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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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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자신의 OOO과 싸우고 있다(정범구)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6-06-29 11:25
조회
315

정범구/ 인권연대 운영위원


 

한동안 화제가 됐던 TV 드라마가 있다. 줄여서 “모자무싸”라고 불리던, 원제목이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라는 드라마다. 드라마의 내용을 떠나 그 제목 자체가 주는 끌림도 상당했다. 사실 우리는 모두 매일매일 무엇인가와 싸우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누군가가 만일 나에게 “당신은 무엇과 매일 싸우며 사는가?”라고 물어본다면, 글쎄, 나는 “모자낯싸”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나는 매일매일 자신의 낯섦과 싸우고 있는지 모른다.

 

언젠가부터는 TV 뉴스를 봐도 잘 모르겠는 것투성이다. 코스피가 왜 갑자기 그렇게 오르는 것인지, ETF는 뭐고 ETN은 뭔지, 주식 한 주 없는 나로서는 관련 뉴스를 보면 문맹자가 된 심정이다. 젠슨 황이란 사람이 한국에 온 게 왜 그렇게 큰 뉴스인지 모르는 처지이니 그가 만들어 갈 거라는 AI 생태계란 것에 대해선 더 깜깜하다. 반도체 호황 속에 벌어진 삼성전자의 “전리품 나누기” 소동도 도통 이해되지 않는다. 대기업 노동운동, 아니 노조 운동에 대해서도 다시 들여다보게 되고, 무엇보다 그 성과급 배분 과정에서 같은 회사 안에서도 그리 차별을 하는 게 이해가 안 된다. 삼성전자 주식 하나 없지만 아침저녁으로 그 뉴스를 지켜봐야 하는 일반 시민들은 6억 원이라는 돈이 비문증처럼 눈앞에 떠다니는 현실에 일할 의욕이 나지 않는다.

아무리 봐도 황당한 것은 송파의 투표함 봉쇄 시위에 나선 군중들이 시위 대응에 나선 경찰 간부를 주저앉혀 놓고 중국인인지 아닌지 신문하는 광경이다. “부정선거론”을 종교처럼 신봉하는 이들이 있다는 이야기는 풍문으로 들었지만 그걸 이토록 뼛속까지 체화하고 사는 동시대인들이 있을 줄은 몰랐다. 이성이 사라진 시대, 모든 이들이 자신의 매체를 갖고 자기주장을 할 수 있는 시대가 왔으나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가짜인지를 가려내기는 점점 어려워진다. 유튜브가 퍼트리는 내용은 뉴스라기보다는 주장에 가까운 것들이 많지만 그것은 사람들의 확증 편향을 타고 주요한 공론장들을 점령해 버린다.

이런저런 이유로, 뉴스를 보면서 마치 무슨 드라마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을 느낄 때가 많다. 이 나라가 내가 살아온, 살았던 나라인가 싶은 낯섦을 아주 자주 느낀다.

 


AI 생성 이미지


 

각 시대에는 그 시대를 조건 짓는 환경이 있었고, 그에 따른 시대정신이란 게 있었다. 1914년생인 내 아버지는 태어날 때부터 식민지 백성으로 태어났다. 외세 지배하에 태어나 살았던 그의 정신세계는 어떤 것이었을까? 그의 유소년기, 청년기를 지배했던 가난과 외세는 그에게 어떤 세계관을 남겨 주었을까? 식민지 조선을 살아온 모두가 항일 전선에 나섰던 것은 아니지만, 아니 오히려 대다수 장삼이사는 그 체제에 순응하며 살았을지 모르겠지만, 1945년 8월 15일은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해방을 반겼을 것이다. 이민족 지배 아래에서 ‘해방’이란 알게 모르게 그 시대의 목표였을 것이다.

해방, 분단, 건국, 전쟁 등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장안의 갑남을녀들은 자신들의 남루한 일상을 이어가는 데에 온 정신을 쏟았을 것이다. 내 아버지도 그랬다. 식구들 간수하고 먹여 살리기 위해서, 세상 돌아가는 일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하루하루의 삶을 이어갔다. 그렇다고 해서 그 시대를 지배한 거대 담론들, 민족자주니 통일이니, 민주 국가 건설 등의 구호 아래 자유로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자기 코앞의 삶에만 주목하는 군중을 통해 역사를 해석하고자 한다면 제주 4.3 항쟁이라든가 대구 10월 봉기, 광주 항쟁, 6월 시민 항쟁 등, 시대가 요구하는 과제에 몸을 던져 나선 민중들의 역동적 삶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전태일의 아버지는 자기보다 어려운 처지의 어린 노동자들을 위해 애쓰는 아들의 삶을 처음에는 냉소적으로 바라보았다. 제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 다른 이들을 위해 나서는 아들의 삶이 가소롭기도 하고 애처로워도 보였을 것이다. 그러던 그 아버지가 결국은 아들을 이해하고 지원한다. 알고 보니 아버지인 그도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이 지도하는 대구 10월항쟁에 참가했던 노동자 출신이었던 게다.

민주화 세대라는 오늘날 50, 60, 70대가 과거 식민 지배와 전쟁을 겪었던 부모 세대와 겪었던 갈등은 이제 역사의 기억 저편으로 넘어가고 있다. 그것이 소위 민주화 세대와 산업화 세대의 갈등이었다고 한다면 지금 민주화 이후에 태어난 세대, 아니 민주화 이후 세상과의 갈등은 무엇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전혀 다른 조건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그래서 다른 시대적 환경과 싸우고 있는 새로운 세대를 이해하는 것도, 정치적 억압과 빈곤은 사라졌지만, 새로운 욕망과 현실이 지배하는 세상을 따라잡는 것도 아직 쉽지는 않다. 정치적 폭압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고 싸웠던 아버지 세대의 이야기는 이제 자식 세대에게는 ‘잔혹 동화’ 이상이 아니다. 아버지의 자수성가 스토리는 “아버지가 옛날에 못 살았던 것이 자신의 책임은 아니잖느냐?”라는 자식의 되침으로 돌아온다. 시대는 언제고 변화해 왔고, ‘어제 내린 눈’은 치워져야 한다.

그러나 민주화 세대의 눈에 비치는 오늘날 세태는 여전히 불안하고 아슬아슬하다. “공동체”, “자기희생”, “대의 앞의 절제” 같은 단어들은 어느새 곰팡내 나는 시대의 언어가 되어버리고, 세상은 오로지 “더 많은 소유”, “더 많은 경쟁에서의 승리”, “더 화려한 소비”를 외치며 달려가고 있는 듯 보인다. 그나마 나를 구원하는 것은 2024년 12월 3일 한밤중 여의도로 달려와 무장 계엄군 앞을 막아섰던 수많은 시민, 내란 세력 척결을 위해 12월 한겨울에 몇 번이고 한강 다리를 걸어 넘던 그 도도한 시민의 물결, 남태령을 뚫었던 시민들에 대한 추억이다. 주식시장 전광판을 오르내리는 수치가 담아내지 못하는 시대정신이 아직 거기에 남아 있기를 빌면서 말이다.

 

이 글이 혹시 시대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한 “꼰대”의 넋두리로만 읽히지는 않기 바란다. 변화의 방향을 예측도 못 할 뿐 아니라 변화에 저항하는 한탄으로는 더더욱 읽히고 싶지 않다. 이 시대 변화의 방향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이 시대를 관통하는 시대 정신은 무엇인지, 그리고 이런 논쟁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사회적 이성은 있는 것인지, 이런 것들을 묻고 싶은 것이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낯섦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고 싶을 뿐인 것이다.

 

정범구 위원은 현재 장발장은행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