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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 벵가를 기억하기 (염운옥)
염운옥 / 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브롱크스 동물원의 사과
미국 야생동물보호협회는 2020년 7월 30일 과거 뉴욕 브롱크스 동물원이 콩고 음부티 부족 남성 오타 벵가(Ota Benga, ca. 1883-1916)를 감금하고 전시했던 잘못에 대해 사과했다. 당시 협회는 브롱크스 동물원을 운영하는 주체였다. 오타 벵가의 전시는 1906년에 일어난 일이니 114년 만의 사과였다. 크리스티안 샘퍼(Cristián Samper) 회장은 사과 성명문에서 더 일찍 사과하지 못해 후대에 상처를 줬다며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고 했다.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구조적 인종차별에 대해 맞서기 위해 협회가 책임 있는 역할을 다할 것이라는 약속도 했다. 그리고 협회 창립회원으로 동물원 운영과 전시에 깊이 관여했던 매디슨 그랜트(Madison Grant)와 헨리 페어필드 오스본(Henry Fairfield Osborn)의 우생학과 인종주의는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덧붙였다. 그랜트는 미국 자연보호운동의 창시자로 유명하지만 『위대한 인종의 소멸(The Passing of the Great Race)』에서 노르딕 인종의 우수성을 찬양하고 열등한 인종에 대한 우생학적 조치를 주장한 노골적인 백인우월주의자였다. 그랜트와 오스본은 1926년에 미국 우생협회(American Eugenics Society)의 설립을 주도했다.
왜 114년이나 지나서 사과했을까? 오타 벵가에게 닥친 잔혹한 운명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많이 알려져 있기에 그리 새로울 건 없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사과라니 늦어도 너무 늦은 사과가 아닌가? 과거 브롱크스 동물원의 운영 주체 야생동물보호협회의 ‘수상한’ 사과에는 맥락이 있다. 2020년 5월 25일 흑인 시민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가 경찰의 근거 없는 과잉 진압으로 사망했고, 곧이어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이하 BLM)’ 운동이 타올랐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미국 정부의 방역 무능력으로 인해 흑인과 히스패닉의 희생자가 속출하자 BLM 운동은 전국으로 번졌고, 남부 인종차별주의자의 동상부터 콜럼버스의 동상에 이르기까지 관련된 동상에 대한 공격과 훼손이 이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공공기관들은 혹시나 불똥이 튈까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선제적으로 인종주의나 우생학과 관련된 인물의 이름을 건물명이나 기관명에서 내리고 자발적 내부 비판에 나섰다. 동물보호협회의 오타 벵가 전시에 대한 사과는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렇다고 BLM 운동에 대한 브롱크스 동물원과 관련 협회의 수세적 대응만으로 사과의 배경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구조적 인종차별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1960년대 민권운동 이래 반(反)인종주의는 시민사회에서 꾸준히 힘을 얻어왔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오타 벵가의 고향 콩고에서 벨기에의 레오폴드 2세가 천만 명에 달하는 아프리카인들을 학살하고 노예화하고 있을 때, 오타 벵가가 콩고에서 미국으로 끌려와 착취당하고 있었을 때부터 인간 전시의 부당함을 고발하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여온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세인트루이스 박람회
오타 벵가가 미국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04년 세인트루이스 박람회장에서였다. 오타 벵가는 콩고 카사이강 인근에서 콩고 자유국 병사들의 공격을 받아 마을은 파괴되고 아내와 아이들을 잃었고, 선교사이자 탐험가, 사업가이자 사무엘 필립스 버너(Samuel Philips Verner)에 이끌려 미국으로 오게 되었다. 오타 벵가는 버너가 인간 전시를 위해 데려온 피그미 중의 한 명이었다. 미국의 눈부신 경제적 성장을 과시하는 장이었던 1876년 필라델피아 박람회와 1893년 시카고 박람회에 이어 세인트루이스 박람회에서는 미국 최초의 인간전시가 열렸다. 인간전시의 기원은 고대 이집트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종족학, 인류학과 결합된 볼거리로서의 근대적 인간전시는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원주민 촌 형태의 전시가 도입되면서 본격적으로 등장해 유럽 주요 도시에서 이미 유행하고 있었다.
