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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가시’는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재)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장), 이동화(아디 활동가),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 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작고 시시콜콜한 기쁨들을 오래 품기 위해(신종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2-04-27 15:44
조회
454

신종환/ 공무원


 쓰기에 앞에 지선이 다가옴에 따라 정당에 관련된 구체적인 언급을 제한하는 공문이 매주 접수됨에 따라 글에서 인물과 그 발언 등의 구체적 언급이 제한됨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알려드린다.


 대선이 지나고 다시 지선을 앞두면서 지나간 몇몇 선거들이 생각난다. 하지만 어떤 선거도 교체가 완료되기 전에 지금처럼 많은 소음을 내지는 않았던 것 같다. 신문이든 텔레비전이든 보도되는 내용을 보고 있자면 어떻게 저런 말을 당당하게 할 수 있나 생각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연이어 보도된다.


 하지만 매체에 나서 말하는 사람들을 제도정치권과 직접 얽힌 사람들을 생각했을 때 그들은 그릇된 가치관을 가졌을지언정 국민 일각의 의향을 파악하는 감각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감각이 그들을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진 토론회에서 특정 행위가 비문명이라고 당당하게 칭할 수 있고, 더 나아가 그런 말이 자신들의 입지를 더욱 단단하게 해줄 거란 확신을 느끼게 했을 거란 근거 없는 생각이 들면 두려워진다.


 많은 사람들이 지난 몇 년간 힘들었고, 이제 불편 속에서 옆자리 사람의 고통을 더듬어내기보다는 자기가 겪어온 고통에 몰두하는 게 더 편하다는 걸 상기하는 사람들이 느는 것 같다. 2015년 1월에 개봉한 마리옹 꼬띠아르 주연의 ‘내일을 위한 시간’에서 동료들은 주인공 산드라가 해고되면 1,000유로를 받을 것이며 보너스를 거절하면 산드라가 복직하니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선다. 산드라는 그런 동료들을 찾아다니며 자신의 복직을 선택해달라고 하는데 의외로 적지 않은 동료들이 고민하거나 거절하고, 결과적으로는 진다. 1,000유로는 당시나 지금이나 대략 130만 원 정도로 환산된다. 당시로서는 마음속에 똘레랑스라는 단어의 발생지이며 선진국이라고 생각했던 프랑스 사람들이 매년도 아니고 한번 지급되는 130만 원에 동료를 자를지 말지 고민하는 식으로 나타나는 연출에 충격을 받았었다.


 그런데 또 동료들의 명암을 보고 결국 잘리고 마는 산드라는 좀 더 단단해진 모습으로 내일을 기약한다. 같이 영화를 보고 논하시던 선생님은 그래서 ‘내일을 위한 시간’은 ‘내 일을 위한 시간’과 연결되어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을 나름 풀어보면 자살을 시도할 만큼 현실에서 낙관적인 면을 발견하지 못하고, 또 발견하고 싶지도 않았던 산드라의 마음에 현실은 완전히 나쁘다고도 좋지도, 사람들도 전부 악인도 선인도 아니며, 그 사실을 자신이 스스로를 위해 보낸 시간 속에서 선명하게 발견되었다는 말씀으로 이해된다. 안 좋은 예감은 안 좋을 일을 크게 보게 하고 좋은 일이나 징조를 가려버리고 어느 정도는 맞지만 그것 만이 전부는 아니다. 그렇게 우울한 징조에 포섭되지 않을 경험과 상상력은 우리 마음에 존재하기 마련이다.



사진 출처 - pixabay


 니체는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강하게 만든다’라고 했지만, 그 작동방식이 이진법처럼 죽거나 강해지거나 하는 방식은 아니라고 친절하게 말해주지는 않았다. 실제로는 고통이 나를 대부분 죽이고, 간혹 죽은 줄 알았는데 기진맥진 살아서 강한 건지 강해져서 산 건지 모호한 상태로 살아남아 강해질 가능성을 붙는다. 산드라가 마음속에서 겪을 일이 그렇지 않을까 나의 삶의 부분과 비교해 생각해본다. 그리고 그 견뎌낸 고통에 한 점 한 점 살을 발라가고 또 한 점 한 점 잃음을 반복하면서 단단함을 얻을 수도 있겠지.


 앞서 말한 것처럼 당분간 나와 내 주변 사람들에게는 견뎌낼 수 있는 고통보다는 견뎌낼 수 없는 고통이 더 많이 찾아올 거란 예감이 들고 그 예감이 우울을 부른다. 우울한 전망을 버티기 위해서는 작은 기쁨을 발굴하고 품을 수 있어야 하고 그 도구 중 하나는 별것 아닌 일에 기뻐하고 떠벌이는 것이다. 실제로 별것 아니고 창피하기까지 해서 대부분 하지 않기에 내가 먼저 떠들어 본다. 이미 매번 인권연대에 글을 써서 보낼 때 크게 민망하고 미안하고 부끄럽기에.


 작년 말부터 공무원노조 속초시지부에서는 청년부원 둘에게 청년 사업을 하라고 채근했다. 배운 게 풀칠이라고 할 줄 아는 건 모임을 만드는 일이라 주변 동료들에게 영화 모임을 하자고 찾아가 애걸복걸했다. 술 생각 날 때는 종환아 형님 주사님 오빠 하며 찾아오던 사람들이 으악 노조원이다! 를 외치며 전부 도망가서 모임 명단은 구멍 난 잠자리 채집통처럼 비어 있었다. 그러나 매 기수 신규직원들이 교육을 받을 때마다 신문지 사이 광고지처럼 끼어 노조 교육을 하고 작년에 이어 올해도 또 온 각설이 같은 마음으로 채근하여 5월에 십여 명의 노조원이 노조사무실에서 이준익 감독의 ‘자산어보’를 본 소감을 나누고 뒤풀이를 하기로 동의했다. 이런 이끼 같은 작은 일이 앞으로의 날들에 습기를 붙잡고 자라 힘들 때 비빌 언덕이 되기를 기원한다. 작은 일을 크게 떠들고 세세하게 기억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