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우리시대

‘우리시대’는 언론계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이 멘토가 되어, 작성한 칼럼에 대한 글쓰기 지도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태민, 이서하, 전예원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안동환(서울신문),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실패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창우)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2-05-18 14:21
조회
470

이창우/ 회원 칼럼니스트


 영화 <플레전트빌>(1998)의 주인공 데이비드는 영화에서 TV 시트콤 <플레전트빌>의 애청자다.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한 이 인기프로그램은 ‘즐거운 마을’이라는 이름처럼 행복하고 단순한 삶을 사는 사람들의 얘길 담은 드라마다. 데이비드를 비롯해 많은 시청자들로 하여금 이제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예를 들면 이른 저녁, 아버지가 일을 마치고 “여보, 나 왔어!” 라고 말하면, 앞치마를 두룬 어머니가 부엌에서 나와 반갑게 맞는 식이다. 정성이 가득한 음식들로 채워진 저녁 식탁에 가족들이 둘러 앉아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을 오순도순 이야기하는 풍경이 펼쳐지는 것이다.

 이 시트콤을 시청하는 데이비드의 현실은 드라마와 너무 딴 판이다. 부모님은 이혼한 이후에도 전화로 서로 싸우고, 하나뿐인 쌍둥이 여동생은 학교에서 인기가 많다. 집에 와도 차가운 냉동식품을 데워 홀로 끼니를 떼우는 일상이다. 데이비드가 ‘플레전트빌’ 시트콤에 빠지게 되는 이유는 어찌보면 현실에 없는 드라마 속 세계에 대리만족하기 때문이다. 금요일 저녁, 제니퍼와 데이비드는 리모컨을 서로 가지려다 박살이 난다. 갑자기 나타난 신비한 수리공 할아버지로부터 리모컨을 받아든 두 사람이 그것을 작동시키면서 TV속 흑백세상 <플레전트빌>로 빨려 들어가는 엄청난 경험을 하게 된다.

 시트콤 플레전트빌은 현실을 지배하는 모든 법칙들이 교묘하게 비껴가는 곳이다. ‘기쁨이 있는 동네’이기에 불도 날 수 없고, 비도 내리지 않고, 농구부 선수들이 넣은 슛은 무조건 들어간다. 소방관들은 출동하여 나무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고양이를 구조하는 것이 가장 큰 업무이다. 한마디로 실패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다. 웃음과 교훈을 주는 시트콤은 언제나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그곳의 사람들은 실제의 인간이 아닌, 허구로 꾸며진 반쪽짜리 존재들이니까. 이 이상적인 세상에서 잘 적응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방송에 대해 무엇이든 알고 있는 출연 배우들이야말로, 시트콤 플레젠트빌에 걸맞는 등장인물이다.

 플레전트빌에서 아이스크림집의 존슨은 데이비드가 오지 않으면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무의미하게 카운터 위나 닦으면서 데이비드가 올 때까지 멍하니 기다려야 한다. 그는 시트콤에 자주 등장하는 ‘카페 주인’의 역할, 조연이다. 언제나 카운터를 닦으면서 주인공에게 필요한 조언을 해주는, 선량한 캐릭터이다. 식당 문을 열고 카운터를 닦고 메인 주인공이 등장할 때마다 가끔 비치는 조연에게 현실에서 등장인물이 된 데이비드가 말한다.

 “존슨, 스스로 그 무엇도 할 수 있어요. 다음부턴 제가 오지 않아도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세요. 모든 것은 정해진 것이 아니니까요. 마음대로 바꾸어도 되는 거죠.”

 그 후, 작은 자유를 맛본 존슨은 더 큰 자유에 대한 욕망이 생겨나고 이렇게 플레전트빌은 변화를 맞게 된다.

 누군가의 한걸음으로 세상은 조금씩 나은 쪽으로 변화해왔고 그 가능성을 플레전트빌은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색깔’은 ‘인간다움’과 일맥상통한다. 아기처럼 아무것도 모르던 주민들이 자신의 욕망과 정체성을 깨닫게 되면서 색깔을 찾는다. 여전히 마을의 배경은 흑백이지만 생생한 색깔을 찾게 된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간다. 그러나 아직 자신의 색깔을 찾지 못한 마을 사람들의 대부분이 그들을 유색인종으로 취급하며 단호하게 뭉친다. 흑백의 플레전트빌에 색을 찾아 대비되는 영화는 민주주의 작동 원리인 다수결의 오류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다수가 선택했다고 그것이 옳은 것은 아니라고. 변화를 요구하는 시민들 사이에서 소수의 선택은 쉽게 배제당한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이 사회가 마치 영화 같은 일들이 재현된다는 사실. 어쩌면 우리도 영화나 드라마 속 세계로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플레전트빌은 그동안 지켜온 언제나 즐거운 마을을 지키기 위해 주로 시장을 중심으로 한 중년 이상의 남성들이 나선다. 제니퍼의 극 중 아버지도 포함된다. 마치 우리의 아버지들처럼 시대의 변화에 호들갑을 떨며 놀라고 어이없어하는 모습이 연출된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아내들이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변화를 거부한다. 아버지의 권위와 어머니의 무조건 희생이 미덕처럼 치장된 가부장제를 계속 유지하고 싶어 한다.