인류학자 윌리엄 존 맥기(William John MacGee)는 세인트루이스 박람회 인류학 분과의 책임자로서 대규모 종족 전시를 기획하고 여러 부족을 모으는 역할을 담당했다. 줄루, 발루바, 피그미, 아파치, 에스키모, 아이누, 필리핀 원주민 등이 인간전시에 동원됐고 180만 명이 관람할 정도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피그미를 데려오는 일은 버너가 맡았다. 선교와 탐험을 위해 콩고를 다녀온 경험이 있는 버너는 맥기의 특별대리인으로 임명되어 거액의 돈을 받고 피그미 부족을 모아오고 박람회가 끝나면 돌려보내는 책임을 맡았다. 버너는 피그미인 수십 명뿐만 아니라 전시 무대를 그럴듯하게 보이기 위해 원숭이, 앵무새, 종교의례 물품도 가져왔다. 오타 벵가의 일행은 오두막에서 생활하는 모습을 관람객에서 보여주고, 기념사진에 모델을 서고, 음악대를 조직해 춤과 노래를 선보여 인기를 끌었다.

세인트루이스 박람회의 오타 벵가. 오른쪽 끝에 등을 보이고 있는 인물. “Pygmies from Central Africa dancing on platform in front of the Palace of Manufactures at the 1904 World's Fair on 28 July 1904” by Jessie Tarbox Beals, Missouri Historical Society. 출처: Maurice Tetne, “The 1904 World’s Fair in St. Louis: Between Ethnographic Display and Visual Exclusion of the Other,” TROPOS JOURNAL 42 (2024), p.185.[/caption]
세인트루이스 박람회에서 또 하나 주목할 만한 일은 오타 벵가와 제로니모의 만남이었다. 전설적인 아파치 전사 제로니모도 박람회 인간전시에 동원되어 관람객에게 화살촉을 팔고 있었다. 백인 4명 머리 가죽으로 담요를 짰다고 알려진 제로니모가 깃털 모자를 쓴 채 얌전하게 성조기에 경의를 표하고, 올가미 던져 수소를 잡는 모습을 연기하고, 10년 동안 만나지 못한 딸과 재회하고, 페리스 관람차를 타는 모습은 인디언에 대한 완전한 정복이라는 환상을 불러일으켰다. 피그미 마을에 이웃하고 있었던 제로니모는 피그미의 춤과 노래가 끝나자 오타 벵가에게 화살촉을 건네주고 그의 주위를 원을 그리고 돌며 오랫동안 엄숙한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오타는 제로니모의 미소와 노래를 오래 기억했다.
1904년 12월 2일 박람회가 끝나고 콩고로 돌아간 피그미인들 일행 중에 오타 벵가도 있었으나 2년 후 그는 다시 버너와 함께 미국으로 가는 증기선에 올랐다. 버너가 처음 오타 벵가를 만났을 때 버너의 말처럼 노예로 팔릴 처지에서 구해준 것인지 아니면 버너가 노예로 산 것인지 알 수 없듯이, 이번에도 미국으로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다는 버너의 주장을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벨기에 군대의 공격에 가족을 잃었고 재혼한 바트와족 아내마저 뱀에 물려 죽은 상황에서 콩고에도 마음 둘 곳이 없었으리라고 추측해볼 수 있을 뿐이다. 어쨌든 오타는 활과 화살, 침팬지 한 마리 데리고, 버너는 광물, 식물, 방울뱀 녹카를 포함한 동물, 민속공예품으로 가득 찬 수십 개의 나무상자를 싣고 6월에 콩고를 출발해 8월 초 뉴욕에 도착했다.
인간의 동물원 전시
버너는 오타 벵가와 침팬지, 동식물 수집품을 맡길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 자연사박물관과 브롱크스 동물원을 방문해 협상을 벌였다. 브롱크스 동물원장 윌리엄 템플 호나데이(Willam Temple Hornaday)가 관심을 보였다. 1899년 11월 개원한 브롱크스 동물원은 워싱턴 동물원과 뉴욕 센트럴파크 동물원보다 몇 배나 더 넓은 규모를 자랑하며 최대한 자연 서식지에 따라 동물 사육한다는 원칙을 세워 세계적 수준의 동물원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초대 원장 호나데이는 동물학대에 반대하고 야생동물 보호와 야생동물 권리를 위한 권리장전을 발표한 인물로 쇼맨십과 연출 능력이 탁월한 인물이었다. 그는 대중의 관심을 집중시킬 좋은 기회로 오타 벵가에게 관심을 보였다. 오타 벵가의 침팬지는 동물원이 구입했고, 오타 벵가는 동물원에 두기로 버너와 협상을 체결했다. 이렇게 해서 오타 벵가의 동물원 전시가 실현되었다.
