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발자국통신

‘발자국통신은’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 교수),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전 주독일 대사),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촉견(蜀犬)보다 나은 사람이 되려면(오인영)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2-08-03 16:13
조회
851

오인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조선 선조 때의 문신 졸옹(拙翁) 홍성민의 문집 <졸옹집(拙翁集)>에 실린 글 중에 <촉견폐일설(蜀犬吠日說)>이란 작품이 있다. 사전적 의미로 ‘촉견폐일’은 ‘촉(蜀)나라 개(犬)는 해(日)를 보면 짖는다(吠)’라는 뜻인데, 촉나라는 산이 높고 안개가 많아서 해가 보이는 날이 적기 때문에, 개가 해를 보면 이상하게 여겨 짖는다는 데에서 유래한 말이다. <촉견폐일설>은 이런 촉나라 개의 행태에서 성인을 헐뜯고 모함하는 소인배의 작태를 유추하여 현실 세태를 비판하는 고전 수필이다.


출처 - 화순군민신문


 고사에서는 개가 해를 보면 짖는다고 하지만, 지은이는 사실 촉나라 개는 해를 보고 짖는 것이 아니라, 비가 오는 날씨에 익숙해진 탓에 “그것이 일상과 다름을 보고 짖는” 것이라 해석한다. “(개는) 촉나라에서 태어나고, 촉나라에서 자라서 다만 촉나라의 하늘만 보았을 뿐이고, 촉나라 이외의 하늘은 보지 못해서 오직 촉나라의 하늘에는 항상 비가 있다는 것만 알고, 촉나라 밖에는 늘 해가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촉나라 개가 해를 이상하게 여기고 그것을 보고 짖는 것은, 촉나라 개의 “천성이 천하의 개에 비해 실제로 다른 게 아니라 그 개가 촉나라에서 태어나 익히고 익숙해져” 그렇게 되었다고 풀이한다.


 이런 ‘촉견폐일’의 고사에서 유추하여 지은이는, 본데없는 소인(小人)이나 범인(凡人)이 ‘비=악(惡)’에 젖어 있어서 ‘해=성인(聖人)’을 보게 되면 정상이 아니라고 ‘짖는’ 세태를 비판한다. 그리고 바른말을 하는 올곧은 사람들을 보면 소인배가 가만두지 않고 모함하는 이유를, 일상화된 악에 익숙해진 데서 찾는다. “한 세상의 어둡고 더러움이 촉나라 남쪽의 항상 비가 내리는 것보다 심하며, 세상 사람들이 사악한 마음을 품고 올바름에 대해 짖음이 촉나라 개가 해를 보고 짖는 것보다 심하다. 이것은 다른 것에 있지 않고, 세상 사람이 다만 사악함에 익숙해져 그 올바름을 모를 뿐이다.”


 지은이는 글을 마무리하면서 촉나라 개가 짖는 것이야 그저 해를 보고 짓기 때문에 “스스로 짖을 뿐이며 해에게는 병이 되지는 않으나 사람이 올바름을 보고 짓는 것은 다만 짖는 데 그치지 않고 반드시 그 사람에게 병”이 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개가 짖는 거야 기실 인간사에 별다른 폐해를 끼치지는 않지만, 권모술수와 거짓에 능한 간사한 무리가 ‘짖어대는’ 것은 단지 ‘개소리’에 그치지 않고, 정정당당한 행실과 바른 생각(과 말)을 역으로 나쁘고 잘못된 언행으로 매도하고, 결국에는 사라지게 만드는 병폐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비정상이 정상을 조롱하고 몰상식이 상식을 경멸하며 ‘사마외도(邪魔外道)’가 정도(正道)인 척하는 도착(倒錯)은 조선 중기만이 아니라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나랏일 한다는 양반들’이 앞장서서 그런 착란(錯亂)과 전도(轉倒)의 세태를 조장하고 있다는 것도 매한가지다. 21세기의 20년도 훌쩍 넘어선 지금도 정권 핵심 세력 내부에서 ‘검사회의’는 구국 충정의 발로로 아무 문제가 없고, ‘총경회의’는 ‘하나회의 12․12와 쿠데타’에 준하는 상황이라고 매도하는 곡학아세(曲學阿世)와 16명이나 죽인 흉악범들을 정당하게 추방한 사건을 마치 북한 정권의 비위를 맞추려고 자발적 탈북자들을 강제로 송환한 사건으로 둔갑시키려는 지록위마(指鹿爲馬)가 잇따르고 있다.


 너무 빈약한 국가관을 지닌 권력 엘리트에게 너무 큰 권한이 위임된 현실도 염려스럽지만,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자세는 고사하고 온갖 수단과 방법으로 자기 이익만을 꾀하는 정치 모리배가 당치도 않은 억지 궤변과 허튼소리를 남발하는 것은 더욱 우려스럽다. 술은 마셨으나 음주운전은 아니라는 말은 이제 거의 ‘애교 멘트’처럼 느껴질 정도로, 현 정권 여기저기서 견강부회(牽强附會)가 난무하고 있다. “너는 빨갱이야!”라는 낙인이 찍히면 그 어떤 증거도 사실관계도 통하지 않았던, 냉전 수구 반공주의의 색깔론도 꺼내 들 태세다. 하기는 국가보안법도 여전히 살아있다.


 동양의 옛 성현은 권력자들이 불의한 짓을 저지르고 그것을 정의라고 강변할 때, 그것을 불의라고 ‘바르게 이름 붙이는 것’, 즉 정명(正名)이야말로 정치의 ABC라고 설파했다. 정치에서 실제에 부합하지 않는 말(명분, 논설)은 정치만이 아니라 사람의 정신, 나아가서는 인륜까지도 오염시킨다. 더욱이 실제에 걸맞은 말을 쓰는 것은 사회적 약속이므로, 정략적 견강부회나 의도적인 ‘뻥튀기 공약(空約)’은 사회적 신뢰 자체를 파괴하는 악이 된다.


 악을 보고 악이라고 말하는 것은 악이 아니다. 악을 보고도 악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악이다. 바보를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은 바보가 아니다. 오히려 자기는 바보가 아니라고 말하는 바보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게 바보짓이다.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자명한 이치다.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검찰의, 검찰에 의한, 검찰을 위한 정부”인 실제를 직접 보고 있는데, 현 정부가 표방하는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라는 말을 곧이듣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웬만한 외국인들도 다 아는 사정이다.


 도스토옙스키도 <죽음의 집의 기록>에서 인간을 “모든 것에 익숙해질 수 있는 동물”이라고 규정했다. 진실, 정의, 올바름을 매도하고 배척하는 짓거리가 빈번해지고, 그것이 일상화되어 거기에 익숙해지면, 세상은 거짓, 불의, 모략을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것으로 여기게 된다. 이런 사고의 착란에서 벗어나 최소한 촉견(蜀犬)보다 나은 사람이 되려면, 말이 명실상부한 것인지-특히 권력자들의 말이 실제에 부합하는 말인지,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리는 일에 게으르지 않아야 할 줄로 안다.


오인영 위원은 현재 고려대 역사연구소에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