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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재)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장), 이동화(아디 활동가),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 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누구의 죽음에는 차별이 있다. 피해자의 목소리는 어디 있는가? (김형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2-07-27 16:21
조회
457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활동가 김형수


 어느 학교에서 장애인 학생이 학급에서 놀림을 받아 학교를 나오지 않으니 인권교육을 해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처음에는 늘상 일어나는 장애인 차별이나 혐오로 생각하고 학교를 방문했으나 교사와 대화하는 과정에서 장애인 학생은 부모가 학급 내 사건을 빌미로 이미 한달 넘게 장기 결석 중이란 것을 알게되었다. 비장애인 학생은 3일만 연속 결석해도 결석 사유를 눈으로 확인해야 하는 것이 상식적인 것인데 장애인 학생의 경우는 왜 그러지 않고 인권교육부터 의뢰했을까? 더욱 놀라운 것은 이미 학기초에 학생에게서 부모로부터 받은 학대 정황이 발견되었다는 것이었다. 담임 선생님과 특수교사는 왜 이 사안을 장애인 학대와 아동 학대로 즉시 신고하지 않았을까? 왜 교장 교감은 왜 인권교육만 하라고 닦달했을까? 학대 경험이 있는 학생이 한달 넘게 결석해서 특수교육대상자가 적절한 의무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는데 왜 해당 교육청의 장애인 학생 인권지원단은 왜 움직이지 않고 나에게 개인적으로 인권교육을 의뢰했을까?


 최근 부모와 함께 사망한 조유나씨(10세) 관련 기사와 몇 년간 폭증한 부모에 의한 장애인 살인 사건을 다루는 우리나라 사회 시각과 언론의 태도를 보면 같은 ‘사람’의 죽음에도 차별과 경중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조유나 피해자 죽음 원인이 그게 무엇이든 존비속의 살인 사건은 도덕적 윤리적 법적 비판을 피할 수 없음은 자명하다.


 언론과 대중들은 동기가 무엇이든, 피해자를 보호하지 않은 부모를 연일 비판하고 심지어 체험학습을 보낸 학교와 교사들에게까지 행정 당국은 책임과 각성을 촉구하는 공문을 보냈다. 허나, 코로나 시대의 수십건 부모의 장애인 살해 사건을 대하는 언론과 사회의 피드백은 같은 가족 간의 살인 사건임에도 위와 같은 극악한 학대 사건으로 다루지 않는다.



출처-픽사베이


 미디어는 아무도 부모의 가난과 고통과 양육의 어려움이 크더라도 ‘오죽했으면’이라 말하지 않는다. 비장애인을 키우는 부모가 어떤 상황에 놓이든지, 그런 살의를 잠시 떠올리거나 입밖으로 드러내거나 SNS에 개인적으로 넋두리 하는 것조차 비난받음을 넘어 당장 신고하라며 고민없이 단호하다. 그런데 장애인 죽음에는 가해자들의 고통과 어려움에 대하여 TV와 기사들은 너무나도 공공연히 공개적으로 실행하지 못한 가해자 경험과 서사를 대중들에게 표현하고 공감한다. 장애인 자녀가 당신들보다 하루만 먼저 사망하길 바란다는 비장애인 당사자에게는 절대 하지 않을 문장도 제목으로 뽑고 많은 장애인 부모들의 인터뷰에서도 가해자 입장과 같은 경험에 공명했음도 가감없이 실어준다. 아니 가해자의 가치와 가해자의 목소리만 들릴 뿐이다. 부모로부터 억울한 죽음을 당한 장애인의 목소리는 어디에도 없다. 피해자를 대변해야 할 인권 활동가나 장애인 당사자도 가해자들이 부모들이면 명확하게 ‘범죄’로 정의하기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부채감을 가진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함께하는 추모제까지 열면서 정치인과 교사, 사회복지사, 치료사와 같은 전문가들이 그 곳에 모여 연일 국가의 책임을 성토한다. 물론 정부의 정책과 지원은 이런 살인을 막기 위해 필수조건이다. 그러나 그 사회 안전망의 구축만으로는 이런 살인 사건을 막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가 장애인의 죽음에 가해자의 입장만을 대변하면 그것은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방조를 계속해서 사회에 퍼뜨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결국 언론과 대중들, 장애인을 키우는 장애인 부모와 장애인 단체들의 입장과 태도가 변하지 않으면 과연 이런 죽음을 막을지는 회의적이다. 무엇보다 이런 인권유린에 민감해야 할 인권 단체와 활동가들의 어쩔 수 없는 침묵은 오싹하기까지 하다. 다른 나라들도 정책과 지원이 충분해도 장애가 있는 가족 살해 후 자살이라는 범죄는 일어난다. 우리 언론들은 특히 장애인 문제에 대하여 가족들에게 온정주의가 가득하다. 감동과 극복의 이데올로기와 맞닿아 장애인의 출생과 양육까지 온통 혈연 가족들의 책임으로 세뇌하니, 세뇌된 책임은 가족의, 부모의 권리로 착각한다.


 장애인 등록과 치료, 교육, 취업, 결혼, 시설입소까지도 부모가 결정하는 법적 권한이 어느 나라보다 강한 나라다. 그만큼 부모의 권력이 세다는 뜻이다. 장애인을 양육하는 부모가 인권적이거나 정답이라서가 아니라 그동안 국가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정치 작업의 결과이다. 장애인을 힘모아서 잘 키워보자는 기사의 분석과 대안은 모호하고 추상적이다. 죄다 장애인을 키우기 두렵고 어렵고 힘들다는 구체화된 낙인된 이야기 뿐이다. SNS에 넘쳐나는 장애인 부모들의 슬픔과 가해자에 대해 공감하고 이해한다는 말들이 장애인을 가족으로 맞이할 후대 부모들에게 세상의 어떤 역경과 차별도 견딜 힘을 줄지, 종국에는 장애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절망을 전염시킬지 혼란스럽기만 하다.


 하다 못해 지역 공동체가 인권단체들이 장애인부모들을 상대로 생명의 전화라도 열어보면 어떨까? 잘못된 권력으로부터 발생할 수 있는 학대와 폭력을 감시하고 장애인 가정의 고립을 막을 수 있는 활동과 정책을 고민해 보면 어떨까? 아무리 국가지원이 늘어도 같은 아동과 당사자의 살해사건에 장애가 있든 없든 동등하게 포함시키지 않으면 절대 이런 사건은 줄지 않을 것이다. 휠체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온전히 자유로운 상주가 되는 장례식조차 제대로 구하기 힘든 대한 민국에는 죽음에도 장애인 차별이 있다. 인권이 이런 억울한 차별에 더 이상 침묵 해서는 아니된다.


- 본 원고는 은평시민신문에 기고된 원고를 대폭 수정 보완 했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