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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가시’는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재)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장), 이동화(아디 활동가),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 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우리 부처는 어디서 오시는 중이실까?(김형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2-05-20 17:14
조회
564

김형수/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사무총장


 작업실이자 사무실 겸 나 홀로 얹혀사는 집은 서울 은평구 구산동 언덕길 끝자락에 인현왕후 서오릉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새로 지어진 곳이다. 맑은 날 북동향 족두리봉을 시작으로 향로봉까지 북한산 자락 응봉능선 전부가 손에 잡힐 정도로 높은 17층 아파트다. 이사 온 것은 코로나가 한창이던 2021년 5월이다.


 신촌 마포구 연남동에서 20년 넘게 살면서 연희 교차로 좁디좁은 복층 원룸 사무실 건물에서 두어 번의 화재와 소방차 출동을 겪으니 반드시 안전한 곳을 찾아 떠나야 한다는 표현할 수 없는 불안감이 온몸을 가위 눌렀다. 연남동 기차길 택시 회사에서 운전을 하는 아버지는 출퇴근 찻삯도 아끼신다면서 이사를 원하지 않으셨다. 바깥에서 햇빛을 보지 않아 대상포진마저 걸렸다. 허나, 지금은 여기를 벗어나야 했다. 연남동을 떠나니 이순희 어머니는 초등학교 그림일기, 개근상 마지막 한 장까지 모두 이사하기 일주일부터 상자에 담아 목록까지 적어 두셨다.


 단체 사무실로 쓰는 입구 쪽 작은 방 2개를 하나로 텄다. 온 방을 모두 책들에게 내주었다. 그 작은 책 ‘방’을 위해 더 좋은 대단지도 버렸다. 결국, 200세대도 안 되어 주차조차 부족한 이곳으로 왔다. 예로부터 왕릉 주변은 화재, 지진, 수해 위험도 적고 군부대에 숨어있는 경찰부서도 있으니 내 몸 주위의 불안한 중력 같은 기운들이 조금 가벼워졌다. 새내기 생애 첫 아파트 생활은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일부 주민들은 주차장이 부족하다며 지상 일층의 휠체어 표식이 있는 5개 주차구역 일부를 지우고 일반 주차장으로 쓰자고 주장했다. 관리실 앞 CCTV 모니터 옆에 층간 소음 분쟁 대응법이란 종이 한 장이 붙었다. 17층 거실과 모든 방에 다리를 뻗은 모든 가구에 테니스공과 양말을 신겼다. 고관절이 벌어져서 수각류 공룡처럼 특히 쿵쿵거리는 걷는 소리를 줄이려고 수중 트레킹화를 실내에서 양말까지 신고 다닌다. 왼쪽으로 기울어진 피사의 탑처럼 기울어진 걸음 걸이다.


 시골길에서 할매할배들도 타고 다니는 덩치만 큰 네 바퀴 전동 스쿠터가 좁디좁은 아파트 입구를 아슬하게 들락거리고 떡 하니 집 앞 공용 복도를 가로막을 때도 많으니 행여나 소방법 위반으로 신고당할지도 모른다.


 한 달 뒤에 들어온 옆집 부부는 아이들의 자전거로 햇빛 드는 공용 공간을 많이 차지해서 미안하다면서 비싼 과일을 주었다. 재활용품과 음식쓰레기를 버리러 일층에 내려갈 때마다 본적도 까무룩 한 저층의 신혼부부들과 어린이들은 껌벅껌벅 인사를 건넨다. 대신 버려주겠다는 동네 어린이들에게서 냄새 가득 찬 음식 쓰레기를 지키느라 진땀을 뺀다.


 바로 18층 어르신은 뜬금없이 내려오셔서 초인종도 없이 과일과 야채, 시루떡을 문고리에 걸어 두고 가셨다. 자동차 두기가 너무 어렵다는 수십개의 단체 문자에도 아파트 관리소장은 불법이라며 장애인 주차구역을 지우는 것은 절대 불가라는 전체 공지를 올렸다.


