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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연결 시대의 국가와 보훈(이찬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1-03-10 14:26
조회
939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모든 언어의 경계는 모호하다. 구체적 사물 언어가 아닌, 추상적인 상태 언어일수록 그 경계를 확정 짓기 힘들다. 사람마다 이해하는 정도가 다르기에 그 다름들이 서로 충돌하기까지 한다. 자신이 생각하는 경계가 어디까지인지 대화를 통해 타협점을 찾아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대화하면 할수록 경계는 느슨해지고 공유지점은 더 확대되기 때문이다.


 국가의 경계도 그렇다. 근대 국민국가 체제가 자리 잡은 이래 물리적 국경은 여전히 분명하다. 그러면서도 정신과 문화는 국경을 넘어서는 경우도 빈번해지고 있다. 온라인상에서는 전 세계가 이미 물리적 경계를 넘어섰다. 국경을 둘러싼 소규모 분쟁들이 아직 빈번하지만, 세계가 초연결·탈민족 시대에 접어들면서 국경 중심의 기존의 국민국가체제는 한계도 드러내고 있다.


 나는 근대 국민국가의 정신적 경계가 ‘실선’이 아니라 ‘점선’이어야 한다는 글을 몇 차례 쓰기도 했는데, ‘점선’이라는 은유로 현재의 세계 개방성과 국가의 정체성을 두루 살려야 한다는 취지에서였다. 국민국가 단위에서 만들어지고 적용되는 모든 것들에 이러한 점선적 의식이 필요하다.


 보훈 분야를 보면서 드는 생각도 마찬가지이다. 근대적 보훈 정책은 국민국가 체제를 배경으로 형성되었으면서 다시 국가주의를 강화하는 데 기여해왔다. 문제는 강화된 국가주의들이 다시 갈등의 원인으로 작용하면서 기존 국가주의의 한계를 노출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보훈이 미래에도 본연의 목적을 유지하려면 국가의 정신적 경계가 ‘실선’에서 ‘점선’으로 개방되어가고 있는 오늘의 세계 상황에 어울려야 한다. 그러려면 기존 국가유공의 성격과 범주를 변화시켜야 한다. 국가의 수호와 유지에 공헌해온 이들에게 다방면으로 보답하는 것은 당연하고 필연적이면서 국가유공의 범위와 성격을 개방적으로 재해석하고 확대시켜나가야 한다. 보훈이 무엇인지 간단히 정리하면서 이 문제를 풀어가 보자.


 보훈은 “국가를 위하여 희생하거나 공헌한 사람의 숭고한 정신을 선양(宣揚)하고 그와 그 유족 또는 가족의 영예로운 삶과 복지향상을 도모하며 나아가 국민의 나라사랑정신 함양에 이바지”하는 행위이다(국가보훈기본법 제1조 목적). 이 규정의 키워드는 ‘국가’, ‘희생’, ‘공헌’으로 정리할 수 있다. ‘선양’, ‘애국(나라사랑)’이라는 두 낱말을 추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진 출처 - 구글


 문제는 이런 키워드들에 대해 일반 국민은 그다지 친근감을 느끼지 못한다는 점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거리감을 느끼기도 한다. 저마다 열심히, 때로는 치열하게 살지만, ‘국가’를 위해 딱히 ‘희생’이나 ‘공헌’을 한다는 의식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다소 특별한 희생과 공헌의 사례를 일반 국민의 애국심 함양으로 이어가려는 정부의 시도가 ‘국가주의적’이라고 여겨지는 데서 오는 불편감도 있다.


 성격상 국가주의적인 ‘보훈’이라는 말이면 충분한데도 각종 법령에서는 물론 연구자들조차 ‘국가보훈’이라는 용어를 종종 사용하곤 한다. 이러한 국가주의적 분위기는 개인주의에 기반한 세계적 초연결의 시대와 겉돈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키면서 보훈을 대중화, 일반화시키려는 과제를 더 어렵게 만든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연 ‘국가보훈’의 의미와 목적은 얼마나 설득력 있고, 국가중심적 보훈 정책은 얼마나 성공적일 수 있을까. 보훈이 국가 전체를 위해 필수불가결한 과제라는 것은 더 말할 나위 없다. 그러면서도 시대적 흐름과 괴리되는 듯한 분위기가 있는 것도 현실이다. 보훈의 정책과 방향을 어디로 어떻게 잡아나가야 하는 것일까. 보훈이 국민에게 더 친숙하게 다가가고 국가유공자의 명예와 함께 지속가능성도 담보하려면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근본적인 질문이다.


 근대 이후 회자되어온 국가는 이른바 ‘국민국가’를 의미한다. 국민국가는 영어로 nation-state이니, 민족국가라고 해도 별 차이가 없다. 근대 국가의 형성이 민족주의의 형성과 궤를 같이 해왔다는 뜻이다. 민족의식과 영토의 경계를 전제로 하는 근대국가 형성의 역사를 돌아보면, 우리의 보훈에 담긴 국가주의적 흐름을 어떤 방향으로 잡아가야 할지 그 우회로도 보인다.


 당연한 말이지만 민족주의는 민족의식을 기반으로 한다. 민족의식은 억압과 피지배에 대한 대항 정신으로 강화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대항 과정에 겪은 희생에 대한 공감이 다시 민족의식을 북돋운다. 가령 수십 개의 영방국가(Territorialstaat)로 나뉘어 있던 옛 독일은 프랑스의 지배를 받으면서 피해 의식이 커졌고, 이 피해 의식이 영방국가들을 연대시키는 형태로 나타났다. 프랑스에 점령당한 베를린에서 피히테(J. G. Fichte)는 독일의 각 영방이 독일어와 독일문화 교육을 강화해 상호 연대 의식을 함양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그런 내용을 담아 “독일 나치온(민족/국민)에게 고함”(1808)이라는 제목의 유명한 강연을 했다. 강력한 공동의 적이 출현하자 뚜렷한 동료의식이 없던 사람들 사이에 누군가의 희생을 떠올리며 연대적 공유의식이 생겨나던 상황을 잘 보여준다.


