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발자국통신

‘발자국통신은’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 교수),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전 주독일 대사),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꽃을 심는 자유: 백범의 메타 정치(이찬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1-07-28 16:33
조회
1306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대한민국 헌법에는 민주주의와 관련하여 ‘민주공화국’과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두 표현이 등장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1조 1항),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한다/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다.”(전문, 4조) 전자는 한국의 정치적 정체성 규정이고, 후자는 그 정체성의 구현 자세이다. 이 둘은 대립하는 언어가 아니다.


 민주공화국은 국민이 주권자가 되어 자신의 대표자를 선출하고 선출된 자와 국민 모두 동일한 법적 통제를 받으며 국민이 스스로를 지배하는 정치형태이다. 국민이든 선출된 정치인이든 원칙적으로 동일한 법적 통제 아래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이 법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보장하고 자유와 평등을 해치면 안 된다는 원칙을 지닌다. 그래서 독재에 의한 억압을 거부하고 자유로운 의사 표현과 선택을 중시하는 자유주의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 자유주의가 민주주의와 결합해 ‘자유민주주의’라는 복합어도 생겨났다.


 자유민주주의라지만 개인의 자유가 무한히 허용된다는 뜻은 아니다. 흔히 한국의 보수주의자는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우며 북한식 사회주의에 반대하고, 자유를 부각시키며 신자유주의적 자유 경쟁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자유민주주의도 결국 민주주의의 다른 이름이다. 민주주의는 국가의 주권을 국민에게 두면서, 국민주권을 위해 모두에게 평등하게 적용되는 법적 통제 장치를 두고 있는 정치 체제이다. 당연히 자유민주주의에서의 자유는 방임이 아니고 가치 중립적이지도 않다. 자유민주주의도 자유를 보장하는 헌법적 가치에 의해 제한되는 민주주의이다. 자유 지상주의가 아니라 사회적 가치를 중시하는 사회민주주의라고 해도 상관없을 그런 민주주의이다. (이효원, 『평화와 법』, 137-139)


 이것 딱히 새로운 해석이나 주장이 아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도자 백범 김구도 진작에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국가 생활을 하는 인류에게 무조건의 자유는 없다. 왜 그런고 하면, 국가란 일종의 규범의 속박이기 때문이다. 국가 생활을 하는 우리를 속박하는 것은 법이다. 개인의 생활이 국법에 속박되는 것은 자유 있는 나라나 자유 없는 나라나 마찬가지이다. 자유와 자유 아님이 갈리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속박하는 법이 어디서 오느냐 하는 데 달렸다. 자유 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오고, 자유 없는 나라의 법은 국민 중의 어느 일개인, 또는 일계급에서 온다.”(김구, 양윤모 옮김, 『백범일지』, 더스토리, 498쪽)


 모든 국민은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지만,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라도 제한적이나마 법적 통제 하에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보수주의자들이 내세우는 자유민주주의도 민주공화적 질서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이 둘은 순환 관계에 있는, 사실상 동의어다. 자유민주주의든 민주공화국이든 ‘민주’에서 만나 상호 순환하는 가치들이다. 이러한 공통의 민주 영역을 확보하는 일이야말로 민주주의를 구체화하는 근간이다.


 그 공통 지점은 상생(相生) 적이어야 한다. 누가 누구를 죽이는 방식은 민주주의라고 말하기 힘들다. 양자의 상위에 있으면서 양자를 살려주고 포섭하는 더 보편의 영역을 합의해가는 일이 민주주의의 근간이다. 지속적인 대화로 양자 긍정을 가능하게 해주는 더 상위의 가치를 합의해내야 한다. 단순한 상대주의가 아니다. 상대방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이 아니다. 충돌하는 지점을 포섭하면서 공통의 가치로 상승시켜주는 상위 혹은 심층적 가치 지향적인 행위이다. 상위의 상생적 가치를 제시하고 설득하는 지난한 작업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민주주의는 일종의 ‘메타 정치’이다. 가능한 모두를 살리는 상위의 가치에 입각해 합의점을 확보할 줄 아는 행위가 민주주의의 가능성과 역량을 보여준다.


 백범은 1947년도에 이런 비유를 남긴 바 있다: “우리는 개인의 자유를 극도로 주장하되, 그것은 저 짐승들과 같이 저마다 제 배를 채우기에 애쓰는 자유가 아니다. 제 가족을 제 이웃을, 제 국민을 잘살게 하기에 쓰이는 자유다. 공원의 꽃을 꺾는 자유가 아니라 공원에 꽃을 심는 자유다.”(『백범일지』, 505쪽)



사진 출처 - 구글


  “공원에 꽃을 심는 자유”란 각자도생을 위한 자유가 아니라 전체 상생을 위한 자유다. 저만의 눈요기를 위해 꽃을 꺾지 않고 모두를 위해 꽃을 심을 자유이다. 더 큰 자유를 위한 자기 조절과 제한이라고 할 수 있다. 자유민주주의에서의 자유는 그런 자유(여야 한)다. 헌법적 통제조차 각자도생의 자유 경쟁으로 내모는 협의의 자유가 아니다.


 자기중심적 민주주의를 내세우며 충돌하는 소모적이고 반복적인 갈등을 멈추어야 한다. 그러려면 일단 서로의 입장을 긍정하며 대화에 임해야 한다. 이 대화는 고민 없는 무조건적인 승인이 아닌, 더 넓은 상생의 영역을 확보하려는, 지난한 가치 지향적 행위이다. 하위의 대립적 범주들을 포섭하는 상생적 가치를 합의해내고 그 길로 수렴시켜야 한다.


 우파 민족주의자였던 백범이 좌파 민족주의자이자 공산주의자였던 김원봉과도 손잡았던 것은 같은 민족의 이름으로 모든 이가 함께 사는 해방 세상을 꿈꾸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독립운동을 함께 했던 것은 더 큰 자유를 위한 실천이었다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좌·우가 합작’하면서 비로소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통합정부의 기초를 다졌다. 자기만을 위해 공원의 꽃을 꺾는 자유는 ‘자유민주주의적 기본질서’가 아니다. 자유는 스스로를 제한하면서 서로를 살리고자 할 때 그 가치가 빛난다.


 자유민주주라지만 사회민주주의와 대립해야 할 이유도 없다. 자유도 모두를 위해 꽃을 심는 그런 자유이기 때문이다. 자유 지상주의는 결국 자신의 자유도 침식시킨다. 심지어 법학을 공부했다면서 자유라는 말을 앞세워 더 큰 자유를 억압하며 결국 각자도생의 길로 내모는 얄팍한 정치인의 행동을 더는 보고 싶지 않다.


이찬수 위원은 현재 레페스포럼 대표로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