출처 - daumcdn


 저녁에 집에 들어 왔을 때 당연히 맛있는 식사가 차려져 있어야 하는데, 자기 색깔을 찾은 부인들이 그것을 거부한다. 도서관에는 책들이 글자를 채워 컬러로 빛을 내고 연인들의 호수에는 컬러의 세상이, 그들만의 자유로움이 자연스럽게 채색된다. 중년을 넘긴 그들은 플레전트빌의 기득권자이자 권력자, 그리고 지배자였다. 그들은 변화가 두렵다. 이미 지금도 충분히 힘과 관련된 편리함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젊은이들의 연애를 방종이라 하고 개인의 감정 표현을 막으려고 한다. 바깥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키우는 책들을 강제로 빼앗아 불태워 버리고, 자유롭게 음악을 듣지 못하게 금지곡을 만든다.

 플레전트빌 시장은 흑색으로 존재하는 사람들을 선동하며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이곳 주민들이 지켜야 할 법규들을 새로 만든다. 빠르게 변화하는 사람들을 억누르는 기득권층의 횡포와 권력남용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이 영화에서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이들의 야만과 자신의 색을 찾은 이들을 향해 ‘유색인종’이라 손가락질하며 비웃는 장면들도 역시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부끄러운 일들이 현재 이 사회에서 뻔뻔함의 극단으로 달리며 자행되고 있다. 그 모습을 20세기 후반 영화를 통해 되새김질 하다 보니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서글픔과 모욕감이 고개를 내민다.


 하지만 영화에서도 자신의 색깔을 찾은 마을 사람들이 모여든다. 아직 흑백인 마을 사람들에 의해 파괴된 존슨의 가게에 모여 투표로 결정된 새로운 강령을 읽고 저항을 시작한다. 아직 파괴되지 않은 뮤직 박스에서 그들이 원하는 이미 금지된 자유로운 음악을 틀고, 데이비드와 존슨은 밤을 새워 저들만의 색깔로 빛을 내는 벽화를 그린다. 나는 잘못된 일들을 파렴치하게 휘두르는 권력에 저항을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것보다는 내 한 걸음 내딛어 행동하고 나서 만날 내일이 덜 두렵다. 결정적인 해결책은 없지만 늘 새로운 시도는 가능하다. 세상은 조금 더 나은 쪽으로 향하고 있다고 믿는다.

 개인의 성향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는 것. 문제는 사회가 자기에게 부과한 역할에서 자기의 존재 의의를 찾지 못할 때 생긴다. 때로는 강요 때문에 격렬한 충돌이 생긴다. 드라마에서 위안을 받는 일이 더 자연스러운 세상 같지만, 그렇다 해도 미리부터 포기할 일은 아니다. 알고리즘이 나를 현실과 동떨어지게 만든다 해도 거부할 수 있는 내가 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시트콤에서 벌어지는 삶은 보이는 게 전부이다. 그 이외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배우들이 연기를 하는, 그럴듯한 세트 안의 인생은 조명이 꺼지면 더는 그곳에 없다. 드라마나 영화는 영상으로 고정해 놓은 이미지로 있을 뿐이다. 보여주기 위해 만든 삶이기에 그것으로 끝이다.

 우리는 현실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걸까. 지금도 무언가에 도피하기 위해 텔레비전이나 넷플릭스 드라마에 빠져 세상을 잊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은 아닐까. 이 영화 속의 시트콤에서는 사람들이 자각과 경이를 느끼면서 그동안 내릴 수 없었던 비가 내린다. 그 비를 보고 두려움에 떨며 색을 찾지 못한 그들의 표정은 한 개인이 옳지 않은 일에 저항하려 할 때 만나는 마음과도 비슷하다. 무엇이든 하지 않는다면 안 되는데 정작 실행하면 나만 다칠 것만 같은 두려움이 먼저 앞선다. 이 사회도 제 색깔을 찾으려는 개인들이 많아지면 저 나름 행복감을 만날 수 있다. 행복한 풍경보다는 내가 행복할 수 있어야 이 세계는 다양한 색으로 제 빛을 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