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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사 이승은의 학폭 기록: '혼잣말'에 묻힌 아이의 울음소리(이승은)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6-03-10 10:40
조회
185
이승은/ 행정사
1. 수화기 너머로 쏟아진 통곡
제복을 벗고 학교폭력 전문 행정사로 첫발을 내딛던 날들, 저는 학폭 상담 오픈채팅방에서 한 아이를 알게 되었습니다. 자폐스펙트럼이라는 얇고 투명한 벽을 사이에 두고 세상과 마주하던 피해 학생, 정연이(가명).
채팅창 너머로 조심스레 고민을 꺼내던 아이와 처음 전화가 연결된 순간. 수화기를 타고 넘어온 것은 말이 아니라, 거친 숨소리와 함께 터져 나온 통곡이었습니다.
“너무 억울해요.”
그 말과 함께 터져 나온 울음은 한참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습니다. 잦아드는 울음 끝에 걸린 한마디. “도와주세요, 제가 행정심판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그 말이 저를 이 사건의 한가운데로 이끌었습니다.
2. '혼잣말'이라는 이름의 방패
정연이가 직접 정보공개청구해서 받아 낸 학폭위 회의록에서 마주한 것은 우리 학폭 행정의 차가운 민낯이었습니다. 가해 관련 학생 박주영(가명)은 수행평가 시간, 정연이의 귀에 대고 “장애인 새끼”, “죽어”라는 말을 수차례 내뱉었습니다. 그런데 심의위원회에서 가해 학생이 꺼내 든 방패는 ‘혼잣말’이라는 변명이었습니다. 학원 친구 때문에 짜증이 나서 혼자 중얼거린 것뿐이라고. 정연이에게 한 말이 아니라고.
더 참담한 건 그다음이었습니다. “가해자가 패닉 상태라 독백했을 것”이라며 심의위원들이 그 변명에 동조했습니다. 정연이가 용기를 내어 켠 휴대폰 녹음기, 그 증거는 오히려 “가해자를 몰아붙인 행위”로 뒤집혔습니다.
피해자의 용기가 외면받는 순간, 저는 그 자리를 기억해 두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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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성장'이라는 이름의 사과문
학폭위 심의 결과는 제1호 서면사과였습니다. 가해자가 제출한 사과문을 펼쳤습니다. 정연이에 대한 미안함은 단 한 줄도 없었습니다. 대신 이런 문장이 가득했습니다.
“저는 이번 일을 통해 성장을 했어요.”
타인의 영혼을 짓밟은 대가가 가해자의 ‘성장’이라니. 이보다 잔인한 역설이 있을까요. 끝이 아니었습니다. 법으로 금지된 즉시분리조치 기간, 가해자는 정연이에게 접근해 스스로 해명을 늘어놓았습니다. 2차 가해였습니다. 그런데 교육청은 이를 ‘화해를 위한 노력’으로 기록했습니다.
불법이 노력으로 둔갑하는 것. 그것이 제가 마주한 학폭 행정의 현실이었습니다.
4. 다시 펜을 잡는 이유
심리검사 결과지에는 ‘정서적 위기’라는 건조한 단어만 남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뒤에는, 밤마다 잠 못 들며 자살 관념에 시달리는 열일곱 살 아이의 울음이 숨어 있었습니다.
경찰 시절, 선후배에게 자주 들었던 말이 있습니다. “일을 너무 열심히 하지 마라. 남들 하는 만큼만 해라. 안 해도 되는 건 하지 마라.” 들을 때마다 묘하게 부끄러웠습니다. 열심히 한 게 아니었으니까요. 원칙대로 하려고 노력했을 뿐.
그 말이 경찰 조직 안에서만 들리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정연이의 회의록을 읽으며 알았습니다. 원칙은 선택적이었습니다. 피해자를 위해서는 안 해도 되는 건 하지 않았고, 가해자를 위해서는 안 해도 되는 걸 기꺼이 했습니다. ‘패닉 상태의 독백’이라는 해석도, 불법 접근을 ‘화해 노력’으로 기록한 것도, 누군가 공을 들인 결과였습니다.
제복을 벗고 나서야 자리가 생겼습니다. 타인의 평가를 의식하지 않고 일할 수 있는 자리. 이 글도 그 자리에서 씁니다. 눈치 보지 않고.
정연이의 울음은 ‘혼잣말’이라는 이름으로 묻혔습니다. 아무도 듣지 않기로 한 것처럼. 그래서 씁니다. 묻힌 것들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누군가는 들었다는 것을. 이 기록이 정연이의 억울함에 이름을 돌려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