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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 죽을 의리?(이회림)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1-07-13 15:19
조회
879

- 유명한 경찰관 A의 민낯


이회림/ 00경찰서


 ‘의리’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다니는 남자 경찰 선배가 한 명 있었습니다. 편의상 A선배라고 부르겠습니다.


 2017년 겨울, 경찰청 모 부서를 통해 A선배를 처음 알게 되었고 제가 만든 홍보 컨텐츠에 등장하여 형사 시절 이야기를 직접 들려주기도 하였습니다. A선배와 저희 부서는 녹음이 다 끝난 후 서대문구 미근동 모 족발집에 모여 회식을 하게 되었는데 여기에서부터 A는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보다도 ‘의리’라는 썰을 풀기 시작했습니다.


 솔직히 그날 A선배에 대한 첫인상은 그다지 좋지 않았습니다. 왠지 모르게 조폭, 양아치 느낌이었고 회식 자리에서 ‘의리’ 외에는 입에서 나오는 단어들이 매우 가벼운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첫인상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점과 말을 진중하게 하나 언행일치가 안 되는 사람들에게 이용당한 경험이 수 차례 있었던 터라 섣부른 판단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을 정리했습니다.


 A선배와 저는 인맥이 겹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저와 오랜 인연이 있던 남자 형사 선배들뿐만 아니라 여성 형사 선배들과도 친분이 있었습니다. 특히 여성 경찰 사이에서 전설적인 존재로 존경받던 1세대 여형사 선배님들을 ‘누나’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실제로 A선배는 그 ‘누나 선배’와 술자리 중에 저에게 전화를 걸어 친히 ‘누나 선배’를 바꿔주기도 했습니다.


 A선배는 2018년부터 소위 ‘잘 나가는’ 모습이 되어 눈썹 문신과 안면윤곽술 등을 시술받았다며 저에게도 권하는 등 마치 준 연예인 같은 분위기를 풍기기 시작하였습니다. 탑클래스 연예인들도 출연하기 힘든 인기 있는 예능 방송에 등장해 출연할 때마다 우호적인 댓글을 몰고 다니며 큰 인기를 끌게 되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은 씨가 말랐다 싶은 정의로운, 의리파 형사의 모습으로 비추어졌기 때문입니다. 수사 형사를 그만둔 지 수년이었지만 방송에서는 계속 형사로 불리고 있었고 주변에 저런 형사 한 명 있으면 범죄가 정말 사라질 것 같은 그런 믿음직한 인상으로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 같습니다. 저와 함께 모 예능에 출연하고 싶으시다며 저를 작가에게 추천한다고 했지만 저는 당시 감찰관으로 근무 중이라 곤란하다고 사양한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A선배를 알면 알수록 그 선배가 즐겨 말하던 ‘의리’와는 거리가 먼 언행을 하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특히 본인이 싫어하는 여성에 대해서 뒷담화를 할 때, 입에 담기도 힘든 쌍욕을 즐기는 것이 저에게는 늘 공해였습니다. A선배가 그 여성을 욕하는 이유에는 공감하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욕설이 매번 너무 저속하고 지나쳤습니다. 이러다 보니 1년에 많이 봐야 한 두 번, 그것도 지인들과 함께 만나게 되었고, 가끔 전화가 오면 대중교통 안이라 통화가 힘들다고 핑계를 대고 끊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이제 슬슬 경조사만 챙기는 정도로 멀고 느슨한 관계가 되고 싶었지만 어떤 명확한 계기가 생기지 않고는 딱 잘라서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그런 계기가 찾아왔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런 계기를 통해서라도 진실하지 못한 인간관계를 정리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시작은 모 영화의 시나리오였습니다. 2020년 7월경, A선배는 저에게 모 영화의 시나리오를 좀 써 줄 수 있겠냐는 제안을 합니다. 대학에서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뒤 경찰에 들어온 후 가끔 취미로 시나리오를 쓰고 있던 저였기에 이런 제안이 반가웠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상업 영화의 시나리오 초고를 쓰게 된 것 자체가 영광이었기에 돈은 중요하지 않아 원고료도 사양하고 말 그대로 10원도 받지 않고 시나리오를 완성하였습니다. 정확히 2020년 8월 1일부터 9월 15일까지 자투리 시간 혹은 주말에 시간을 내어 시나리오를 썼고 9월 15일에 A선배의 이메일로 1차 완성 시나리오를 전달하였습니다.


