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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태민, 이서하, 전예원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안동환(서울신문),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횡단보도 하나만큼의, 아득한 거리(조혜원)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2-07-13 10:36
조회
667

조혜원/ 회원 칼럼니스트


“점심시간 1시간을 보장해주세요.”


“임신한 노동자에게 필요한 쉼과 휴가를 주세요.”


“다치면 산재처리를 받게 해주세요.”


 21세기에 ‘사람답게 살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 기업이 있다. 빵 굽는 구수한 냄새 가득할 것만 같은 파리바게뜨의 SPC다. 임종린 민주노총 화섬식품노조 파리바게뜨 지회장은 부당노동행위 중단 및 사과, 노조파괴 책임자 처벌 등을 요구하며 53일 동안 진행했던 단식을 지난 5월 19일 중단했다. 암담한 현실의 노동자 탄압과 노동인권 현주소가 SPC를 통해 다시 한 번 확인됐다.

 더불어 확인한 사실은 우리 사회의 거대한 무관심이었다. 파리바게뜨 노동자들의 길고 긴 싸움이 일부 언론을 통해 공식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임 지회장의 단식 투쟁이 한 달을 훌쩍 넘어선 지난 5월 9일이 되어서였다. 그것도 한 시민의 온라인 내 해시태그 운동을 통해서 겨우 가능했다. 3월 해시태그 운동이 있기 전까지는 거의 모든 언론에서 해당 사안이 다뤄지지 않았다.

 더욱 암담한 문제는 언론의 주목 이후였다. 대부분 언론사는 ‘노노 갈등’ 프레임을 씌우려 했다. 앞으로 SPC 기업이 나아가야 하는 방향들, 해당 시위의 쟁점들, 그리고 더욱 근본적인 배경을 다루는 것을 회피했고, 일부 언론은 시위와 불매운동으로 인해 가맹점주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는 식의 보도로 아예 본질을 흐리기도 하였다. 자극적이고 갈등을 불러일으킬 만한 부분만 극대화하여 보도하는 것에 그치는 언론의 보도 행태는 현재 언론이 과연 평등한 공론장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게 한다.

 비단 SPC 건만이 아니다. 모든 사회적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다룰 때마다 언론은 늘 비슷한 행태였다. 페미니즘과 성평등의 투쟁을 ‘젠더 갈등’으로 축약시키거나 장애인 이동권 문제를 ‘민폐 시위’로 보도하는 등 현재의 언론은 권력 중심, 기득권 중심의 시각에서 소수자 문제를 외면하려는 행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 보니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만 내고,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여전히 갈등 그 자체에만 집중하여 “왜 또 싸우고 있는지” 따위를 물어보게 되는 것이다.

출처 - 직접 촬영


 6월 8일 SPC 파리바게트 노동자의 2차 촛불시위가 있었다. 시위 현장에서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시위 현장 바로 건너편에 있는 파리바게트 건물에 사람들이 그렇게도 많이 오갔다는 사실이다. 제 아무리 확성기로 크게 문제를 이야기하고 몇 시간 동안 투쟁을 하였음에도 여전히 이 사실을 듣지 못하고, 혹은 들었음에도 문제 의식을 가지지 못하고, 혹은 문제의식을 가졌음에도 애써 외면하며 그 곳의 빵을 사가는 사람들이 그렇게도 많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처음으로 이 사회의 보이지 않는 벽을 보게 되었다. 고작 횡단보도 하나만큼의 거리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인식의 차이는 높은 기득권과 소수자 사이에 존재하는 엄청나게 큰 벽은 아니다. 늘 생활 속에서 맞닥뜨림에도 닿을 수 없을 듯 아득한 거리감이 있을 뿐인지 모른다.

 간식거리를 위해 그곳을 들르는 직장인들, 친구들과 함께 삼삼오오 무리 지어 그곳을 들어가는 학생들, 내일 먹을 아침을 위해 식빵 한 봉지를 손에 들고 나오는 사람들과 같이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평소에는 평등하다고 생각되는 동료 시민들이 그 횡단보도 건너편에 존재한다. 악덕한 기업의 노동탄압보다, 같은 노동자들에게 무뢰배 같다며 입막음을 시도하는 한국노총보다, 그 횡단보도 건너편을 보며 느꼈던 분노와 절망감이 더 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문제를 회피하는 언론과 이 무관심한 시민의 모습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언론은 더 이상 우리 이웃의 문제를 단순한 논란거리나 가십으로 소비하는 행태를 멈추어야 한다. 이야기를 듣고 함께 해결해 나가야 한다. 그리고 이 촘촘한, 보이지 않는 인식의 벽들을 하나하나 부수어 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