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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오염될 때(김아현)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1-06-16 16:25
조회
766

김아현/ 인권연대 전임간사


 지금은 온 국민이 그 수용번호를 다 아는 전직 대통령이 현직이던 시절의 일이다. 경제활성화법, 노동개혁법, 테러방지법 등의 입법을 촉구하는 서명운동이 대대적으로 벌어졌었다. 경제계와 청와대는 당시 이것을 ‘민생구하기 입법’이라고 불렀다. 경제계와 청와대는, 천 만 명의 서명을 받아 위 법안들의 국회통과를 촉구하고 경제를 살리는 한편 테러를 방지해 민생을 살리겠다고 했다.


 삼성은 물론이고 대한상공회의소를 비롯한 수십여개 경제단체들이 적극적으로 팔을 걷고 나섰다. 보통 서명운동이니 집회니 하는 것들은 주로 ‘빨갱이’들이나 하는 일이었다. 노동조합도 못 만들게 하던 삼성이 사옥에 서명 부스까지 설치하며 팔을 걷고 나설 정도로 우리나라 경제가 백척간두에 서 있나 아무리 둘러봐도, 고급호텔은 늘 예약이 꽉 차 있고 공항엔 출국을 앞둔 이용객들이 가득했다.


 재계의 투쟁은 외롭지 않았다. 대통령, 국무총리, 각 부처 장관 등 고관대작들의 서명 참여 인증샷이 이어지는데 전국의 작은 지자체와 산하기관들이 가만있을 도리가 없었다. 21세기형 관제 운동이라는 비판이 일부 진보언론을 중심으로 제기되었다. 그로부터 5년여가 지난 지금, 테러방지법을 제외한 해당 법안들의 처리 과정과 결과가 어땠는지 그닥 기억나지 않는 것을 보면 한국사회의 집단지성이 절망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나 보다.



사진 출처 -정책주간지 공감


 집회 및 결사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에서 빨갱이든 삼성의 총수든 그 누구든, 데모도 할 수 있고 서명운동이라면 더욱 못 할 일이 없다. 대통령도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 나는 대통령이 거리에서 서명운동에 동참하는 사진이 실린 기사를 읽으며 꽤나 크게 분노했다. 아주 상스러운 욕을 하고 싶었는데 남들 다 할 줄 아는 욕 말고 더 심한 수위의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분노보다는 모욕감이 더 컸다. 람보르기니 우라칸을 타고 나타난 이들에게 느닷없이 발가벗겨지는 것도 모자라, 손에 쥔 마지막 푼돈을 빼앗긴 느낌이라고 하면 엇비슷하겠다.


 서명운동은 누가 하는가. 땡볕과 매연과 칼바람을 막아줄 문명의 이기 하나 없이 길바닥 위에 서서, 일면식은 물론이고 내 말 들어줄 시간도 관심도 없는 이들을 붙잡아 말을 건네고 허리를 굽히는 그런 일은, 과연 누가 하는가.


 절실함 말고는 가진 게 없는 이들이다. 마이크, 호화 변호인단, 법개정이나 예산반영을 관철시킬 유무형의 네트워크, 또는 사람들의 관심 가운데 단 하나도 갖지 못한 이들이 주로 거리로 나선다. 그들은, 언론 보도의 논조를 조율할 수 있고 법과 예산도 주무를 수 있으며 정치와 행정을 통해 세상을 움직일 힘이 있는 사람들에게, 거리마저 빼앗겼다. 관제 여론몰이 정치쇼가 서명‘운동’의 옷을 입었을 때 누군가는 모든 것을 잃었다. 누군가는 그 행위를 들어 서명‘운동’이 아니라고, 그런 것은 운동일 수 없다고 지적했어야 했다. 고관대작들이 할 일은 서명이 아니라 다른 것이라고 말했어야 했다.


 ‘젊은 보수도 젊은 진보도 발렌시아가를 입는다’며, 국민의힘 이준석 신임 대표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추켜올린 어느 진보언론의 기사를 읽고 이 글을 쓴다. 부연하자면 그 기사에 대한 분노와 절망, 비아냥거리고 싶은 마음을 표현하려는 목적이다. 하이엔드(고급) 패션의 혁신을 K-정치에 빗대어 자칭 진보의 각성을 촉구하고자 하는 그 마음 모르는 바 아니지만, 108만 원짜리 후드티, 474만 원짜리 털재킷, 130만 원짜리 스커트, 127만 원짜리 스니커즈, 64만 원 넘는 수영복을 입을 수 있는 ‘젊은’ ‘진보’는 어디에 있는가. 돈 많이 벌고 옷 잘 입는 진보도 있어야 하고 간혹 그 기사를 쓴 기자 주변에 많을지 모르지만, 그 몇몇은 통계적으로도 계급을 대변할 수 없다. 교과서만 파서 입시에 성공한 사람은 있을 수 있지만 그게 보편적일 수 없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준석이 창조하고 이준석이 변화시킨 정치 지형이 뭐가 있는지 알고 싶다. 이준석의 성과에 그의 성별과 나이, 학력 말고 대체 어떤 것이 기여했는지 정말 궁금하다. 그가 대변할 수 있는 계급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 다만 생물학적 젊음에만 빗대어 크레이티브 디렉터라느니 사상 초유의 30대 당대표라느니 하는 ‘진보’ 언론의 말들은 낯 뜨겁다. 그보다 젊은 나이에 당대표를 역임한 작은 정당, 다른 성별의 대표들이 숱하게 스친다. 기성세대의 출혈경쟁에 미래를 강탈당해, 발렌시아가를 입기는커녕 지․옥․고를 벗어나지 못하는 청춘들의 절망을 ‘코인 같은 도박에나 베팅하는 철없음’으로 조롱하는 말들도 스친다. 속이 부대낀다.


 그가 ‘국회의사당역’에서 ‘국회 본청’까지의 그 짧은 거리를 공유자전거로 출근하는 구태의연한 정치쇼를 벌일 때도 언론은 혁신이라고 추켜세우기 바빴다. 말은 누가 오염시키는가. 오염된 말은 누가 유통시키는가. 오염된 말이 유통되어 프레임이 변화할 때 그 때문에 고통받는 이들을 지켜보는 건 누구인가. 적어도 ‘발렌시아가를 입는’ 기자가 그들 곁에 있을 거라는 상상을 하지 못하는 편협함만이 아주 조금 미안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