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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가위, 사오정의 뿅망치(박용석)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2-05-25 13:32
조회
780

박용석/ 책팔이


 얼마 전 소속된 노동조합 지부장 선거에 후보로 출마했다 떨어졌다. 그간 낙선을 사례한다는 어색한 표현만큼이나 무슨 말을 어떻게 할지 몰라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문득 돌아가신 어머니가 해주었던 옛이야기가 생각났다. 1985년, 내가 태어나던 해의 이야기다.


 내가 아직 어머니 배 속에 있을 적, 출판인들의 연이은 구속과 수배에 항의하기 위해 뜻있는 출판사와 서점들이 함께 동맹휴업하고 시위에 나서자 결의했었단다. 그러나 결사 당일, 시위 현장에는 갓 돌 지난 첫째아들을 미리 시댁으로 보내놓고 나온 임산부인 어머니와 몇 명뿐, 함께 결의했던 사람 중에 이름난 사람은 아무도 오지 않았다고 했다.


 어머니는 제대로 해본 것도 없이 체포되어 며칠의 구류를 살고 나왔다 했다. 그조차도 임산부를 가둔 것에 항의하고자 외신기자들을 이끌고 온 아버지의 기자회견 직후였다고 한다. 이미 수배 중이었던 아버지였지만 다행히 잘 도망쳐 그 자리에서 체포되지는 않았다고 했다. 그렇게 석방된 다음 날 어머니는 청계 상가에서 예리한 제단 가위를 사 정성스레 포장해 그 자리에 오지 않은 유명한 이들에게 선물로 보냈다고 했다.


 이 사건이 역사에는 조금 달리 적혀있다고 했다. 그날 그 자리에 오지도 않은 출판사와 서점 대표들 여럿이 결의하여 시위하였고 그 자리에서 성명을 발표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했다. 있지도 않았던 시위와 있지도 않았던 성명이 날조되었다 한다. 그중에 누구는 꽤 높은 관직에 올랐고 유명해진 정치인이 여럿이며, 여전히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는 출판사들이 끼어있었다. 사오정의 뿅망치1) 같은 거라 했다. 죽을 각오로 9번을 열심히 때렸던 지난 사람들을 기억하지는 않는다고, 마지막 열 번째 망치질로, 어쩌면 운으로 권력을 잡은 사람들은 염치들이 없다고 말이다.


 그러면 왜 사실을 바로잡지 않느냐 물었다. 그들에 대한 비난은 제 얼굴에 침 뱉기라 우스운 꼴밖에 되지 않는다 했다. 그리고 의리라 했다. 그날 그 자리에 오지 않았음에도 온 척하는 이들에 대한 의리가 아니라 꾸며진 영광이라도 있어야 힘을 낼 사람들에 대한. 그래서 반박하지 않는다 했다. 그러며 당부했다. 염치도 의리도 바닥에 떨어진 지 너무도 오래이니 너무 열심히 하려다 상처받지 말고 적당히 눈치껏 실속도 차릴 줄 알라고.


 하지만 여전히 모르겠다. 의리도 지키고 실속도 챙기는 법을. 눈치껏 적당히 하면서 염치도 차리는 법을. 입은 무겁게 지갑은 가볍게 해야 한다는 나이가 되어가면서도 여전히 가벼운 입과 쉽게 열기에는 욕심 많은 지갑밖에 없어서.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는 역설에 대리만족하기도 하지만 백마 탄 왕자(혹은 공주)님이 데리러 올 날을 고대하며 깃털을 가꾸는 것이 능한 처세라 백화점 명품 매장에 새벽부터 번호표 뽑고 대기하고, ‘상승과 하강으로 명징하게 직조해낸 신랄하면서 처연한 계급 우화’ 같은 상상력에 갈채하면서도 임대아파트 사는 아이와 같은 학교에 우리 아이를 보내는 끔찍한 일은 결단코 없어야 하고, 점점 더워지는 지구에 숙주마저 죽이는 고장 난 바이러스의 창궐로 전 인류가 고통받고 있는 와중에도 전쟁을 벌이는 현실 속에 대체 누구에게 의리를 지키고 누구에게 염치를 차려야 할지, 누구에겐 적당히 눈치껏 실속을 챙겨야 하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사진 출처 - 구글


 특권적 관계에 있노라 주장하는 사람들과 역사를 부정당했던 사람들은 결국 공동의 운명과 마주친다2)지만, 그 비어 있는 거대한 행간이 대체 무엇으로 채워질지 여전히 궁금하다. 여전히 그날이 올 때까지 잘 참지를 못해 실수투성이기도 하다. 그래서 넋두리하듯 아무 짝에 쓸모없을지 모를 푸념을 꾸역꾸역 써낸다.


 나 역시 알량한 뿅망치질에 취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기 때문이고, 내 손톱 및 가시만 아프다며 헐뜯고 상처 주기에만 바빴던 것 같기도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 눈 밝은 이가 이 글과 현실 사이에 공간을 읽어내어 더 나은 이야기를 만들어주길 바라면서 재미없는 옛날얘기는 이만하고 염치와 의리와 눈치와 실속의 관계와 균형에 대해 좀 더 고민해야겠다. 죽을 힘을 다해 9번 때린 뿅망치를 넘겨주고 조용히 입 다물고 있을 줄 아는 사람이 되는 법을, 그러면서도 더 많은 뿅망치를 만들 방법을. 언제가 제대로 10번째 망치질을 해낼 방법을.


덧: 어머니에게 받은 가위를 아직 보관하고 계신 분이 혹여 이 글을 보신다면 제게 그 가위를 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치욕을 주기 위해 보냈던 물건을 제 나이만큼 보관하신 그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고 넓은 마음에 감사하여 저 또한 삿된 마음이 들 때면 바라보며 행실을 다잡고자 합니다.


1) <날아라 슈퍼보드_허영만 원작_KBS 방영>의 사오정 캐릭터는 ‘뿅망치’를 무기로 사용하고, 10번째 공격에만 가공할 폭발 공격이 가해진다는 설정이다. 귀가 잘 들리지 않고 기억력이 좋지 않은 어리숙한 설정의 캐릭터 사오정은 힘겹게 몇 번을 때리고 나자빠지고 또다시 힘겹게 몇 번을 때리고는 몇 번을 때렸는지조차 잊어버려 만화의 재미와 긴장감을 주는 캐릭터다. (젊은 세대들에게는 생소한 캐릭터일 수도 있다고 생각되어 따로 주석을 남깁니다.) 

2)  Eric Wolf, Europe and the People Without History, 2nd Edition,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10. 박광식 역, 『유럽과 역사없는 사람들: 인류학과 정치경제학으로 본 세계사 1400~1980_뿌리와이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