신을 다독이고 감내하라.


넷째, 범죄를 명하는 상관은 그대를 도구로 악용할 뿐이다. 헌법과 인도주의, 양심의 소리를 따르라.


다섯째, 항상 사유하라. 불법적 명령에 복종하는 ‘복종 범죄’를 거부하는 군인은 문명의 파수꾼이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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