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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꽃 같은 웃음을 준 북녘의 아이에게 - 금강산 밑 온정리 마을…너희들의 웃음이 모든 이들에게 평화로 스며들었으면 (이지상)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5-31 14:39
조회
647
거기에도 비가 내렸니? 얼음장 밑 송사리의 머리를 톡톡 두드려 연분홍 꽃물 같은 화사한 얼굴로 새 봄소식 전해 주는 단비 말야. 겨우내 얼어붙은 대지의 철모르는 잔설들도 녹여 파릇파릇 봄동 돋게 할 내내 희망 같은 봄비 말이지.

따뜻한 우물이 있는 동네라고 했지? 온정리(溫井里), 조선 최고의 물 좋은 온천이 있고 그 봉우리 다 헤아릴 수도 없이, 아름다운 금강산이 있고 또 삼일포며 장전항…. 얼마나 그 풍광이 차고 넘치면 이름도 해금강이라 했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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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곳을 둘러쌓은 마을 경계 철조망을 넘어 온정리, 네가 사는 마을에 들어가면서 "그렇게 아름다운 곳을 고향으로 두고 있으니 너는 참 좋겠다"는 말을 입가에 맴돌리다가 혼잣말로도 내어놓지 못하고 이내 삼켜버렸던 것은 아마도 내가 다른 나라를 방문할 때보다 더 까다로운 절차를 거쳤고, 실체도 보이지 않는 분단의 흔적을 지나 통일의 밭을 일구는 농부의 마음으로 왔음에도 여전히 낯선 모습들 때문이었을 거야.

남 측 통일전망대를 거쳐 장전항, 그리고 온정리로 들어가는 그 길을 나는 방문 일정이 잡히고 난 그 뒤로 참 많이 상상했었단다. 동해선 연결도로는 잘 뚫렸을까, 그 길도 쪽빛바다를 오른쪽으로 두고 달리는 시원한 길일 테지. 북 측 군인아저씨들의 복장이나 표정들은 어떨까. 사정이 너무 어렵다고들 하는데 혹 왈칵 눈물이라도 흘리면 어쩌나 등등….

나는 이번 북 측 방문이 처음이지만 예전에 일본의 민족학교에는 가본 적이 있었단다. 도쿠야마(德山)라는 곳의 조선학교였는데 교문에서부터 강당 운동장에까지 나부끼는 현수막의 내용만으로도 내가 북 측의 어느 학교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지만 수업 중간이었음에도 전교생이 다 나와서 간단하나마 환영행사로 맞아주는걸 보고 생소하지만 무척 감사했던 적이 있지.

그때 그 젊은 교장선생님과 80, 90년대 남 측의 청년학생운동에 대해 당돌한(?)어조로 묻던 여선생님의 따뜻한 인상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단다. 그때는 변변히 분단된 나라의 남 측에서 온 손님으로써 멋진 인사말 한번 하지 못해 아쉬웠는데 혹 이번에 너희들 앞에서 내가 인사를 해야 하진 않을까 하는 헛생각에 피식 웃기도 했지.

온정중학교 앞에서 썰매놀이를 하던 네가 내게 손을 흔들어주어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잠깐 본 너의 모습이지만 그 또래만이 할 수 있는 활기찬 표정과 웃음이 너무 고마웠다. 이미 녹슬어 보이지도 않는 낡은 군사 분계선 푯말을 지나 겹겹이 쌓인 철조망과 병사들의 위험스러워 보이는 총구를 피해 들어간 호기심 많은 남측 이방인에게는 무척 호사스런 선물이었지.

장갑도 끼지 않은 맨손을 호호 불어가며 썰매질에 열심인 너를 보며 가슴이 아릿했단다. 깨진 유리창을 헌 비닐이나 널빤지로 대신한 너의 학교나 나무 한그루 찾아볼 수 없는 민둥산. 그럼에도 어디서 구했는지 마른 나뭇가지를 한 지게 짊어지고 가는 늙은 농부의 힘겨운 발걸음도 역시 그랬고….

쌀과 곡식이 있으나 그것을 조리할 불이 없어서 애를 먹고 있다는 말을 전해들을 때만 해도 사실 설마했었다. 추운 날씨에도 장갑과 마땅한 의복도 없이 온기 없는 방에서 한겨울을 나야한다는 얘기도 잘 믿기지 않았다.

그래서 나의 일행이 싣고 간 연탄 5만 장의 소중함보다는 내머리 속엔 잡히지도 않는 민족·통일·화해 따위의 단어만 떠올렸나보다. 진작에 제대로 씻을 수 없어 부르튼 너의 차가운 손을 생각해야 했다. 진작에 온기 하나 없는 한 밤을 떨며 뒤척일 너의 몸을 껴안는 네 아버지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렸어야 했다.

무엇보다도 어렵사리 싣고 간 연탄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주어서 고맙다. 지금까지 35만 장이 그리 많은 양은 아니지만 남녘 동포들의 소박한 온정을 인정해줘서 고맙고 꼭 필요할 때 전해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말도 해줘서 고맙다. 전하는 이들의 조심스런 마음을 당당하게 받는 너희 동네 아저씨의 넉넉한 웃음도 고맙다. 온정리에서 고성 읍내까지 그 먼 길을 자전거로 우마차로, 도보로 촘촘하게 채우며 생의 근거를 찾아다니는 너희 마을 사람들의 활기도 참 고맙다.

남 측에 다시 돌아와 생각해보면 네게 미안한 일이 참 많았구나. 마을 회관 간판이나 단고기집 혹은 유아원의 아이들을 담고 싶어 처음 간 집 곳간 문 열어보듯 카메라를 아무데나 들이댔던 일이나 너의 해맑은 웃음보다는 너의 남루한 옷차림에 더 관심이 많았던 내가 참 부끄럽다.

먼저 금강산에 관광을 갔던 사람들은 철조망으로 둘러진 경계 때문에 마을 구경을 할 수 없었다고 불평을 하지만 그 철조망이 오히려 네가 맘껏 뛰어놀던 금강산이라는 천혜의 놀이터를 빼앗아 버린 것 같아서 참 미안하다. 훗날 통일이 되고 나도 백발이 성성했을 때 고향이 금강산 온정리인 청년을 만난다면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지금쯤 또다시 따스한 봄비가 내렸으면 좋겠다. 마른 들판의 언 땅을 갈라 새순이 돋으면 우리 그 새싹의 희망을 믿으며 통일의 그날을 약속했으면 좋겠다. 네가 내게 보여준 그 짧은 시간의 웃음이 봄날 진달래 북녘으로 오르듯 가을날 단풍 남녘으로 내리듯 하여 이 땅을 사는 모든 이들에게 평화로 곱게 스며들었으면 좋겠다.

다시 살아서 만날 날을 기약하며 남녘의 얼치기 통일꾼인 한 아저씨가.

(이 기사는 뉴스앤조이에도 기고된 글로 1월말 금강산 밑 온정리 마을에 연탄을 배달하러 간 뒤의 소회를 정리한 글입니다. 약 5만장(대형 트럭 8대분)의 연탄을 온정 중학교 앞에 내려놓고 왔습니다. 통일을 직접적으로 이해하는데 보탬이 될까 싶어 나눕니다.)

이지상 위원은 현재 가수 및 작곡가로 활동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