 이와 비슷하게 프랑스의 르낭(E. Renan)은 독일에 패배했던 프랑스인의 입장에서 『나시옹(민족/국민)이란 무엇인가』(1882)를 저술했다. 르낭은 이 책에서 “나시옹(민족/국민)은 개인과 마찬가지로 노력과 희생과 헌신으로 이루어진 오랜 과거의 결과”로서, “나시옹은 사람들이 과거에 했고 또 앞으로도 하려는 의사가 있는 희생의 감정으로 구성된 위대한 연대감”이라 규정했다. 민족/국민의 개념이 적의 도전에 희생을 무릅쓰고 연대하던 이들에 의해 형성되어 왔다는 것이다.
이것은 피히테가 “고귀한 사람은 기꺼이 나치온(민족/국민)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는 웅변을 한 것과 통하는 대항 의식을 잘 보여준다. 르낭과 피히테 모두 민족/국민 개념의 밑바탕에서 구성원들의 저항에 의한 희생의 감정을 보면서, 이 희생이 민족/국민의식에 기반한 근대국가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문제는 국민의식이 커지면서 국가는 견고해지지만, 동시에 이 국민과 저 국민이 서로 부딪힌다는 것이다. 근대 국민국가(nation-state)라는 것이 집단중심주의를 동일성의 논리로 포섭해 구성원들을 통일시켜 가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동일성을 공유하지 않은 타자에 대해서는 적대성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큰 체제인 것이다.


 그러나 불과 몇 십 년이 지난 이제 이 두 나라는 ‘유럽연합’ 체제 속에서 더 이상 부딪히지 않고 부딪혀서도 안 되는 환경으로 급격히 전환했다. 한때는 죽고 죽이는 전쟁을 하던 철천지원수들이 교류와 협력이 서로 살길이라는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 가장 가까운 우방이 되었다. 지금은 같은 화폐를 쓰고 자유롭게 여행하며 지내고 있다. 이 두 국가만이 아닌 유럽연합 체제에 있는 국가들이 비슷한 상황 속에 있다. 전반적으로 근대 국민국가의 견고한 경계가 무너져가고 있는 중인 것이다. 견고한 경계에 기반한 적대성이 느슨해지고 탈경계적 이웃으로서의 의식이 커지고 있는 중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보훈의 경우는 어떤가.


 한국 보훈의 기초에도 일제에 대한 저항과 그 과정에 겪은 희생, 북한과의 전쟁으로 인한 희생과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 의식 같은 것이 놓여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도 민족의식을 유기체적으로 통일시키고 구성원들을 하나로 고양시키면서 하나의 국민국가로 형성되어온 측면이 크다. 한국만이 아니라 여느 나라든 이러한 구성원 간 의식의 통일을 경험하면서 오늘의 국가를 형성하는 동력으로 삼아왔다.


 그러나 이제는 전 세계가 기존의 국경 개념을 지키면서도 이를 넘어서는 다문화, 초연결의 사회로 급격히 전환하고 있다. 국경은 있으되 그 너머로 이루어지는 교류의 폭이 더 크다. 우리도 한때는 그렇게 저항했던 일본과 자연스럽게 교류하고, 수백만의 사상자를 내며 전쟁까지 치뤘던 북한과 평화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으며, 여전히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과 천문학적 규모의 교역을 하고 있다.


 이미 한국에 체류 중인 외국인이 2020년 기준으로 220만 명이나 되고, 3만3천여 명의 탈북민들과 함께 살고 있다. 대중 매체에서는 다양한 피부색의 외국인들이 단골처럼 등장한다. 이 모든 것이 전혀 낯설지 않은 풍경이 되었다. 온라인상에서의 급격한 지구화 현상은 새삼 거론하지 않아도 될 만큼 자명한 현상으로 다가오고 있다. IT를 선도하는 한국이 지구적 다양성을 먼저 만나게 되는 것도 당연한 이치다. 한국도 초연결, 탈민족, 다문화 사회로 접어든 것이다.


 이러한 때에 대립적 저항 의식과 희생 경험을 기반으로 하는 민족/국민국가라는 것은 과연 무엇이어야 할까. 분명한 사실은 국가를 위한 희생과 공헌에 기반한 애국정신이라는 것이 일반인에게 좀 더 현실감 있게 와 닿지 않으면 이른바 국가유공자도 일반 국민과 무관한 특수한 신분이나 영역에 있는 사람으로 머물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국가유공자를 포함해 85만 명에 이르는 보훈대상자들에 대한 존경심은커녕 애국정신의 함양이라는 각종 정책과 행위도 ‘형식’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어떤 때 애국가를 진심으로 우렁차게 부르게 되는 것일까. 앞으로 그런 때가 얼마나 있을 수 있을까. 장기적인 비전을 가지고 보훈을 둘러싼 이러한 근원적인 문제를 하나씩 풀어가야 할 중차대한 과제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 이 글의 본론은 「일간투데이」 “2021년 보훈의 재조명”(2021.03.08)에도 게재되었습니다.


이찬수 위원은 현재 종교문화연구원장으로 재직 중입니다.