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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태민, 이서하, 전예원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안동환(서울신문),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문과라서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야 할까(이서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2-05-10 16:53
조회
587

이서하/ 회원 칼럼니스트


 ‘문과라도 안 죄송한 이세계로 감’이라는 웹 소설이 온라인 플랫폼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주인공 김정진은 사학과를 졸업하고 마땅한 일자리를 찾지 못해 영세한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다, 불의의 사고로 물에 빠져 소설 속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이 세계의 마법은 아름다운 문장으로 주문을 외워야만 그 힘이 더욱 강하게 발현된다. 주인공은 편집자로 일하던 경험을 살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거센 바람이 5월의 여린 꽃봉오리를 뒤흔드니1)”, 슈테판 게오르게의 “불꽃의 궤도를 선회해본 이 그 누구든, 불꽃의 위성으로 머무를지니2)” 등 거장들의 멋들어진 문장을 사용하며 제일의 마법사로 발돋움한다. 현실에서는 아무 쓸모도 없었던 역사적 지식 역시 세계의 흐름을 파악하고 난관을 타파해 나가는 일에 큰 도움을 준다.


 모든 작가는 어떻게 해야 한 명이라도 더 자신의 글을 읽어 줄지를 고민한다. 그리고 이 고민을 해소하기 위하여 독자와 공감대를 형성하고 욕망을 반영하기 위해 노력한다. ‘문과라도 안 죄송한 이세계로 감’이라는 소설이 나오게 된 배경 역시 명확하다. 우리 사회가 문과라서 죄송한 사회가 된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기술 발전의 세상이다. 아날로그는 뒤로 밀려났다. 키오스크를 통하여 대면 없이도 음식을 주문할 수 있게 되었다. QR코드를 통하여 백신 접종 여부를 인증하고 방문 기록을 남기기도 한다. 스마트폰 안에는 범인이라면 미처 다 사용하지 못할 첨단 기능이 가득하다. 이런 사회에서 당장 필요한 인재는 이공계 출신이다. 더 나은 기술, 더 나은 기계, 더 나은 전자제품을 발명할 수 있는 인재의 보유가 곧 국력이고 세계의 발전이라 인식된다. 고도로 산업화한 시대에 기술은 곧 생활이므로 이에 발맞춰 가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앞으로 달려 나가기에 바빠 무언가를 잊어버리고 있던 것은 아닐까. 발전한 세상, 부강한 세상이 곧 옳은 세상과 동의어는 아닐 것이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Caspar David Friedrich, Wanderer above the Sea of Fog (1818)


 인문학은 한자로 사람 인(人), 글월 문(文), 배울 학(學)이다. 즉 사람을 읽는 문자이며, 사람을 탐구하는 학문이며, 사람의 근간이 되는 초석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전혀 거창하지 않다. 사람뿐 아니라 사람 간의 관계와 인간 본질의 정수를 탐구하고 이해하여 어떻게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하는 모든 것이 바로 인문학이다. 그렇기에 어쩌면, 우리 모두 인문학적 소양을 조금씩은 가지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기술이 사회를 지탱하는 하나의 축이라면, 인문학은 꿋꿋이 기술의 반대편에서 또 하나의 축이 되어 우리 사회를 균형 있게 발전시키는 데 이바지해왔다. 단지 지나치게 기술 중심적이 된 현대 사회가 인문학으로 “먹고 사는” 일을 어렵게 만들었을 뿐이다.


 사람을 읽고 이해하는 일을 그만두는 것은 타인과의 소통 및 공감 능력의 부재를 불러오기 쉽다. 요즘 사회의 과도한 경쟁, 난무하는 혐오와 분쟁 역시 이것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언제나 살아가기에 바쁜 세상이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최소한 인간의 기본적 소양을 외면하는 일만큼은 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즉 사람답게 살아야 할 것이다. 이 ‘사람답게’라는 말에 인문학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하지만 사람다운 사람이라는 말을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경쟁 위주로 흘러가는 교육, 그리고 그것을 부추기는 사회 구조부터 차차 바뀌어야 할 것이다. 타인을 배려하고 이해하는 소통 능력을 키워야 할 것이며, 무엇보다 나 자신을 깊이 알아야 할 것이다. 아직 인문학이 가야 할 길은 너무나도 멀다. 하지만 갈 길이 멀었다는 말은 곧 끝이 멀었다는 말이 아닐까.


 ‘문과라도 안 죄송한 이세계로 감’속에도 여러 문제가 존재한다. 왕정을 철폐하고 공화정을 세우려 하는 혁명 세력, 권력을 지켜내려는 왕세자, 형을 밀어내고 성군이 되고자 하는 셋째 왕자의 대립 속에서 시대는 격동한다. 주인공은 역사의 풍랑 속에서 끊임없이 어떻게 해야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있을 것인지, 어떻게 살아가야 옳을지에 대하여 고뇌한다. 강한 능력을 갖췄음에도 삶에 대한 고민과 성찰은 피할 수 없던 것이다. 우리 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어느 시대라도, 어떤 기술 속에서도 인간다움에 대한 고민이 사라진 적은 없다. 인문학이 매번 존폐 위기에 시달리면서도 명맥을 이어 온 이유일 것이다.


 인문학을 살리기 위하여 갑자기 철학책을 펼 필요는 없다. 자신의 삶에 이미 존재하는 자그마한 인문학적 소양, 즉 인간성에 잠시의 시선을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인간성에 대한 관심과 고민 속에서 사람이 사람으로 존재하는 한 인문학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죄송한” 학문 역시도 아니다.


1) Sonnets 18
2) The Star of The Coven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