 그런데 시나리오를 전달하고 6개월이 훨씬 지난 시점에서도 A선배는 영화감독에게 시나리오를 전달했는지 어쨌는지 명확한 말이 없었습니다. 저는 직감적으로 이상하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습니다. 짧은 경제팀 수사관 경험이지만 관악서와 종로서에서 경제팀 업무를 배우면서 크고 작은 사기꾼들을 여럿 보아 왔기에 A선배의 수법 정도는 훤히 보였습니다. A선배는 가장 낮은 레벨의 사기꾼들이나 하던 수법으로 후배 경찰인 저에게 버젓이 사기를 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A선배는 저와 카톡으로 대화하던 중 자신에게 불리한 증거를 저에게 부주의하게 전송하는 실수를 하였고 저는 그 카톡 덕분에 명백한 증거를 갖게 되었습니다. 제가 팩트를 들이대며 따져 물으면, “그건 너의 오해야~~”라며 증거 앞에서도 확증편향에 빠져 있는 행태를 보였습니다.



사진 출처 - adobe stock


 세상엔 A선배처럼 사실을 들이대도 ‘오해야~’ 라고 대충 얼렁뚱땅 넘어가는 사람들이 적잖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기에 이때부터는 화도 나지 않고 마음이 차분해지기 시작했습니다. A선배에게 더이상 문자와 연락을 받지 않을 것이니 연락을 하지 말라고 경고하자 뒤늦은 사과와 읍소가 이어졌습니다. 자신의 번호가 차단된 후로는 다른 번호로 다시 연락이 왔습니다. 저는 그 번호마저 차단하며 더이상 연락하면 ‘스토킹’이라고 재차 경고하였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출근길, 제가 다니는 경찰서 내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마자 A선배의 얼굴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00야..얘기 좀 하자.”며 힘없는 목소리로 말합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기가 막혀 “뭐하시는 겁니까? 왜 여기까지 오셨어요? 명백히 스토킹입니다. 더 이상 다가오면 112신고합니다” 라고 말하고는 자리를 피했습니다.


 사무실에 들어갔더니 A가 이미 팀장과 팀원들에게 저를 찾아왔다며 인사를 하고 간 후라 저는 이 일을 숨길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팀장님은 저에게 “서울에서 손님 왔던데요~ TV에 나왔던 분 같던데요”라고 친절히 말씀해주셨고 저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그냥 이대로 두었다가는 큰 오해와 소문에 휩싸일 것 같아 제가 당한 일에 대해 팀장님께 알리고 상의를 하였습니다. 그리고나서 저희 서 감찰직원에게도 A선배와의 일에 대해 알렸습니다.


 잘못된 인간관계를 정리할 때는 확실히 깨끗하게 하는 것이 맞습니다. 일단 저의 직장 내에서는 팀장과 감찰직원께 얘기를 해 놨으니 A선배의 진실에 대해 알아야 될 다른 사람, 아마도 저처럼 피해를 입은 것이 명백해보이는 영화감독 K에게도 연락을 하였습니다. K의 연락처는 A선배가 끝까지 알려주지 않아 어쩔 수 없이 K가 소속된 일터에 저의 연락처와 메모를 남겼습니다. 운 좋게도 그날 오후에 K로부터 바로 연락이 와 그간의 일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혹시 시나리오 비용은 어떻게 되었는지 아나요?” 저는 10원도 받지 않은 시나리오 비용에 대해 이렇게 K감독에게 질문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K감독이 저에게 해 준 말을 모두 옮겨 쓸 수는 없지만, K감독은 그동안 저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저에게 확인해주었습니다.


 평소에 입으로만 ‘의리’, ‘의리’ 찾던 못난 A선배, 선배 덕분에 저는 표준국어대사전을 다시 열어봅니다.


의리 義理 [의ː리]
1. 명사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2. 명사 사람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바른 도리.


사람으로서, 마땅히, 사람 관계에서, 지켜야 할, 바른, 도리.


 A선배가 저와 K감독에게 한 언행은 전혀 ‘의리’와는 거리가 먼 모습일진대 A선배는 자신이 어떤 바르지 않은 행동을 하더라도 무조건 이해하고 감추어 주는 것을 ‘의리’로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 글을 쓰느라 2018년부터 A선배와 주고받은 카톡을 처음부터 다시 읽어 보니 그동안 꼼꼼히 보지 않은 징글징글한 글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합니다.
 “남자나 여자나 의리가... 술 마니 마시고 있네. ㅋ 짐 텐프로 왔네 ㅋ”
 위의 문자는 제가 해외에서 장기간 여행 중일 때 보낸 문자로 보이는데 그때 당시에 제대로 못 읽어봤나 봅니다. 이제는 3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이지만 저 괴상한 문자에 답글을 한 번 달아보며 이 글을 마쳐보겠습니다.


 “어이구, A선배님, 그놈의 ‘의리’ 입으로만 ‘의리의리’ 거리시더니 결국은 후배 여경한테 이런 짓을 다 하시네요. 근데 텐프로를 가든 영프로를 가든 어디 가서 경찰이다, 형사 출신이다. 소리 좀 하지 마세요. 그러다 훅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