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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귀한 언어를 빼앗지 말아라.(김형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6-05-27 10:32
조회
162
김형수/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사무국장
‘오빠’라는 단어가 뜨겁다. 나이 있고 권력 많은 남성 여당 대표가 어린 초등학생에게 시장 후보를 향해 요구한 오빠라는 호칭이 처음 문제가 되었고, 이제는 여성 야당 국회의원이 지나가는 여학생을 향해 이른바, “‘잘생긴 오빠’가 있다”라는 발언에 대한 논쟁이 격렬하다. 가족관계에서 손아래 여성이 손위 남성을 부르는 낱말이었던 말이, 타인 간에는 어느 정도 친분과 다정함이나 목적성마저 띠게 되면서, ‘오빠’라는 명칭은 이제 조심스럽고 가려 써야 하는 낱말이 되었다. 뉴스의 한 가운데에 있고 정쟁의 주요 대상이 되었음은 물론, 심지어 이 논쟁이 드라마와 같은 미디어까지 확장되어 갔다. ‘아주 지랄맞은 오빠’. 새삼 어떤 이를 어떻게 불러 주는가에 대한 깊은 고민과 함께 각자에게 그 언어가 주는 힘과 의미와 가치를 생각해 본다.
나는 어릴 때부터 스무 살 어른이 될 때까지 누군가에게 매력 있는 남성에게 호감을 표시하는 언어로 ‘오빠’라고 불린 적이 거의 없다. 굳이 꼽자면 한 살 아래 사촌 여동생 딱 한 명뿐이었다. 늘 승강기 안에서는 목발과 함께 ‘저것’이라 지칭되었고, 집 안 사람들에게도 ‘병신새끼’ 였으며, 바깥사람들에게는 ‘쯧쯧 장애자’였다.
누군가를 보호하고 지킬 수 있는, 든든하고 믿음직한 ‘지랄맞은 오빠’가 아니라, 혼자라도 있을라치면 늘 보호자가 필요하고, 다른 사람들의 불안한 눈빛과 함께 “왜 오셨어요?”라는 질문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었다. 아주 가끔, 그 사촌 여동생이 나를 조용히 불러 주면 그이의 친구들에게 머쓱하게나마 ‘아는 친구 오빠’가 될 기회가 될 뿐이었다. 그 잘난 남성성이나 그 값싼 외모 평가조차 받을 일은 거의 없다. 잘해봐야 그냥 존재로서 호칭이라도 감지덕지였다.
대접받고 싶은 정치인처럼 “나를 오빠라고 불러 보아라”라고 한없이 가볍게 치켜세워 주는 이도 없었고 어떤 이익을 위해 내 매력을, 내 외모를 이 단어로 포장하여 꼬드기는 사람들조차 드물었다. 나는 그저 같은 공간에 이름도 없이 호칭도 없이 내 목발과 함께 머물게만 해주어도 감사할 따름이었다. 누구처럼 제삼자가 나를 가리켜 어린 여성에게 그 호칭을 권유하거나 강요하는 일은 더더욱 없다.

그러다가 먼저 내 이름을 누구누구 씨라고 같은 출석부로 호명해 주고, 경계하거나 측은한 눈빛이 아닌, 친해지고 싶은 나머지 호기심 가득하게 내 나이를 물어보며 형수 형이라 부르며 먼저 다가오는 여성들이 있었다. 어쩌다가 어두운 밤길을 함께 걷다 보면 내 목발이 호위 무사같이 든든해져 오라버니라 불렸고, 몇 번 밥을 함께 지어 먹고 옆에서 설거지하다 보니 어린 여성들도 동년배들도 누나들도 농담처럼 나를 오빠로 만들어 주고는 했다. 그렇게 오빠라는 언어를 쓰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차별과 불의에 대해 민감해졌을 때 비로소 나를 그들의 동네 오빠로 인정해 주었다.
가끔 장애를 이유로 아예 처음부터 가족들 사이에서조차 그 언어가 지워지고 불릴 기회마저 박탈당하는 사람들이 있다. 애초부터 시설에만 거주하여 평생 이용자나 환자로 이름 지어 살다가 50대 그 정치인 또래가 되어서도 우리 아이나 장애인 친구로 불리는 지적 자폐성 장애인분들도 있다. 우리는 언제나 당연하다는 듯이 반말을 듣는 존재였고, 보호자가 필요할 뿐 정작 보호자가 될 수도, 되어본 적도 없는, 강함을 부여받지 못하는 ‘약자들’이었다. 결국 어떤 사람들을 부르는 호칭이 주는 권력과 의미는 그 말들을 부리는 사람들만이 가져다줄 수 있는 가치이자 효과이다. 그래서 원래 ‘오빠’라는 단어는 그 관계 안에서 발화하는 여성들이 주체적으로 지배해야 할 언어다. 오로지 먼저 호감을 느낀 여성들이 다른 남성의 매력이나 가치를 매겨서 붙일 것인지 말 것인지 스스로 ‘결정’할 단어이다.
그 호칭으로 관계를 만들어 가는 주인공 여성들의 표현에 따라, 잘생긴 사람이 될지 천하에 멋진 사람이 될지 듬직할 사람이 될지 ‘평가’될 뿐이다. 누군가에게서 그 당사자만이 쓸 수 있는 언어와 말들을 빼앗는 건 잘못된 악습이고, 차별이며, 문제일 뿐이다.
장애인 대부분에게는 오빠라는 쓰는 이와 그렇지 않은 이를 차별할 구조적인 권력조차 없다. 구조적인 성차별을 자행할 것들조차 지워지는 무성한 존재가 된다. 원래 오빠라는 표현으로 힘을 얻고 당사자가 되어야 할 여성들의 목소리도 지워진다. 친근하게 환대해 줄 매력 넘치는 사람으로 만드는 힘을 가진 말, 그 귀한 단어를 여성들에게서 함부로 마구잡이로 빼앗지 말아라. 장난스럽게 권하지도 말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