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우리시대

‘우리시대’는 언론계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이 멘토가 되어, 작성한 칼럼에 대한 글쓰기 지도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태민, 이서하, 전예원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안동환(서울신문),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하나에서 여럿으로(이창우)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2-07-06 15:08
조회
358

이창우/ 회원 칼럼니스트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작동하기를 바라는 힘보다 앞서는 감성의 힘으로 나는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있다. 현대라는 위험사회에 갑자기 찾아온 죽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생명이 한 점에서 출발한 것이라면 그 점이 더는 보이지 않는 것을 죽음이라 편리하게 이름 붙일 수는 있다.


 삶이라는 제목에 굳이 흔적을 남겨야 할 것도 아니다. 스스로 확인하다가 살아있음을, 그것이 벅차면 확인하지 않아도 된다. 어떤 점으로 있건 그건 내가 부르고 싶은 이름으로 불리면 된다. 수많은 말과 소리와 글로. 또는 이미지로. 그게 삶이라는 이름이 되기도 한다.


 세상에서 여러 모습으로 살아가는 일. 지금 여기와 그 어느 날과 또 다른 그 어느 시절에 살아간다는 것이 삶이다. 중심이 되는 하나가 다른 차이, 질적 다양성을 말살시키려는 것은 폭력이다. 인류의 역사에 드리워진 만행, 그들조차 인지하기 어려울 만큼 보호받거나 정당화하고 이어가는 남성 중심의 사회구조이다.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일상에서 이론적으로 배우고 느끼며 살고 있다. 다만 인간으로 태어나 여성으로 있는 것과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과는 확연히 다름을 쉽게 지나칠 뿐이다. 내가 생활하면서 만나는 부당함이 뼈저리게 파고들지 않으면 저항보다 순응이 쉽다.


 남성 중심의 사회가 그렇다. 워낙 자연스럽게 이어지며 공고하게 굳어진 남성 중심의 생각들이 자리를 내어주지 못한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스스로 알아차리고 깨닫지 않으면 페미니즘은 수많은 사회운동처럼 부분에서 정체되어 파편화되고 더 나아가지 못한다.


 페미니즘은 더 나은 삶을 위한 과정의 한 의식화이고 그 너머에서 진정한 휴머니즘의 세계가 열릴 수 있다. 남자, 여자로 규정된 생각에서 벗어나 인류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세계에서 하나인 인간으로 살아나기 위해서라도 페미니즘은 자명성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접근해 한 걸음 내딛기 시작해본다. 내가 받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어머니 교과서를 다시 풀어내 보기. 지금 나는 과연 누구와 마주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는 일. 다름 아닌 거울 속에 '여성'은 아닐지. 단 한 번의 거대한 투쟁 없이 지나온 한국 여성의 역사는 또 어떨지.


 내게 부여된 젠더로 나의 삶을 구분하거나 규정하는 일은 순전히 개인의 몫이어야 한다. 타인들이 지칭할 문제가 아니기에 인간이면 충분할 자의식이 필요한 거였다. 여전히 이 세계는 고정되거나 신화가 되어버린 성 역할의 사회학습 효과를 톡톡히 요구하고 있다.


 씩씩한 남자 만들기만큼이나 현모양처 만들기에 힘을 쏟았던 한국사회의 역사성을 느껴보는 일. 주체로 살아가기에 걸림돌은 무엇일까 생각하다 멈추는 곳은 지금, 여기였다. 페미니즘은 건강한 사상이다. 논쟁으로 승부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앎을 서로 나누는 이성과 감성의 조율이다.


 젠더만큼 뜨겁고 달콤하고 격렬하기도 한 논쟁은 드물다. 뒤끝으로 공부의 동기를 주는 괜찮은 학문이기도 하다. 온라인에서는 논쟁이라기보다는 일방적인 말들로 뒤죽박죽이다. 표출된 말들은 치우친 경우가 더 많다. 읽어보면 공론장과 같은 역할의 커뮤니티에서 정제되지 않은 풍경은 가히 폭력을 넘어 가학적으로 보인다.


 페미니즘을 접하면서 수많은 문학과 책들 속에서 만나는 것은 분명 살아 움직이고 있는 존재로서 여성이다. 작은 부분들로 이루어진 페미니즘은 전체를 돋보이게 할 수 있는 기제로 서로를 감싸 안아준다. 어느 작은 한 가지로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이기도 하다.


 청소년기와 청년의 시간에 책을 가까이하기 어려웠던 한국사회의 능력주의라는 강박. 페미니즘 공부를 해오면서 자주 만나는 감정이다. 고전이라 불리는 세계문학 안에는 여성으로 태어났지만, 인간으로 살아가려는 수많은 목소리가 있다. 적어도 주체의 나를 보살피게 된다는 의미이다.


 사회에서 만들어가는 여성의 모습과 다른 나를 인정하는 일부터 시작해 사회에서 학습한 지식이 얼마나 남성 중심으로 치우쳤는지. 되돌아보면 문학과 함께 굳이 꺼낼 단어들이 페미니즘과 이어지고는 한다.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배우는 것은 이 세계가 얼마나 편향성을 주류로 생각해 왔는가이다. 인간으로서 존엄이 거의 모든 영역에서 강자에게 치우친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적어도 나의 세계에서만큼은 변화가 찾아온다.


 나와 그대가 하는 그럴싸한 변명, 초연하게 살아온 것 같지만 그렇지 못한 나의 이야기 또는 그대 이야기가 있다. 자기 정당성이란 함정을 파 놓고 삶을 궁핍하게 몰아가는 이 사회 구조에서 멀쩡하기는 어렵다. 하나에서 여럿으로 연대의 힘만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동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