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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은 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권혁용(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김태중(병원장),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오항녕(전주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교수), 이재승(건국대학교 법전문대학원 교수), 임아연(주간함양 편집국 부국장),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장발장은행장) 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 글을 씁니다.
세상은 잔칫집 같아도(정범구)
정범구/인권연대 운영위원
- 장발장 은행장을 맡고 난 후 주요 일과 중 하나는 한 달에 한 번씩 있는 대출심사회의에 참석하는 일이다. 8월 심사위원회는 지난 26일 열렸다. 세 시간여 논의 끝에 열세 명에게 모두 3000만원 정도 돈을 대출하기로 결정하였다. 신청자는 60명이 넘었는데 이런저런 기준과 정황에 따라 심사하다 보니 최종적으로 대출이 결정된 것은 모두 열세 명이었다. 한정된 재원을 갖고 은행을 운영하려니 대출 심사가 필요하지만, 어쨌든 기대감을 갖고 대출을 신청한 모든 사람들에게 다 기회가 돌아가는 것은 아니라서 심사를 끝내고 나면 약간 우울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대출심사에서 기본적으로 배제하는 것은 음주운전이나 성폭력, 사기 등이지만 때로는 판단하기 애매할 때가 있기도 하다. 또 신청인의 사안이 얼마나 절박한가 하는 것이 당연히 고려된다. 어쨌든 이런 절차를 거쳐 신청자의 20% 정도가 대출을 받게 되었다.
- 그런데 몇 시간 대출심사서류를 들여다보고 나니 온몸의 진이 다 빠지는 느낌이다. 우리사회 가장 낮은 곳에서 이런저런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주는 무게가 어깨를 짓눌러 오기 때문이다. 대출신청도 당장 5:1의 벽을 넘어야 하지만 설사 대출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래서 벌금은 어찌어찌 해결한다 하더라도, 그들 삶의 근본 문제는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무겁다.
신청자 중에는 여전히 “전기통신사업법 위반”이나 “전자금융거래법” 위반이 많다. 당장 현금이 아쉬운 상황에서 금융권 대출도 어려운 이들을 대상으로 범죄조직이 다가온다. 이들의 어려운 형편을 이용해 대포폰이나 대포통장을 만들기 위해서다. 대출해 주겠다는 속임에 빠져 통장 사본과 통장 비밀번호를 넘기면 막상 사기조직이 약속한 대출은 받지 못하고 자신들의 통장이 이른바 대포통장이 되어 범죄에 이용되게 되는 것이다. 또 유심칩을 가져오면 개당 5만~10만원을 준다고 하니 당장 현금 한 푼이 아쉬운 입장에서는 쉽게 뿌리치지 못한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대포폰으로 피해자가 발생하니 이들은 본의 아닌 범죄자가 되게 된다. 엄밀히 보면 이들도 피해자인데 현행법은 이들을 범죄자로 단죄한다.
어린 아이가 셋이나 되는데 양육비, 생활비 한 푼 안주고 술만 마시고 돌아다니는 남편에게 부엌칼을 들고 덤벼들었다가 폭행죄로 벌금형을 받는 젊은 여인, 병석에 있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있으면서 생계 때문에 예비군 훈련에 빠졌다고 벌금형을 받아야 했던 20대 청년, 이들이 당면하고 있는 근본적 문제들 - 구조적 가난, 위태로운 가족 관계 둥 –은 몇 푼 대출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대출 심사라는게 신청자들이 제출한 대여섯 장 서류들의 행간을 읽어내는 작업이지만, 그 몇 장 서류들 속에 들어있는 우리 이웃들의 삶이 신산스럽고 안타까워 대출 심사 작업이 끝나고도 마음은 물 먹은 솜처럼 무겁게 가라앉는다. 극히 작은 도움이지만 장발장 은행이 내민 손길이 이들에게 격려나 위로가 될 수 있을까? 어디선가 자신들을 지켜보는 손길과 눈길이 있다는 것을 느끼고 힘을 낼 수 있을까?
- 살면서 이런저런 어려움들을 겪고 살겠지만 역시 경제적인 궁핍이 가장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 같다. 경제적 궁핍이 인간관계도 파괴하고, 가족관계도 어렵게 한다. 그러나 그 고비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이후의 삶이 결정된다.
누구에게나 세상을 살면서 가장 어려웠던 시절이 있을 것이다. 사람마다 경험도 다르고 처지도 다르겠지만 어쨌든 정말 밑바닥이구나 하는 걸 경험하는 때가 있다. 그러나 그 어려움이란 것은 결국 밑바닥까지 내려가지 않고는 반전의 기회를 잡기가 쉽지 않다. 바닥에 발이 닿아야 결국 다시 바닥을 차고 솟아오를 힘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장발장 은행 대출심사를 진행하다 보니 나도 지나온 세월을 더듬어보게 된다. 정말 바닥이라고 생각했지만 더 떨어지는 바닥도 있었고, 이제 더 이상 갈 데가 없다고 느꼈을 때 조차 밀리다 보면 더 밀리는 곳이 있었다. 그러나 정말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다고 느꼈던 때, 이제 더 이상 밀릴 곳이 없는 막다른 골목이라고 느꼈던 그 때, 바닥을 차고 오르는 힘을 얻고, 막다른 골목 끝에 살짝 열린 쪽문을 발견했던 기억이 있다. 우리를 막다른 골목으로 밀어넣는 운명의 힘도 막강하지만 결코 ‘내일’을 포기할 수는 없다는 절박함이 또한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 추석 명절을 앞두고 이 글을 쓰고 있다. 명절 분위기로 온 세상이 흥청거리는 것 같지만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 사회 어느 구석에서는 좌절과 절망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이 지금은 추락하고 있지만 어느 순간 반드시 바닥을 치고 다시 솟아오르기를 바란다. 그들과 함께 따뜻한 국수를 먹고 싶다.

국수가 먹고 싶다/ 이상국
사는 일은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주는
국수가 먹고 싶다.
삶의 모서리에 마음을 다치고
길거리에 나서면
고향 장거리 길로 소 팔고 돌아오듯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가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마을의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눈물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과
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다
정범구 위원은 장발장은행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