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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사는 남자’ 읽기 (속편) - ‘4.3’을 기억하기-(오항녕)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6-04-07 15:11
조회
383
오항녕/ 인권연대 운영위원, 전주대 명예교수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조선시대의 가장 심각한 사건 중 하나를 소재로 삼고 있다. 이에 관하여 경향신문 칼럼(독사관견, 3월 31일자)에 정리한 적이 있는데, 기억이라는 역사학의 주제에 대해 자료를 보충하고 싶어 속편을 마련하였다.
1.
엄흥도 얘기부터 해보자. 영월 호장(戶長)이었다는데, 호장은 아전의 우두머리를 말한다. 엄흥도는 비명에 죽은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인물로 널리 알려졌지만, 정작 단종이 죽은 이후 2백 년이 지나도록 그가 누구인지 알려진 바가 없었다. 왕이 된 세조의 후환이 두려웠던지 엄흥도와 그의 후손들은 울산, 경주 등 타향을 떠돌았다고 한다. 본관도 영월에서 경주로 바꾸었다.
엄흥도의 6세손 엄의생(嚴義生) 형제가 본관을 영월로 회복한 것은 현종 10년(1669)이었다고 한다. 송시열(宋時烈)이 현종에게 ‘엄흥도의 후손에게 관직을 내려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으라’고 건의한 뒤의 일이었다.
1.
이건 전사(前史)가 있어서 가능했다. 1657년(효종9), 송준길(宋浚吉)은 “조선의 성삼문(成三問)과 박팽년(朴彭年) 등도 실로 방효유(方孝孺, 1357~1402)와 같은 인물입니다. 성삼문은 전에 연산(連山 충청남도 논산 근처)에 살았고 박팽년은 회덕(懷德)에 살았는데, 연산과 회덕에는 모두 선현(先賢)의 사당이 있으므로 학자들이 이 두 사람을 선현의 사당에서 같이 제사 지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라고 효종에게 건의하였다. 우리가 사육신으로 알고 있는 인물에 대한 표창을 건의한 것이다. 국가에서 못하면 지역 사회에서 추념하겠다는 의미였다.
성삼문, 박팽년과 비교했던 방효유는 명나라 초 영락제의 손에 책형(磔刑 거열형같이 몸을 찢어 죽이는 형벌)을 당해 세상을 뜬 인물이었다. 영락제가 조카 건문제를 시해하고 방효유에게 즉위 교서를 작성하라고 했으나, 방효유는 거절하고 오히려 ‘연나라 역적이 찬탈했다[燕賊簒位]’고 영락제를 비판하였다. 영락제가 찬탈 전에 연왕(燕王)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이때도 영락제는 ‘정난(靖難 혼란을 안정시킴)’을 표방했다. 수양대군(세조) 역시 찬탈의 서곡이었던 1453년 김종서 등의 암살을 ‘정난’이라고 불렀다. 찬탈이 끼친 해악은 사회의 질서나 합의의 파괴, 인명의 손실에 그치지 않는다. 가치와 기강을 흔들고, 좌절이 내면화되어 그 사회의 원기(元氣)를 갉아먹는 데 더 큰 위해가 있다.
1.
방효유는 명나라가 망해갈 즈음인 1622년 복권되었고, 그의 후손들도 방씨 성을 쓸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이 소식이 조선에도 전해졌을 것이다. 송준길이 사육신에 대한 제사의 근거로 방효유를 사례로 든 것은 이런 상황을 알고 한 듯하다.