1906년 10월 9월, 오타 벵가는 동물원에 전시되었다. 안내판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한 달 동안 원숭이 우리에 사람을 전시함. 이름: 오타 벵가(아프리카 피그미). 나이: 28세. 키: 150cm. 몸무게: 45kg. 버너 목사가 콩고에서 데리고 옴. 피그미란 성인 남자의 키가 150cm 이하인 인류 집단을 가리키는 용어임. 피그미들은 사냥과 채집으로 살아감. - 뉴욕 브롱크스 동물원 원장.” 원숭이 우리 주변에 동물의 뼈를 흩어놓아 수렵 채집 생활과 식인관습까지도 연상시키는 연출도 했다. 침팬지를 안고 원숭이 우리에 들어가 있는 사람을 보러 관람객이 모여들었다. 피그미는 사람과 원숭이의 중간 존재인가 같은 속류 진화론에서 주장하는 소위 ‘잃어버린 고리’의 증거일지도 모른다는 호기심이 대중을 자극했다. 같은 우리에 살고 있는 오랑우탄 도홍과 교감하는 오타 벵가의 ‘능력’은 문명사회의 인간이 되지 못한 ‘증거’, 원숭이에 더 가깝다는 ‘증표’로 해석되었다.
Ota Benga at the Bronx Zoo, with Polly the chimpanzee Verner brought from the Congo, in 1906. 출처: Wikipedia.[/caption]
한 달로 예정된 전시는 단 며칠 만에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원주민 마을 형태의 인간전시는 종족적 특징과 생활양식을 보여주는 인류학 전시라고 변호할 수 있지만, 20세기 초 최고의 문명을 자랑하는 뉴욕에서 동물원에 인간을 전시하는 일은 불편하고 눈살 찌푸리게 하는 일이었다. 호나데이 원장은 피그미와 오랑우탄의 유사성을 연구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동물학과 인류학적 관점에서 유용한 전시라고 변명했지만, 가장 먼저 비판의 목소리를 낸 사람은 맨하튼 칼바리 침례교의 로버트 스튜어트 맥아더(Robert Stuart MacArthur) 목사였다. 그는 교회는 아프리카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인데 오히려 동물원에서는 아프리카인을 야만인으로 만들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어 브루클린 위크스빌에 있는 하워드 유색인 고아원의 책임자 제임스 고든(James Gordon) 목사와 유색인 침례교 목사들이 동물원을 항의 방문을 했고 뉴욕 시장에게도 호소했다. 원래 계획은 다음 해 봄까지고 전시를 계속할 작정이었지만 결국 20일 후 전시는 폐지되었고 안내판도 철거되었다.
감금과 전시로 인한 트라우마로 난폭한 행동을 하는 오타 벵가는 이제 골칫거리가 되었다. 호나데이는 다루기 힘들고 위험해진 오타 벵가를 포기하고 고든 목사의 유색인 고아원으로 보내기로 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버너의 허락이 필요했다. 버너가 호나데이에게 보낸 편지에서 버너는 “만일 그가 너무 신경질적이 된다면, 약간의 진정제를 투여하는 것이 좋을 수 있는데, 나는 아프리카 원주민들 사이에서 때때로 일어나는 황홀한 광란에서 자주 보았다”라고 했다.1) 실제로 진정제를 투여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편지 구절은 버너가 오타 벵가의 강제 감금과 착취에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오타 벵가의 ‘친구’, ‘선생’, ‘보호자’로 자처하는 것이 얼마나 기만적인가를 보여준다. 친구라면 소란을 피운 친구에게 진정제를 놓으라고 말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버너는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의 학살에 눈감고 콩고에서 부와 명성을 추구했던 인물이었고 오타 벵가는 그가 야망을 추구하는 도구였다.
오타 벵가의 친구들
브롱크스 동물원에 전시된 오타를 석방하라는 운동을 벌인 사람들이야말로 오타의 진정한 친구들이다. 오타 벵가의 자유를 위해 싸운 사람들은 브루클린 유색인 고아원의 고든 목사를 비롯해 버지니아주 린치버그 신학교장 그레고리 헤이즈(Gregory Hayes), 교사이자 시인 앤 스펜서(Anne Spencer)였다. 고아원에 잠시 머물렀던 오타 벵가는 린치버그에 정착했다. 헤이즈 교장은 오타 벵가의 후견인이 되어 보살폈고, 스펜서는 자신과 남편이 가꾸는 정원 에단크랄(Edankraal)로 오타 벵가를 초대해 교류하며 위로와 안정을 선물했다.
