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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이 사회를 바꿀 수 있을까(이찬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0-12-09 17:04
조회
1143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오랫동안 인문학 분야의 이곳저곳을 들여다보다가 십여 년 전부터 사회과학 언저리에 기웃거려왔다. 관련 공부도 좀 하고 강의도 해왔다. 특히 평화학에 관심을 가진 이후 정치학이나 사회학 같은 이른바 주류 사회과학의 맛을 살짝 보았다. 그중에서 좀 더 끌리던 학문은 사회학이었다. 정치학, 경제학, 법학 같은 학문은 이름만 들어도 무엇을 다루는지 대강 와 닿았는데, 사회학은 이름만으로는 알 듯 말 듯 했다. 정치의 작동방식이나 행위 주체는 비교적 분명했고, 경제 같은 분야도 그런 편이었다. 그런데 사회학은 행위 주체를 딱히 규정하기 모호했고, 작동의 동력도 잘 와닿지 않았다. 그래서 좀 더 궁금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내가 좀 더 알고 싶던 부분이 나름대로는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인간의 원천적 욕망이 복잡하게 표출되는 장소가 사회라는 사실을 의식하면서부터였다.


 국어사전에서는 사회를 ‘같은 무리끼리 모여 이루는 집단’이라고 간단히 규정하지만, 그런 사회라면 애당초 고민의 대상조차 못되었을 것이다. ‘가족, 마을, 조합, 교회, 계급, 국가, 정당, 회사 등 넓은 의미에서 공동생활의 형태로 드러나는 인간 집단’이라고 좀 더 풀기도 하지만, 이런 정도의 규정은 ‘사회’라기보다는 소박한 의미의 ‘공동체’, 그것도 건조한 형식적 정리에 가깝다.


 사회는 겉으로는 알 수 없다. 소박하거나 간단하지도 않다. 칸트는 사회(Gesellschaft)를 자유로운 인격적 존재자들이 외부적 자유의 원리에 기초해 인격적 영향을 주고받는 공동체(Gemeinschaft)라고 해설한 바 있다. 사회에는 그 구성원들이 서로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도록 조절하는 상위의 장치인 ‘법’도 있다고 했다.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면서 적절히 통제하는 법이 작동하고 있기에 사회가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역시 무덤덤한 형식적 정리이다. 현실에서의 사회는 법적 정신이나 원칙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자유로운 인격들이 서로 인격적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인 것처럼 말했지만, 실상은 훨씬 복잡하고 불편하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기는 하지만, 그 영향이나 효력이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다. 긍정적이었다면 굳이 사회의 본질을 살펴보려 애쓸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현실은 교묘하게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며 집단적 질서 안에 인격을 속박시킨다. 자유로운 주고받기는커녕 욕망이라는 발톱을 감춘 공격 행위일 때가 많다. 서로가 서로에게 은근히, 때로는 노골적으로, 그러다 보니, 영향을 주고받는 과정에 긴장과 갈등은 계속된다. 몸과 마음이 아프기까지 하다. 현실에서의 사회는 철학자의 사전적 정의와는 달리 자유조차 상위의 통제장치를 자기에게 유리하게 활용하는 데 교묘하게 사용한다. 사회에는 법적 견제 장치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더 심층적 동력이 작동하고 있다.


 제일 강력한 동력은 아무래도 자기 생존과 확장을 위한 욕망일 것이다. 자유로운 경쟁적 행위라는 미명 하에 이루어지는 성과 지향의 신자유주의 체제일수록 욕망은 더 노골화한다. 이런 자기 확대를 위한 욕망들이 얽히고설켜 집단을 움직이는 동력으로 작동한다. 신자유주의가 성과의 축적을 찬양하는 경제 시스템이라는 점에서 성과를 산출하기 위한 욕망은 물건이든 돈이든 일종의 ‘자본’을 확장시키는 근본 동력이 된다. 이렇게 사회의 속살을 찾다 보다 보면 경제의 문제와 연결된다. 경제란 무엇이던가.


 경제에 해당하는 영어 ‘에코노미(economy)’의 원뜻은 ‘집(eco)의 규칙(nom)’이다. 서로 교류하며 물건이나 화폐가 오가는 집안의 질서가 시원적 의미의 경제다. 그러다 개인이나 집안끼리 재화가 오가는 과정에 국가가 개입하면서 그 영역이 대폭 확장되었다. 그 확장된 영역이 오늘 우리가 말하는 경제의 토대이자 영역이다. 이 경제의 덩치가 급속히 커지면서, 정치는 경제를 선도하기보다는 경제가 더 확장되도록 뒷받침하는 수단이 되었다. 사적 혹은 가정적 영역이었던 ‘에코노미들’이 중층적으로 뒤섞여 다차원적으로 뻗어가고 있는 유기체적 집단이 오늘의 ‘사회’인 것이다. 그 어떤 권력도 관리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사회는 자기 생명력을 갖기 시작했다.


 이 집단의 구성원들은 저마다의 욕망을 활용하며 사회에게 더 강하고 복잡한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사회는 그렇게 끝없는 자기 변화와 확장을 계속한다. 그 근간은 경제이며, 전례 없던 새로운 농도의 경제 현상이 오늘날 사회라는 난제로 등장한 것이다. 사회는 구성원들의 욕망들이 얽히고설켜 자기 확장 중이고, 그 사회가 다시 욕망을 추동해 최후의 힘마저 내놓으라 닦달한다. 그러면서 사회는 자기 생명력을 강화해가고, 그만큼 인간은 탈진되어간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이때 인간이 100조 개 세포들의 집합체이면서도 그 세포들을 다시 관찰할 수 있는 자기 초월과 자기 대상화의 능력이 있다는 사실이 희망의 근거다. 이것은 사회도 개인 욕망들의 합집합에 머물지 않고 거대한 욕망 덩어리를 돌파할 수 있는 심층의 영역이 있다는 뜻이다. 개인이 개인을 대상화하고 개인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아 스스로를 개조하듯이, 사회에서도 그런 가능성을 보아야 한다. 이런 가능성을 보지 못하면 아픔과 상처는 더 커지기만 하기 때문이다. 개인이 희망을 놓치지 않아야 절망을 극복하게 되듯이, 사회적 자기 치유의 가능성을 견지해야 사회도 구성원의 통제 영역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 가능성을 배제하고서 어찌 사회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을 하고, 사회를 개조하겠다 말할 수 있겠는가. 사회의 아픔에는 반드시 치유의 길이 있다. 어쩌면 한계에 도달한 사회가 파열음을 내며 스스로 길을 내보여줄지도 모를 일이다.


 사회학이 무엇인지 모호한 채 있다가 사회학도 결국 인간을 치유하는 학문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게 된 것은 나로서도 다행이었다. 최근에 『사회는 왜 아픈가: 자발적 노예들의 시대』라는 졸저를 낸 것도 이런 가능성을 일부나마 드러내고 싶어서였다. 그렇게 생각한다고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그나마 사회를 더 괴물로 만들어버리고 말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여전히 희망의 영역이지만, 인간이 사회에 종속되지 않고 사회를 통제할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다. 그것도 인간이 인간을 살리는 방식으로 움직이게 되면 좋겠다. 그런 희망으로 졸저의 서문에 있는 내용을 일부 고쳐 써보았다.


이찬수 위원은 현재 종교문화연구원장으로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