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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가시’는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재)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장), 이동화(아디 활동가),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 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비발달’ 장애인들(?!)이여 각성하라(김형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1-06-30 11:46
조회
719

김형수/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사무국장


"장애인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이 존중되는 권리를 출생하면서부터 갖고 있다. 장애인은 그 장애의 원인 또는 정도에
관계없이 같은 나이의 시민과 똑같은 권리를 갖는다."

-장애인의 권리선언 제3항(1975년 12월 9일 제30차 UN 총회에서 결의)


■ 누가 ‘발달’된 인간인가?


 필자는 올해 발달장애인 당사자에 대한 연구와 교육 활동을 다섯 가지나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지적 자폐성 장애인에 대한 특수교육 전문가도 아니요, 가족이나 친지 중에 당신들 당사자가 있는 것도 아니다. 굳이 그들과 연관성을 찾자면 본인의 공식 아이큐가 발달장애 판정이 가능한 경계선 급(?)이란 정도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작년에 이어 계속 지적 자폐성 장애인 청년들, 성인들과 교류하는 것은 기존의 특수교육이나 신경 정신과 관련 전문가 부모들과 전혀 다른 목표를 추구했기 때문일 것이다. 본인의 목적은 그들을 교육하거나 재활하게하는 것에 있지 않다. 나의 목표는 지적 자폐성 장애인 당사자들과 대화하고 소통하고 그들의 표현을 수용하고 그래서 그들을 이해하며 그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나’를 이해시키는 것에 있다. 왜냐하면 위에서 진행하는 모든 프로그램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그분들의 생각과 의견 그리고 그분들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그분들과 필자 사이에 원활한 의사소통 코드와 기제를 아직 충분히 ‘발견’하지 못했다. 마치 컴퓨터란 기계와 내가 직접 소통하기 위해서는 도스나 윈도우, 키보드, 마우스, 모니터 등의 ‘인터페이스’ 등이 손쉽게 개발 발달되어 내가 충분히 숙련되어야 하는 것처럼. 나는 아직 그분들과 의사소통을 제대로 할 만큼 나의 직관과 감각과 인터페이스를 발달시키지 못했고 숙련되지 못했다. 누구의 책임이자 능력인가?


그들을 위한 민주주의는 아직 없다.


 그래서 나와 세미나를 하는 지적 자폐성 장애인들은 나와 소통할 의무와 책임이 없다. 나를 이해하고 수용해야 할 이유가 없다. 오로지 세미나 진행자인 내가, 그들을 이해하고 수용하고 의사소통을 해야 한다. 나는 그들의 강의 평가에 따라 강의료를 지급받고 고용 계약을 연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갑과 을의 관계에서 ‘을’ 위치에 있는 내가 실질적으로 갑의 관계에 있는 ‘그들’에게 장애 등급을 이유로, 주관적이고 비과학적인 아이큐 검사의 결과로, 언어 사용과 정서적인 유대감이 결여되었다는 이유로 ‘그들’에게 ‘발달’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교육하고 주입하고 강제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인가? 그들을 발달장애인이라고 부르는 것도, 지적 자폐성 장애인이라 부르는 것도, 발달이 지체된 사람이라고, 심지어 영혼이 맑디 맑은 사람이라고 부른 것도 나는 그분들에게 물어보지 않았다. 갑의 관계인 그들에게 어떤 이름으로 불러야 하는지 을의 관계인 필자는 동의를 구하지 못했다. 장애인복지법에 발달장애인이란 낱말이 지적 자폐성 장애인이란 말로 개정되었을 때도 당사자인 그분들에게 그 말이 어떤 느낌인지, 좋은지 싫은지 어떤지 당사자에게 인터뷰를 해보거나 설문을 해 본 적이 있는가? 가까운 시일 내에 발달장애인 분들이 우리의 입회 없이, 우리의 참여 없이 우리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름 붙이는 것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대사회적으로 표명하신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필자와 우리는 모두 발달장애인에게는 제국주의이며 파시즘이다. 요즈음 장애계의 가장 큰 화두가 발달장애인법 제정인데 그 과정에 전문가, 교수, 부모, 시설 운영자들은 적극 참여하고 있지만 정작 시설에서 생활하시는 발달장애인분들에게 어떤 법이 얼마나 필요한지, 그들의 언어와 의사소통 방법으로 의견을 구해 본 적이 있는가?


 그럴 생각이나 의지라도 있는가? 이 글은 읽고 있는 독자들이 어떻게 발달장애인들이 법을 이해하고 의견을 표명하느냐며 의구심을 갖는다면 나는 이렇게 답해 주고 싶다. 그럴 의심할 시간에 발달장애인이 이해하고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설문지나 법 해설서나 개발하셔요.라고.


 사실 발달장애인분들의 직접 참여 없이 이루어지는 작금의 법 논의나 보건복지부의 발달장애인지원센터 설립 연구들은 그 가치와 이념에 비해 실천과정은 그래서 퇴행적이고 모순적이다. 발달장애인의 지적 능력이 그렇게 의심스럽다면, 발달장애인 중에서도 상위 1%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달라. 비장애인 모두가 서울대를 가지 못한다고 우리는 모두 자신의 능력을 제한하지는 않는다.



사진 출처- freepik


지적 자폐성 장애, 발달 장애는 가지고 있는 것일 뿐이다.


 발달장애인은 없다.
 발달장애인을 이해하고 소통하는 인터페이스와 능력이 없는 우리와 필자와 우리 사회가 있을 뿐이다. 오늘날의 자폐 스펙트럼 진단체계로 보면 과거 뉴튼이나 아인슈타인은 모두 자폐성 장애인으로 분류되었을 테고, 학교 부적응 학생들도 바로 학교라는 시스템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니까. 태초부터 지적 자폐성 장애인은 애초부터 발달이 지체되고 소통이 부재된 것이 아니라 사회 시스템이 인간의 발전속도 인간의 적응 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변화한 것뿐이다. 그래서 발달 장애는 앓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기준일 뿐이다. 그들의 기준에서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가지고 있을 뿐이다. 지금 필자의 지면에서도 그들이 발달장애인이었다가, 지적 자폐성 장애인이었다가 그들이라 불리기도 한다. 내가, 우리가 그들에게 어떤 이름이 좋은지 물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엑셀도 못하고 카카오톡도 못하는 대학교수는 이 스마트 시대에 발달 지체, 학습 부진이라 부르면 안 되는가? 필자는 문자를 잘 보내지 못하는 아버지와 나날이 소통의 부재와 단락을 느낀다. 상대적인 기준을 가지고 절대적인 학력 평가를 일삼고 사람을 평가하고 한계 짓는 것이 정말 非발달스런 일이다.


 다시 한번 묻자. 인간 대뇌의 2%도 그 비밀을 못 밝혀내면서 아이큐 지수 하나로, 산업화 이후 학교 시스템 하나로 인간을 평가하는 것이 정말 발달된 판단인가? 누가 발달장애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