송준길의 건의 전에도 기억은 이어져 왔다. 1576년(선조9), 20대 중반의 젊은 임금 선조에게 판서 박계현은 남효온이 쓴 〈육신전(六臣傳)〉을 읽어보라고 권하였다. 〈육신전〉을 읽어본 선조는 4대조(왕위로는 6대조) 할아버지 세조를 모욕했다고 모두 불태우라고 명하였다. 하지만 영의정 홍섬 등이 극구 사육신의 충정을 설득하여 화를 풀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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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에 이어 즉위한 숙종 11년(1685), 강원도 관찰사 홍만종과 영월 부사 조이한의 주도로 ‘노산군 묘’(이때는 아직 ‘장릉’이 아니었다.) 곁에 육신(六臣)을 모실 창절사를 세우고 엄흥도를 배향하였다. 그리고 송시열(1607~1689)이 〈영월군육신사기(寧越郡六臣祠記)〉를 짓고, 박태보(朴泰輔, 1654~1689)는 〈육신사당기(六臣祠堂記)〉를 지었다. 이어 10여 년이 지난 1698년 노산군이 단종으로 복위되었다.
그 사이에 송시열과 박태보는 세상을 떴다. 1689년(두 사람의 졸년을 보라!), 장희빈을 왕비로 만들려는 숙종의 빗나간 정치와 로맨스는 송시열에게 사약을 내렸고, 박태보는 고문 끝에 귀양을 가던 도중 세상을 떴다. 이렇게 가끔 역사는 꼬이고 휘어져 간다. 그러다가 길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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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을 쓰고 있는 4월 3일, ‘제주 4.3사건’을 추념하는 날이다. 아직 사회에서 합의된 명칭이 없이 ‘4.3사건’으로 불리는 80년 전 국가폭력의 역사에 대해, 노무현 정부를 시작으로 정부 차원의 사과와 추념식을 열어 영혼을 위로하고 있다. 딱 그만큼만 다행이다.
“제주 4·3 사건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 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북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 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 충돌과 토벌대의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주민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하였다.(『제주 4·3 사건 진상 조사 보고서』, 2003)
하지만 나무위키(https://namu.wiki)에서는 ‘남조선로동당이 일으킨 무장봉기를 토벌하기 위해’ 벌어진 사건으로 기술하고 있다. 올해 추념식이 열리던 제주 4.3 평화공원에는 극우 단체와 유튜버 등 20~30명이 ‘4·3은 공산폭동으로 발생했다’라고 주장했다고 뉴스는 전했다. 우리 사회에서 ‘제주 4.3사건의 복위’는 아직 미완이라는 말로 읽힌다.

사진: 제주 4.3평화공원의 모녀상 ‘날리는 눈[飛雪]’. 1949년 ‘토벌’에 쫓겨 피신하다 숨진
모녀의 시신이다. 저 모녀상이 환한 얼굴로 벌떡 일어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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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4일, 지역리더대학원 졸업 워크숍이 있어서 제주에 다녀왔다. 한강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에 나오는, 이른바 중산간이라는 곳에 숙소를 정했다. 소설에서 주인공 경하가 친구 인선의 앵무새를 구하러 가다가 버스에서 내려 눈 속에 뒹굴던 곳이 중산간이었다.
이튿날 한라산을 올랐다. 관음사 길이 힘들다고 해서 성판악으로 길을 잡았다. 하여 관음사는 가보질 못했다. “관음사 주지 오이화 스님은 무장대 내통 혐의로 가혹한 고문을 받은 후 그 후유증으로 입적했으며, 이세진 스님은 자수한 이후 산지포구에서 수장당했다”, “당시 제주도 내 사찰은 대체로 중산간지대에 널리 분포했기 때문에 무장대의 은신처나 토벌대의 주둔지로 이용되면서 공방전의 중심지가 되었다”, “제주도 내 80개 사찰 중 56곳이 방화로 전소되거나 훼손되었다”라는 사실은 워크숍에서 돌아와 읽은 〈제주 관음사를 생각하며〉(인권연대 3월 3일자 이재승 운영위원 칼럼)를 보고 알았다.
역사학자조차 이러면 안 된다. 엄흥도․남효온․송준길․송시열․박태보처럼 계속 얘기하고, 기억하고, 움직여야 한다. ‘제주 4.3사건’이 바른 이름을 찾고, 오염되지 않을 때까지 그렇게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