스펜서는 할렘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여성 시인으로 버지니아에 평생 살면서 흑인 지식인들을 초청하고 흑인 공동체의 구심점 역할을 하며 흑인의 권리를 위해 평생 싸웠다. 스펜서의 부모는 모두 노예 출신으로 노예해방 이후 어린 시절을 보낸 세대였다. 아버지가 세미놀 인디언 혈통이었기 때문에 스펜서는 머리띠를 하고 사슴 가죽 재킷을 걸치는 인디언 복장을 즐겨 입었다. 오타 벵가는 그녀와 우정을 나누며 세인트루이스 박람회에서 만난 아파치 전사 제로니모를 떠올렸다. 1916년 3월, 오타는 권총 자살로 생을 끝냈다. 열 살 난 아들 천시(Chauncey)가 오타가 왜 죽었는지 묻자 스펜서는 “오타 벵가는 자신의 영혼을 아프리카로 보낸 것이란다”라고 말했다.2) 오타 벵가의 시신은 린치버그 구시가지 공동묘지에 묻혔다가 화이트 록 공동묘지로 이장했는데 위치는 정확히 모른다고 한다.
2017년 9월 16일 오타 벵가 메모리얼이 헤이즈 교장의 집 앞에 세워졌다. 길 건너편은 과거 린치버그 신학교가 있던 곳으로 현재 린치버그 대학이다. 메모리얼 제막식에는 콩고 대사를 비롯해 오타 벵가의 새로운 전기 『스펙터클: 오타 벵가의 놀라운 삶(Spectacle: The Astonishing Life of Ota Benga)』을 쓴 뉴욕대 저널리즘학 교수 파멜라 뉴커크(Pamela Newkirk)도 참석했다. 아카이브 자료를 꼼꼼히 읽어 오타 벵가의 삶을 다시 쓰는 과정에서 뉴커크는 벵가와 그의 종족을 무자비하게 착취했던 버너는 친구이자 구원자로, 벵가를 우리에 전시했던 호나데이는 고용주로 탈바꿈하는 과정을 밝혀내고, 진정으로 오타를 위해 싸운 사람들은 기억되지 않았다고 썼다.3)
https://www.cipdh.gob.ar/memorias-situadas/en/lugar-de-memoria/marcador-historico-en-honor-a-ota-benga/[/caption]
New memorial sets the record straight otory of Ota Benga 출처: https://www.equaltimes.org/new-memorial-sets-the-record?lang=en[/caption]
시인 박제영은 「안녕, 오타 벵가」라는 시에서 인간 전시에 경악하는 우리를 향해 눈을 돌려 곁을 보라고, 이웃의 오타 벵가에게 다정한 인사를 건네야 하지 않겠냐고 일깨운다.
중략)
믿을 수 없다고? 거짓말 같다고?
그렇다면 봐,
저기 오타 벵가가 지나가잖아.
오타 벵가가 웃고 있잖아.
안녕, 오타 벵가!4)
블랙’이 단지 색깔이 아니라 억압받는 모든 사람, 저항하는 모든 사람의 이름일 수 있듯이, ‘오타 벵가’는 인간 전시에 희생된 수백, 수천 명의 이름이며, ‘오타 벵가의 친구들’은 그들에게 ‘안녕’하고 손을 내밀어준 선한 사람들의 이름이다. 오타 벵가를 기억하는 것은 동시에 그의 친구들을 기억하는 것이다.
1) Pamela Newkirk, “Ota Benga in the Archives: Unmaking Myths, Mapping Resistance in the Margins of History,” Journal Of Contemporary African Art 38-39 (2016), p.170.
2) 필립스 버너 브래드포드, 하비 블럼, 손풍삼 옮김, 『오타 벵가: 동물원에 전시된 사람 이야기』 (고려원, 1994) [Phillips Verner Bradford and Harvey Blume, Ota: The Pygmy in the Zoo, New York: St. Martin’s, 1992].
3) Pamela Newkirk, Spectacle: The astonishing Life of Ota Benga, New York: Amistad, 2015, p.90.
4)박제영, 「안녕, 오타 벵가」, 『안녕, 오타 벵가』 (달아실, 2021).
https://blog.naver.com/sotong/2225252275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