 그 일층의 장애인 주차구역에서 1995년에 재건했다는 수국사 황금사찰 대웅보전의 삐친 머리 자락이 보인다. 말 그대로 대웅전을 영원히 보전한다고 몽땅 금박을 입혔단다. 가끔 저층까지 들리는 목탁과 불경 소리는 시끄럽다고 민원이 되었다. 접근성이 좋아서 장차 일본의 황금 절인 금각사보다 유명해 지리라 자랑한다. 전동 스쿠터 충전지를 새것으로 갈고 나서야 아파트 후문에서 사찰로 올라간다. 대웅전에서 아파트의 전신이 다 훑어 보인다. 이렇게 사무실 등 뒤 직선거리로 법당까지 거리 222미터. 그 거리를 오는데 석 달이 넘게 걸렸다. 그래도 수국사는 대웅전 사찰마당 앞까지는 구르는 바퀴를 막는 돌계단이나 문지방 높은 산문(山門)이 없다. 은평구 육아종합지원센터 위쪽의 주택가 뒷길 골목보다 더 야트막하다. 그러나 일본의 금각사처럼 휠체어를 이용해서 대웅전에 들어가서 부처님을 바로 직면할 수는 없다.


 이렇게 나 홀로 내 걸음으로 자력으로 갈 수 있는 사찰은 25년 전쯤의 부산 범어사가 있었다. 지옥같이 지겨운 연산동 학원가 로터리의 한샘 학원을 벗어나 가출하듯이 목발 짚고 혼자 재수생은 세속을 떠났다. 당시 지하철 범어사역에 승강기는 없었지만 사찰 셔틀버스 90번이 항상 멈춰서 손님들이 다 찰 때까지 기다렸기 때문에 버스 안에서 엎어지거나 구르지 않았다. 월간 고사를 마치고 대학별 대응반을 옮길 때마다 갔지만 정작 본 것은 범어사의 겹겹이 겹쳐진 처마뿐이었다. 치솟은 산문 앞 두터운 계단에 닿기도 전에 나는 작은 오솔길로 빠졌다. 그렇게 50미터가량을 옆으로 빠지면 여러 개 큰 바위들이 눈에 많이 띄는데 고승께서 수행했을 법한 작은 암자 바위에 목발을 던져놓고 저녁 짓는 내음이 솔솔 날 때까지 걸터앉아 있었다. 수국사도 데자뷔처럼 바투 한 6호선 구산역과 버스 종점이 있어 지금 방황하는 목발잡이 재수생이 있다면, 수국사 법당 옆 북한산 둘레길이 또 다른 시작하는 높다란 나무계단에 기대고 앉아 깨달음을 갈구할 수도 있겠다. 전동 스쿠터의 가벼운 굴림도 둘레길 앞 나무계단에서 멈추었다. 그리고 절 마당에 있는 보살들에게 예의를 갖추는 것으로 222미터 속세로 돌아왔다. 왕할머니는 가끔 몰래 커피를 맛보여주시면서도 내 뻣뻣한 다리를 어루만지며 알 수 없는 불경을 읋조리시며 ‘내 업보다, 내 업보다 하셨다.’ 내 몸의 뻣뻣함이 왜 왕할머니의 업보가 되었을까? 이 뻣뻣함을 통해 매일같이 하나하나 작업의 해탈과 부드러움과 유연함에 대한 깨달음을 위한 훌륭한 고행은 왜 되지 못했을까?



사진 출처 - 승가원


 위세 높은 계단을 올라야만 성불하고 불끈불끈한 턱을 넘어 서야만 해탈할 수 있으며 꼭 신발을 벗고 문지방을 넘어 한껏 엎드려야 네게 자비를 베풀겠다고 할 만큼 잔인하고 중생들을 차별하는 우리 법당에 들어앉은 우리 부처는 부디 편안하실까? 나는 추앙해 마지않는 목발을 짚고서 석가모니를 대면할 수는 없는 것일까? 일생에 딱 한 번 부처님을 1:1로 얼굴을 맞대고 만난 적이 있다. 초등학교 6학년 경주로 갔던 수학여행 때였다. 호리호리한 키다리 아저씨처럼 키가 기다랗던 우리 교감 선생님께서 나를 업고 반 시간 넘게 계단을 올라 석굴암에 도착했다. 지금도 또렷이 기억나는 것은 교감 선생님 등에서 바로 본 석굴암의 석가 여래불보다 온통 진흙으로 범벅이 된 교감샘의 하이얀 교직원 체육복이었다.


 모든 사람에게 부처의 길이 있다시던 우리 부처는 어디서 오시는 중이실까?
승강기 없는 구산역에서 20분~30분 리프트를 타면서 매일같이 죽음의 공포를 느끼는 사람들 곁에는 이미 오시지 않았을까? 오다가는 풍경 소리를 불경처럼 안으며 사찰마당에서 휘휘 몇 바퀴 도는 것으로 명상과 수행을 마치고 222미터 떨어진 사무실 아파트 장애인 주차 구역에 가부좌 하시고 누가 함부로 지우지 않도록 지키고 계시지 않을까?


● 본 원고는 은평시민신문에 기고한 글을 추가 첨삭 수정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